49화. 나만의 기사님
“아스테인 님!”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여느 때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의 환한 얼굴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신의 회초리를 정리하고 방금 복귀했습니다.”
레프렌스를 만나지 못한 걸까? 하지만 이 망토는 그가 연회 때 나를 호위하기 위해서 입고 왔던 것인데…….
“어떻게 신의 회초리를 정면으로 맞고도 살아남은 거지? 이 끈질긴……!”
유테르안이 아스테인을 보고 으르렁댔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그런 유테르안을 가소롭다는 듯이 보며 비웃었다.
“안됐군. 프레이아 님이 늦게 신전으로 왔다면 그 핑계로 날 파문이라도 시키고 싶었을 텐데 말이야.”
나는 아스테인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데아 님께 들었지만 역시 유테르안이 이 일을 이용해 나쁜 짓을 하려 했다.
어쩌면 그가 데아 님께 아스테인을 죽여달라 부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웃음기를 머금었던 아스테인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했다.
“선대 성녀님의 명으로 두 사람은 프레이아 님의 곁에 올 수 없다. 이제 이분은 성녀로서 신전에 머무를 테니 두 사람의 신전 출입도 금하겠소.”
“우리는 성스러운 샘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런 우리가 신전 출입을 금지당할 이유가 있나?”
유테르안은 아스테인에게 건방진 말투로 말했다.
나는 그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후작, 말투가 그게 뭐죠?”
“아, 누님. 이제 저자는 대공이 아닌 일개 성기사인데 소후작인 제가 하대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누가 그런 소리를 했지? 나는 아직 단델리온 대공의 지위를 버리지 않았다.”
아스테인의 날카로운 눈빛에 유테르안이 눈꼬리를 살짝 떨었다.
그리고 분한 듯, 살짝 억눌린 목소리로 아스테인에게 반발했다.
“황제 폐하께서 용납하지 않을 텐데?”
“신의 회초리 문제로 성녀님과 함께 공을 세운 내게 폐하께서 허락하신 문제다.”
유테르안은 못마땅한지 낮은 신음을 내었다.
그것을 여유롭게 지켜보던 아스테인은 내 앞을 완벽하게 막아섰다. 그러자 보기 싫었던 부자의 모습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쨌든 지금은 성녀님을 지키는 성기사로서 말하지. 당장 신전에서 나가시오.”
아스테인의 말에 순순히 물러날 자들이 아니었다. 뻔뻔하게도 내 앞에 고개를 들고 나타난 자들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우리는 성스러운 샘 문제로 왔습니다. 새로운 성녀가 등극했으니 관리 문제를 새로 의논해야지요.”
후작의 말에 아스테인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은 검으로 향했다.
“계속해서 억지를 부리겠다면 완력을 써서라도 쫓아내겠다.”
위협적인 그의 태도에 후작은 여러모로 불쾌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대놓고 따질 수는 없었다.
지금은 어떡하든지 나와 인연을 이어가고 싶을 테니.
“프레이아, 돌아가신 성녀님이 우리를 내치면서도 그 일을 아직 맡긴 이유를 생각해보렴. 가족끼리 화해할 여지를 남기려고 하신 것 아닐까?”
끝까지 질척대는 후작을 향해 아스테인은 검을 뽑아 들었다.
나는 잔뜩 화난 그의 팔을 잡고 달랬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는 나의 만류에 후작과 유테르안을 살짝 노려보았다가 검을 집어넣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약간의 기대감이 돌았다. 내가 그들에게 손을 내민다고 여기기라도 한 것일까?
“내일 아침이 밝자마자 황제 폐하께 달려가세요. 성스러운 샘과 관련해 나눌 이야기가 많을 거예요.”
내 말에 기대에 찼던 후작의 얼굴이 바로 무너졌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에 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주었다.
“두 분 덕에 황후 폐하의 입지가 좁아졌으니 두 분이 책임져야 할 겁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 사람이 성스러운 샘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제일 잘 알 텐데요?”
나는 위엄을 갖춘 목소리로 그들에게 엄하게 말했다.
“그로 인해 신전의 위치가 흔들린다면, 그 또한 푸토르 후작가의 책임이 될 겁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성스러운 샘에 남아 있는 후작가의 사람들과 함께 나가세요.”
더는 연결고리를 남겨두지 않겠다는 나의 선언 후, 아스테인은 손가락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푸른 망토를 두른 크리세우스가 다른 성기사 몇몇을 이끌고 나타났다.
크리세우스는 아스테인을 약간 불만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크리세우스는 잔뜩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후작과 유테르안을 몰아세웠다.
