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황제의 자질을 가진 자 (1)
나는 황망한 눈으로 그것을 쳐다봤다.
아스테인이 선물한 소중한 인형이 부서지다니, 너무 당황해 그것을 주워들 생각도 못 했다.
단지 속상한 눈으로 인형을 망가트린 원흉인 비단을 쳐다봤다. 엘라네르로 추정되는 이가 내게 보낸 비단.
저것이 도대체 왜 밖에 나와 있었는지 모르겠다. 계속 내게 성녀가 될 것을 강요하는 글을 만들어 보여 서랍 안에 넣어두었는데.
나는 손을 덜덜 떨며 비단을 펼쳤다.
『단델리온 대공이 황제가 되길 바란다면, 네가 신전으로 가서 성녀가 되어야 할 거야.』
그러자 오늘을 기다렸다는 듯이 떠오른 메시지.
나는 그것을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엘라네르! 너는 도대체!”
원망스러운 마음이 치밀어올랐다.
겨우 아스테인에게 모든 것을 고백했다. 그리고 이제야 아스테인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
그런 내 노력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은 걸까? 엘라네르를 향한 원망이 점점 쌓여갔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침실 여기저기를 뒤져 가위를 찾아냈다.
가위로 비단을 자르자마자 잘린 조각 위로 또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내가 많이 원망스럽겠지만, 내 뜻을 아는 날이 오겠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듯한 말투는 더 부아를 치밀게 했다.
틀림없이 엘라네르는 나의 비극적인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게 또 그 길을 걸어가라고 강요해서는 안 됐다.
나는 망설임 없이 남은 비단을 반으로 잘라 내려 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떠오른 문구에 손이 멎었다.
『곧 우리는 만날 거야, 나의 날개여.』
나더러 날개라고?
엘라네르가 나를 날개라고 부를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를 날개로 부르는 이는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성녀가 아니듯, 엘라네르가 신은 아니었다.
나는 비단을 어쩌지 못하고 노려만 보며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순간, 비단이 스스로 불타올랐다. 푸른색 불꽃 속에서는 점차 무엇인가가 형체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신의 전령…….”
여신 데아 님이 가장 아낀다는 새, 행복을 부른다는 파랑새가 불꽃에서 날개를 펼쳤다.
그 새는 축복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 주변을 맴돌더니 창문을 통해 훨훨 날아가 버렸다.
바닥에는 이제 비단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불탄 흔적도, 엘라네르의 메시지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환상이라도 본 듯이.
* * *
다음 날 나는 해가 뜨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눈을 떴다.
“아가씨, 어제 언제 돌아오신 거예요? 너무 놀아서 피곤하신 거 아니에요?”
날 깨우러 들어온 셀레미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야, 조금 잠을 설쳤을 뿐이야.”
“아니, 왜요? 후작가에서 나온 뒤로는 잘 주무셨잖아요.”
“그냥 꿈자리가 사나웠나 봐.”
“왜요? 신께서 뭔가 예지라도 주신 거예요?”
나는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리고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예지라면 예지일까?”
작은 한숨은 저절로 따라 나왔다.
“어머? 정말요?”
하지만 멋모르는 셀레미온은 이 사실이 정말 기쁜 모양이었다.
베이트만 부인과 집사에게도 다 전할 만큼.
“아가씨, 오늘 빈민가 사람들이 들꽃을 꺾어 왔답니다.”
집사는 너무나도 뿌듯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커다란 화병에 가득 꽃을 꽂아 방문 앞, 복도에 놓았다. 전부 내 머리카락을 닮은 푸른 꽃이었다.
오늘은 그 꽃조차 보기 싫었다.
“사람들이 아가씨의 힘을 알아보고 찬양하는 것이 기쁘군요. 빈민가에서 올해는 전염병이 없다며, 다 아가씨 덕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예비 성녀를 모신다는 자긍심 가득한 집사의 모습은 언제나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아스테인과는 달리 그는 나를 이해해주지 않을 테니까.
“오늘은 예지까지 받으셨다니, 이제 성녀가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신께서도 알고 계신 것 아닐까요?”
“…….”
나는 무심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찬양하는 그의 모습이 오늘따라 유달리 더 불편했다.
엘라네르가 날 감시하려 붙여놓은 사람인가 싶은 망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집사님, 아가씨가 신전으로 가고 나면 어쩔 생각이에요?”
셀레미온의 질문에 베이트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쎄다. 원래라면 다음 예비 성녀님을 찾아내어 모셔야겠지.”
