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당신과 나의 첫 만남
대공성으로 돌아가던 길, 아스테인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여러 번 나를 돌아봤다.
하지만 생각에 잠긴 나는 그런 아스테인에게 반응해 줄 수가 없었다.
그는 마차에 오르고 난 뒤에야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꺼냈다.
“괜찮으십니까?”
“그게…… 솔직히 아니요.”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니 확실히 그럴 만했다.
핏기 없이 하얘진 얼굴. 얼굴 전체에 내려앉은 근심까지.
마차에 오른 뒤, 나는 애써 그를 향해 웃어주었다.
그리고 마차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엘라네르의 행동과 목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요.”
“진짜 성녀가 될 사람이 신전을 무너트리려는 자와 한 편이라니……. 정말 모순된 일이기는 하군요.”
“그렇죠?”
하지만 나는 조금 더 다른,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엘라네르는 진짜 성녀일까?
새벽에 불타 사라져 버린 비단과 그녀가 남긴 메시지를 생각한다면…….
흔들리는 마차만큼이나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엘라네르가 성녀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지……?”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쳐다봤다.
나는 그의 시선에 침을 살짝 삼켰다.
“지난번 빈민가에서 날아왔던 화살 기억해요?”
“네, 기억납니다. 설마 했는데 그 여자가 정말로 인테르와 협력 중이었군요. 그래서 마법도 쓰지 않았는데 눈앞에서 사라질 수 있었던 거고요.”
신성력의 힘일 것이라는데 나도 이견이 없었다.
“그럼 대공령에서 프레이아 님에게 위해를 끼치려던 것도 그 여자의 짓이었을까요?”
“아니요, 그녀는 절대 날 해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황궁에서도 그렇고 프레이아 님을 노리지 않았습니까?”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대신 화내주는 일은 언제나 나를 감동 받게 했다.
“엘라네르는 절대로 날 다치게 하지 않을 거예요.”
애초에 그런 목적이었다면 황궁에서 내게 신성력을 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아스테인의 물음에 나는 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잠시 다물었다. 그리고 아스테인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다정했고, 나만을 올곧게 보고 있었다.
나를 언제나 믿고 따라주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더는 숨기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엘라네르가 그날 보냈던 비단을 통해서 메시지를 보냈어요. 그리고 절 날개라고 불렀어요.”
날개라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스테인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아스테인 님이 황제가 되길 바란다면 제가 성녀가 되어야 한다고도 했어요. 예전에 꿈속으로 찾아와서도 비슷한 말을 했었죠.”
아스테인은 그 말에 눈썹을 추켜세웠다.
커다래진 눈동자는 뭔가를 곱씹고 되새김질하는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서서히 흔들림이 멈춘 그의 눈동자가 내게 고정되었다. 올곧은 눈동자는 그 어떤 유혹에도 방황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듯했다.
“저는 황제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이유로 계속 성녀가 되겠다고 말씀해 오셨던 것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
확고한 그의 반응에 오히려 내가 당황해서 눈을 깜박였다.
“어째서요? 아스테인 님의 외조부와 어머니께서 유지로도 남겼다면서요. 성기사가 되려는 것도 신전의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면서, 왜요?”
“저와는 상관없이 본인이 원하는 미래를 선택하라는 뜻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자상했다.
나는 입을 달싹이며 뭔가 더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미래가 뭐지?
아스테인의 죽음을 막는 것과 그가 자신에게 걸맞은 자리에 올라서는 모습을 보는 것.
다른 것도 있지만, 일단은 그게 내가 가장 바라는 모습이었다.
“저는 아스테인 님이…….”
겨우 입을 조금씩 열었다. 하지만 마차가 서면서 마부가 문을 두드린 바람에 내 말은 쑥 들어가 버렸다.
“말씀하신 곳에 도착했습니다.”
황궁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르기로 했던 라일락 숲이었다.
나는 깊이 숨을 몰아쉬며 마차에서 내렸다.
이미 해가 넘어간 저녁, 그래도 달빛이 숲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어 구경할 만했다.
“라일락은 이미 다 져버렸네요.”
“이제 곧 여름이 시작될 테니까요.”
“아쉽다.”
그래도 라일락 향은 가까이에서 계속 은은하게 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와 아스테인 님이 어릴 때 만났다는 거죠?”
“네.”
“아스테인 님이 열 살 때 즈음인 것 같던데 맞나요?”
“크리세우스가 벌써 그 이야기를 해버린 겁니까?”
불만스러운지 아스테인의 미간이 살짝 주름을 만들었다.
“아니요. 기사님들의 말을 셀레미온이 전해줬어요. 그 시기에 아스테인 님이 가출을 하셨다고요.”
괜히 말했다. 아스테인의 귀가 살짝 빨개졌다.
“그럼 저는 여섯 살이었네요. 아마 그때면 저는 빈민가에서 도망쳐서…….”
