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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44화 (44/101)

44화. 블루 로즈의 주인

내 귀가 잘못된 것 아닐까?

나는 아스테인을 부르지도 못하고 우뚝 섰다.

손이 덜덜덜 떨렸다. 나를 지옥으로 보낸 사람은 분명 블루 로즈라고 후작이 그랬는데…….

손에 든 펜던트에 새겨진 무늬를 보니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크리세우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아스테인이 천천히 몸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프레이아 님!”

“아, 아가씨!”

둘은 내 얼굴을 보고 당황한 듯, 말을 멈췄다.

“그, 그게…….”

나는 아스테인에게 다가갔다.

어쩐지 다리마저 부들부들 떨리는 것 같았다.

“응접실 복도에서 셀레미온이 주웠다는데요. 아무래도 아스테인 님의 물건 같아서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며 아스테인을 대했다.

“아스테인 님의 모후께서 이 장미를 좋아하셨다면서요?”

아스테인에게 손을 내밀자 그가 펜던트를 받았다.

나는 침착하게 아스테인의 눈을 봤다.

잠시 당황한 듯 멀뚱히 나를 쳐다보던 아스테인은 조심스럽게 그 물건을 살폈다. 그러고는 눈을 찌푸렸다.

“제…… 수하의 것 같습니다.”

“아, 이거! 누가 잃어버렸다고 찾는 것 같았습니다.”

펜던트는 곧바로 크리세우스의 손에 넘어갔다. 크리세우스는 뭔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 모습을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봤다.

“그, 그, 아 맞다! 아가씨! 성스러운 샘에 관해서 아세요?”

크리세우스가 말을 돌리려는 것이 너무 대놓고 보였다. 하지만 나는 모른 척하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네, 신전의 가장 안쪽, 성녀님이 쓰시는 건물 뒤에 있는 분수예요. 신전에서 열리는 여러 가지 행사에 성수로 사용되죠.”

아스테인과 크리세우스의 표정이 평소보다 심각해졌다.

“왜 묻는 거죠?”

목소리가 조금은 날카롭게 튀어 나갔다.

하지만 듣는 두 남자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샘을 지키는 기사들 말입니다.”

“아……. 그들이 혹시 무슨 사고라도 일으켰나요?”

“뭐, 푸토르 후작가가 얌전히 있으면 신기한 일이죠.”

성스러운 샘을 지키는 것은 성기사가 아닌 후작의 기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성스러운 샘을 지키기에는 부적합했다.

성심은 부족했고, 욕망은 넘쳐났으니까.

“설마 후작이…….”

“그가 직접 저지른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크리세우스가 아니라 아스테인이 대답했다. 그는 내 눈이 또 찌푸려지자 조심스럽게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어쨌든 성스러운 샘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들을 황제가 폭로할 예정입니다. 그것 때문에 인테르의 수장을 만났답니다.”

이건…… 모르는 척해도 되는 부분 아닐까?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아스테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희도 모른 척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성녀님께서는 고생하시겠네요.”

“후작가가 신전에 참견하는 일을 막을 기회이니 성녀님께도 나쁜 선택은 아니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테인의 말이 옳았다. 이번 기회에 신전에서 후작가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몰아내는 것은 신전의 미래를 위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인테르를 무너트리기 위해서는 또, 참견하고 훼방 놓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해서 갈등 중입니다. 세력을 키우는 것을 막고 수장을 잡으려면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의 친정을 공격하는 일이란 자각이 있는 건가요?”

“네. 아무래도 이제 자식이 생기면 외척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내 눈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신전을 무너트려서라도?”

“신권보다는 황권이 우선일 테니까요.”

“어리석네요. 저라면 차라리 신전의 힘을 빌려 황권을 더 찬란하게 빛낼 텐데요.”

황제는 예나 지금이나 옹졸하고 치졸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이런 일을 벌이려는 또 다른 이유가 충분히 짐작 갔다.

“아스테인 님을 경계하는 방법치고는 조금, 유치하네요.”

내 대답에 크리세우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눈치를 채셨군요?”

뻔한 일이었으니까.

아스테인이 나와 가까워진 것이 불만이었을 것이다.

신전의 위세를 빌리고자 성녀를 배출한 가문에서 황후를 얻었다. 하지만 그 집안은 성녀로부터 버림받았다.

예비 성녀마저 황제가 아닌 그의 이복동생과 신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황제로서는 불만이 가득할 수밖에.

“그럼 차라리 황제가 그런 생각을 못 하게 하는 건 어때요?”

나는 내 생각을 아스테인과 크리세우스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크리세우스가 내 손을 잡고 춤이라도 출 듯이 굴었다.