“계속 이러고 있으면 신성법에 따라 신전의 지하 감옥에 가두겠습니다. 성녀님의 명에 계속 반항하면 최대 파문도 가능한 거 아시죠?”
크리세우스는 푸토르 후작을 제법 능숙하게 협박했다.
그리고 그 협박은 통했다.
대대로 성녀를 배출하는 가문으로서 파문은 가문의 명예에 치명적인 일이었다.
후작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뒤로 돌아섰다.
“누님. 두고 봅시다.”
하지만 유테르안은 언제나처럼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아스테인을 잔뜩 노려보면서 말했다.
“정말로 파문을 당해야 하는 쪽이 누군지 곧 알게 되겠지요. 그때 누님이 고모님 꼴을 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겠습니까?”
유테르안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비열하게 웃으면서 돌아섰다.
크리세우스와 성기사들의 몰이에 쫓겨나는 유테르안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쭉 펴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설마…… 아니겠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스테인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죽음을 앞두고 약해지셨다 하더라도 평범한 인간이 성녀님을 해칠 수는 없었을 겁니다.”
“하긴, 데아 님께서 본인이 데려갔다고 하셨으니까…….”
내 혼잣말에 아스테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곧 속상한 얼굴이 되었다.
“결국에는 신전으로 오게 되었군요.”
“그게……. 미안해요.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저를 구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 아닙니까?”
아스테인은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살짝 화를 냈다.
“내 말을 전해 듣지 못했나요? 어째서 여기 있는 거예요? 아니 푸른 망토는 또 왜…….”
하지만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스테인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으니까.
“프레이아 님이 성녀가 된다면 저도 무조건 따라가겠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아스테인 님.”
“사랑하는 사람을 사지에 혼자 두는 연인은 없습니다.”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도, 연인이라는 말도 성녀와 성기사에게는 어울릴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기도 했다.
“레프렌스에게 들었습니다. 저를 살리기 위해 신전으로 오는 것을 택했다고요.”
나는 그의 품에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죽은 줄 알고 많이 우셨다는 말도 셀레미온 양에게 들었습니다.”
“고마워요. 살아 있어 줘서.”
“저 때문에 끔찍했던 기억으로 가득 찬 공간에 돌아왔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로 인해 행복한 공간이 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스테인의 눈은 정확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미안함과 고마움, 그런 감정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따스한 기운을 품고.
나는 그의 품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그의 넓은 가슴에 귀를 대자 건강하게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데아 님께서 약속했어요. 내가 잘 해내면 아스테인 님이 반드시 황제가 될 거라고요.”
“저는 그런 것이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데요? 두 삶을 아무리 되새김질해봐도 이 제국에서 황제의 자리에 걸맞은 사람은 아스테인 님뿐이니까요.”
나는 두 팔을 살짝 벌려 아스테인의 허리를 안았다.
약간은 어리광을 부리듯 그의 가슴에 얼굴도 비볐다.
“그러니까…….”
“싫습니다.”
나는 예상했던 그의 대답에 웃음이 나오려 했다.
“음……. 나는 1년 정도만 여기 있다가 때가 되면 준비하러 가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럼 당장 떠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다시 들었다. 조금 당황한 얼굴의 그를 보고 빙그레 웃어주며 말을 이었다.
“신전에서 숨죽이며 황제가 될 준비를 해요. 나는 신전을 장악해서 도울 테니까.”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그는 내게 와줬다. 어쩌면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스테인이라면 내가 밀어내도 반드시 내게 올 거라고 믿었는지도.
“나, 비록 신성력은 없지만, 누구보다도 훌륭한 성녀가 될 거예요. 당신 곁에 서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만큼, 위대한 성녀가. 그리고 신전을 무너트리고 당신 곁에 갈 거예요.”
신전이 사라진다고 해도 누구도 나를 하찮게 보지 못하게.
“그러니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요. 데아 님이 내게 한 약속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것은 프레이아 님의 뜻대로.”
아스테인은 내 이마에 입술을 맞춰주었다. 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참 그리웠었다.
그리고 이것만 있다면, 나는 이 지긋지긋했던 신전에서 버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와 같은 비극은 이제 우리 곁에 없을 테니까.
* * *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접견실에 대사제들을 불러모았다.
가장 높은 자리, 성녀의 자리에 나는 차분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런 내 뒤로 듬직한 나의 기사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초보 성기사도 하나 있었고.
“부르셨습니까? 그런데…… 이 성기사들은 누구시죠? 처음 보는군요.”
