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그날, 우리가 만난 후에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상하게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조금 오싹한 것이 추운 것도 같고.
결국,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서서 쉬었다.
“어머, 아가씨. 어딜 가세요?”
마침 세숫물을 가지고 들어오던 셀레미온이 내 팔을 붙들었다.
그러더니 화들짝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가씨! 어디 아파요?”
셀레미온은 나를 억지로 침대로 데려가 앉혔다. 그러고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어머, 어떡해! 온몸에 열이 펄펄 나잖아요!”
“괜찮아. 아프지 않아.”
“아니긴요! 얼굴색도 엉망인데!”
“셀레미온, 소리 지르지 마. 그게 더 머리 아파.”
나는 나를 눕히려는 셀레미온의 손을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힘없는 팔은 셀레미온을 밀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다시 셀레미온에게 붙들렸다.
“아침부터 어딜 가시려고요?”
“아스테인 님은 어디 계셔?”
“성 밖으로 나가셨어요. 신의 회초리 문제로 바쁘시다고요. 며칠 안 남았다면서요?”
“아…….”
그래, 그것도 있었다. 그것은 며칠에 걸쳐 마을을 차례차례 부술 것이다.
그게 내일부터였던가?
“아가씨 덕분에 대비가 잘되고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뭔가 또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셨다면서요.”
셀레미온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아스테인을 당장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맥이 빠진 탓일까?
“크리세우스 님은 절 볼 때마다 아가씨를 찬양해요. 집사님보다 더 열렬한 추종자라니까…… 아, 아가씨!”
떠들어대던 셀레미온이 뒤늦게 내 상태를 보고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고개를 반쯤 숙인 나는 눈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힘겨워졌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몸에는 스스로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열감이 있었다.
밤에 잠을 한숨도 자지 않은 탓일까? 하지만 밤을 처음 새워 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몸이 무겁지? 온몸을 누가 세게 누르는 것처럼 욱신댔다.
“아이참, 아픈 거 맞잖아요! 의사를 불러올게요.”
차라리 그냥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셀레미온을 말릴 수가 없었다.
그 아이를 붙잡으려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뒤로 넘어갔으니까.
“꺄악, 아가씨! 근처에 누구 없어요?”
나 때문에 난리가 나버렸다.
의사며 집사며 기사님들로도 부족해 요리사까지 모두 출동했으니.
“어제 무리하셔서 몸살이 났군요.”
지난번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나는 침대에 꼼짝도 못 하고 누워 있었고, 나를 사람들이 둘러싸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지난번만큼이나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아이고, 아가씨. 제가 몸보신에 좋은 고기 수프를 올리겠습니다.”
“산에 가서 내가 약초라도 캐올까?”
“아가씨께 아무거나 함부로 올릴 수 없습니다. 성녀가 되실 분의 몸에 위해를 가할 수도 있어요.”
나를 걱정해주고 아껴주느라 이런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곁에서 떠드는 것은 내게 절대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몸살에는 그저 잘 먹고 푹 쉬는 것이 좋습니다. 어제 무리해서 근육이 놀라 아픈 것이니, 움직이지 마시고요.”
의사가 소음을 뚫고 내게 당부했다. 그의 말에도 뒤쪽의 소란은 끝이 날 생각이 없었다.
나는 말할 기운이 없어 그냥 힘없이 눈을 감았다.
아스테인이 있었다면 시끄러운 기사들을 쫓아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내 곁에 없었다.
“그만들 떠들어요! 이래서야 아가씨가 어찌 쉬어요?”
결국, 셀레미온이 나서서 사람들을 방 안에서 다 내보내 줬다.
겨우 조용해진 방에서 셀레미온은 날 일으켜 묽은 수프를 먹이고, 약도 챙겨 먹여줬다.
“좀, 추운 것 같아.”
몸이 덜덜 떨리는 것도 같았다. 내가 이를 살짝 부딪쳐가며 떨자 셀레미온의 녹색 눈이 커졌다.
“열이 계속 올라서 오한이 오는 건가 봐요. 물주머니 가져올게요. 따뜻하게 하면 좀 덜할 거예요.”
셀레미온은 다급히 밖으로 나가서 가죽 주머니에 뜨거운 물을 채워왔다.
이불 속에 그것을 넣어주자 따뜻한 온기가 퍼졌다. 하지만 아스테인의 품만큼 편안하지는 않았다.
그가 안아주면 떨리는 것이 멈출 것 같은데…….
“아가씨, 오늘은 꼼짝도 하면 안 된다니까 이대로 푹 주무세요. 아까 먹은 약 안에는 잠이 잘 오는 약도 들었대요.”
“응.”
셀레미온은 내가 잠들기 좋게 창가의 커튼을 닫아주었다.
