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사랑스러운 질투
“자, 한 명씩 들어오세요!”
셀레미온은 응접실 앞에서 기사들을 한 명씩 들여보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옆구리에 손을 얹고 어찌나 당당하게 무게를 잡고 있는지, 내가 아니라 저 아이가 주인같이 느껴졌다.
“다음.”
셀레미온의 부름에 다음 기사님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기사단의 막내, 레프렌스입니다.”
“안녕하세요. 지난번 황실 연회 때 황궁 안에서 호위했던 분 맞죠?”
낯익은 얼굴에 나는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젊은 기사의 뺨에 붉은 홍조가 나타났다.
“맞습니다!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성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어요.”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정말 별것 아니지만, 무운을 비는 실 팔찌와 훈련할 때 드실 간식이에요.”
“감사합니다!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기사 레프렌스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엘라네르의 팔찌로 축복을 보탤까 하는 생각은 접었다.
내 것이 아닌 남의 힘으로 보답하는 것은 진정한 마음이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꾹꾹 눌러 담는 것이 더 진심을 전할 것이다.
“언제나 부상 없이 건강하시길 바랄게요.”
“아가씨도 매일매일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사 레프렌스의 말에 나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곧 그를 위해 눈가를 휘어줬다.
“이미 저는 이곳에서 행복하답니다. 여러분 덕분에요.”
레프렌스가 나가고도 기사들의 방문은 끊이지 않았다.
대충 예상해본 기사들의 수보다 더 많이 준비했는데도 주머니가 모자랄 것 같았다.
“와, 도대체 어디에 이렇게 기사님들이 많이 숨어 계셨대요?”
셀레미온은 지친 얼굴을 했다.
“아직 사람들이 많아?”
“네. 어쩌죠?”
“일단……. 있는 건 다 나눠 주고, 모자라면 인원수에 맞춰서 다시 준비해야지.”
“네, 집사님께 말해서 의상실에 연락을 넣어달라고 해야겠어요.”
셀레미온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기사들의 수가 알려진 것보다 많다는 것, 그 의미가 무엇인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 것이다. 아스테인의 기사들은 그를 위해 성 밖에도 숨어 있었다.
“아니, 그건……. 나중에 내가 직접 하는 편이 낫겠어.”
“왜요?”
“아스테인 님께 정확한 인원수를 확인해야 모자라지 않게 주문할 수 있지 않을까?”
셀레미온은 내 지적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리고 집사나 부인에게는 오늘 얼마나 모자랐는지 말하지 않는 게 낫겠어.”
“왜요?”
“음, 집사는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내가 아스테인 님이나 그 기사들을 더 챙기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야.”
“으……. 맞아요. 깐깐해.”
셀레미온이 입을 쭉 내밀며 동의해줬다.
그 아이는 동시에 다시 질린 얼굴을 했다. 다음에도 이렇게 고생해야 하냐며 울상인 아이를 나는 애써 무시했다.
“자, 얼른 다 나누어 주고 오늘은 쉴까?”
“네, 알겠어요. 자! 다음 기사님 들어오세요.”
쉬자는 소리에 기운 낸 셀레미온의 도움으로 이제 주머니는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그런데 마지막 기사님을 들여보내야 하는 셀레미온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아이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파묻혔다.
“야! 너는 아가씨와 만나보지도 못했잖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나도 아가씨와 만날 자격이 있다고!”
“아가씨가 우리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고 만든 자리인데, 왜 눈치 없이 끼어들어?”
“우리도 아가씨와 인사하고 싶다고! 우리는 맨날 숨어 지내야 하냐?”
“다들 왜 여기서 싸워요? 이럴 거면 다들 나가요!”
셀레미온의 큰 목소리까지 섞여 들렸다.
쉽게 정리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주머니를 들고 밖으로 나가자 그곳에 몰려 있던 수많은 기사가 일제히 나를 돌아봤다.
“다들…… 무슨 일이신가요?”
눈을 깜박이자 기사들이 우르르 내 앞에 몰려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들과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서웠다.
회귀 전에 나를 죽이려 달려든 신전의 기사들이 떠올라서.
“저, 저기…….”
“야! 네가 험악한 얼굴을 들이미니까 아가씨가 당황하셨잖아!”
“내가 뭘! 네 얼굴이 문제겠지!”
큰 목소리에 귀가 울렸다.
오늘 온종일 쿠키 반죽을 미느라 피곤한 몸은 커다란 소음에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큰 소리에 골이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저기, 그만 싸우면 안 될까요?”
