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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36화 (36/101)

36화. 황제의 자질을 가진 자 (2)

나는 카렌시아를 위해 황제의 접견실로 갔다.

그녀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내가 황제에게 한 소리를 해주기로 했다.

그래도 나는 어쨌든 예비 성녀니까, 이럴 때는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아스테인을 도와 해결할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단델리온 대공님 말고 다른 분도 계신가요?”

안쪽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목소리는 둘이 아니었다. 시종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답했다.

“세르펜스 대공께서도 오셨습니다.”

나는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아스테인이 두 이복형제 사이에서 어떤 곤란을 겪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어머니가 모두 다른 형제들 사이에서 늘 치여 살았던 모양이니까.

“내가 찾아왔다고 알리세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시종장이 접견실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문이 열리자 안쪽에서는 조금 큰 소리가 들렸다.

“살인자를 용서하라니요?”

이 목소리는 내 기억이 맞으면 세르펜스 대공의 것이었다.

“황궁으로 오는 사이 네 수하가 깨어났다고 들었는데 살인이라니? 그리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선처하라는 것이다. 네 수하가 저지른 죄가 있지 않아?”

이건 아스테인의 것이었다. 하지만 세르펜스 대공이라는 자는 아스테인의 말에 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 수하는 핑계고 제 사업을 접게 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그러니 그런 범죄자를 용서하라면서 꼬투리를 잡는 것이지요.”

“사업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난한 평민이나 빈민들의 등골을 빼먹는 일은 황족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 일로 결국 볼썽사나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

아스테인은 열심히 세르펜스 대공을 설득하고 혼내려 했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날카로운 것이 잘 통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황족의 품위를 망친 적 없습니다.”

“제스티안, 설마 네가 선황 폐하의 유지를 기억 못 한다는 소리를 하지는 않겠지?”

아스테인의 말을 끝으로 잠시 대화가 끊겼다.

시종이 나의 등장을 알린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 아스테인을 돕고 싶은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다.

곧 밖으로 다시 나온 시종은 내게 문을 열어주었다.

“폐하께서 기꺼이 들어오라 하십니다.”

나는 조금은 음침한 것도 같은 접견실의 안으로 들어갔다. 건방져 보일 만큼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그곳에는 닮은 듯, 닮지 않은 세 형제가 있었다. 아스테인은 내가 들어가자 찌푸렸던 얼굴을 잠깐 풀었다.

그 모습을 칙칙한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신기하다는 듯 지켜봤다.

“오, 프레이아, 황후와 볼일은 끝났느냐?”

“예, 폐하. 축복도 내려드리고 불안해하시는 것도 잘 달래드렸답니다.”

그 남자는 이제 나와 황제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가늘게 뜬 눈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돌아보자 그는 내게 조금은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스티안 세르펜스라 합니다.”

나는 회귀 전, 대관식에서 만났던 세르펜스 대공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의 황제보다도 오만해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와 속은 비었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말을 내뱉던 입매.

게다가 그때는 은근슬쩍 내 뒤에서 호위하던 아스테인을 얕잡아 보기도 했다. 성녀를 지키기 위해 따라온 성기사인데도.

“안녕하세요.”

최대한 냉랭하고 사무적으로 인사를 한 다음 나는 아스테인을 바라봤다.

“그런데 아스테인 님, 밖에서 들은 이야기가 무슨 소리죠?”

“제스티안의 고리대금으로 폭행 사건이 일어나 그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습니다.”

“내가 아는 그 일인가요?”

대단히 기분 나쁜 얼굴로 세르펜스 대공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정당한 사업을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는데?”

“폐하! 제스티안이 하는 사업은 사업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자를 원금보다 많이 받는다니 암흑 길드가 하는 짓과 무엇이 다릅니까?”

아스테인의 말에 세르펜스 대공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암흑 길드라니요? 그런 소리를 입에 담을 처지가 아닐 텐데요?”

그 말에 아스테인이 순간 내게 눈동자를 돌렸다. 하지만 흔들리던 눈동자는 곧 세르펜스 대공 쪽으로 고정되었다.

“나는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다. 내 수하들에게 오명을 씌운 것은 너와 네 외가니까.”

나는 두 사람이 나누는 말에 약간의 의아함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의아함을 지금 풀 수는 없었다.

“하하하, 뻔뻔하기도 해라. 돌아가신 제 모후께서 들으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겠군요.”

대공이 아스테인을 몰아세우는 모습에 화가 났다.

심지어 황제까지 그걸 거들려고 했다.