그리고 차가운 물수건을 내 이마에 올려주었다. 몇 번이고 뜨거워졌을 수건을 바꿔 주던 아이는 물을 갈러 밖으로 나갔다.
방에 어둠이 찾아오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약 기운 때문인지, 열 때문인지 나는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 * *
잠에서 깬 내가 눈을 뜬 곳은 라일락 꽃이 가득 피어 있는 숲속이었다.
그곳에는 나 말고도 두 명이 있었다.
파란 머리의 꼬질꼬질한 소녀와 보라색 눈을 가진 노신사.
노신사는 소녀를 예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름이 뭐지?”
“프레이아.”
자그마한 소녀였던 나는 라일락 나무 뒤에 몸을 반쯤 숨긴 채 대답했다.
“그래, 프레이아. 지금까지 혼자서 힘들었지?”
어린 나는 남자를 보고 고개를 열심히 흔들어댔다. 그러자 노신사, 카이룰라 백작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나를 따라가면 춥지도 배고프지도 않을 거란다. 같이 가지 않겠니?”
“…….”
어린 나는 백작이 내민 손을 빤히 노려보고만 있었다. 뭔가 예감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까…… 그 오라버니는 어디로 데려갔어?”
백작이 원하는 대답 대신 질문을 한 나는 백작에게 적개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랐다.
나는 빈민가에서 살다 한겨울에 그곳에서 쫓겨났다. 겨우 여섯 살의 아이는 신의 가호를 받아 봄까지 살아남았고, 운명의 소년을 만났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겠다던 아스테인을 늙은 백작이 억지로 끌고 갔다.
“해치려는 거야? 오라버니는 가기 싫다고 했잖아.”
“그분은 이 숲에 남아서 거지처럼 살 수 없는 존재란다. 그분은 이런 곳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니.”
“그건…… 그래.”
어린 나는 순순히 그것을 인정했다. 겨우 여섯 살이었을 텐데도 이때의 나는 사리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린아이답게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시무룩하게 입꼬리를 내리고 있으니.
그걸 보고 백작이 빙그레 웃었다.
“그분과 다시 만나고 싶은 거니?”
어린 내 얼굴에 반짝, 미소가 돌았다가 사라졌다.
어린 나는 카이룰라 백작을 믿지 못하는지 잔뜩 경계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갔단다. 높고 고귀한 곳이지.”
그 말에 어린 내 얼굴에 잔뜩 실망한 기색이 돌았다. 다시 축 늘어진 입술에 백작이 이겼다는 듯, 눈을 빛냈다.
“하지만 네가 그분을 다시 만날 방법이 있단다.”
“뭔데?”
“황자님은 황제가 될 분이다. 그러니 너도 그에 걸맞은 고귀한 사람이 되면 된단다.”
어린 나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다시 힘이 빠졌다. 어린 나의 심정을 나는 알 것 같았다.
빈민가 출신의 하찮은 내가 황제의 옆에 서는 고귀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아이의 좌절감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지금의 나도 사실 마찬가지인 입장이니까.
지금은 아스테인이 소중하게 여겨주지만, 언젠가 그가 황제가 되면 나는 그의 곁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성녀 말이다. 가장 고귀한 여인이지.”
“성녀?”
“너는 파랑새를 부르고, 기적을 만들기도 하잖니?”
백작의 꼬드김에 혹한 어린 내 모습이 보였다. 그도 그럴 만했다.
아스테인은 내게 위로를 받았다고 했지만, 그건 어린 나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배척하던 나를 마주 안아 준 것은 아스테인 하나였으니까. 날 보고 대가 없이 따스하게 웃어 준 것도 아스테인이 처음이니까.
백작처럼 무언가를 바라며 친절한 척한 것이 아닌 순수한 마음.
“내가 성녀가 될 수 있어?”
“그럼. 너는 특별한 아이란다. 그래서 널 찾고 있는 이도 있고.”
“성녀가 되면 아까 그 오라버니랑 진짜로 만날 수 있어?”
“물론이란다. 어쩌면 네 힘이 그분을 황제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
“내가 도와줘? 그럼 그 오라버니가 계속 웃을 수 있어?”
“당연하지.”
어린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백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잘 생각했단다.”
백작은 내 몸값을 좀 더 높인 뒤에야 나를 푸토르 후작의 고아원으로 보내겠지.
나는 백작과 나란히 걸어서 마차에 오르는 내 어린 모습을 뒤에서 지켜봤다. 말릴 수는 없었다.
힘든 시련은 겪겠지만 어린 나의 바람대로 나는 아스테인을 만나게 될 테니까.
마차가 떠난 뒤에도 나는 라일락 숲에 그대로 서 있었다. 본능이었다.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올 것이라는.
그리고 내 예감은 맞았다.
“헉헉! 어디 갔지?”
어린 아스테인이었다. 겨우 열 살의 소년은 건장한 호위를 어떻게 제쳤는지 혼자였다.
