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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41화 (41/101)

41화. 사랑합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사람이 아스테인이라서 기뻤다. 순간 꿈이 아닐까 생각할 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그런데 아스테인이 속삭여준 말은 나를 더 달콤한 상상 속에 가뒀다.

“연모하는 이를 매일 보고 싶은 것이 사내의 마음입니다.”

순간 귀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직 잠에서 덜 깬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도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그……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인 걸요?”

꿈이라고 생각하는데도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부끄러운 것은 똑같았다.

“용서하십시오.”

그런데 아스테인이 갑자기 조금은 억누른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 뒤를 감쌌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너무나도 좋아하는 보라색 눈이 내게 가까워지는 것을 보자, 어제 그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던 감촉이 떠올라버렸다.

그러자 심장 소리가 귓가에 아주 커다랗게 들렸다.

고요한 공기를 가르는 아스테인의 거친 숨소리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들린 고백.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반쯤 눈을 감은 그는 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대로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으니까.

아스테인의 입술은 뜨거웠다. 분명 숨소리는 거친데, 그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심지어 달콤한 그의 향기까지 잔뜩 머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입술을 빨아들이는 감촉에 나도 모르게 눈에서 힘이 빠졌다. 스르륵 눈을 감자 감각이 더 예민해졌다.

살살 긁는 것 같은 촉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을 눈치챈 것일까? 내 머리카락을 헤집는 그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동시에 그는 내 아랫입술을 아주 살짝 물었다.

놀란 내가 입을 살짝 벌리며 뭐라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더 뜨겁고 더 말랑하고 더 부드러운 것이 내 속을 파고들어 왔다.

그러고는 그의 성격처럼 다정하게 내 안을 훑고 지나갔다. 살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그리고 정성스럽게도.

아스테인의 것이 여린 살을 건드릴 때마다 몸이 찌릿하며 움찔거렸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생경한 느낌이었다. 그게 끊이지 않고 이어지자 나도 모르게 이불을 꽉 쥐었다.

하지만 아스테인을 밀어내지 못했다. 이 달콤한 열기에 취하고 싶었으니까.

“아, 아스테인 님.”

아스테인이 조금 숨 쉴 틈을 줬을 때 애타게 그를 불렀다.

하지만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을까? 그가 다시 한번 입술을 겹쳤다.

이번에는 조금 전까지 다정했던 그가 사라지고 없었다.

열정적인 기사님의 저돌적인 키스만이 남아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점점 숨이 가빠오고, 머리가 몽롱해져 그저 그의 입술이 전해주는 감각만을 느끼기에도 버거웠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이것이 꿈인지 아닌지 아직 헷갈릴 만큼.

어느새 내 머리는 베개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점점 흐트러지고 있었다.

정말로 이래도 되는 걸까?

이건 나만 느낀 감정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용서를 다시 구하는 아스테인의 얼굴은 내게서 겨우 손가락 한 마디만큼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그의 달뜬 숨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뒤늦게 현실감이 돌아왔다.

내가 아스테인과 방금 무엇을 했는지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괘, 괜찮아요. 싫었으면 밀어 냈……겠죠.”

아스테인의 눈동자가 살며시 휘어졌다. 그는 다시 쪽 소리가 나게 입술을 부딪치고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기대를 했었는지, 내 입술이 혼자 살짝 꼬물거렸다. 하지만 아스테인에게 이런 속마음을 밝힐 수는 없었다.

“곧, 셀레미온 양이 오겠군요.”

그는 내게 손을 내밀어 침대에 편하게 앉혀주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아스테인의 손길은 자상했다. 정리를 끝내고 떨어지는 손길을 잠시 더 붙들고 싶을 정도였다.

“아직은 모두에게 우리의 감정을 밝혀서는 안 되겠지요.”

아스테인의 목소리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엘라네르 그 여자를 어제 붙잡았어야 했는데 놓쳤습니다. 그랬다면 모든 것이 끝났을 텐데 죄송합니다.”

“엘라네르를 만났어요?”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아스테인이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테르가 신전을 무너트리려 움직일 거라고 합니다. 신전의 비리를 잡은 모양이더군요.”

저절로 눈썹이 모였다.

“엘라네르가 알려줬겠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프레이아 님과 힘을 합쳐 그것을 막으라 했습니다.”

눈썹 사이의 간격이 더 좁아졌다.

“하지만 신성력은 쓰지 말라더군요.”

“역시 또 가짜 성녀가 되라는 소리네요.”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며 제게 검을 한 자루 주었습니다.”

