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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48화 (48/101)

48화. 가짜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 (2)

들판에는 별빛이 아름답게 쏟아지고 있었다. 별빛을 받은 하얀 꽃들은 잔잔하게 이리저리 흔들리며 평화로움을 증명하고 있었다.

드넓은 들판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나는 그 평화로운 풍경에 섞여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데아 님이 사라진 들판에는 바람 소리와 기사들의 발소리만이 퍼졌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레프렌스와 다른 기사들이 내게 달려왔다. 나는 그 광경을 힘없이 쳐다봤다.

“괜찮아요.”

“그 여자는 뭡니까? 마법사입니까?”

한참이나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떠난 데아 님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마법사라 오해받을 만했다.

“아니요. 그때 크리세우스 님이 그랬잖아요. 이 대륙에는 그럴 만한 마법사는 없다고.”

“그럼 도대체…….”

나는 별빛 가득한 하늘을 쳐다봤다.

그 순간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그런데 저희 주군과 수장은요?”

“크리세우스 님이 블루 로즈의 수장이었나 보군요.”

나는 옅게 웃으면서 레프렌스를 쳐다봤다.

레프렌스는 살짝 찔리는지 얼굴을 붉혔다.

“그……! 주군께서 아직 말씀드리지 말라 했었는데…….”

“괜찮다고 한 것은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네요.”

내 말에 기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예전의 블루 로즈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블루 로즈는 아스테인 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잖아요. 나쁜 짓을 하고 다니지 않는다고 믿어요.”

아스테인의 외조부가 주인으로 있을 때와는 다르다고 믿었다. 그러니 그렇게 아스테인이 내게 호소했었을 것이다.

“맞습니다! 저희는 암흑 길드가 아니라 주군을 위해서 정보를 캐고 은밀히 움직이는 정보 길드로 일하고 있습니다.”

레프렌스는 기뻐하면서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줄줄 읊었다.

암흑 길드 시절의 잔재가 남았을 때 아스테인이 그들을 버리려 했던 일도, 엄하게 그들을 혼냈던 일도, 그리고 가족 같은 사이가 된 지금의 관계도.

“그래서 암살에 특화됐던 놈들은 기술을 더 늘리고 몸을 키워서 저처럼 기사가 됐습니다.”

“날렵한 몸을 가진 이들은 아직 성 밖에서 정보 수집을 하고요?”

“네, 눈치채셨군요.”

한참을 블루 로즈에 관해 자랑하던 기사는 내 쓸쓸한 웃음에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우리 주군과 수장은…… 죽은 겁니까?”

“아니요. 안전하게 잘 있대요. 잠이 든 상태로…….”

“그런데 어째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돌아올 거니까요.”

웃고 있는 내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웃고 있지만 울고 싶었다.

데아 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싫었다.

무섭다가 더 올바른 표현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말인데요. 지금 당장…… 신전으로 가요.”

“네?”

“내일부터 내가 성녀가 되어야 하거든요.”

아스테인과 했던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또 한 번 신전으로 들어가 가짜 성녀 행세를 해야 했다.

“하지만 주군께서 안 계시는데요. 주군 없이 신전으로 가셨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어찌 알고요?”

“아스테인 님을 돌려받는 조건이에요. 그러니 내가 가야 해요.”

레프렌스는 여러 가지로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가씨.”

“여러분의 목적은 아스테인 님을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는 거 아니었나요?”

정곡을 찌르는 내 말을 들은 기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흘렀다.

나는 그것을 보고 다시 웃어줬다. 안심하라는 듯이…….

“그건 내 목표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당장 가요.”

“알겠습니다!”

나는 여전히 침의에 로브 하나만을 걸친 상태였다.

하지만 옷차림 같은 것은 상관없었다.

비록 여전히 신성력을 받지 못한 가짜였지만 상관없었다. 신의 허락을 받은 가짜니까.

“아니, 이젠 내가 진짜야.”

신이 허락하고 임무를 맡긴 유일한 사람, 그게 나였다. 예전처럼 진짜 성녀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 * *

밤의 신전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이 시간에 신도가 없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일은 없었다.

성녀님의 일을 숨기느라 다들 숨죽이고 있는 것일 테지.

“프레이아 님께서 오셨다.”

레프렌스는 신전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성기사에게 내 신분을 밝혔다.

그러자 성기사의 눈이 커졌다. 내가 오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는 다급히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신전의 책임자를 데리고 왔다.

“당신은…… 누구죠?”

“새로이 대사제를 맡게 된 레무스라고 합니다.”

검은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젊은 남자는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살짝 그를 경계했다.

하지만 그는 정중한 태도로 내게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하지만 나는 이자를 오늘 처음 봤다.

“푸토르 소후작을 보냈을 때 오지 않겠다고 했다 들었습니다.”

“왜 그자를 보냈죠?”

