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고귀한 사람
“저의라니 무슨 뜻인가요?”
나는 애써 침착한 얼굴을 하고 집사를 향해 물었다. 대신 불쾌한 감정을 목소리에 담았다.
“혹시 대공께서 신전이나 신성력의 힘을 빌려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자신의 사사로운 미래를 위해서 아가씨를 이용하려는 것 같습니다.”
집사의 대답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해졌다.
이건 다행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까?
“집사님 입으로 대공님께서 성심이 깊다며 아가씨의 성기사로 적격이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셀레미온이 대신 대답해줬다.
“대공님은 성녀님의 당부를 들어주시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 아가씨가 성녀가 되기 전에 평범한 귀족 영애로서의 삶을 사는 거요!”
셀레미온이 또박또박 대꾸하자 집사가 반 발자국 물러섰다.
집사와 함께 온 베이트만 부인도 거들어주었다.
“당신은 어린 셀레미온만도 못하네요. 대공께서 그런 사심을 품고 아가씨에게 접근했다면 겨우 드레스 같은 것으로 환심을 끌겠어요? 몇 달도 제대로 입어보지 못할 옷인데요?”
베이트만 부인은 성녀가 입는 옷을 남편에게 자세하게 설명했다.
성녀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단히 불편한 흰옷을 입게 되어 있었다. 아스테인이 선물한 이런 화려한 옷이 아니라.
“그러니 혼자서 이상한 상상하지 말고, 아가씨가 조금이라도 즐겁게 민가의 생활을 즐기게 둬요!”
“하지만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는 법이라고 했소.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아가씨에게 다른 관심이 있을…….”
집사의 말에 순간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하지만 베이트만 부인의 손길이 나를 구했다.
“이 양반이 정말!”
아내의 꾸중과 매서운 손길은 신의 말씀보다 위대했다.
“당신은 조용히 입 다물고 포장하는 거나 도와요! 아가씨가 은인들에게 보답하는 일이니까.”
집사는 마음 깊은 곳에 살짝 남은 불만과 의심을 작게 웅얼대면서도 아내의 지시를 따랐다.
그런데도 나는 괜히 집사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이제 아스테인과의 밀회를 줄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가짜라는 것을 빨리 밝히거나.
나는 조용히 실 팔찌를 주머니에 옮겨 넣었다.
“와! 아가씨 그게 마지막이에요!”
한참 뒤, 셀레미온은 힘들었는지 조금은 질린 얼굴로 외쳤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슬며시 웃다가 마지막 실 팔찌를 쳐다봤다.
무운을 기원한다는 의미의 실 팔찌였다. 비록 신성력으로 만든 축복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감사한 마음을 누구보다 가득 실 팔찌에 담아 마지막으로 챙겨 넣었다.
“아가씨, 이제 축복을 내릴 차례군요.”
집사는 약간의 기대감을 지닌 채 내게 말했다.
“따로 축복 같은 거 내리지 않으려고 실 팔찌를 산 건데요?”
셀레미온이 샐쭉대며 날 대신해 답했다.
“어째서 하지 않을 생각이신지요? 예비 성녀님의 권위를 높일 기회입니다.”
“내 권위를 높여야 할 이유가 따로 있나요?”
나는 차분하게 집사에게 물었다.
그러자 집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당연히 예비 성녀님은 남들과 다른 고귀한 분이니 그래야 마땅하지요.”
“내가 어떤 점이 남들과 다른가요?”
“신께서 선택한 분 아닙니까? 세상 그 누구보다도 고귀한 분이죠.”
나는 대답 없이 집사를 바라봤다.
먹은 것이 체한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신성력이 늦게 발현되는 바람에 카르텔로 같은 건방진 사제가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들을 누르고 성녀로서의 위엄을 찾기 위해서라도 가까운 이들부터 기적을 내려 서서히 아가씨의 소문이 퍼지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집사의 반응에 나는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이건 어쩌면 그의 도움을 받은 순간 예정된 일이었을지도.
“그만 해요. 아가씨께서 불편해하시잖아요.”
베이트만 부인은 조심스럽게 남편을 만류했다.
나는 그것을 손을 들어 말렸다.
대신 집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베이트만 가문이 지금껏 숨어서 예비 성녀를 위해 헌신해 왔다는 사실에 감사하답니다. 그것이 당신들의 숙명이라고 하지만, 보통의 책임감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나의 감사에 집사는 고개를 잠시 숙였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도 내게는 마음의 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요. 당신도 신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공평한 사랑을 나누어 주는 분이라고 배워오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더 고귀하다는 거죠?”
“아가씨는 신의 대리인이므로…….”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분명 베이트만은 성심이 깊은 사람인데…….
“신께서 과연 성녀를 사람 위에 군림하라고 만드셨을까요?”
어째서 인테르의 사상이 갑자기 마음에 와닿은 걸까?
‘신전이 정말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인가’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채웠다.