기사들의 시선이 내게 옮겨오자,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야무지게 이야기했다.
“다들, 계속 싸울 건가요? 그러면 나는 이만 쉬러 갈게요.”
기사들이 멈추지 않겠다면 내가 멈추면 되는 일이었다.
“아니, 아가씨, 그게 아니라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가씨도 참, 하하하!”
큰 소리를 내자 겨우 원하는 반응이 살짝 나왔다.
“이렇게나 정성스러운 선물을 준비해주셨는데 당연히 쉬셔야죠.”
“맞습니다. 얼른 방으로 돌아가 쉬십시오.”
하지만 그들은 말과 달리 내게 길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단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만 보고 있을 뿐.
그리고 그 반짝이는 눈이 가리키는 곳은 명확했다.
내 손에 들려 있는 선물 주머니.
나는 그것을 움찔하며 몸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시선이 고스란히 내 손으로 따라왔다.
부담스럽게도 그 시선에는 기대가 가득 차 있었다.
“아니, 왜 아가씨가 쉬러 간다는데 여기 지키고들 있는 거예요? 비켜요, 비켜!”
셀레미온이 손을 흔들어대며 기사들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진짜 왜 이래요? 우리 아가씨 쉬어야 한단 말이에요! 이러면 기사님들께 고마웠던 게 싹 날아갈지도 몰라요.”
“어휴, 우리 꼬마 아가씨는 정말 말을 잘한다니까?”
셀레미온이 칭찬에 자신도 모르게 헤벌쭉 입을 벌렸다.
자신이 조금 전까지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잊던 것을 잊고.
“그런데……. 거기, 아가씨 손에 들린 것은 누구에게…….”
모두의 시선이 다시 선물 주머니에 쏠렸다.
“저게 마지막은 아니지요?”
“안 되는데, 그럼 저건 주군 차지일 거 아니야.”
다들 수군대는 소리에 나는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요, 이건 여러분들 거예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사들이 손을 뻗으며 자신들끼리 몸싸움을 시작했다.
놀란 내가 입을 막고 뒷걸음질 쳤지만, 다들 이런 나를 보지 못하고 싸우기 바빴다.
“아가씨, 어떡해요?”
셀레미온도 겁에 질렸다.
우리가 살벌한 기사들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할 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그만.”
크지 않은 목소리인데도 묵직한 힘이 있었다.
역시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아스테인 님.”
“주, 주군!”
조금은 화난 듯이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지르는 아스테인의 모습에 기사들이 잔뜩 얼었다.
아스테인은 내 앞에 도착하자마자 날 그의 등 뒤에 세웠다.
“왜,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놈들이 있는 거지?”
“아니, 주군, 그게요…….”
“너희들이 할 일은 여기서 프레이아 님의 선물을 받는 게 아닐 텐데?”
“우리가 밖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는데요! 우리를 오해하신다던 분이 선물을 준다고 하셔서…… 그! 죄송합니다.”
아스테인의 등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기사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잔뜩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우르르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후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서 생긴 소란인 걸요.”
“그런데…….”
아스테인의 눈도 내 손에 쥐어진 주머니를 향했다.
그의 얼굴에도 뭔가 기대가 떠올랐다.
“에이, 주군. 아까 못 들었어요? 이건 주군이 아니라 우리 거라잖아요.”
어느새 다가온 크리세우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맞죠, 아가씨?”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주머니를 손에 올려줬다.
그러자 크리세우스가 승리의 환호성을 외쳤다.
그런데 아스테인의 얼굴빛이 밝지 않았다.
“저는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 * *
아스테인은 그렇게 가버린 뒤, 한참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 식사 시간에도, 그 이후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도.
나는 침대에 앉아 뻐근한 팔을 힘겹게 들고 수를 놓고 있었다.
옆에는 완성된 손수건이 곱게 놓여 있었다. 실력은 여러모로 부족했지만, 정성은 가득 담았다.
“얼른 완성해야 해.”
뭔가 조급해졌다. 조금 전 봤던 아스테인의 뒷모습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스테인은 기사들에게 화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아마도…….
이유가 무엇인지 떠오르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서 한 땀 한 땀 바느질에 더 정성을 기울였다.
그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요.”
나는 아스테인의 등장을 기다리며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가씨!”
입꼬리가 바로 아래로 떨어졌다. 아쉽게도 셀레미온이었다.
“왜, 왜요? 저, 뭐 잘못했어요?”
“아니야. 무슨 일인데?”