갑자기 머릿속을 스친 기억이 있었다.
나를 후작의 고아원에 바래다준 남자. 그자의 모습이 아스테인과 겹쳐졌다.
하지만 같은 사람일 리가 없었다. 그 남자는 검은 머리를 가진 지긋한 나이의 신사였는걸?
눈동자는 아스테인과 비슷한 것도 같지만.
“뭔가 기억이 났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에요.”
“아쉽군요.”
“말해주시면 안 돼요? 제가 뭐라고 했는지…….”
내가 조금은 간절한 눈으로 그에게 간청하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달빛보다 눈부시게, 오직 나만을 위해서.
“저보다 작은 몸이면서 저를 꼭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본인도 울고 있었으면서 제 등을 두드리며 달래주더군요.”
어린 나도 빈민가에서 배척받고 힘들었으니까.
“그리고 제 이마에 입술을 맞추며 조용히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네? 제가 아스테인 님께 뽀뽀했다고요?”
얼굴 전체에 열이 오른 것이 느껴졌다. 화끈거리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 하셨죠. 그러니 다른 사람 때문에 울지 말자고요.”
아스테인은 조용히 한 나무 앞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뭔가 작은 표식을 찾아냈다.
나와 그의 이름이 새겨진 흔적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소중한 보석을 다루기라도 하듯이.
“이번에는 제가 그 말을 돌려드릴까 합니다.”
아스테인이 몸을 돌려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꼭 끌어안았다.
“엘라네르라는 여자가 무슨 말을 하든, 오직 프레이아 님을 위한 선택을 하십시오. 누가 뭐라 해도 프레이아 님은 제게 가장 고귀한 사람이고, 마땅히 행복해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아스테인의 말에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어린 시절 우리가 만났을 때처럼, 은은한 라일락 향이 우리를 감쌌다.
힘내라고 응원하듯이.
눈을 뜬 나는 결심을 끝낼 수 있었다.
“저는 성녀가 되지 않을 거예요.”
아스테인은 믿을 수가 없는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곧 그의 눈은 다정하게 휘어졌다.
그리고 라일락 향이 가득한 말을 건넸다.
“예전에 만났던 소녀와는 다른 말을 하는군요.”
* * *
싸늘한 겨울바람을 가르며 은발 머리의 건장한 청년이 커다란 저택 앞으로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는 삭막한 저택의 문 앞에서 말을 세웠다.
“오늘도 오셨습니까? 2황자님?”
문지기는 익숙하다는 듯이 청년을 불렀다. 열여덟 살의 아스테인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런 그의 뒤에는 금발 머리의 다른 청년이 호위로 따라왔다.
“푸토르 후작은?”
“신전에 가셨습니다.”
“언제 돌아오지?”
“글쎄요? 그것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문지기의 대답에 아스테인은 안타까운 얼굴을 지어 보였다. 오늘이 도대체 며칠째인지…….
문지기는 아스테인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조금은 비웃는 얼굴 같기도 했다. 그는 아스테인에게 말을 꺼내지도 않고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언제나처럼 조금만 기다리면 이 어린 황자는 곧 돌아갈 테니까.
“이 집 아가씨도 후작을 따라갔나?”
“네, 당연히 따라갔지요. 앞으로 고귀한 분이 되실 테니 미리미리 여러 가지를 공부해야 하거든요.”
아스테인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꼬질꼬질 고아처럼 보였던 아이가 좋은 양부모를 만나 또 좋은 짝을 만나게 될 예정인 것 같아서.
“그렇군……. 한 번은 만나 봤으면 좋겠는데.”
“곧, 만나지 않겠습니까? 곧 발표될 테니까요. 그게 아니더라도 황실에 인사하러 갈 테니 그때 뵈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아스테인이 아쉬움 가득한 탄식을 내뱉었다.
문지기는 그것을 동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 젊은 황자가 자신의 아가씨를 연모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신성력을 타고나지는 못했지만, 누구보다 너그럽고 고결한 것이 미래의 황후로는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황태자도 아니고, 황제에게도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눈앞에 있는 황자의 짝은 아니었다.
“그만 포기하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두 분은 인연이 아닌 것을요.”
“인연을 맺길 바라서 찾아온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쨌든 내가 찾아온 이유는 후작을 만나기 위해서니까.”
아스테인은 잠깐 망설이다 대답했다. 하지만 문지기는 그저 불쌍한 황자가 핑계를 대는 것으로만 들렸다.
“후작이 언제 올지 모르니 나는 이만 가도록 하지.”
아쉬움에 느리게 말을 몰던 아스테인은 얼마 가지 못해 말을 멈췄다.
“황자님, 무슨 일입니까?”
황궁 밖에 몰래 나설 때면 늘 따라다니는 자신의 수하, 크리세우스가 그를 불렀다.
