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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46화 (46/101)

46화. 갑작스러운 죽음

나와 셀레미온은 유테르안의 목소리에 미간을 동시에 좁혔다.

어떻게 된 것이 후작도 그렇고 유테르안도 그렇고, 아스테인이 성에 없을 때를 맞춰 기가 막히게 나타났다. 당연히 감시를 붙인 거겠지?

“아가씨, 어떡해요?”

“무시해야지. 성녀님께서는 내게 소후작이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을 내려주셨는걸.”

“하지만 후작님 때도 그렇고…….”

물론 후작은 그 명령을 받고도 성으로 쳐들어왔었다.

누가 아들 아니랄까 봐 유테르안도 성문 앞에서 진을 치고 쉽게 물러서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무시해. 지난번의 일 때문에 기사님들이 더 신경 써서 막아주실 거야. 우리는 이 가련한 파랑새나 땅에 묻어줄까?”

설레미온은 불안한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성문 쪽에서 나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덕분에 나도 유테르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성녀님의 명으로 예비 성녀님을 뵐 수 없습니다.”

“그 명령을 내렸던 성녀님이 계시질 않는데 무슨 상관이지?”

이상한 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땅을 파기 위해 집었던 나뭇가지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트렸다. 셀레미온도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게…….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닐까?”

우리는 눈을 마주하며 다시 바깥 상황을 주시했다.

귀에 익은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유테르안을 향해 소리쳤다.

“똑바로 설명하십시오.”

“성녀님께서 신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날아가셨다. 이제 예비 성녀인 내 누이께서 신전으로 가야 한다는 소리다.”

셀레미온은 유테르안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날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라봤다.

“아가씨, 저게 다 무슨 소리래요?”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유테르안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곳으로 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회귀한 뒤로 두 달 정도가 지났으니, 아직 성녀님이 돌아가실 때까지는 석 달 이상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데 왜 신전의 사제들이 아닌 푸토르 가의 소후작이 아가씨를 모시러 온 것입니까?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아스테인의 기사들은 물러섬이 없었다.

나 역시 그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성녀님께서 하늘로 떠나신 것이라면, 대사제의 대표가 나를 데리러 와야 했다.

“그 신의 회초리인가 뭔가로 신전이 비상이라서 말이야. 맞다! 여기 대공도 그곳에 갔다지?”

“신전이 비상이라 할지라도 신전의 공식문서가 있을 것 아닙니까? 성녀님의 서거와 같은 중대사에 신전에서 내쳐진 자가 심부름을 하다니요.”

그러자 유테르안이 한참을 비웃듯이 웃어댔다.

웃음을 그친 그는 서늘한 말투로 아스테인의 기사들에게 말을 건넸다.

“이봐, 단델리온의 애송이들. 계속 이렇게 나를 막아서다가는 신전으로부터 파문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헛소리하지 마십시오.”

“뭐, 그렇게 자신만만하면 계속 날 막든가.”

지나치게 오만한 목소리였다. 도대체 유테르안이 뭘 믿고 저러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자, 여기. 신전의 인장이 찍힌 문서다. 내 누이께서 본다면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신성력으로 바로 알아볼 것이다.”

“이것을 아가씨께 전하겠으나, 아가씨를 소후작에게는 맡길 수 없습니다. 대공께서 오시지 않는 한 절대로 아가씨를 내어드릴 수 없으니 그리 알고 돌아가십시오.”

“절대 내 누이를 내어주지 않겠다?”

아스테인의 기사들은 우직하게 주인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유테르안이 물러날까?

한참을 코웃음을 치는지 조용하던 유테르안이 여유로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 그렇다면 대사제가 누이를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해. 대사제가 참으로 좋아하겠군. 단델리온 대공이 예비 성녀를 내어주지 않는다니.”

유테르안의 말투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불길한 소리를 지껄였다.

“아, 그런데 단델리온 대공이 과연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모르겠네.”

“무슨 꿍꿍이입니까?”

“신의 회초리, 그게 왜 생겼다고 생각해? 신이 성녀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은 성기사를 용서할 것 같아?”

“주군과 아가씨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왜 누이는 그곳에 따라가지 않았을까? 하하하, 진실이 무엇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말의 울음소리에 이어 요란한 땅 울림이 느껴졌다.

나는 넋을 잃고 꽉 닫힌 성문 쪽을 바라봤다.

셀레미온은 너무 놀라 입을 막고 말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우리는 도저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성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낯익은 얼굴의 기사가 나타났다.