“아가씨, 왜 이렇게 현명하세요? 이야, 역시 최고라니까.”

크리세우스의 칭찬에 얼굴에 열이 순식간에 올랐다.

손으로 얼굴에 바람을 일으키자 그가 놀리듯이 말했다.

“그런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주군의 쿠키에는 견과류도 훨씬 많이 들어가고, 말린 과일도 들어가고, 그 귀하다는 남국에서 들여온 초콜릿이라는 것까지 들어가다니요.”

크리세우스는 아스테인의 손에 들린 바구니를 가리켰다.

아스테인의 두 손에 꽉 들려 있는 바구니를 보자 뭔가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만해라, 크리세우스.”

“에이, 왜요. 두 분 다 부끄러워하시기는. 얼른 다 부숴버리고 해결하자고요. 저는 두 분을 응원하니까요.”

아스테인과 나 사이를 이미 눈치챈 크리세우스의 모습에 이번에도 내 얼굴이 다시 빨개지려고 했다.

하지만 내 입에서는 조금 거친 말이 나왔다.

“크리세우스 님. 집사가 눈치챈 것 같으니 조심해주세요. 혹시 모르니까요.”

“아, 네……. 죄송합니다.”

서늘한 목소리에 크리세우스가 당황한 듯 보였다.

나는 잘게 한숨을 쉰 뒤, 아스테인에게 얼굴을 돌렸다.

“아스테인 님도……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낫겠어요. 새벽에 찾아온다던가 그런 건요.”

아스테인의 눈썹이 살짝 가운데로 몰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를 배려하는 남자는 내 말을 따라주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더 노력해서 일을 더 빨리 해결하겠습니다.”

평소와 같은 모습에 어쩐지 심장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그리고 간절하게 바랐다.

내가 잘못 들었다고, 절대 그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전, 이만 가서 쉴게요.”

* * *

나는 두 남자를 보내고 아스테인의 외조부가 썼다던 서재로 왔다.

성에 온 뒤 자주 이용했던 곳이었다. 감자 독의 치료법을 찾을 때도 유용하게 이용했다.

신의 회초리로 인한 피해를 줄일 방법에 관한 아이디어도 이곳에서 얻었다.

하지만…….

“날 고아원에 보낸 게 아스테인의 외조부라고?”

믿기지 않았다. 왜 하필 그 사람일까?

내가 너무 멍청하게 느껴졌다. 한심했다.

[블루 로즈는 저를 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군을 대신해 온갖 더러운 일을 하는데요!]

[암흑 길드라니요? 그런 소리를 입에 담을 처지가 아닐 텐데요?]

[우리를 오해하신다던 분이 선물을 준다고 하셔서…… 그! 죄송합니다.]

이렇게나 많은 조각을 들어놓고도 놓쳤다니.

어쩌면 무시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아니야. 잘못 들은 걸 거야. 아니면 뭔가 사연이 있었겠지.”

뭔가 홀린 듯이 나는 서재를 뒤졌다.

아스테인의 외조부, 카이룰라 백작의 흔적을 찾아서.

이곳에 그에 관한 단서가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서라도 뭔가 필요했다.

한참을 온갖 책을 다 꺼내어 봤지만, 백작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긴…… 남아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널브러진 책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니 팔이 아팠다.

꾸역꾸역 마지막 책을 집어 들기 위해 허리를 숙인 나는 갑자기 몸을 멈췄다.

“이게 뭐지?”

책장의 아래쪽, 바닥의 습기를 피하려고 돋아놓은 공간을 나무판으로 막아 두었다. 그런데 한 곳만 나뭇결이 뭔가 달랐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 부분을 밀어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대로 잡아당겨 보는 것은?

손잡이가 없었기에 주변을 돌아봤다. 그때 눈에 띈 것은 난로의 부지깽이였다.

“앞부분이 왜 또 꺾였지?”

납작한 앞부분이 한 번 더 꺾여 있었다. 무엇인가 홈에 걸 수 있을 것처럼.

나는 그것을 들고 책장 아래에 여러 번 돌려가며 끼워 넣었다. 그러자 뭔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그것을 잡아당기자 나무판자인 줄 알았던 것이 서랍처럼 끌려 나왔다.

“하! 찾았어.”

서랍 안에는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꺼낸 뒤 책상 앞에 앉았다.

한 장씩 넘기다 보니 이 책의 의미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카이룰라 백작의 일기였다.

나는 휘리릭 페이지를 넘겼다. 16년 전, 내가 여섯 살이던 그해의 일기를 보려고.