아스테인은 엘라네르가 준 것이라면서 내게 검을 하나 보여줬다. 전설 속, 데아 님을 지키는 창공의 기사가 사용하던 푸른 날개의 검.

“글라디우스.”

“역시 그것이군요.”

검에서는 팔찌와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손이 상하겠습니다.”

초조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에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아스테인이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로 내 손에 상처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아스테인은 내 손을 평소보다 더 힘을 주어 잡아줬다.

“그 여자의 말을 따를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 여자를 잡으려면 인테르의 일에 개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편안한 안정감이 아스테인의 손끝에서부터 전해졌다.

나는 그의 눈에 시선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는 내게 신뢰감을 줬다. 괜찮을 거라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인테르를 와해시키는 것이 그 여자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프레이아 님이 억지로 신전에 들어갈 이유도 생기지 않겠죠.”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심하다는 소리를 들을지 모르겠지만, 아스테인에게 무조건 의지하고 맡기고 싶었다.

아스테인이라면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어줄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아스테인이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는 곧 결심을 굳힌 듯 손에 약간의 힘을 더 주고 내게 말을 건넸다.

“프레이아 님께 신성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뭔가 알 수 없는 공포 같은 것을 느꼈다.

이건 회귀 전의 삶이 가져다준 불안함이었다. 가짜라는 것을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살아왔었다.

그게 아직 본능처럼 남아 있었다.

“평생을 성녀가 되기 위해 살아오셨으니, 불안할 거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어차피 신전으로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니, 하루라도 빠른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틀린 점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내 눈동자는 조금 흔들렸다. 아스테인은 그런 나를 위해 눈을 맞춰주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을 것 아닙니까? 성녀와 성기사가 아닌, 그냥 평범한 연인의 사랑을 인정받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는 아스테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네르의 존재가 여전히 거슬리기는 했다.

“절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스테인이 내 어깨를 슬쩍 끌어당겨 그의 가슴에 나를 가뒀다.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점차 불안한 기운은 달아났다. 그리고 가슴 한구석에서 조금은 나도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고개를 내밀었다.

“유테르안…….”

아스테인의 숨소리가 아주 살짝 불만스럽게 거칠어졌다.

“아니 푸토르 소후작이요. 내가 성녀가 될 수 없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지난번에 당했던 망신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다급히 이름을 바꿔말하자 그가 만족한 듯 그의 고개를 내 머리 위에 올렸다.

“안 그래도 그 여자에게 접근했더군요. 잘 감시하고 있으니 프레이아 님은 저만 믿고 따라오면 됩니다.”

아스테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힘이 있었다. 모든 불안을 지워주는 힘.

나는 놀랍도록 안락한 그의 가슴에 조금 파고들었다. 그의 허리에 양손도 살짝 올렸다.

셀레미온이 올 때가 되어 갔다.

어느새 태양이 성벽 위로 올라오고 있었으니.

하지만 우리는 소중한 마음을 나누느라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아스테인과 마음을 나누고 벌써 닷새 정도가 지났다.

“아가씨, 일찍 일어나셨네요.”

셀레미온은 요즘 일찍 일어나 있는 나를 걱정스레 쳐다봤다.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스테인이 숨어 들어간 그의 방과 연결된 문을 보면서.

“잠을 더 주무셔야 해요.”

“요즘에는 낮잠도 자잖아.”

아스테인은 그날 이후 새벽마다 몰래 내 방으로 숨어들어왔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고는 했다. 애정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사랑을 속삭이고.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이 공간에서 만난다는 사실이 긴장되면서도 설렜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주지도 않는 아슬아슬한 사랑일지라도.

“그래도요. 신전에 들어가고 나면 규칙적인 삶을 살아야 하잖아요. 지금 아니면 언제 자유로운 삶을 누려요?”

신전으로 갈 일이 없다는 사실은 말할 수가 없었다.

그냥 조용히 셀레미온의 수발을 받아 가면서 얼굴을 씻을 수밖에.

“오늘 점심 즈음에 의상실에서 기사님들의 주머니를 다 가져다준대요.”

“아…….”

“베이트만 부인이 아침 먹고 오늘 쿠키를 굽자고 하시네요? 재료 준비는 다 되었대요.”

“이런, 아스테인 님께 드릴 거는 아직 완성 못 했어.”

“흐음, 초반에는 속도가 좋더니 왜 늦어지셨어요?”

그거야 아스테인과 새벽까지 몰래 대화를 나누느라 늦게 잠드니까.

그래서 시간이 부쩍 줄었다.

내가 아스테인을 위해 만들던 손수건과 주머니를 꺼내 들자 셀레미온이 옆에 붙었다.

