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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40화 (40/101)

40화. 뒤늦게 후회해 봤자 (2)

나의 차가운 눈빛을 보지 못한 후작은 계속해서 내게 사죄의 말을 내뱉었다.

“내가 모두 잘못했단다. 그러니 날 용서하렴.”

내 다리에 매달리려는 것을 기사님들이 밀어내 주었다.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뒤로 발라당 넘어진 후작은 가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후작의 입가가 떨리는 것을 보고 그런 동정은 바로 집어넣었다.

“프레이아, 그렇게나 내가 미운 거냐?”

지금 이 상황이 또 내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그래도 다 내 잘못이다. 네가 지금까지 받아온 상처는 내가 충분히 보상하마. 그러니 이만 마음 풀었으면 좋겠구나.”

나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아가씨, 왜 주무시질 않고 밖에 나와 계십니까?”

그때 집사 내외가 소란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셀레미온도 나를 쫓아 내려와 내 뒤에 섰다. 곧, 당번이 아닌 기사님들도, 기사님들을 위한 야식을 만들던 요리사들도 모두 몰려나왔다.

내 뒤에 몰려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후작을 사나운 기세로 노려봤다.

후작이 움찔할 만큼.

“뭘 잘못하셨는데요?”

나는 든든한 지원군들을 등에 업고 후작에게 차갑게 한마디를 던졌다.

이곳에는 내가 설령 냉정하게 군다고 해도 날 탓할 사람이 없었다.

“뭐라고?”

“뭘 잘못하셨는지 말씀해 보세요. 용서를 빌러 온 사람이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고 있을 것 아닌가요.”

매몰찬 내 목소리에 후작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그게 후작을 초라하게 보이게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반항하면 손부터 올렸는데…….

그와 나의 바뀐 처지가 내게 희열을 안겨다 줬다.

“왜요? 왜 말씀하지 못하세요? 성녀님의 말씀을 어기고 날 찾아와서 용서를 빌 용기가 있으신 분이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씀하셔야죠.”

후작은 내 요구에 그저 가련한 사람인 척하며 고개를 떨궜다.

가증스럽게도 다른 사람에게 동정을 사고 싶은 걸까? 내가 매정한 성녀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후작은 잠시 뒤, 슬픈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프레이아…… 아가, 네 어미를 생각하거라. 고아였던 널 보살핀 멜리아가 얼마나 속이 상하겠니? 네가 아비인 나를 이렇게나 박대하면…….”

“제게 아버지는 없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후작의 말을 끊어냈다.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후작이 과연 단 한 번이라도 나를 딸로 생각했을까?

“성녀가 될 사람이 이렇게나 자비심이 없으면 되겠니? 멜리아는 널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어.”

감히 후작 부인의 이름을 계속 들먹이다니!

하지만 그가 내게 호소할 수 있는 일은 그게 다였다.

“그러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곧 멜리아의 기일인데 네가 와서 추모를 해줘야지.”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후작이 찾아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거짓 용서를 빌어서라도 나를 후작가로 데려가는 것. 정말로 내게 미안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건 회귀 전 마지막 날에 내리던 눈보다 더 차갑고 시린 웃음이었다.

“후작께서 말하지 못하겠다면 제가 왜 푸토르 가를 버리고 나왔는지 다시 말해볼까요?”

“프레이아, 꼭 그렇게 나를 망신시켜야겠느냐?”

우스워라, 이미 스스로 명예를 추락시킨 사람이 누구더라?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여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제게 용서를 구한다는 거죠?”

후작의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가 그럴수록 내 심지는 단단히 굳었다.

나는 결코 그의 잘못에 관용과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끝내 신성력을 찾지 못했다면, 성녀님의 신성력을 물려받게 할 작정이었잖아요. 가짜 성녀로라도 신전에 집어넣고 나와 신전을 주무를 생각, 아니었나요?”

후작은 내게 감사해야 했다.

이 행동은 신전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이기에 신성법에 의해 파문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가문의 명예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후작가가 황실에서도 내쳐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말이냐?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러다 진짜 성녀라도 나타났다면 내게 독약을 건넸겠죠. 집에 보관하고 있잖아요. 비페라 베루스의 독 말이에요.”

후작이 내게 건넸던 것은 뱀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든 내가 쓸모를 다하면 사용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곡을 찔린 후작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프레이아, 그게 무슨 소리냐 도대체?”

나는 여전히 반성의 기미가 없는 후작의 얼굴을 보고 눈을 감았다.

겨우 떨쳐냈던 지난 과거가 주르륵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거짓된 사과에 속아 넘어갈 이유도, 초라해진 후작을 동정할 필요도 없었다.

