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입술에 담긴 마음
아스테인은 내 결심을 듣고 자상하게 웃어줬다.
“정말 성녀가 되지 않으실 겁니까?”
“저는 신성력이 없는걸요? 성녀님과 엘라네르의 신성력을 빌려 쓴다고 한들, 진짜가 아닌 이상 결국에는 가짜라는 것을 들킬 거니까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스테인은 대견하다는 듯이 내 등을 톡톡 토닥여줬다.
그 느낌이 좋았다. 심장 안에서 뭔가가 몽글몽글 피어나 나를 껴안아 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아스테인 님도 성기사가 되는 일은 포기하시는 거죠? 그때처럼 모든 걸 던져버리고 성기사가 된다며 황위 계승권을 포기해서는 안 돼요.”
“물론입니다. 저도 황위 계승권을 버리고 성기사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다행이에요.”
“저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기사가 되어 프레이아 님과 거리를 지키며 바라만 봐야 하는 날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도 된다니 다행입니다.”
아스테인의 말이 빠르게 뛰고 있던 심장을 더 자극했다.
이렇게 끌어안긴 상태에서 심장이 요동치면 아스테인이 고스란히 느낄지도 모르는데.
“그, 이제는 충분히 위로되었으니까 놓아주셔도 돼요.”
“아직 안 됩니다. 상이 남았거든요.”
“상이요?”
“네.”
갑자기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내 얼굴과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의 붉고 뜨거운 입술이 내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쪽’ 하는 살과 입술이 부딪히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크게 들렸다. 마차까지 들리면 어쩌지?
아니, 기사님들이 우리 주변에 숨어서 호위하고 계실 텐데…….
“저, 저기!”
“그날 이후 프레이아 님의 말 덕분에 힘든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아스테인의 고백에 나는 몸을 꿈틀대려던 것을 포기했다.
아스테인의 얼굴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고마운 푸른 머리의 소녀가 푸토르 가의 예비 성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마음이 참 묘했습니다.”
“왜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서운하더군요.”
아스테인은 여전히 나를 안고 있는 팔을 풀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숙인 그는 내게 똑바로 눈을 맞추며 자신의 마음을 풀어나갔다.
“다시는 그렇게 나를 안아주지도 이마에 입을 맞춰주지도 못할 테니까요.”
“그건…….”
“그래도 작은 인연을 맺은 분이기에, 잘 지내는지 궁금해 후작가를 찾아갔었습니다.”
“절 보러 오신 거였어요?”
“네, 당연히요.”
카렌시아를 보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니…….
솔직히 너무 기뻤다.
“하지만 만나 뵙기 쉽지 않더군요. 힘들어하는 모습만 멀리서 확인하려니 마음이 쓰였습니다.”
아스테인이 조금 속상한 듯, 눈을 찡그렸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찡그린 눈에 손을 대서 펴주고 싶을 정도였다.
“고마워요. 계속해서 걱정해주셨다니……. 저는 아스테인 님과의 기억을 잊었는데요.”
“괜찮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기억나실 때까지 얼마든지 생생히 묘사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소리는 그만큼 그가 그날의 일을 되새기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나는 다시 열심히 뛰어주는 심장 덕에 얼굴이 뜨거워지려 했다. 게다가 아스테인의 체온 덕분에 더 얼굴 주변이 홧홧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들려주세요. 기억이 날 때까지요.”
“네, 알겠습니다.”
아스테인은 대답을 하고는 또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성녀님께 받았던 볼 키스와는 느낌이 달랐다.
촉촉한 그의 입술이 닿은 부분부터 뜨거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발가락을 나도 모르게 꼬물댔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감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의 체온이 멀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제 할 일이 많겠네요. 엘라네르를 찾지 못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도 세워야…….”
애써 아쉬움을 숨기려 말을 돌렸다. 하지만 내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 때문에 말을 잇는 것을 포기했다.
“아스테인 단델리온은 오로지 한 분만을 위한 기사가 되고자 합니다. 프레이아 님, 당신만의 기사가 되어 곁에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그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검집 채 내게 내밀었다.
기사가 모시고 싶은 주인이 생겼을 때 맹세를 위해 하는 행동이었다.
“부탁…… 드릴게요.”
나는 그의 검을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 * *
밤늦은 시간, 유테르안은 루크데린 거리로 나왔다.
봄의 여왕 축제가 끝이 났는데도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리고 유테르안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것이 불만스러웠다.
“감히 어딜 쳐다봐?”
자신을 쳐다보며 수군대는 사람들에게 날을 세워봤다. 하지만 뒤에서 계속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맙게도 그것은 귀족이 아니었다.