“내 모후도 마찬가지지.”

셋의 어머니들은 모두 달랐고 그로 인해 사이가 나쁜 편이라고 들었다. 물론 공동의 적은 아스테인의 어머니였다.

그게 꼴 보기 싫었다. 그러니 일단은 저 꼴사나운 대공의 높은 콧대를 꺾어야겠다.

“어머! 원금보다 많은 이자를 내놓으라고 하고, 갚았는데도 돈을 갚지 않았다고 채무자의 가족을 사창가에 팔아넘기려고 했으면서요?”

“제스티안.”

황제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세르펜스 대공을 불렀다.

“내게 말한 것과는 상당히 다르군. 아스테인이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서?”

“아닙니다, 폐하. 그건 예비 성녀님께서 오해를…….”

“어머나, 내가 어제 그 현장에 있었다는 말은 안 했던가요?”

천연덕스럽게 답하자 세르펜스 대공의 입이 다물어졌다. 나는 그걸 보며 조금은 매서운 표정을 지었다.

“신께서는 불쌍한 이들을 핍박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을 거예요. 대공, 그러니 계속 고리대금을 하실 건지요?”

“음, 그것은 신전의 뜻입니까?”

세르펜스 대공이 나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질문했다. 그 눈빛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앞으로 신전의 뜻이 될 겁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위엄을 갖춰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가 곤란하다는 듯이 양팔을 올렸다.

“신전이 정치와 경제에까지 관여하다니……. 황제 폐하의 위신이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세르펜스의 비꼼에 황제의 미간이 급격히 좁아졌다. 그리고 못마땅한 신음을 작게 흘렀다.

황제는 억지로 내게 고개를 돌려 거짓 미소를 지었다.

“성녀가 될 이의 조언을 무시하긴 힘들지. 하지만 결정은 내 몫이다.”

황제의 마지막 말은 제법 가시가 돋쳐 있었다.

나는 그런 황제를 향해 당당히 마주했다.

이럴 때는 내가 예비 성녀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신께서 내린 경고를 감당해야 하는 것도 폐하의 몫이지요.”

미래를 보고 온 유일한 사람이라는 점은 내게 강점이 되었다.

“신의…… 경고?”

황제는 불쾌함을 드러냈다.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네, 데아 님이 저에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경고하셨죠.”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것이 자신만만해 보였을까? 황제의 눈썹이 꿈틀댔다.

물론 세르펜스 대공도.

아스테인은 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무표정한 얼굴로 둘을 돌아봤다.

“무엇이지?”

“신의 회초리, 그것이 곧 닥칠 거예요. 리디안힐에요.”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려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내 경고에 세르펜스 대공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계획했던 일을 망치는 나를 쳐다보면서.

* * *

만찬장에서는 황제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다.

“제스티안 녀석, 계속 설치고 다니더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눌러줄 수 있겠구나.”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황제에게 너무나도 많은 도움을 주고 말았다.

문득, 세르펜스 대공이 아스테인의 약점을 물고 왔어도 황제는 저런 반응을 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 제 수하들이 제스티안을 감시하고 있으니 걱정 놓으셔도 됩니다.”

“그래, 아스테인. 고맙구나.”

그냥, 아스테인이 자신의 비위를 맞춰주는 척하는 것이 마음에 드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저러다가도 아스테인이 조금만 잘못하면, 그의 어머니 일과 묶어서 그를 괴롭히겠지?

“다 프레이아 님의 지혜 덕분입니다.”

“하하하, 역시 예비 성녀가 가족이라 좋군. 제스티안 녀석이 요즘 이상한 짓을 뒤에서 벌이는 것 같아서 신경 쓰였는데 말이야.”

황제는 계속해서 부담스러운 추임새를 넣었다.

“그런데 정말 그 회오리바람이 신이 내리는 벌인가?”

“네. 신의 회초리는 데아께서 인간의 잘못을 벌하기 위해 내리는 경고예요.”

“하, 자칫하면 내가 치세를 잘못해서 신벌이 황실령에 내려지는 것으로 보일 뻔했군. 제스티안 놈이 가난한 이들을 괴롭혀서 생긴 잘못인데.”

내가 보기에는 둘 다 잘못하고 있는 것을 향한 경고였지만, 그걸 굳이 정정해주지는 않았다.

“네 경고가 아니었으면 제스티안 녀석이 내 땅을 야금야금 먹고 있는 것을 모를 뻔했군. 심지어 그 자리에 질 좋은 철광석 광산이 있는 것을 알고도 숨기려고 했다니, 고얀 녀석.”