“프레이아! 어딨어? 데리러 왔어!”
죄책감 가득한 소년은 라일락 숲을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그가 찾던 소녀의 흔적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한참이나 뒤지던 고귀한 소년은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미안해…….”
겨우 잠깐의 시간 동안 만난 소녀를 찾으며 안타까워하는 아스테인의 모습이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런 아스테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소중한 소년을 끌어안았다.
아스테인은 나를 느끼지 못하는지 고개를 숙이고 혼자 웅얼댔다.
“같이 행복해지려고 했는데……. 미안, 미안해.”
“괜찮아요. 우리는 곧 다시 만날 거니까요.”
나는 아스테인의 이마에 입을 맞춰줬다. 역시 그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저지른 짓을 그에게 탓할 수가 없을 만큼.
그때 아스테인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그리고 조금은 놀란 얼굴.
그것이 산산이 흩어졌다. 모래가 된 듯이 하얗게 부서지며.
하지만 그것이 무섭지 않았다.
“아스테인 님.”
그는 지금 내 곁에 있으니까.
눈을 뜨고 꿈속에서 벗어나자 아스테인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내 이마에 수건을 올려주고 있었다.
내가 이불 속에서 손을 내밀자 그가 내 것을 잡아주었다. 그는 이마를 찡그렸다.
“열이 너무 많이 납니다.”
“괜찮아요.”
“성녀님을 모셔와야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대신 그에게 졸랐다.
“아스테인 님이 간호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는 다정하게 눈을 휘었다가 걱정스럽게 눈꼬리를 내렸다.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러면 빨리 낫지 않을 겁니다. 어제 제 기사들과 절 위해 무리하다 아픈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스테인 님이 책임지셔야죠. 열이 내릴 때까지만요.”
“……알겠습니다.”
그는 얌전히 내 곁에 앉아주었다. 아직 겉옷도 벗지 못한 것이 일하다 급히 달려온 것 같았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가 내게 보여주는 마음은 변함없는 것일 테니까.
참 희한하게도 아스테인이 물수건을 올려주자 뜨거웠던 이마가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끈지끈했던 열기가 밀려나자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나는 손에 조금 힘을 줬다. 아스테인은 그런 내 손 위에 다른 손을 올려 토닥여줬다.
“아스테인 님…….”
“네, 말씀하십시오.”
“저, 이제 다 털어냈어요.”
목소리에도 졸음이 밀려와 조금 어눌하게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나 괜찮으니까……. 외조부님 때문에 미안해하지…… 마요.”
내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 * *
내가 몸살에서 벗어난 것은 그로부터 닷새 뒤였다.
“아가씨, 이제 건강해진 거죠?”
“응. 다음부터는 무리하지 말아야겠어.”
단단히 다짐했다. 주머니를 못 받았던 기사들과 아스테인도 당부했다.
보답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무리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하지만 아스테인의 주머니에 수놓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이건 보답 그 이상의 의미였으니까.
내 사심을 가득 담은…….
“아가씨, 오늘도 머리카락 모아드려요?”
머리를 빗겨주던 셀레미온이 물었다.
“아니, 이제 괜찮아. 그런데 아스테인 님은 오늘도 못 오셨어?”
“네. 신의 회초리가 시작됐잖아요. 산발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일이 며칠간 이어져서 수습에 정신이 없나 봐요.”
“아, 맞다. 나도 따라갔어야 했는데…….”
“대공님이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그날 밤 날 간호해주고 난 이후, 나는 아스테인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내가 약을 먹고 자는 시간이 길었다. 그 탓에 아스테인이 돌아오는 시간과 내가 깨어 있는 시간이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왜요? 보고 싶으세요?”
속마음을 들킨 나는 뜨끔했다. 냉정한 척하려는데도 귀 끝이 살짝 붉어진 것도 같았다.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돼서 그러지.”
“기사님들 말로는 대공님이 검을 들고 있으면 신의 회초리가 피해간다던데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지만.”
글라디우스의 힘이구나.
뭔가 살짝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의 활약을 지켜보고 싶었는데.
“그런데 신기하네요. 여기는 이렇게나 하늘이 푸른데 다른 한쪽은 신의 회초리라니요.”
셀레미온의 말에 나는 문득 하늘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의 말과 달리 동쪽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심지어 뇌우라도 치고 있는지 불길하게 번쩍이기도 했고.
“저기가 리디안힐 쪽이던가?”
“아니요. 신전 쪽 아니에요?”
조금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엘라네르가 황제와 준비하고 있다는 일도 아직 터지지 않았는데…….
“산책이라도 하실래요?”
“응. 그러자.”
다시 아프지 않으려면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산책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어머나, 이게 뭐래요?”
파랑새의 사체가 산책길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연이어 성의 입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예비 성녀님을 모시러 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유테르안 푸토르의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