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뒤늦게 후회해 봤자 (1)
아스테인의 얼굴에서 마음을 읽기 애매했다.
기분이 나쁜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어느새 평소의 다정한 얼굴로 돌아온 남자는 내게 손을 다시 내밀었다.
“잠시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실 팔찌를 손목에서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러더니 뭔가 묘한 눈을 했다.
커다랗게 변했다가 다시 가라앉는 눈동자는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이고 했고, 기뻐 보이기도 했다.
“왜 그러세요?”
“어릴 때 모후께서 폐하께 선물을 했었다고 합니다. 본인의 머리카락을 엮어서 만든 실 팔찌를 말이죠.”
실 팔찌는 소중하게 다뤘는데도 약간 닳아 있었다. 아스테인은 특히나 그 부분을 다시 손가락으로 쓸었다.
“아스테인 님의 어머니께서는 선황 폐하께 진심이셨군요?”
“이 팔찌의 의미를 아시는 겁니까?”
“그게…… 회귀 전에는 몰랐는데요. 얼마 전에 알게 됐어요.”
얼굴에 열이 올라 살짝 간지럽게 느껴졌다.
아스테인은 내 대답에 실 팔찌를 들여다보는 것을 멈추고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 눈빛이 붉어져 있을 뺨에 닿자 다시 열이 확 올랐다.
“다섯 살 즈음에는 머리를 길렀었습니다.”
“그래요?”
순간적으로 상상이 되지 않았다. 긴 머리의 아스테인이라니, 게다가 겨우 다섯 살이었다.
“절 딸로 키우고 싶어 하셨다더군요.”
“제 방의 초상화에 있는 아스테인은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었는데요?”
“폐하는 질색하셨거든요.”
살짝 그리움에 젖어 잔잔한 웃음을 짓던 아스테인은 곧 다시 슬픈 얼굴을 했다.
“그 당시 어머니가 제 머리를 빗기면서 머리카락을 모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린 제게 팔찌 만드는 법을 알려주셨죠.”
“그래서 만드는 방법을 아신 거예요?”
“네. 한동안은 그걸 유품처럼 여기고 적당한 습도에서 향유도 발라가면서 잘 관리했었습니다.”
“그랬어요? 그럼 그게 아직도 있겠네요. 신기하다.”
“안 그래도 찾아봤는데 보이지 않더군요.”
그와 나는 동시에 그것을 쳐다봤다.
내가 시간을 되돌렸다는 증거인 실 팔찌는 그와 나를 연결하는 운명의 끈이기도 했다.
“신비로운 일이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게다가 그때도 지금도 제 마음이 같다는 사실이 기쁘군요.”
아스테인의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자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 반짝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믿지 못했던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연모하는 이의 행복을 바라면 이 팔찌를 주라고 하셨거든요.”
연모라는 단어는 마법의 단어였다. 정말 열병에 걸리기라도 한 듯, 온몸이 화끈화끈 불타버릴 것 같았으니까.
차마 아스테인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려는데 아스테인의 얼굴이 따라왔다. 내 시선은 나도 모르게 그의 입술로 향했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떠올라 버린 감촉은 심장을 정신없이 달리게 했다.
쿵쿵 쾅쾅 뛰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주군! 그 오징어 자식이……. 으아아아악! 죄송합니다.”
갑자기 문을 연, 크리세우스 때문에 나도 모르게 아스테인의 가슴을 확 밀어버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키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무리 그게 아스테인의 오른팔이라고 할지라도.
“하, 하던 거 마저…….”
“크리세우스…….”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크리세우스의 앞으로 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부하의 귀를 잡아당겼다.
“죄송해요! 으아악, 아니 문을 잠가 놓든가!”
그대로 끌려간 크리세우스가 안타깝기도 했지만, 걱정도 됐다.
아스테인과 나 사이의 감정을 다른 사람이 알아도 되는 걸까?
그때 방문이 다시 살짝 열렸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입 무거…… 으아악, 가요, 간다고요!”
복도 너머로 크리세우스의 비명이 계속 들리는 듯했다.
그것이 사라진 뒤, 내 방에는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혼자 남은 것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아스테인의 한결같은 마음이 곁에 남아 있었으니까.
* * *
복도에서는 촐싹대는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마구 흔들어대면서 주인을 쫓아갔다.
“우와, 우와, 우리 주군, 소원을 이루신 겁니까?”
“조용히 입 다물어.”
아스테인은 크리세우스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조금은 어두침침한 복도에서도 아스테인의 붉어진 뒷덜미는 잘 보였다.
“그런데 아가씨는 신전으로 가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이거 완전 금단의 사랑이잖아.”
“프레이아 님께서는 신전으로 가지 않으시겠다고 했다.”
“진짜요? 그렇다면……!”