대사제 레무스는 아스테인과 크리세우스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슬쩍 뒤를 보자 아스테인이 크리세우스보다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 레무스에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
“이분은 아스테인 단델리온 대공, 푸토르 후작이 사가에서 날 학대했을 때 구해준 은인이십니다. 특히 단델리온 경은 사라졌던 성물인 아이기스를 찾아왔고, 신께 글라디우스도 얻었답니다.”
데아 님이 아스테인에게 직접 줬던 검은 신의 회초리를 막아낸 것으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레무스는 아스테인의 옆구리에 있는 검과 막대 모양의 방패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리고 옆에 있는 크리세우스 로세틴 경은 아이기스를 찾는 데 큰 도움을 준 유능하고 지혜로운 기사님이죠.”
아스테인은 단정하게, 크리세우스는 약간 삐딱하게 대사제들에게 인사했다.
크리세우스는 솔직히 전혀, 성기사다운 면이 없었다.
그런데 레무스는 그런 크리세우스를 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영혼이 참 맑은 분이군요. 재밌을 것 같습니다.”
그 모습에 크리세우스는 더욱 인상을 쓰고 말았다.
“그런데 저희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요?”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은 그중 내 삶의 질과 연관된 일을 해결하고자 했다.
“신전에서 수련 중인 어린 사제들은 누가 관리하나요?”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물었다.
그러자 레무스가 해맑게 손가락으로 한 중년 남자를 가리켰다.
“대사제 웨르 님이십니다.”
“그렇군요. 아이들이 집을 그리워하지는 않나요?”
대사제 웨르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물론 한, 둘은 그런 친구들이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 아이들의 꿈이 사제인가요?”
내가 갸웃하면서 묻자 웨르가 다시 어색하게 입꼬리를 움직이며 더듬더듬 말했다.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사제 가문 출신이라…….”
내가 그런 웨르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자 레무스가 나서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어제 아이들을 만났는데 어떤 친구는 커다란 케이크 가게를 만들고 싶어 하고, 어떤 아이는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처럼 어릴 때부터 사제가 되겠다고 집을 나온 아이는 드물더군요.”
“그 소리는 어른들의 강요에 억지로 사제의 길을 걷는다는 소리인가요?”
나와 같은 아이들이 있다는 소리에 마음이 쓰였다.
강요와 세뇌로 정해진 길로만 살아가는 고통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그,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 아직 어려서……. 고아들은 특히 사제가 되지 않으면 어차피…… 사창가로 흘러 들어갈 불쌍한 여아들도 있고…….”
그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회귀 전의 기억 하나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군요. 일단, 아이들 가운데 사제의 꿈을 꾸지 않는 아이들은 일반 학교에 보내주세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성녀님의 수발을 들 아이들이 부족합니다.”
“알아요. 하지만 내 수발을 꼭 어린 사제들이 들 필요가 있나요? 참 신기하게도 여자 사제 후보들은 견디지 못하고 중도 포기해서 다 어린아이들뿐이라 어차피 내 수발을 들기도 어렵잖아요.”
나는 웨르를 쳐다보는 눈에 좀 더 힘을 주고 말했다.
그러자 그자가 움찔 뒤로 물러섰다.
“그냥 나는 예전처럼 사가에서 데리고 있던 하녀를 데려와 쓰겠어요. 그게 마음도 편하고 익숙하니까요.”
나는 셀레미온을 불러들이고 싶었다.
그 아이가 곁에 있어 주었으면 했다. 성녀를 모시는 하녀라는 명예도 주고 싶었고, 돈도 더 챙겨주고 싶었다.
아무래도 이곳에는 아스테인과 크리세우스 말고는 날 아프게 한 사람들뿐이었으니까 의지할 사람도 필요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습니다. 저는 동의합니다.”
사제 레무스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나머지 사제들도 차례로 동의했다. 그건 웨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어쩐지 불안해 보였다.
“참, 그런데 성녀님, 열 사제의 충원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나머지 네 명은 선대 성녀님께서 지목했지만 대신전으로는 오지 않겠다고 해서요.”
레무스의 질문에 나는 한쪽 입꼬리를 크게 들어 올렸다.
“상관없어요. 아니, 차라리 부르지 마세요. 신전의 더러움을 더 씻어내고 나서 불러도 충분할 테니.”
내 말에 몇몇 사제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푸토르 후작의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모든 사제가 깨끗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다시 거만하고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성스러운 샘과 관련한 신전의 비리를 대륙의 모든 신전과 신도들에게 고한 뒤, 내가 황제를 비롯한 모두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생각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선언에 대사제들의 얼굴이 검게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