아스테인은 저기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마차를 쳐다봤다.
“저거, 후작의 마차 맞지?”
“네. 맞는데요?”
아스테인의 심장이 이상하게 떨렸다.
벌써 오래전 일이었다. 자신이 너무 힘들고 지쳤을 때, 그때 자신을 안아준 자그마한 소녀가 어쩌면 저 마차에 있다.
한 번은 다시 보고 싶었다. 아스테인에게 살아갈 희망을 안겨준 소녀가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소문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 싶었다.
아스테인이 말머리를 틀려고 하자 크리세우스가 말렸다.
“분명히 또 황자님이 가면 후작이 저 집의 아가씨를 보여주지 않을걸요? 황후가 될 사람이라잖아요.”
“그녀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럼요? 아, 그럼 예비 성녀? 그쪽은 더 힘들죠. 작은 사교모임에도 절대 보내지 않는다던데.”
“어째서지?”
“성녀가 될 거잖아요. 어리다고 해도 괜히 남자 귀족들과 친분을 쌓게 되는 상황이 싫겠죠.”
아스테인의 눈썹이 모였다.
그리웠다. 그리고 궁금했다. 자신은 이렇게 잘 지내고 있으니, 그 소녀도 잘 지내고 있다는 확인을 받고 싶었다.
“그냥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나중에 성녀가 되면 신전으로 만나러 가요.”
“그편이 낫겠지?”
“네. 어릴 때 친분을 이용해서 친해져 봐요. 그러면 황위 다툼에 성녀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려고 만나려는 거 아니다.”
단호한 아스테인의 거부에 크리세우스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런 수하의 모습을 무시하고 아스테인은 마차가 지나가는 것만 바라봤다. 마차가 그의 앞을 지나칠 때, 아스테인은 마차 안에 앉아 있는 그리운 푸른 머리의 소녀를 확인했다.
“어디 가요?”
아스테인이 갑자기 마차 뒤를 조용히 쫓아갔다. 한참이나 뒤에 떨어져서 조심스럽게 마차를 따라가는 그의 얼굴이 심각했다.
“왜 저렇게 얼굴이 어둡지?”
분명 후작가에서 대접받으며 잘 지낸다고 했는데?
아스테인은 결국 후작가로 돌아왔다. 그는 대문 앞, 마차에서 사람들이 내리는 것을 숨죽이고 쳐다봤다.
“저런!”
붉은 머리의 장녀가 먼저 마차에서 내려 밝은 얼굴로 들어갔다. 하지만 푸른 머리의 소녀는 후작에게 손을 잡힌 채, 질질 끌려 나왔다.
“너는 정말 쓸모가 없구나!”
아스테인은 그것을 보고 말에서 뛰어내리려 했다. 그걸 크리세우스가 말렸다.
“남의 집안일이에요.”
“하지만…….”
아스테인이 당장이라도 집 안으로 뛰어들려고 하자, 크리세우스가 다시 팔을 잡았다.
“아, 진짜!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예비 성녀인데?”
아스테인이 말없이 죽일 듯이 노려보자, 크리세우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비밀 통로 알려드릴게요. 대신 조용히 보고만 오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이고요.”
몇 번을 다짐한 뒤에야 크리세우스는 저택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를 알려줬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아스테인은 금방 프레이아를 찾았다. 후작이 워낙 크게 소리를 친 탓이었다.
“신성력을 왜 쓰지 못하는 거냐? 오늘도 신전에서 망신을 당할 뻔했잖아!”
“죄, 죄송해요……. 더 수련할게요.”
윽박지르는 후작 때문에 어깨를 웅크리고 잔뜩 움츠러든 소녀를 보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다락방에 들어가서 기도해.”
“네…….”
후작은 소녀를 어두운 다락방에 밀어 넣고 문을 잠갔다.
후작이 떠난 뒤, 아스테인은 크리세우스의 만류에도 별채의 다락방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잠긴 문을 열려고 했다.
그때, 조용한 문 안에서 맑고 희망찬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래도 나는 행복해질 거니까 괜찮아. 나는 성녀가 될 거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을 구하는 훌륭한 사람이 될 거잖아.”
차마 소녀를 데리고 나올 수가 없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소녀의 꿈을 깰 수는 없었으니까.
“돌아가자.”
“진심이세요?”
“그래. 그런데 말이야. 어차피 나는 황제가 되지 못할 테니까 성기사가 되는 거 어때?”
“나쁜 생각은 아니네요. 황태자의 눈도 피하고, 나중에 신전의 도움도 받고.”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크리세우스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 * *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스테인은 어린 시절의 꿈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여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물론, 프레이아가 어린 시절의 꿈을 포기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가 성기사가 되려고 했던 이유는 자신에게 희망을 준 소녀의 행복을 곁에서 지키고 응원해주기 위해서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