아스테인의 기사들은 나를 성녀보다는 아스테인의 친구로 대해줬다. 그것이 내 의문의 시작이었다.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기사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축복을 남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실제로 엘라네르의 팔찌를 이용해 축복을 내려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신성력의 축복은 알 수 없는 행운을 곁에 불러주니까.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 권위를 높이기 위한 목적이라면, 과연 그런 축복이 정말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까요?”
이것은 내가 가짜 성녀가 되어 살았던 지난날의 반성이었다.
거짓을 숨기기 위해 성녀님이 남기신 힘으로 만든 축복과 기적은 내게 불행을 가져다줬다.
“성녀는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예요.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성녀라면 그 힘을 사용할 자격이 없어요.”
나는 회귀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 시절에 아무리 애를 써도 진짜 성녀가 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베이트만은 큰 가르침을 얻은 사람처럼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역시 저는 아직 모자란 사람인가 봅니다.”
집사의 얼굴에 나를 향한 존경심이 더 묻어났다.
하지만 모자란 사람은 여전히 나였다.
나는 이번에도 나를 위한 삶을 살기로 했으니까.
* * *
실 팔찌 분류를 끝낸 나는 다시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는 요리사들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줬다.
“자, 아가씨. 그러면 이제 반죽을 이렇게 밀대로 밀어봅시다.”
이미 몇 차례 연습을 해봤기 때문에 진도가 잘 나갔다.
양이 많은 것이 문제였지.
“저희가 도와 드린다니까요. 이걸 혼자 언제 다 하시려고요?”
하지만 나는 도움을 거절했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다 해야죠. 반죽을 도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이런 것이니까.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열심히 반죽을 밀었다. 팔이 조금 아프기는 했다. 어쩌면 몸살이 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쿠키 반죽을 밀고, 예쁘게 잘랐다.
“대신 굽는 것은 부탁드릴게요.”
불 조절은 내 능력치에서 벗어난 일이니까.
내 부탁에 요리사들은 열심히 반죽이 올라간 쟁반을 날랐다. 주방에는 이내 고소하고 달콤한 쿠키 냄새가 가득 찼다.
옆에서 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던 셀레미온이 코를 킁킁댈 정도가 되자, 첫 번째 쿠키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맛있겠어요!”
“잠시 식혔다가 먹어야 제맛이랍니다.”
요리사가 시원한 그늘에 쿠키를 식히자 셀레미온은 먹고 싶은지 침을 삼켰다.
“셀레미온, 오늘 쿠키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지금까지 연습용으로 만든 것보다 오늘 만든 게 더 맛있어 보이잖아요.”
“나 욕하는 거지?”
“아, 아니요.”
“내가 혼자 만든 건 맛이 없었다, 그거야?”
연습용으로 만든 것은 오로지 나 혼자만의 힘으로 했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조금 맛이 떨어지기는 했다.
내가 입을 삐죽 내밀자 셀레미온이 당황해서 손을 내밀고 열심히 흔들었다.
“아니, 오늘 만든 건 재료를 더 아낌없이 쏟아부었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아몬드도 듬뿍 넣었고, 어 그리고…….”
당황해하는 셀레미온의 모습이 귀여웠다.
“뭐, 당연히 초보자인 나보다 전문가인 요리사님들의 반죽으로 만든 쿠키가 더 낫겠지.”
내가 맑은 웃음을 터트리자 셀레미온이 입을 삐죽였다.
“아가씨! 저 놀린 거죠?”
볼을 부풀린 그 아이를 밀가루가 묻은 손가락으로 꾹 누르자 셀레미온도 웃음을 터트렸다.
“자, 이제 식었으니 맛을 보십시오.”
요리사가 나와 셀레미온에게 쿠키를 하나씩 줬다.
우리는 그것을 동시에 베어 물었다.
“와, 맛있어!”
“아가씨, 맛있어요!”
“다들 좋아하겠지?”
“네! 너무 달지도 않고 고소해서 기사님들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자신감이 생긴 나는 다시 부지런히 반죽을 밀었다.
사람들이 선물을 받고 기뻐해 줄 모습을 상상하자 내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힘든 것도 모를 정도였다.
“대공님께서도 좋아하시겠어요. 그런데 진짜 힘들지 않아요? 땀도 흘리시고. 이러다 병나겠어요.”
셀레미온이 걱정스레 손수건을 들고 내 이마를 닦아주었다.
“음,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매일매일 힘들게 일하면서 살잖아. 너만 해도 내 방을 청소하고, 내 수발을 들고. 나는 공주도 아닌데 너무 대접만 받고 살았어.”
셀레미온은 그 말에 눈을 찌푸렸다.
“성녀님이 되실 분인데 당연하죠!”
“셀레미온, 너도 그렇게 생각해? 성녀가 될 사람은 다르다고, 고귀한 사람이라고?”
내가 조금 인상을 쓰고 이야기하자 셀레미온이 움찔했다.
그래도 그 아이는 소신껏 제 생각을 밝혔다.
“음, 그것보다는…… 아가씨는 성녀랑 상관없이 고귀한 사람인 건 맞는 것 같아요.”