“거의 다 했네요. 한, 이틀만 손대면 되겠는데요?”

“다른 분들과 함께 드리지 않으면 실망하시겠지?”

“음, 제가 본 대공님의 성격으로는 그럴 것 같지 않은데요?”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

아스테인은 알게 모르게 질투심이 많은 남자였다. 그걸 숨기려고 애쓰는 모습이 사랑스러울 정도였고.

“걱정되면 오늘 대공님께는 따로 쿠키 바구니를 만들어서 드리고 주머니는 따로 드리겠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대공님 거는 다른 기사님들 거랑 다르게 만들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테인의 기사들은 나를 위해서 정말 애를 많이 쓰고 있었다.

인테르나 후작가가 나를 해코지하지 못하게 밤낮으로 호위 중이었다. 아스테인의 말로는 그들을 감시하는 일도 한다고 했다.

그런 분들에게 얼른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일단은 얼른 아침을 먹고 쿠키 반죽부터 하러 갈까?”

* * *

오전 내내 쿠키 반죽을 했다. 최대한 내 힘으로 하고 싶었지만, 양이 양인지라 요리사님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습니다. 굽기 전에 차갑게 굳혀야 하니 잠시 쉬십시오.”

요리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팔이 빠질 뻔했다.

밀가루가 묻은 얼굴을 깨끗이 닦고 잠시 장미가 핀 것을 보며 쉬러 정원으로 나갔다.

그런데 멀리서 셀레미온이 나를 다급히 찾았다.

“아가씨, 얼른 와 보세요.”

“무슨 일인데?”

셀레미온을 따라가자 의상실 직원이 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온 것은 주머니만이 아니었다.

“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 드레스에 사용한 실크, 너무 곱지 않아요? 보석들도 너무 촘촘히 예쁘게 박혔어요.”

“내가 주문했던 옷은 이미 다 배달받았는데?”

의상실에 갔던 나는 대부분 기성품의 사이즈만 조정해서 옷을 주문했고 그것은 이미 받았었다.

“외출복도 몇 벌 더 주문했잖아요.”

셀레미온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혹시 이 아이의 기억이 어떻게 된 걸까? 그래봤자 세 벌이었던 것을.

“셀레미온. 나는 이렇게 사치를 해가며 옷을 주문하지 않았어. 그것도 보석이 치렁치렁한 이런 옷은…….”

“아……. 그렇네요?”

셀레미온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 아이는 상자를 나르고 있던 의상실의 점원을 불렀다.

“우리는 이런 옷을 주문하지 않았는데 어찌 된 일이지?”

“단델리온 대공님께서 주문하셨습니다.”

아스테인의 이름이 나오자 얼굴에 열이 살짝 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랬군……. 이것이 전부 내 것이라고?”

“성에 계실 동안 편하게 입으실 옷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녀 아가씨를 위한 옷도 몇 벌 더 주문해 주셨습니다.”

셀레미온은 제 것도 있다는 말에 쪼르르 직원을 따라갔다. 멀리서도 셀레미온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우와, 어쩜 대공님은 이리도 마음이 넓어요?”

내 사람까지 챙겨주는 아스테인의 마음이 스르륵 내 속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조금 걱정은 됐다.

의상실 직원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내가 성에서 임시로 지내는 것을 알 텐데…….

“그리고 주문하신 주머니도 잘 완성이 되었습니다.”

점원은 내게 주머니가 가득 들어 있는 상자를 보여줬다.

주머니에는 파랑새의 날개 인장이 수 놓여 있었다. 그것이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했다.

아스테인은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도 날 보는 시선이 여전할까? 푸른 날개가 기만으로 느껴지지는 않을까, 조금 염려가 됐다.

“서비스로 주문하신 양보다 조금 더 여유롭게 만들었습니다.”

점원이 내 방에까지 모든 짐을 옮겨 줬다. 아스테인이 산 옷은 대공비의 옷방을 가득 채웠다.

점원이 돌아간 뒤 셀레미온은 팔을 걷어붙였다.

“일단 실 팔찌부터 나누어 담으면 되죠?”

적극적으로 나서는 셀레미온의 모습에 나는 불편한 마음을 숨겼다.

어쨌든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만든 거니까.

“베이트만 부인도 모셔올게요. 우리끼리 하면 온종일 걸릴 것 같으니까.”

셀레미온은 베이트만 부인 외에 덤으로 집사를 데리고 왔다.

“대공께서 아가씨께 옷을 따로 선물했다면서요?”

질문하는 집사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대공님의 저의가 무엇인지 의심스럽군요.”

예리한 집사가 우리 사이를 눈치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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