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47화 (47/101)

47화. 가짜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 (1)

어떻게 침대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얼마나 울었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셀레미온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는 그 아이의 품에서 계속 울고 울었다.

지워진 과거는 결국 또 반복되고 말았다.

내가 신의 회초리 이야기를 꺼내지만 않았어도 아스테인이 그곳에 갈 이유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회귀하고 아스테인을 찾아가지만 않았어도, 그냥 어딘가로 도망가 혼자 쓸쓸히 죽었더라면…….

“아가씨, 대공님은 무사하실 거예요.”

셀레미온은 조심스럽게 내 등을 두드려주며 위로했다.

하지만 눈에서 눈물이 멎지 않았다.

내 탓이라는 자책감과 아스테인의 생사를 모른다는 불안함이 뒤섞여 나는 진정할 수가 없었다.

“아가씨, 그만 울어요. 흐윽…….”

어느 순간 셀레미온도 나를 따라 울기 시작했다.

“그분을 좋아하셨던 거죠? 성녀가 되어야 해서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신 거고.”

셀레미온은 내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긴, 그렇게나 아스테인 앞에서 내가 얼굴을 붉혔었는데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날이 밝으면 대공님을 구하러 가요. 아가씨가 가진 신성력이라면 구할 수 있잖아요.”

그때 갑자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셀레미온은 겁에 질려 그쪽을 쳐다봤다. 나 역시 그곳을 향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파랑새…….”

“네?”

창문 앞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날개에 흙을 묻힌 채.

“아가씨, 설마 저 새요, 아까 땅에 묻은 그 새 아니죠?”

나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포르르 창문 안으로 날아든 새는 협탁에 놓인 엘라네르의 팔찌를 부리로 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날아올라 내 손에 그것을 떨어트리고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팔찌를 쥔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레프렌스 경을 불러줘. 당장 리디안힐로 가야겠어.”

“아가씨, 밤이 너무 늦었어요.”

아스테인의 실 팔찌를 손목에 걸면서 날카롭게 대답했다.

“상관 안 해.”

“성녀는 자신을 위해서는 힘을 못 쓰잖아요. 그러다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요.”

셀레미온이 나를 막아섰지만 나는 막무가내였다.

잠옷 차림으로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셀레미온이 급히 옷방에서 기다란 로브를 챙겨 나왔다. 그것을 씌워준 셀레미온은 복도로 나가 다급히 기사를 데려왔다.

“아스테인 님이 실종됐다는 곳으로 데려가 줘요.”

“하지만…….”

“나라면, 아니 나만이 아스테인 님을 찾아낼 수 있어요. 살릴 수 있다고요.”

“대공님께서 계셨다면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인테르나 푸토르 후작이 이 틈을 노리고 습격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으면 신성력으로 모조리 다 치워버릴 거예요!”

전혀 성녀가 될 사람답지 않은 모습으로 악을 썼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레프렌스에게 먹혔다.

“알겠습니다. 당장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기사가 자리를 뜨고, 셀레미온은 나를 부축해 1층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계단으로 간 내 걸음은 상당히 불안했다.

“아가씨, 괜찮아요?”

“응. 괜찮아. 아니 괜찮을 거야. 그래야 아스테인 님을 구할 수 있을 거니까.”

이번에는 그때처럼 그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엘라네르의 힘을 모조리 다 빌려 써서라도 그를 구해야 했다.

“아가씨, 신성력으로 그곳까지 바로 갈 수는 없어요?”

셀레미온은 다급해 보이는 내 모습에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린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힘을 아껴야 해.”

아스테인을 구하는 데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할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때만큼의 힘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힘이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걸.”

팔찌의 힘을 빌려 쓰고 나면 사파이어의 빛이 조금 흐려졌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파이어는 짙은 푸른색을 되찾고는 했다.

“그러니까 아스테인 님을 되찾을 때까지는 무조건 힘을 아껴 쓸 거야.”

나는 다짐하듯 혼잣말을 읊조렸다.

하지만 그런 나의 다짐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가씨, 이 시간에 어딜 가시려고요?”

하필 집사와 마주쳤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집사는 나를 뒤쫓아왔다.

“신전으로 가는 겁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공께서 계시지 않으니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나는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집사를 향해 차갑게 내뱉었다.

“아스테인 님을 찾기 전에는 신전에 가지 않아요.”

집사를 밀어냈다. 어디서 그런 괴력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사는 내 힘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다.

그것을 무시하고 나는 빠르게 밖으로 나가 마차에 올랐다.