황제는 정말 분했는지 와인잔을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눈을 가늘게 뜨고 관찰했다.

“감히 내 뒤통수를 치려고 했다, 이거지?”

혹시나 했던 기대는 역시 사라졌다. 황제의 분노는 제국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앞으로 일어날 일에 제국민들이 받을 피해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신의 회초리에 대비해야 해요.”

“아, 그렇지? 아스테인. 너에게 모두 맡기마. 제스티안이 노리던 철광석 광산이 어딘지도 알아내.”

황제는 모든 짐을 아스테인에게 떠넘겼다.

이건 절대 아스테인을 신뢰해서가 아니었다. 분명히 뭔가 또 꼬투리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황실령의 제국민들을 지켜내고, 제스티안이 벌이려는 일도 막아내겠습니다.”

억지로 일을 맡은 아스테인을 보자 속이 갑자기 답답해졌다. 훌륭한 요리를 앞에 두고도 입에 넣기가 힘들어질 만큼.

좀처럼 음식에 손대지 못하자 아스테인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괜찮습니까? 속이 불편하십니까?”

“조금요.”

아스테인의 성으로 돌아가 기사님들과 편하게 먹고 싶었다.

그러면 잘 먹을 수 있을 텐데.

“자, 평소에 잘 드시던 생선을 더 드십시오.”

내가 고기를 입에 대지 못하자 그가 시종을 불러 다른 요리를 내어오게 했다.

내 식성까지 파악하고 있다니, 그게 고마워 억지로 먹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나 속이 답답해 나는 한입을 먹고 바로 물을 마셔야 했다.

“황후의 입덧을 프레이아가 대신하는 것인가? 황후는 임산부답지 않게 잘만 먹던데 말이지.”

조금은 비꼬는 황제의 말투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카렌시아는 잘 먹는 것이 아니라 입덧으로 몇몇 먹을 수 있는 것만 많이 먹고 있었다.

그걸 저렇게 표현하다니, 내가 다 화가 나려고 했다.

안 그래도 카렌시아가 속상해하고 있다는 것을 들은 터라 더 황제의 말이 거슬렸다.

나는 차마 카렌시아 앞에서 꺼내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회귀 전, 황제의 죽음과 관련된 더러운 소문들을.

그건 어쩌면 소문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폐하, 황후 폐하께서 입덧 중이라 그런 것이니 먹고 싶은 것을 더 많이 챙겨주고, 관심을 가져 주세요.”

“그러고 있으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말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카렌시아가 서운해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임신하면 예민해지니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해주셨으면 해요.”

내 말에 황제의 눈썹이 살짝 모였다.

“황후가 네게 뭐라 한 모양이군. 안 그래도 조금 다투기는 했지.”

“무엇 때문에요?”

“내가 정치적인 일정으로 만난 여자를 두고 오해하더군.”

황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눈치챘다.

그냥 이건 단순히 카렌시아의 오해일까? 하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 여자의 외모, 그것이 우연인지 확인해야 했다.

“오해받을 행동을 하지 않으셨다면 황후 폐하도 곧 이해하실 거예요.”

“네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 만난 것을. 반신전파라는 인테르, 그들의 수장을 만났다.”

인테르의 이야기에 아스테인이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신전을 무너트려도 상관없다고는 했지만, 아스테인에게 인테르는 여전히 경계의 대상이었다.

어쨌든 그들과 후작이 아스테인을 죽이려 했으니까.

“그런 불순한 자들을 폐하께서 왜 만나셨습니까? 그들은 반신전파일 뿐 아니라 사람을 해치려는 암살자 집단입니다.”

나는 살짝 예민해져 황제를 쳐다봤다.

만약 그가 또 아스테인을 죽이는 것을 도모하고 있다면,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신이 허락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황제를 내쫓을 것이다.

“그들이 평범한 백성들을 선동하고 다닌다고 해서 확인차 만난 것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그 수장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깜짝 놀랐어.”

황제는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이 둘러댔다. 그러면서 그는 기분 좋게 와인을 한 모금 입에 삼켰다.

“여자가 그런 집단의 수장인 것도 놀랍지만, 어쩜 그리 신전에 있는 성녀님을 닮았는지, 정말 놀랍더군.”

들고 있던 포크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카렌시아가 말한 여자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내가 아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프레이아, 왜 그러지?”

얼굴에서 피가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스테인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 수장이라는 여자, 이름이 혹시…….”

“엘라네르라고 하더군.”

이번에는 아스테인의 얼굴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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