“돌아가세요.”

“프레이아, 딸아!”

“다시 찾아오면, 후작님께서 날 가짜 성녀로 만들고 하려 했던 행동들을 모두 신전에 고해 파문하겠습니다.”

나는 매정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모자람이 없게 뒤로 돌아섰다.

“성녀님의 결정을 어긴 후작을 성 밖으로 내쳐주세요.”

“예, 아가씨! 걱정하지 마십시오!”

기사들은 팔까지 걷어붙이며 우르르 후작에게 몰려갔다. 조금은 거친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것이 미안하거나 가슴 아프지 않았다.

이건 모두 후작이 쌓아온 업보니까.

애초에 진실한 사과를 했어도 통할까 말까였는걸.

“프레이아, 네가 이러면 안 된다. 신께서 네가 이러는 것을 원치 않을 거야. 굶어 죽어가던 것을 구해 먹여 살린 것이 나 아니냐! 은혜를 갚지는 못해도 이렇게 내게 복수를 해서는 안 돼!”

“아, 거참, 시끄럽네. 좀 닥쳐요!”

조금 더 과격한 소리와 함께 후작의 목소리는 끊겼다.

그리고 나는 아팠던 과거를 겨우 끊어냈다.

* * *

“여긴가?”

“예, 맞아요! 여기가 틀림없어요.”

아스테인은 크리세우스와 함께 허름한 술집 앞에 섰다.

인테르의 본거지, 그리고 인테르의 수장, 아니 진짜 성녀 엘라네르를 드디어 찾아냈다.

그의 귓가에는 프레이아가 했던 가슴 아픈 고백들이 떠올랐다. 그와 그녀가 죽었어야 했던 사연, 그리고 프레이아가 품어온 고통.

“오늘 모든 것을 끝낼 수 있겠군.”

“뭘 말입니까?”

“그 여자가 아직 여기에 있는 것이 확실해?”

“네, 우리가 번갈아 가며 안에 들어가서 확인했습니다.”

아스테인의 보라색 눈이 조금 푸르다 싶을 만큼 차갑게 가라앉았다.

조금은 냉정하면서도 차분한 얼굴이었다.

“어쩔까요? 아가씨를 신전으로 보내지 않으려면 차라리 인테르를 돕는 편이 낫지 않아요?”

크리세우스가 아스테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숨어 있는 다른 수하들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니, 그것보다 그 수장을 잡으면 빠르게 끝난다.”

어쩌면 신성력으로 도망갈지도 모른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그녀를 잡아야 했다. 아스테인은 아이기스를 품에서 꺼내 손에 쥐었다.

성녀가 아닌 신이 만든 방패, 이것이라면 성녀의 힘을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들어가지.”

아스테인의 손짓에 평범한 사람인 척 주변을 맴돌던 기사들이 일제히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아스테인은 그 선두에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왔니?”

프레이아가 찾아달라 간청하던 여자가 아스테인을 맞이했다.

프레이아의 황금빛 눈동자와 묘하게 닮은 눈을 가진 빛나는 여자. 엘라네르는 프레이아 또래인데도 더 연륜이 넘치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또, 알 수 없는 위압감도.

“단델리온 대공님이다. 예를 갖춰라!”

크리세우스는 건방진 여자의 모습에 발끈했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그런 자신의 수하를 손으로 막았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한 얼굴이군.”

“푸토르 가의 애송이를 감시하고 있었으니 날 찾아오겠다 싶었지.”

아스테인의 관자놀이가 불쾌하게 꿈틀했다. 역시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완벽하게 숨어오다 오늘 자신을 노출한 의도가 있을 것이었다.

“그래, 맞아. 그러니 나머지 친구들은 내보내는 것이 어때? 할 이야기가 많을 텐데?”

심지어 자신의 속마음을 읽는 듯한 태도.

“뭐야! 주군, 함정이 있을 거예요!”

크리세우스는 당장 발끈하며 아스테인을 말렸다. 아스테인도 함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덤빈다고 해도 저 여자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기스를 사용할 때마다 느꼈던 신의 힘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기운을 저 여자에게서 느끼고 있었으니까.

“크리세우스, 모두 데리고 나가 있어.”

“주군!”

“귀여운 아가, 네 주인은 고귀한 운명을 받을 사람이니 건드리지 않는단다. 걱정하지 말렴.”

엘라네르는 크리세우스의 대답을 듣지 않았다.

그대로 손가락을 까딱하자 크리세우스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밀려났다.

처음부터 밖에 서 있던 사람들처럼.

아스테인은 그 광경을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봤다. 이건, 보통의 신성력이 아니었다.