“출발해요.”

“네, 아가씨!”

마차 안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나는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인 채 그저 기도만을 올렸다.

제발, 제발 아스테인이 무사하게 해달라고.

이번만큼은 나의 목숨을 거두어 가고 아스테인만은 살려달라고 여신께 빌고 또 빌었다.

* * *

“여기입니다.”

리디안힐에 도착하자 레프렌스가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늘 아스테인의 에스코트를 받다가 다른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려니 어색했다. 결국에는 혼자 힘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도착한 마을은 신의 회초리에 직격탄을 맞은 곳답지 않게 주택들이 멀쩡했다.

“파손된 곳이 거의 없네요?”

“돌로 된 집들은 아가씨가 알려주신 아이디어로 지붕이 날아가지 않았답니다. 회오리바람에 의한 피해는 대부분 지붕이 날아가면서 생기는 일이니까요.”

“사람들은요?”

“대공님께서 안전한 곳으로 미리미리 대피시켜 인명 피해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눈앞이 다시 흐려지려는 것을 이를 악물어 참아냈다.

우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어디죠? 아스테인 님이 사라진 곳은?”

“저쪽 들판입니다. 위험하게 들판에 홀로 서 있던 여자가 있었답니다.”

“여자?”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그 여자의 머리카락 색이 붉은색이었나요?”

“네, 어찌 아십니까?”

엘라네르. 그 여자 짓이야.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엘라네르가 아스테인을 해친 것일까?

하지만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신성력으로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그러니 분명히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를 불러내려는 걸까?”

“네?”

나는 결심을 굳히고 레프렌스를 쳐다봤다.

어쩌면 오늘이 엘라네르를 붙잡을 마지막 기회였다.

“나 혼자 갈게요.”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아스테인을 구할 수만 있다면.

내 의지와 고집에 레프렌스는 나를 아스테인이 사라졌다는 들판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신의 회초리가 지나간 흔적 같은 것은 없었다. 여전히 많은 들꽃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아름답게 피어 있었으니.

“내가 왔으니까 아스테인을 돌려줘.”

나는 팔찌에 힘을 주며 외쳤다.

그러자 어디선가 작은 회오리바람이 불어왔다.

레프렌스를 비롯한 기사들이 달려오려는 것을 손을 들어서 막았다.

그러자 회오리바람은 내 주변을 몇 번 돌다가 내 눈앞에서 멈췄다.

“안녕, 나의 아름다운 날개.”

그리고 나타난 붉은 머리의 여자.

엘라네르는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졌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천천히.

나는 그 손길이 소름 돋아 힘껏 쳐냈다.

“아스테인 님은 어디 있죠?”

“왜? 보고 싶니?”

“어디 있냐고 물었어요!”

“잠시 잠을 자고 있지?”

“돌려줘요!”

“글쎄,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엘라네르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그 모습이 너무 얄밉고 미웠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노려봐도 그 여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런데 너, 여기 있어도 되니? 신전으로 가야지.”

“설마, 신전에 정말 문제가 생긴 건가요?”

“응. 그 썩은 날개는 죽었어. 내가 조금 전에 데려왔거든.”

성녀님을 모욕하는 말투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믿지 말아야 할 자를 다시 믿은 대가지. 어리석고 안타깝게도…….”

누굴 말하는 걸까? 아니 그것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했다.

“당신…… 누구죠?”

“이런, 서운하네. 그렇게나 내가 네 곁에 머무르고 있었는데도 날 몰라보다니. 내게 매일 기도했잖아. 신성력을 달라고.”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엘라네르를 쳐다봤다. 설마 했던 생각이 맞았던 걸까?

“정말로 당신이 여신 데아 님이라고요?”

“그럼, 나의 어여쁜 날개여.”

“하지만 당신은 진짜 성녀여야 하는데…….”

엘라네르는 날 보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내가 혼란에 빠져 아무 생각도 못 하고 눈만 깜박이자 다시 양손을 뻗어 내 양 볼을 감쌌다.

“아니, 내가 고작 성녀라면 어떻게 성물을 만들고 신의 회초리를 부르겠니?”

내 이마에 입을 맞춘 그녀는 내가 소중하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했다.

마치 기르던 새의 깃털을 다듬어 주듯이.

“하지만 당신이 신이라면 어째서 반신전파인 인테르의 수장이 된 거죠?”

“신전이 없어지길 바라니까.”

“네?”

“다시 말할게. 나는 신전도 성녀도 없어지길 원해.”