“너, 감히 이름도 모를 평민 주제에 지금 귀족에게 삿대질했어? 목숨이 한 개가 아닌가 보지?”
분풀이할 상대가 필요했다. 초라한 옷을 입고 있는 젊은 여자는 유테르안의 화풀이에 적당한 상대였다.
“죄,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덜덜덜 떠는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자신만 보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무조건 죄송하다고 빌던 여자아이가.
그리고 이제는 자신에게서 도망쳐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시건방진 여자가.
그래서 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죄송하다면 다야?”
그는 자신의 수하들에게 명해 죄 없는 여자를 바닥에 꿇렸다.
“손이 움직이지 않게 꽉 붙들어. 다신 귀족에게 삿대질 못 하게 혼쭐을 내줄 테니.”
유테르안은 한쪽 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감히 고귀한 성녀를 배출한 푸토르 가의 후계자를 우습게 본 대가를 치르게 해야 속이 풀릴 것이다.
“꺄아악!”
“다시는 손가락이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일이 없게 해주마.”
단단한 구두 굽은 가여운 여자의 손가락 위로 향했다.
여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저 빈민가에 기적을 안겨준 예비 성녀님을 생각하는 마음만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그분을 어릴 때부터 학대하고 괴롭혔다는 소문의 푸로르 후작가를 욕해주고 싶었을 뿐.
“멈춰!”
그때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다가왔다.
자신에게 반말하는 사람을 쳐다본 유테르안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발을 멈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멈추라고 했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다시 울린 목소리와 함께 유테르안의 몸이 뒤로 튕겼다.
유테르안은 자신을 밀어낸 무형의 힘에 눈을 부릅떴다. 무슨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 것인지 눈치채기도 전에 로브를 쓴 사람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애송이, 너는 이래서 아직 멀었다는 거다.”
로브가 바람에 슬쩍 뒤로 넘어갔다. 그러자 붉은 머리의 여인이 얼굴을 드러냈다.
유테르안은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힘없는 사람을 괴롭혀서야 쓰나?”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글쎄? 왜라고 생각하지?”
그 여자, 엘라네르는 눈을 곱게 접었다.
그 모습에 유테르안은 불쾌한 얼굴을 했다.
“길거리에서 나를 망신 주고도 너와 네 동료가 무사할 수 있을 것 같나?”
“흐음,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자는 건가? 물론 나는 네가 저지른 짓을 떠벌려도 상관이 없지만.”
비릿하게 웃는 엘라네르의 모습에 유테르안이 살짝 몸을 떨었다.
엘라네르에게는 알 수 없는 위압감 같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한 유테르안은 당장 자세를 고쳐 일어났다.
“자리를 옮기지. 사람들이 많으니.”
“그러든가.”
엘라네르는 살짝 차갑게 웃으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 걸음은 여자의 걸음치고는 빨랐다.
유테르안은 다급히 그녀를 쫓아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것이 영 불만스러웠지만, 으르렁댈 틈이 없었다.
“여기야.”
엘라네르는 유테르안을 허름한 술집으로 데리고 갔다.
노릿한 냄새와 곰팡내가 동시에 풍겨오자 유테르안은 미간을 잔뜩 구겼다. 하지만 엘라네르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서 뭐, 내게 볼일이라도 남았어?”
“지난번의 암살 의뢰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니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
“아, 그 황궁에서의 일?”
엘라네르는 술집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유테르안 앞에 묵직한 주머니가 여러 개 소환됐다.
“위약금도 두둑이 넣었어.”
엘라네르의 가벼운 반응에 유테르안의 눈썹이 불쾌함으로 춤을 췄다.
“나는 보상 대신, 의뢰한 일의 완성을 원한다.”
“미안하지만 그를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어서 말이지.”
“……설마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아, 뭐, 물론 내 볼일 보느라 바쁘긴 했지. 내 귀여운 새에게 나는 법을 알려줘야 했거든.”
유테르안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는 엘라네르의 목을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저 여자의 목을 잡고 부러트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다면 더 이럴 수 없지. 감히, 푸토르 후작과 그 후계자인 나를 속여먹고, 살아남으리라 생각했나?”
“황제도 내 편인데? 겨우 후작이 뭘 어쩌려고?”
유테르안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겨우 붙들어야 했다. 게다가 바라는 것이 있는 쪽이 약자기에, 조금은 물러나야 했다.
“네가 돌려준 돈의 두 배를 내지.”
“흐음, 그래서 뭘 원하는데? 이제 시시한 암살 의뢰 같은 것은 우리가 받지 않아서 말이야.”
“인테르와 같은 것을 원한다. 아니, 그 일에 내가 협력하도록 하지.”