“설마 푸토르 후작가에서 다음 예비 성녀님이 나오진 않겠죠? 그럼 돌아가기 힘들잖아요.”
“사제인 동생의 말로는 이미 그 집안에서는 나오지 않았으니 다음 예비 성녀님도 아가씨처럼 다른 곳에서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하더구나.”
베이트만의 충직한 성심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저 이대로라면 그에게 나는 계속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미안할 뿐.
“그런데 예지 내용이 무엇인가요? 아, 혹시 황궁에 가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까?”
집사의 질문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조금 말문이 막혀 당황하려는 순간, 구세주가 다가왔다.
“모두에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신언이었다면 바로 말씀하셨겠지.”
아스테인은 언제나처럼 내게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줬다.
집사는 다행히 아스테인의 말에 쉽게 수긍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주제넘었군요.”
“점심을 먹고 우리는 황궁으로 가야 하니, 준비해주게.”
“네, 알겠습니다.”
집사가 복도를 떠난 뒤,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걸 아스테인이 안쓰럽게 쳐다봤다.
그는 핑계를 만들어 셀레미온까지 자리를 비우게 해줬다.
그런 뒤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줬다. 그 행동이 대단히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던 것 같은데…….
“힘드시지요?”
“네……. 편하지는 않네요.”
“어제보다 더 불안해 보이는군요.”
아스테인의 말에 눈이 조금 흔들렸다. 새벽에 받은 엘라네르의 메시지를 이야기해야 할까?
그는 엘라네르를 찾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 엘라네르가 한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게다가 내게 날개라고 부른 것을 알면…….
잠시 망설이는 사이 아스테인이 먼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예지라니, 왜 저들이 그런 오해를 하는 겁니까?”
“저야 미래를 보고 왔잖아요. 예지라면 예지죠.”
“흠, 제가 그 미래를 바꿔버릴 거니 나쁜 기억은 다 잊으십시오.”
“하지만 신이 내리는 재해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아스테인 님의 경쟁자들이 지금 벌이고 있는 일들을 제가 먼저 알고 있으니 도움이 될 거예요.”
“그렇군요. 저는 최고의 지원군을 얻은 셈이군요. 영광입니다.”
아스테인이 황제가 되는 길……. 그것에 내가 방해되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최선일까?
내가 성녀가 된다면 성기사가 되겠다는 아스테인. 그를 황제로 만들려면 내가 성녀가 돼야 한다는 엘라네르.
아스테인을 믿고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섣불리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문제가 있으신 것 아닙니까? 얼굴이 어둡습니다.”
“아니에요. 참 오늘 황제 폐하께 찾아가겠다고 전했나요?”
“네, 다행히 만나주겠다더군요. 무슨 바람인지……. 프레이아 님도 황궁에 온다니 만나주는 모양입니다.”
“잘 해결되면 좋겠네요.”
그래도 우리에게 다른 주제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잠시라도 내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으니.
“그런데 크리세우스 님은 돌아왔나요? 어제 카르헨의 일로 경비대에 간 이후로 보이질 않네요?”
“오전에 돌아왔다가 잠시 일이 있다며 확인하러 간다고 다시 나갔습니다. 조금 늦을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크리세우스는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그것도 다급한 얼굴을 한 채.
“주군! 큰일 났습니다! 그 카르헨이라는 놈이 사고를 쳤어요!”
아스테인과 나는 점심 식사 후 느긋하게 즐기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인데요?”
내가 크리세우스에게 묻자 그는 아스테인의 눈치를 봤다. 아스테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크리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약혼녀랑 길을 가다가 그 사채업자 놈을 만났답니다.”
“그런데?”
“그 개념 없는 사채업자 놈이 또 약혼녀를 강제로 데려가려고 했답니다. 그래서 사채업자를 죽도록 팼다네요. 사채업자가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답니다!”
나와 아스테인의 얼굴이 동시에 단단히 굳어버렸다.
* * *
황후궁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황후를 만나 차를 마시고 있었다.
“프레이아, 와줘서 고마워.”
나는 불편한 심기를 숨긴 채 카렌시아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줬다.
카렌시아와 관계없는 사람의 일로 그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오니까 마음이 놓이는 거 있지.”
옅게 웃는 카렌시아를 보며 나도 따라 웃어주었다. 카렌시아의 웃음은 평소보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배가 자주 아프셨다면서요? 배 속의 아이는 괜찮은 거예요?”
“응, 사실…… 아버지랑 유테르안이 찾아와서 난리를 친 바람에…… 신경을 많이 썼었나 봐.”