“아까 응접실 앞 복도에요. 이런 것이 떨어져 있지 뭐예요.”
“복도에?”
“네. 기사님들이나 대공님께서 떨어트린 것 같아서요.”
셀레미온은 내게 손을 내밀어 작은 무엇인가를 건넸다. 그건 작은 펜던트였다.
그것을 받아든 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블루 로즈?”
백금에 사파이어와 아쿠아마린이 적절히 섞인 장식은 아스테인의 정원을 가득 채운 푸른 장미와 닮아 있었다.
“정원의 장미만큼이나 예뻐요. 대공님 물건인가 봐요.”
“그러게…….”
하지만 아스테인이 정원의 장미와 관련된 장식을 한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가씨가 나중에 돌려주실래요?”
“응? 그래, 알았어.”
일단은 알겠다며 그것을 받아두었다.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대공님께 드릴 주머니를 만들겠다고 늦게까지 깨어 계시면 안 돼요.”
“그래, 알았어. 잔소리 그만해.”
후작가에 있을 때보다 밝아지고 능청스러워진 셀레미온을 쫓아냈다.
그리고 얌전히 아스테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물어볼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 보고 싶었다.
성에 온 이후로 매일 보고 있었지만, 부족했다.
“언제 오지?”
하지만 오늘따라 기다림은 길어졌다. 도저히 기다림을 참기 어려워진 후에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지 않는 걸까?”
조금은 아쉬운 마음에 아스테인의 방과 연결된 문 앞으로 갔다.
“저기, 아스테인 님. 혹시 계세요?”
방문을 살짝 두드리면서 불러봤지만, 방문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는 전혀 없었다.
조금 서운한 마음에 다시 내 침대 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벌써 한 달 가까이 주인이 떠난 방에 몰래 들어가기로 했다.
그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서 기다리겠다는 생각으로.
“많이 바쁜가 봐.”
성에서 가장 높고 좋은 방. 방의 주인은 가끔 옷을 갈아입거나 나를 보러 올 때만 이곳을 찾았다.
그래서 조금은 방에 삭막함이 흘렀다.
나는 눈을 감고 그의 침대에 앉았다. 오늘은 만나지 못한 연인을 그리며.
그때 코를 간지럽히는 향이 있었다.
라일락 향에 섞여 있는 강렬한 체향.
“왔어요?”
아스테인이 방에 들어오다가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서서 나를 쳐다봤다.
조금은 뚱해 보였다.
“나한테 서운한 거 있어요?”
“아닙……니다. 바빠서 늦은 겁니다. 오늘은 곧, 또 나가 봐야 합니다.”
하지만 말투에서부터 서운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애써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안쓰러울 정도로.
나는 아스테인의 곁으로 가서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까치발을 하고 아스테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날카로웠던 눈이 부드럽게 풀렸다.
“서운했던 거 맞으면서.”
“흠흠…… 아닙니다. 정말로.”
“내가 아스테인 님께는 선물을 주지 않아서 삐치신 거 아니에요?”
조금은 정곡을 찔렸는지 아스테인이 살짝 헛기침했다.
나는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질투해줘서 고마워요.”
제대로 그의 마음을 짚어 냈는지 아스테인의 귓가가 시뻘겋게 변했다.
“제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알면서도 속이 상한 거예요?”
“그것이…….”
나는 대놓고 질투도 하지 못하는 사랑스러운 남자의 커다란 손을 잡고 내 방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 위에 새하얀 손수건을 올려주었다.
“일단은 이것만요. 주머니의 수는 아직 완성 못 했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쿠키도 구웠어요.”
내 방에 있던 쿠키가 가득 든 바구니도 내밀었다.
“맛은 장담 못 해요. 아스테인 님께 드릴 쿠키는 나 혼자 만들어서…….”
“프레이아 님이 만들면 뭐든 맛있을 겁니다.”
아스테인의 눈이 조금은 만족스럽게 변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나와 아스테인은 오늘 보지 못한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한참이나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쳐다봤다.
“이제 다시 나가 봐야 합니다.”
아스테인이 나간 뒤, 나는 아쉬움에 잠시 침대에 앉아 멍하니 밖을 내다봤다.
“아! 이거!”
그때 블루 로즈 모양의 펜던트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것을 손에 쥐고 복도로 나왔다.
아스테인의 목소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렸다. 그곳까지 나는 부지런히 걸어갔다.
하지만 곧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러니까 외조부가 프레이아 님을 후작의 고아원으로 보낸 것이 사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