비슷한 시기의 일기를 발견한 이후, 눈과 책을 넘기는 손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나는 진실을 확인해야 했다.

『병약하신 황후 폐하를 죽음으로 내몬 대가를 그들이 치르게 해야 한다. 하지만 아스테인 황자께서 유약하여 어찌해야 할지 걱정이다.』

“아스테인 님이 힘들어했다던 시기야.”

가출까지 감행할 만큼 황궁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때.

『푸토르 후작에게서 의뢰가 들어왔다. 성녀가 될 아이를 찾아달라고.

우리 집안을 무시하는 듯하여 고까웠는데, 잘 됐다. 이 기회에 돈도 왕창 뜯고, 후작가의 비밀도 캐야겠다.』

후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를 찾기 위해 블루 로즈에 거금을 내어줬다던 이야기가.

나는 조금 전보다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겨우 페이지를 넘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알아야 하는 정보가 들어 있는 페이지를 찾아냈다.

『황자님께서 결국 황궁에서 도망치셨다. 그런데 이건 천운일까? 소문의 아이와 황자님께서 만났다. 게다가 큰 인연을 맺었으니 훗날 황자님께 도움이 될 것 같다.』

“이건…… 날 말하는 거야.”

『덕분에 황자님께서는 용기를 얻고 황궁으로 돌아갔다. 역시 성녀가 될 아이는 뭔가 남다른 걸까? 일단은 그 아이를 내가 임시 보호하기로 했다.』

나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복잡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내게 손을 내민 이의 눈동자였다.

아스테인의 것과 놀랍게도 닮은 보라색 눈.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하늘은 그런 내 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다.

『오늘 그 아이를 푸토르 후작의 고아원에 보냈다. 몸값을 올린 보람을 느꼈다.

우리의 도움을 받은 소녀가 무사히 예비 성녀가 된다면, 황자님이 황제가 되는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의 블루 로즈와 함께.』

나는 마지막 말을 보고 일기장을 덮었다.

너무나도 괴롭고 숨이 막혀서…….

* * *

해가 뜨기 전, 평소 아스테인이 찾아오던 시간까지 깨어 있었다. 어제 오지 말라고 했기에 그가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떡하지?”

눈에 눈물이 계속 고이려고 했다.

내가 원망하던 존재가 아스테인의 외할아버지였다. 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데…….

눈을 멀뚱멀뚱 뜨고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아스테인일 것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스테인과 웃는 얼굴로 대화할 자신이 없었다.

“주무십니까?”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애써 깊은 잠에 빠진 듯, 고른 숨소리를 내며 눈을 뜨지 않았다.

“오지 말라고 하셨는데, 와서 죄송합니다.”

그는 내가 듣든지 말든지 상관없는 듯했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털썩 그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지친 걸까? 나를 위해 돌아다니다가 들어온 것일 텐데…….

“하지만 프레이아 님의 얼굴을 보지 않고는 잠을 잘 수가 없어서요.”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그래도 모른 척,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오해를 풀어드리려 했는데, 어쩌지요? 제 외조부와 블루 로즈가 프레이아 님께 고통을 드렸더군요.”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억눌렸다. 그는 나만큼이나 괴로워했다.

“크리세우스 녀석도 속상해하더군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과거에 블루 로즈가 프레이아 님께 아픔을 드렸다고요.”

나는 아스테인의 숨어 있던 수하들의 정체를 완벽히 이해했다.

특히 성에서 보이지 않다가 주머니를 받으러 갑자기 나타난 이들의 정체를…….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까요? 그 사실을 철저히 은폐해서라도 프레이아 님이 모르게 하고 싶습니다.”

그의 갈라진 목소리는 지금껏 들어온 것 중에서 가장 힘겹게 들렸다.

“저를 더 사랑하게 만들면 과거의 일을 모른 척 지나가려 하실까요?”

아스테인의 마음을 듣는 것이 괴로웠다.

그가 나를 향해 보여주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하지만 그런 만큼 내 마음도 아프고 혼란스러워졌다.

“다 부질없는 짓이겠지요. 하지만 며칠만 더 있다가 솔직하게 다 고백하겠습니다. 단 며칠이라도 프레이아 님께 미움받지 않고, 사랑을 드리고 싶으니까요.”

아스테인은 그 말을 마친 뒤 내 이마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이 떨어지고 발소리가 멀어지자,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방문이 닫히고 그가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입을 손으로 막은 나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울었다.

아스테인의 외조부를 향해 어린 시절 하지 못했던 원망의 말을 쏟아내며.

그러는 사이 아침 해가 높이 떠올랐다. 나의 마음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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