작게 웃는 셀레미온의 모습에 얼굴이 풀려버렸다.
“뭐야, 그게. 내 질문의 답이 아니잖아.”
“어쨌든 그러니까 대공님도 아가씨를 챙기고, 기사님들도 따르고, 빈민가 사람들도 존경하는 거 아니겠어요? 우리 아가씨가 세상 어느 귀족 영애들보다 고귀해요.”
나는 셀레미온의 말이 고마워 그대로 끌어 안아버렸다.
그러자 그 아이가 작게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 저한테 밀가루를 묻힐 거예요? 너무해!”
* * *
아스테인은 황제의 말에 따라 ‘신의 회초리’를 대비하기 위해 인근 마을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황제가 모처럼 그를 신뢰하는 척하고 일을 맡겼기에 잘 해내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을 이용해 제스티안을 경계하기 위한 일일지라도.
“아가씨가 좋은 아이디어를 내셨네요. 저러면 확실히 지붕이 덜 날아가겠어요. 그러면 집도 덜 부서지겠네요.”
크리세우스의 말에 아스테인은 눈앞에 있는 집의 지붕을 올려다봤다. 밧줄을 엮어서 지붕 전체를 덮었고, 끝에 무거운 돌을 매달았다.
“흐뭇한 표정 좀 그만 지으시죠? 와, 얼굴에서 꿀이 떨어지네.”
“흠흠, 폐하는 광산의 위치를 찾았어?”
“아직요. 우리가 먼저 흔적을 두 곳 발견했습니다.”
“일단은 모른 척해야겠군. 제스티안은?”
“아가씨의 경고 때문에 평민이나 빈민에게는 고리대금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 카르헨이라는 녀석도 풀려났어요.”
아스테인은 안타까웠던 그 연인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
그들도 그렇게 힘겨운 고비를 넘기고 다시 하나가 되었으니…….
“소중한 이를 위해서 뭐든 하는 사람이 지금은 제일 위대해 보이는군.”
“주군도 그러고 있잖아요.”
크리세우스가 능글맞게 웃었다.
그걸 지켜보던 아스테인의 귀 끝에 열이 살짝 올랐다.
“그런데 주군, 저걸 왜 아가씨가 생각해 냈다고 알리라는 거예요?”
크리세우스는 손가락으로 지붕을 가리켰다.
“아가씨가 계속 이렇게 뭔가를 만들어내면 다들 성녀라고 더 추앙할 텐데요.”
크리세우스가 아스테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아스테인은 지붕 끝을 응시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자신감과 기대감이 있었다.
“아니, 저건 오로지 그분의 지혜로 떠올린 생각이다. 나는 그분이 신성력과 관계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길 바란다.”
아스테인은 제게 희망을 준 프레이아를 만나러 매일같이 찾아갔던 시절을 떠올렸다. 후작은 그가 프레이아를 만나지 못하게 막았었다.
그 덕에 프레이아를 향한 그리움과 환상은 어린 아스테인의 마음에 간절하게 쌓여갔다. 그러다 겨우 프레이아를 보게 된 날,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그의 가슴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도 나는 행복해질 거니까 괜찮아.]
“그래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웃을 테니까.”
후작에게 구박받느라 웃는 것조차 몰래 해야 했던 소녀. 그 소중한 여인이 세상 앞에 당당해지길 바랐다.
“흐음, 저한테는 조금 어렵네요. 그냥 내가 잘 지켜주고 보호해주면 끝나는 거 아닌가요?”
아스테인은 크리세우스의 말에 그저 빙그레 웃었다.
“참, 인테르 말인데요. 조만간 황제랑 뭔가 저지를 것 같던데요?”
아스테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엘라네르, 그 여자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인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푸토르 소후작은?”
“두문불출 중입니다. 대신 후작이 돌아다니느라 바쁘더라고요.”
“후작이?”
“네, 여기저기 또 들쑤시고 다닌대요. 그중 하나가 그 쥐새끼 같은 대공이랍니다.”
자신의 이복동생에게 붙인 수식어에 아스테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크리세우스는 그자가 정말 싫은지 온갖 동물의 자식을 소환해가며 세르펜스 대공의 욕을 해댔다.
“무슨 꿍꿍이지?”
“그냥 친분만 쌓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둘 다 아가씨에게 혼쭐난 일로 유대감이 쌓였나 보죠.”
아스테인은 엘라네르의 소식보다 이쪽이 더 신경이 쓰였다. 이들의 조합이 더 악의적일 것 같았다.
“애들을 더 붙여.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까지 알아내게 두 집안에 잠입시키고.”
“오늘 밤은 무리고, 내일 아침부터 보낼게요.”
크리세우스의 말에 아스테인이 눈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크리세우스가 움찔했다.
“언제부터 너희들이 일할 때 시간을 따졌지?”
“그게…… 다들…… 성에 볼일이 있다고…… 나도 가야 하는데…….”
아스테인이 눈꼬리를 더 올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크리세우스는 살벌한 주인의 말에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질투에 휩싸인 제 주인의 불타는 눈동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