유테르안의 검은 눈동자가 흑요석이라도 된 것처럼 불길한 검은 빛을 띠었다.
엘라네르는 흥미로운 눈으로 유테르안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성녀를 배출하는 가문이 신전을 없애는 데 동참하겠다?”
“물론이다. 다만 예비 성녀, 그 여자만 내게 넘기면 된다.”
“그 푸른 머리의 착하기 짝이 없는 여자 말이야?”
“그래. 내가 예비 성녀를 망가트리면 어차피 신전은 무너지게 되어 있으니 양쪽이 다 이득 아니겠어?”
엘라네르가 눈을 크게 뜨며 기괴하게 웃었다.
“하하하, 너, 그 애한테 미쳤구나?”
“처음부터 내 것이었다. 그걸 되찾겠다는 거다.”
엘라네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테르안의 앞으로 갔다. 손을 뻗은 그녀는 검지 끝으로 유테르안의 턱을 슬쩍 밀어 올렸다.
“참, 인간들은 재미있어. 그렇지?”
“더러운 손으로 만지지 마.”
“누가 가장 더러운지 너는 모르는구나?”
엘라네르의 말에 유테르안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엘라네르는 그걸 귀엽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뭐, 그래도 흥미로운 것 같네?”
“나와 함께하겠다는 건가?”
엘라네르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기만 했다.
* * *
성으로 돌아온 나는 셀레미온과 베이트만 부인의 도움을 받아 목욕하고 있었다.
“아가씨, 오늘따라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요?”
“어머, 열이라도 있는 건가요? 셀레미온, 목욕을 마치면 따뜻하게 주무실 수 있게, 양가죽 주머니에 뜨거운 물을 채워오렴.”
“난 괜찮아요. 그러니 셀레미온, 수선떨지 않아도 돼.”
얼굴이 빨개진 것은 계속 이마에 간질간질하던 감촉이 남은 탓이었다.
부드럽기도 하고, 뜨겁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포근했던 그의 입술이 똑똑히 느껴졌다.
그러니 열이 계속 오를 수밖에.
“감기라도 걸려서 그런 거라면 따뜻하게 해야 합니다.”
베이트만 부인은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나를 챙겼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상하게 더 부끄러워졌다.
마치 사랑에 빠진 것을 들킨 소녀라도 된 것처럼.
“어라? 얼굴이 더 빨개지셨어요. 큰일이네.”
“셀레미온, 안 되겠다. 대공님께 말씀드려서 의사를 모셔오렴.”
결국, 오해를 받고 만 나는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병문안을 받았다. 그것도 이 늦은 밤에.
“아가씨, 이것 좀 드십시오. 달걀노른자, 꿀, 우유, 버터까지 섞어서 만든 거랍니다. 북부지방에서 건너온 민간요법인데 이게 감기에는 특효약이랍니다.”
기사님들의 야식을 준비하던 요리사님은 내게 조금 이상한 음료를 건넸다.
“안 됩니다. 아까 의사가 준 약을 먹고 푹 쉬면 된다고 했습니다.”
“이 집사, 참 깐깐한 사람이네. 약보다는 이런 게 더 빨리 낫는다니까?”
“아가씨, 이 답답한 인간들이 하는 말은 듣지 말고 밖에 나가서 운동합시다. 땀을 쭉 빼고 나면 감기는 한 방에…….”
“다들, 프레이아 님이 쉬어야 하니 나가도록.”
아스테인이 정리해줘서 겨우 방이 조용해졌다.
그는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를 향해 돌아선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밖에서 너무 오래 있었나 봅니다.”
“저 아프지 않아요.”
“열이 있으셨다면서요.”
“그게 사실, 계속…… 떠올라서요.”
중요한 말은 아주 작게 입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용케도 그것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의 귀도 빨개졌으니까.
“그럼, 이만 쉬십시오.”
아스테인은 다급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곧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부러졌군요.”
그의 발걸음을 잡은 것은 목각인형이었다.
나는 그것을 양손 위에 올려놓았다. 나도 모르게 눈꼬리가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엘라네르의 힘 때문에 바닥에 떨어졌었어요.”
“아교로 다시 붙이면 됩니다. 제가 가져가서 맡기겠습니다.”
“그래 주실래요?”
양팔을 뻗어 목각인형을 전했다.
그런데 얼마 전 의상실에서 배달 온 새 잠옷의 소매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인형을 받아 가던 아스테인의 눈이 내 왼쪽 손목에 고정됐다. 거기에는 회귀 전의 그가 선물했던 은색 실 팔찌가 예쁘게 매달려 있었다.
“이건…… 설마, 제가 만들어 드렸나요?”
“네. 회귀 전에 주셨어요.”
대답을 들은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