“아가씨.”

“레프렌스 경.”

심각한 얼굴로 내게 다가온 기사는 양피지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그의 얼굴은 놀란 나와 셀레미온보다 차분했다. 아스테인의 기사답게 믿음직한 모습이었다.

“다 듣고 계셨습니까?”

“푸토르 소후작이 혼자 찾아온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물어뜯었다.

젊은 기사는 그것을 살짝 찡그리며 바라봤다. 나는 잠시 뒤 기사와 시선을 맞췄다.

“혹시 신전 쪽 상황을 알 수 있을까요? 성녀님께서 정말로 하늘로 돌아가셨다면 신전의 가장 높은 탑에 푸른 깃발이 달렸을 거예요.”

“확인하러 기사를 당장 보내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거기에는 유테르안이 전한 말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성녀님께서 서거했으니 빨리 신전으로 돌아와 예식을 치르라고 적혀 있네요.”

그 말에 레프렌스 경이 미간을 좁혔다.

“이것은 진짜가 맞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신성력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당장 확인하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기사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군께서 돌아오시면 그때 확인하고 움직이는 편이 저도 나을 것 같습니다.”

나는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무서웠다. 정말로 이것이 진짜라면 어찌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이건 반드시 아스테인과 함께 확인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문제였다.

나는 신전으로 가지 않을 거라고 아스테인과 약속했었으니까.

“아스테인 님께 얼른 돌아와 달라고 연락을 넣어주세요.”

“네, 지시한 사항을 빠짐없이 이행하겠습니다. 성의 경비도 강화하겠지만, 혹시 모르니 방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 * *

저녁때가 되어도 아스테인은 성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아스테인에게 줄 주머니에 수를 마저 놓았다. 이거라도 하고 있으면 그가 금방 돌아올까 봐.

“아가씨, 완성했네요.”

“괜찮은 것 같아?”

“네. 라일락 꽃에서 금방이라도 향기가 날 것 같아요. 파랑새도 너무 예뻐요. 꽃향기에 취한 거예요?”

“응.”

손수건은 처음이라 이렇게 예쁘게 만들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만을 새겨놨었다.

조금은 자신감이 생긴 뒤 아스테인과 나를 상징하는 것으로 주머니를 만들었다. 자잘한 자수정 장식을 이용해 라일락 나무를 새겨넣었고, 그 위에 내려앉은 파랑새도 수놓았다.

그와 나를 알아볼 수 있게.

“대공님이 좋아하시겠어요.”

“정말?”

“네, 정성이 가득 담겼잖아요.”

나는 주머니에 놓인 수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한참을 그것에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던 나는 문득 걱정이 속에서 피어났다.

“아스테인 님께 아직 기별은 없어? 크리세우스 님은?”

“두 분 다 바쁘신지 아직이네요. 기사님들께 여쭸는데도 잘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그래……? 신의 회초리가 생각보다 피해를 많이 주고 있는 걸까?”

“저는 잘 모르겠어요.”

뭔가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떨치려 머리를 저으며 애써 다른 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좋지 않은 생각만 떠올랐다. 유테르안 때문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이었다.

“낮에 본 파랑새는 잘 묻어줬지?”

“네. 기사님들께 부탁해서 무덤도 만들어줬어요. 파랑새는 신의 전령이라면서요. 오늘 도련님이 가져온 소식도 그렇고…….”

셀레미온이 더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나도 알아들었다.

하지만 나쁜 예감은 억지로 집어넣었다.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믿자.

“가련한 아이의 마지막 길을 지켜줬으니 좋은 일이 생길 거야.”

“그렇겠죠?”

“그래. 그러니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셀레미온을 달랜 뒤 돌려보냈다. 괜찮은 척했지만 불안한 쪽은 나였다.

나는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물건들을 훑었다.

목각인형, 토끼 인형, 그리고 엘라네르와 아스테인의 팔찌.

“괜찮을 거야.”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는데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집사님. 아가씨는 이제 주무셔야 한다고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신전에서 큰일이 났다니 당장 예비 성녀인 아가씨가 신전으로 가야 한다.”

“도련님의 말이 거짓일 수도 있잖아요!”

“아직 신전에서 보낸 문서를 확인도 하지 않았다며!”

“만약을 대비해서 대공님이 오시길 기다리는 거죠!”

집사의 화난 목소리가 성의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지금 리디안힐에서 생긴 이변도 그렇고,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댔다.