레무스 대사제는 순한 눈망울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성녀님께서 문제가 있던 다섯 사제를 파문한 뒤 새로이 대사제를 뽑으려 했으나 아직 다들 모이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대사제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순진하고 순박한 눈동자에서는 어떤 사심이나 악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신의 회초리가 발생해 기존의 사제님들은 그곳을 수습하러 가셨습니다. 그 와중에 변고가 생겼고, 때마침 소후작이 신전을 방문했기에 부탁드렸습니다.”

“푸토르 소후작은 성녀님의 명으로 내게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몰랐나요?”

“아…… 그랬군요. 죄송합니다. 남부 신전에서 올라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너무 많은 일이 터져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형님이 그런 중요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네요.”

조금 한숨이 나오려고 했다.

이 순박한 사제는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남부의 사제들은 대부분 고행과 기도만 하면서 사는 이들이라 대신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몰랐을 수도 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성녀님을 봬야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성녀님의 방을 찾아갔다.

신전의 가장 깊은 곳, 그곳에는 성녀님께서 잠들어 계셨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잠을.

“어째서…….”

데아 님께서 데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마음이 아팠다.

내게 따끔한 가르침도 주고 엄하게 구실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나를 자상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신 분이었다. 원망을 하기도 했지만 감사할 때가 더 많았고.

그런 분이 차가운 시체가 되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것도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신전의 탑에 왜 푸른 깃발을 아직 걸지 않은 거죠?”

“성녀님께서 약속한 날보다 빨리 하늘로 가시어, 신도들이 동요할까 걱정되어 아직 못 했습니다.”

“그럼, 이대로 5개월 동안 이 사실을 은폐할 생각이었나요?”

“아닙니다. 그런 뜻은.”

거짓이라고 보기에 대사제의 눈동자는 맑았다. 너무 맑아서 문제일 정도랄까?

나는 작게 한숨을 쉰 뒤 단호하게 명했다.

“그럼 당장 탑 위에 깃발을 걸도록 해요.”

“네, 알겠습니다.”

대사제가 밖으로 뛰쳐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뒤, 나는 성녀님의 손을 잡았다.

신께서는 성녀님을 썩은 날개라고 했지만, 그래도 그녀 역시 신전과 푸토르 가의 희생자였으니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때 이미 예감하셨던 거죠?”

나는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그분께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로 했다.

“저는 성녀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래도 절 위해 애써주신 걸 누구보다 제가 잘 아는걸요.”

돌아가신 분의 이마에 입을 짧게 맞추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부디…… 신의 곁에서 영면에 들길…….”

데아 님의 팔찌가 살짝 반짝인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분의 얼굴을 쓸었다. 그러자 계속해서 감지 못하고 있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마치 내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는 듯이.

밖으로 나가자 레무스라는 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아침이 되면 리디안힐에 간 다섯 대사제를 모셔오세요. 신의 회초리는 이제 그칠 거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들이 돌아오면 바로 성녀 검증과 대관식을 치르도록 하겠어요.”

“어…… 그것은…….”

레무스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러는지는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아직 여유가 있었으니까요.”

성녀 검증은 하루면 끝나겠지만, 대관식은 이야기가 달랐다.

정상적인 절차대로 한다면, 성녀님을 보내는 의식과 함께 일주일은 걸려야 했다.

“허례허식은 필요 없어요. 지금은 역사상 유례없는 비상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나는 그렇게 일주일을 보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내일 오전 중에 성녀 검증을, 오후에 대관식을 끝내요. 나는 당장 이 혼란한 신전의 성녀가 되어야겠으니.”

그래야 아스테인이 얼른 내 곁에 돌아올 것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나는 내 소중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레무스를 보낸 뒤, 나는 아직 신전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레프렌스를 불렀다.

“아가씨. 부르셨습니까?”

“늦어도 내일 오후면 아까 그 들판에 아스테인 님과 크리세우스 님이 돌아올 거예요.”

“정말입니까?”

“네, 그분들을 모시고 성으로 돌아가세요.”

“아가씨는요?”

나는 조금 슬픈 눈을 하고 웃었다.

그 행복하고 그리웠던 일상과 당분간은 멀어져야 한다.

“나는 이곳에서 성녀가 돼야죠.”

“아, 그럼 주군께 바로 이곳으로 오라고 하겠습니다. 아가씨의 성기사가 되기로 하셨으니까요.”

나의 성기사. 그래, 그 사람은 나의 기사가 되어주겠다고 했었지.

하지만 데아 님은 나의 노력에 따라 그가 분명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신의 명에 따라 내 손으로 신전을 무너트릴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성녀의 기사가 되는 것이 과연, 아스테인에게 도움이 될까?

“아니요. 그분께는 내가 찾아갈 때까지 자신의 길을 걷고 있으라고 해주세요.”

“아가씨.”

“혼자만의 꿈이 아니잖아요. 여러분이 함께 꿈꾸는 거라면서요?”

내 말에 레프렌스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했다.