진짜 성녀라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몰랐다면, 목숨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자, 일단 여기 앉아 볼래?”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엘라네르의 목소리에 아스테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뭐, 듣기 싫으면 그냥 서 있든가.”

“본인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겁니까?”

아스테인의 질문에 여자는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엘라네르는 아스테인의 질문을 무시한 채, 자신의 할 말만 했다.

“일단 고마워. 프레이아를 끝까지 지켜주려 한 것도, 그 아이의 마음을 강하게 만들어 준 것도.”

아스테인은 엘라네르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눈치챘다.

“당신도 회귀한 것입니까?”

“아니? 나는 회귀하지 않았어.”

“그럼…….”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어.”

“뭐죠?”

계속 자신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 여자를 아스테인은 기분 나쁜 눈으로 쳐다봤다.

“인테르는 이제 본격적으로 신전을 무너트릴 거거든. 그들의 약점을 잡고 하나둘씩, 차분히.”

엘라네르가 환하게 웃었다.

정말로 이 여자는 자신이 성녀라는 자각이 없는 것일까? 어떻게 성녀가 신전을 무너트리겠다는 소리를 하지?

“프레이아 님을 성녀로 만들어 신전에 밀어 넣고 신전을 없애겠다고? 프레이아 님을 해치겠다는 뜻입니까?”

아스테인의 억눌린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아마 크리세우스였다면 당장 도망갔을 정도로 살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엘라네르는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너랑 프레이아가 힘을 합쳐서 인테르를 막아내. 그때만큼은 신의 힘을 빌리지 않아야 할 거야.”

“무슨 뜻입니까? 도대체?”

“그러면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을 얻을 기회가 생길 거야.”

엘라네르가 은은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가 생전에 아스테인에게 짓던 것과 비슷했다.

인자하고 자애로운 부모의 마음이 담긴 미소.

“나의 소중한 날개는 나를 많이 원망해서인지 내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아서 말이야. 하긴, 내가 미울 만도 하지.”

엘라네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스테인에게 다가와 그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아스테인이 그것을 뿌리치려 하자 그녀는 피식하고 웃었다.

“프레이아를 끝까지 잘 지켜주렴. 그리고 행복하게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녀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에게 푸른 날개가 새겨진 검을 한 자루 남기고.

* * *

어스름한 검은 하늘에 푸른빛과 붉은빛이 서서히 찾아오는 새벽, 아스테인은 프레이아의 방에 몰래 들어왔다.

이러면 안 된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프레이아가 밤에 겪은 일을 듣자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은 괜찮으십니까?”

곤히 잠이 든 자신의 소중한 백조는 답이 없었다.

의자에 앉은 아스테인은 두 손을 모아 자신의 이마에 대었다.

엘라네르, 그 여자에게서 느껴진 묘한 힘은 그에게 경외심을 가져다줬다. 평범하지 않은 여자. 그냥 진짜 성녀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신전을 무너트린다…….”

크리세우스는 인테르가 하는 짓을 내버려 두는 편이 낫지 않냐고 했다.

“사지로 내몰고는 행복하게 해주라고?”

왜 프레이아가 이토록 혼자 오랜 시간 고민을 한 건지 이해가 되었다.

“지금의 저처럼 혼란스러웠지요?”

그는 고개를 들어 프레이아를 바라봤다.

살짝 몸부림을 치던 소중한 여인의 머리카락이 엉켜, 얼굴을 간지럽혔다.

잠든 상태에서도 코를 찡그리는 것이 몹시도 사랑스러워 보일 만큼.

“언제까지고 지켜드리겠습니다.”

아스테인은 프레이아와 만난 후, 후작가로 그녀를 몰래 찾아갔던 일을 떠올렸다.

[신성력을 왜 쓰지 못하는 거냐?]

[죄, 죄송해요……. 더 수련할게요.]

자신과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주눅이 들었던 소녀.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도 나는 행복해질 거니까 괜찮아.]

후작이 떠나고 나자, 혼자서 애써 빙긋 웃으며 용기를 내던 소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때 혼자 멀리서 약속했었다.

[내가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으으음…….”

그때 사랑스러운 백조가 눈을 깜박였다. 현실감이 없는지 몇 번을 더 눈꺼풀을 닫았다가 연 프레이아는 아스테인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아스테인 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너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네…… 네?”

자신이 조금만 마음을 표현해도 붉어지는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이게 혼자만의 감정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이었고.

“연모하는 이를 매일 보고 싶은 것이 사내의 마음입니다.”

“그……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인 걸요?”

수줍은 프레이아의 대답에 아스테인은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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