열심히 흔들어대던 꼬리가 멈췄다. 크리세우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얼굴로 아스테인을 쳐다봤다.
“그래, 중단했던 것들을 다시 진행해도 된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크리세우스가 기뻐하는 모습에 아스테인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돌았다.
“하지만 다른 녀석들에게는 프레이아 님께서 신전으로 가지 않는다는 소리를 하지 말도록. 내 수하들을 믿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니까.”
아스테인의 말에 크리세우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드디어 우리를 수하로 인정해주셨어.”
아스테인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크리세우스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아가씨가 성녀가 되지 않는다면 나중에 결정적인 순간에 신전의 힘을 빌릴 수 없지 않나요?”
“신전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우리 스스로가 해낼 수 있게 단단히 준비해야지.”
“그거야 뭐, 여부가 있겠습니까?”
크리세우스는 누구보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윙크를 했다.
그 모습이 가소롭긴 했지만, 아스테인은 속내를 비치지 않고 앞만 쳐다봤다.
“1년 반, 그 안에 모든 준비가 끝나야 한다.”
“네? 갑자기 1년 반이요?”
크리세우스는 갑작스러운 제한 시간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것을 본 아스테인은 피식 소리를 냈다.
“왜?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더니, 못 하겠어?”
“에이, 그럴 리가요. 그런데 갑자기 왜 시간제한이 생긴 거죠?”
아스테인은 크리세우스에게 프레이아의 회귀 사실을 알리는 것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특히나 회귀 전에 아스테인이 황제가 죽고도 황권에 도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크리세우스가 모르는 편이 나았다. 그 이후 프레이아를 지키다 죽은 일도.
“프레이아 님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
차라리 신의 이름을 빌리는 편이 나았다. 회귀라는 것이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렇군요. 역시 대단한 아가씨야. 그런데 아가씨가 신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방법이 있어요?”
아스테인은 그 말에 잠깐 얼굴이 어두워졌다. 프레이아가 걱정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어째서 결정하는 것이 늦어졌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찾으라고 했던 여자, 찾았나?”
“아, 저 그것 때문에 찾아온 겁니다. 그 오징어 자식이요, 그놈이 오늘 만난 여자가 딱 그렇게 생겼던데요?”
아스테인의 걸음이 멈췄다. 열심히 뒤따라가던 크리세우스는 아스테인의 등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니, 주군! 왜 갑자기 멈춥니까?”
“소후작이 왜 그 여자와 만났지? 아니, 그 여자가 인테르의 수장이라던데 사실인가?”
“와! 주군, 어떻게 알았어요? 맞아요! 그 여자가 그 괴상한 녀석들의 주인이래요.”
“인테르의 본거지를 알아낸 건가?”
크리세우스는 무시무시하게 변해버린 제 주인의 얼굴을 보며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징어 놈이 그 여자에게 새로운 의뢰를 했답니다. 아가씨를 자신에게 넘기라고요.”
그러자 아스테인의 얼굴이 더 험상궂어졌다.
“당장 그리로 가자.”
* * *
방에 혼자 남은 나는 서랍에 고이 넣어뒀던 양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아스테인을 닮은 자수정으로 라일락 무늬를 새겨 넣은 주머니는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다.
“이제 수를 놓아야겠지?”
그래도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열심히 연습한 탓에 실력이 아주 조금은 늘었다.
아스테인이 더는 걱정하지 않을 만큼 손가락에 상처도 없었다.
모양은 물론, 아직 덜 예뻤지만.
그때 방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저예요.”
“들어와.”
셀레미온이 목각인형을 들고 들어왔다. 목각인형은 어느새 부서졌던 부분이 붙어 있었다.
“대공님이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벌써 고친 거야?”
“아직 덜 말랐으니 조심하라고 하시긴 했어요.”
셀레미온은 그것을 제자리에 두었다.
그걸 올려놓은 아이의 눈동자에는 약간의 호기심이 있었다.
“흐음, 대공님은 이 인형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사신 건가?”
뜨끔해진 나는 그 말을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열은 좀 내리셨어요?”
인형에서 고개를 뗀 아이는 날 걱정스레 쳐다봤다. 진심이 담긴 눈동자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애초에 아픈 것이 아니었는데 걱정을 끼쳤다.
“응, 괜찮아. 약도 먹었고, 다들 걱정해줬으니까 빨리 나아야지.”
“그래도 더 쉬셔야죠. 수를 놓느라 늦게 자고 그러면 돼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셀레미온은 언니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얼른 드리고 싶은걸?”
“뭐, 대공님께는 그래도 되죠. 그래도 너무 늦게까지는 안 돼요.”
셀레미온은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다. 그러고는 커튼을 치러 창가로 다가갔다.
그런데 셀레미온이 눈을 갑자기 가늘게 떴다.
“왜 그래?”