아마도 이 기사는 아스테인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셀레미온이 내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약속을 지키지 못한 셈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분의 곁에 꼭 갈 테니까…… 그러니까 날 믿고 원래 가려던 길을 가라고 해주세요.”

“아가씨!”

“제 방에 아스테인 님을 위해 만든 주머니가 있어요. 그걸 꼭 전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나는 레프렌스 경을 떠나보냈다.

그가 떠난 뒤 나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혔다. 안 그러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힘내야지. 아스테인 님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도.”

신전을 장악한 뒤 그 힘으로 아스테인을 도와주어 그를 황제로 만들자.

그런 다음, 데아 님과의 약속대로 내가 진정한 성녀가 되어 신전을 무너트리는 거야.

* * *

해도 뜨기 전, 나는 성녀님이 입던 성녀복을 꺼내 입었다.

느낌이 묘했다. 이 하얀 옷을 다시 입게 되다니…….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촉이 아직은 유쾌하지 않았다.

준비를 끝내고 성스러운 샘으로 갔다.

“예비 성녀님.”

새벽 일찍 사람들을 보낸 탓에 다섯 대사제는 금방 내 곁에 모였다.

그리고 곧바로 성녀 검증이 이어졌다.

데아 님이 내게 신성력을 담은 팔찌를 준 이유가 이것이었다.

“성스러운 샘 앞에 그대의 힘을 증명하십시오.”

원래라면 돌아가신 성녀님의 힘을 물려받아 검증을 통과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신의 힘을 직접 빌렸기에, 회귀 전과는 달리 당당하게 샘 앞에 섰다.

[당분간은 마음껏 힘을 사용해도 된단다. 그편이 너도 편하겠지?]

신의 허락을 받은 나는 팔찌에 힘을 집중했다.

그러자 성스러운 샘의 물이 일렁였다. 그것은 푸른 날개 무늬를 만들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것으로 신전을 덮었다.

찬란하게 빛을 내며.

“오오,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신성력을 지닌 성녀님께서 우리 곁에 왔군요.”

“성녀임을 인정합니다.”

회귀 전의 소심했던 증명과는 다른 내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다.

하지만 그런 감상에 젖을 겨를도 없이 대관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원래라면 황제와 귀족들까지 불러놓고 화려하게 진행하는 것이 맞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모두 생략하겠다고 선언했다.

덕분에 사람들을 위해 신께 기도를 올리는 의식만이 남았다.

“데아 님, 원하시는 대로 이 자리에까지 왔어요. 그리고 명하신 일을 해낼 테니, 신성력 없이도 누구보다 현명한 성녀가 되어 신전을 없앨 테니……. 그 사람을 무사히 자신의 자리로 돌려 보내주세요.”

기도실에서 홀로 네 시간에 걸쳐 기도를 올렸다.

보통의 성녀였다면 남을 위한 기도를 올렸겠지만, 나는 오로지 소중한 한 사람을 위해서만 계속 기도했다.

“모든 의식이 끝났습니다. 당신을 데아 님의 푸른 날개로 인정합니다.”

나는 성녀를 상징하는 성물, 푸른 날개의 목걸이를 건네받아 목에 걸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이 신전의 성녀였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선대 성녀님의 장례식은 저희가 준비할 테니, 이만 쉬십시오.”

“알겠어요.”

“측근에서 호위할 성기사들을 바로 배정하겠습니다.”

“급한 일이 아니니 천천히 해요. 신전 안에서 무슨 일이 있겠나요? 오늘은 혼자 가서 쉴 테니 아무도 따르지 않아도 된답니다.”

레무스의 호의를 거절하고 나는 혼자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신전의 입구에서 방해꾼을 만났다.

“프레이아, 기사들에게 전해 들었다. 기쁘구나, 드디어 성녀가 되다니.”

애처로운 부모의 얼굴을 한 후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불쾌한 표정의 유테르안이 있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죠? 나는 아직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성녀가 된 너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단다.”

“필요 없어요.”

“아버지, 누님께는 선물보다는 새로운 성기사가 필요하겠군요. 신의 회초리에 휩쓸려 그 대공은 이미 죽은 모양이니.”

그들을 지나치려던 나는 유테르안의 말에 걸음을 멈추고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그가 비열하게 웃었다.

“뭐, 이거라도 저는 만족합니다. 언젠가는 저희를 용서하시겠죠. 우리는 가족인데요. 그러니 제가 누님의 성기사가 되어드리는 건 어떻습니까?”

눈치라도 보면서 내게 기는 후작과는 달리 유테르안은 여전히 내게 고압적이었다.

도대체 믿는 구석이 뭐길래 이러지?

“당장 여기서 나가요.”

성기사를 부를까, 아니면 팔찌의 신성력을 쓸까? 고민하며 두 부자를 노려보는데 복도 끝에서 묵직한 음성이 울렸다.

“새로운 성기사는 필요 없다. 내가 있으니까.”

나의 소중한 기사님이 내 말을 전해 듣지 못했는지 푸른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왔다.

오직 나만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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