신의 입에서 자신의 안락한 공간인 신전을 없애라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엘라네르, 아니 데아 님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듯이.

내가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데아 님이 다정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는 약간의 슬픔과 미안함도 담겨 있었다.

“내 실수였어. 욕심이 많은 인간에게 환멸을 느꼈기에 성녀를 없애기로 마음먹었단다. 그래서 네게 신성력을 주지 않았더니 여전히 욕심 많은 인간 탓에 너와 네 소중한 이의 삶이 망가졌더구나.”

다시 한번 내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는 손길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내가 그녀를 원망하는 것과는 달리 애정도 느껴졌고.

“그러니 이번에는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어?”

“그렇다면 왜 아스테인 님을 데려간 건가요?”

“네가 날 너무 못 믿어서 말이야. 약간의 심술이랄까?”

나는 인상을 썼다.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아스테인의 목숨을 가지고 날 위협한 거라고?

“시련이 있어야 너희들의 마음도 더 단단해지고, 신뢰가 쌓일 것 같기도 했고.”

“지금까지 저희를 가지고 노신 건가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나는 눈앞의 여자가 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항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데아 님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 이렇게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네 모습을 기다렸지. 그래야 나랑 싸울 맛이 나지 않겠니?”

신을 상대로 싸우라는 소리를 하는 데아 님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무조건 내가 지는 싸움이었다.

“나는 곧 떠나겠지만, 인테르는 신전을 무너트리기 위해 열심히 맞서 싸울 거거든.”

“신전을 없앨 거라면서요.”

“그래 맞아. 하지만 그건 외부의 힘이 아니라, 결국 신전 내부의 힘이어야 해. 신전에서부터 신성력에 의지하는 일이 줄어야 하니까.”

나는 데아 님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데아 님은 날 보고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 모습은 신전의 벽화에 새겨져 있던 자애로운 신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성녀에게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단다.”

“아……!”

“성녀에게 내 힘을 가지고 남을 위해 희생하라고 말한 일은 더더욱 없고.”

“하지만 지금의 신전은……!”

“그래, 인간들이 살다 어려움을 겪을 때 도움을 주려 남긴 내 소중한 새들을 새장에 가두고 날개를 부러트렸어. 그래도 처음에는 인간들을 위하기에 지켜보고만 있었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더구나.”

데아 님께서 신전을 없애려는 이유는 이해했다.

하지만 왜 본인이 직접 해도 되는데 나에게 그 역할을 넘기는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심지어 지난 생에 그런 비극을 만들어가면서…….

“일단은 신이 직접 하는 것보다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세상이 더 가치 있으니까?”

“그래서 지난 삶에 제게 그런 일을 맡기셨나요? 하지만 저는 그런 큰 뜻을 이루기에는 한없이 약하고 보잘것없어요.”

나는 몸을 살짝 떨었다. 회귀 전에 겪었던 불행한 일들은 아직 내 곁에 악령처럼 머물러 있었다.

그것도 떨쳐내지 못한 내가 신을 대신해서 이런 일을 할 자신 같은 것은 없었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인간은 무엇이든 해내지. 네 마음이 더 단단해질 시기를 기다렸단다.”

데아 님은 내 양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신전으로 가렴. 그래서 신전을 망친 것들에게 신성력이 없어도 신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렴.”

내가 데아 님을 올려보자 그분은 내게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달빛보다 환하고, 태양보다 더 따사롭게.

“네가 성공하면 다시는 너처럼 억지로 성녀가 되어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불쌍한 여인은 생기지 않겠지.”

그 말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신께 당당하게 요구했다.

“내가 신전으로 가면 아스테인 님을 돌려주실 건가요?”

“당연히 돌려주겠지. 네가 믿는 유일한 기사잖니.”

나는 데아 님의 말이 거짓일지라도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소중한 사람을 돌려받을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내가 데려가지 않았다면 애송이 녀석이 네 소중한 사람을 파문시키려고 했을걸?”

“혹시 유테르안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그 녀석이 참 깜찍한 일을 벌였더구나. 네 소중한 이를 망치기 위해.”

나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걸 보던 데아 님은 내게 심장이 내려앉을 소리를 했다.

“자칫하면 이번에도 비극이 반복될 수 있겠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예요.”

데아 님은 내 대답에 눈을 빛냈다.

“그래, 네 노력에 따라 그 사람은 황제가 될 수도 있단다.”

그 말에 내 눈에도 빛이 감돌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