신의 회초리가 내 기억보다 더 길고 강력하게 일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은 했다. 내가 미래를 바꾸려고 해서 데아 님께서 화나신 걸까?

나는 떨리는 마음을 숨기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집사가 빠르게 내게 다가왔다.

“아가씨! 당장 문서의 내용을 확인하고 신전으로 가셔야 합니다.”

“만약을 대비해 날 호위할 성기사인 아스테인 님 앞에서 확인하겠어요.”

“이미 신전에 난리가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기사들이 신전에 가서 확인하고 왔어요. 푸른 깃발은 없다고요.”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집사가 내 말에 반박하려는 것을 손을 들고 막았다.

“성녀가 하늘로 돌아가는 날이 앞당겨진 선례가 없다는 걸 당신은 모르나요?”

역사상으로는 그랬다.

“그러니 신전에 큰 변고가 생겼을 수도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랬다면 대사제가 왔겠죠.”

내 단호함에 집사는 뭔가 불만이 있는지 입을 들썩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만약 정말 신전에 변고가 생겼고, 대공께서 늦게 돌아오게 되어서 일 처리가 늦어졌을 때는 말입니다.”

심각한 그의 얼굴에 나도 얼굴을 굳혔다.

“신전에서 그 책임을 대공께 물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집사의 발언에 미간을 좁혔다. 불편한 심기를 숨길 수가 없었다.

“왜죠?”

“성기사가 될 자가 성녀를 모시고 신전으로 가는 일에 소홀했으니까요.”

“그는 나와 황제의 명을 받고 리디안힐에서 신의 회초리의 피해를 줄이는 일을 하고 있어요.”

“신전의 늙은이들은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나는 ‘사소한’이라는 단어에 눈을 매섭게 떴다. 그러자 집사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신전의 늙은이들을 알지 않습니까? 평민가에서 일어나는 일에 신경 쓸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녀님께서는 신전에 그런 불경스러운 자들을 남기지 않겠다고 저와 약속했어요. 설령 그런 자가 남았더라도 내가 용납하지 않아요.”

집사는 내 반응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에는 떨떠름함이 남았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분이 곤란해지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집사는 내게 반쯤은 강요하듯이 얼른 신전으로 갈 것을 요청하고는 돌아갔다.

셀레미온은 복도 끝에서 사라지는 집사의 모습을 보고 입을 샐쭉 내밀었다.

“뭐야, 저 집사님. 보자 보자 하니까 아가씨한테 왜 저렇게 무례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도움을 받지 말 걸 그랬어요.”

나는 말없이 집사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집사에게 감사했던 마음은 남아 있었다. 가짜면서 진짜 성녀가 될 것처럼 그를 속였기에 죄책감도 없지 않았다.

“레프렌스 경에게 아스테인 님의 소식을 다시 알아봐 줄래?”

하지만 집사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정말로 성녀님께 무슨 일이 생겼다면…….

아스테인은 내가 신성력이 없어도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다녔다. 그리고 곧, 내가 그러는 이유가 신성력을 지니지 못한 탓이라고 밝힐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게 생겼다. 엘라네르조차 확보하지 못했으니까.

원래라면 성녀 검증도 통과하지 못할 나지만, 엘라네르는 숨어서 날 성녀로 만들려 할 것이다.

“네, 제가 지금 당장 갔다 올게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셀레미온이 동동거리며 뛰쳐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내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금방이라도 멎을 것처럼 불안하게.

셀레미온이 돌아온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 아이의 주변으로 레프렌스 경을 비롯한 기사들이 우르르 서 있었다.

“아가씨…… 어떡해요?”

셀레미온이 조금은 울먹이면서 내게 말을 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심장이 다시 뛰었다가 멎었다가를 반복했다. 내게 앞으로 닥칠 일을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내게 대답을 하기 위해 나선 것은 셀레미온이 아니었다.

레프렌스 경이 내 앞으로 나왔다. 그의 얼굴도 셀레미온만큼이나 어두웠다.

“레프렌스 경. 무슨 일인지 말해주세요.”

“주군과 수장이 신의 회초리에 휘말려 하늘로 날아갔다고 합니다.”

“네? 무슨 소리죠?”

나는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끔벅였다.

“대공님께서 크리세우스 님과 함께 실종되셨다고 합니다.”

그 뒤에 내가 들은 것은 셀레미온의 외침이었다.

“꺄악, 아가씨! 의사를, 의사를 모셔오세요!”

그 후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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