“아가씨, 저기 성문 쪽에 기사님들이 몰려 계시네요? 횃불까지 잔뜩 들고.”
“그래?”
셀레미온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이 시간에 누가 온 건가?”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는데?”
“하지만 누군가를 못 들어오게 막는 분위긴데요?”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봤다. 셀레미온의 말이 맞는 것같이 느껴졌다.
달빛과 횃불에 기사님들의 검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으니까.
그래도 나는 태연히 답을 할 수 있었다.
“대공님이 계실 테니까 알아서 해결하시겠지.”
아스테인을 향한 믿음이 있으니까.
하지만 나를 보는 셀레미온의 얼굴에는 약간의 불안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요. 대공님께서는 성 밖으로 나가셨는데요?”
“그래?”
그래도 그의 기사들이 있으니까 별로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편히 마음을 먹은 채 다시 침대로 돌아가 아스테인의 주머니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 색과 잘 어울리는 은색 실을 바늘에 꿰었다.
“저, 여기에 조금만 더 있어도 돼요?”
“왜? 무서워? 설마 성문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람이 후작님일까 봐?”
“으아, 왜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세요?”
나는 셀레미온의 겁에 질린 얼굴을 무시하고 묵묵히 바늘을 움직였다.
그사이에도 셀레미온은 창가를 쳐다보면서 신경을 쓰고 있었다.
“지금까지 대공님의 기사분들이 무사히 잘 막아왔잖아. 새삼스럽게 왜 겁을 먹고 그러니?”
“그, 그렇죠?”
하지만 셀레미온은 후작이 자신에게 복수하려고 할지도 모른다며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아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창밖을 계속 지켜보던 셀레미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뚫렸나 봐요.”
그 말에 나도 창밖을 내다봤다. 그러자 우르르 줄을 지어 누군가를 뒤쫓는 횃불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붉은 말을 타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로브를 쓰고 있어 정확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으아아, 뭐야! 설마 진짜 아가씨를 노리고 달려오는 것은 아니겠죠?”
“걱정하지 말라니까. 설마 기사님들이 놓치겠니?”
내 말대로 아스테인의 기사들은 금방 그자를 따라잡았다. 그리고 둥글게 원을 만들어 남자를 포위했다.
“어? 아가씨, 그런데요. 저 말, 낯이 익지 않아요?”
셀레미온의 지적에 눈에 힘을 주고 말을 확인했다. 제법 가까워진 거리라 문 앞에서보다는 자세히 보였다.
그리고 저 말의 주인은…….
“후작님의 말 아니에요?”
셀레미온의 말에 눈이 찌푸려졌다.
성녀님의 지시를 어기고 성으로 찾아오다니.
그것도 아스테인이 성 밖을 빠져나간 틈을 노렸다는 것이 조금 괘씸하게 느껴졌다.
“아가씨를 또 괴롭히려고 온 거 아니에요?”
유테르안은 내가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려 했었다. 그것을 후작에게 전해주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지금껏 했던 것처럼 나를 괴롭히고 핍박할 수 없음을 이젠 확실히 알 텐데…….
“후작님이 말에서 내렸네요? 어머? 뭐지? 무릎을 꿇으신 건가?”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에 나는 눈살이 찌푸려졌다.
성녀를 배출하는 가문이라는 자긍심으로 평생을 살아온 푸토르 후작이 할 행동이 아니었다. 후작에게는 꺾이지 않는 자존심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그러게요? 사과라도 하러 온 걸까요?”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천하의 푸토르 후작이 빈민가 출신의 수양딸에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 빌러 왔을 리가 없었다.
“기사님 한 분이 건물로 오시는 것 같아요.”
셀레미온의 말이 맞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 한 분이 내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푸토르 후작이 아가씨를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나는 만날 이유가 없어요.”
“아가씨께 사죄하겠다고 합니다. 아가씨께서 내려 오지 않으면 이대로 무릎을 꿇고 밤을 새우겠다고 하는군요. 어찌할까요?”
“흥, 뒤늦게 뭐 하는 거람? 아가씨가 싫다니까 쫓아내 주세요.”
셀레미온이 콧방귀를 꼈다. 나의 단호한 거부에 기사가 돌아갔다. 나는 창문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기사들은 다시 후작을 일으켜 세워 내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후작은 몇 번이고 기사님들을 뿌리치고 달려와 무릎을 꿇고는 했다.
“끈질기네요. 그래도 무시해요. 정말, 어이없어.”
하지만 나는 곤란해하는 기사님들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옷 위에 카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자 기사들이 내 주변을 에워쌌다.
후작은 나를 발견하고 기다시피 달려왔다.
그러고는 내 발 앞에 쓰러지듯 엎드렸다.
“프레이아, 나를 용서하거라. 제발.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구나.”
나는 그 광경을 조금은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