내가 아는 활발한 여인은 눈앞에 없었다.
첫 아이를 밴 것만으로도 많이 힘들고 부담스러웠을 텐데, 내 일을 돕느라 마음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
그게 너무나도 미안하고 고마웠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가족들과 사이가 나빠지셨네요.”
내 대답에 카렌시아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무슨 소리야? 너는 내 가족이 아니야?”
“그…… 죄송해요.”
“네게 언니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지는 사실 모르겠지만……. 그래도 네가 날 언니라고 생각하고 의지해주면 좋을 것 같아.”
카렌시아의 잔잔한 미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진심 어린 마음이 내 가슴속에도 전해졌다. 카렌시아는 내게 너무나도 큰마음을 전해줬기에, 나는 오늘 그것에 보답하고자 했다.
“저, 제가 배를 만져봐도 될까요?”
“배를? 아직 태동이 없는데? 그건 몇 달 더 기다려야 해.”
“알아요. 지난번에 큰 도움을 받았는데 축복도 제대로 못 드리고 갔잖아요.”
“아…… 정말? 나야 영광이지. 나의 아기님이 미래의 성녀가 될 이모에게 배 속에서부터 축복을 받는다면야. 역대 어느 황제 폐하도 태아일 때부터 축복을 받아보지는 못했을걸?”
카렌시아의 순수한 감탄사는 예상한 반응이었다. 아마 아스테인을 제외한 모두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정정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야?”
나는 빙그레 웃으며 오른손을 카렌시아의 배 위에 올렸다. 오른손에는 엘라네르가 내게 보낸 사파이어 팔찌를 차고 있었다.
그걸 보며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곧 팔찌로부터 신성력이 전해졌다.
“신성력은 따스한 거구나.”
카렌시아와 달리 나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따스한 것은 맞았지만 내게는 그저 차갑게만 느껴졌다.
“데아 님, 감사합니다.”
카렌시아의 감사 인사에 정신을 차렸다.
집중해야 해, 카렌시아의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보호하려면.
“끝났어요.”
작은 푸른 날개가 팔랑이며 카렌시아의 배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확인했다.
“신께서 황후 폐하의 아기님을 지켜줄 거예요.”
황제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황제가 제 죽음을 막기 위해 대비할 틈은 줄 수 없었다.
그 양심의 가책으로 카렌시아의 아이만은 지켜주고 싶었다. 비록 내 힘이 아닐지라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러니 이제 마음 놓아요. 산모의 마음이 태아에게 영향을 끼치는 법이랍니다.”
“응……. 알았어.”
하지만 생각보다 카렌시아의 얼굴이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역시 후작 때문이겠지?
“혹시 다른 근심거리가 있으세요?”
“그게…… 사실은…….”
카렌시아는 주변을 살피다가 수발들고 있던 시녀들을 멀리 물렸다.
넓은 정원에 우리 목소리를 들을 사람이 근처에 있지도 않은데 카렌시아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폐하가…… 다른 여인을 찾는 것 같아.”
나는 단번에 미간을 좁혔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인을 두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하는 것인지…….
무능하고 열등감만 많은 황제인데도 별 탈 없이 황실이 굴러가는 데에는 카렌시아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임신한 부인을 두고 딴짓이라니, 내가 더 화가 나려고 했다.
“확실한 거예요?”
“아니……. 그냥, 처음에는 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하니까 정말 기뻐하더니 이제는 나랑 식사도 잘 안 하고 늘 바쁘셔.”
그냥 단순한 의심인 걸까? 아니면 차마 치부를 드러내기 힘들어 저렇게밖에 말 못 하는 것일까?
그래도 초조한 눈빛의 카렌시아를 보니 마음이 쓰였다.
“그냥 바쁘신 거면 괜찮을 거예요. 설마 후계자를 잉태한 분께 소홀히 하겠어요?”
“그럼 다행이지만……. 그냥 암행을 나갔다가 성 밖에서 화려한 옷차림의 떠돌이 여자를 만났다는 말도 있고…….”
집시를 말하는 걸까? 집시 중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많았다. 그리고 정착하고 싶어 하는 집시들을 온갖 감언이설로 꼬여내 정부로 삼는 타락한 귀족들도 있었고.
하지만 웃기게도 집시들과 바람이 난 귀족들은 패가망신을 당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미신을 믿는 자들은 집시들을 피했다.
“떠돌이 여자라면 더 신경 안 쓰셔도 되죠.”
“그래야 하는데…… 그 여자가 나랑 닮았다는 말도 있고 해서 더 신경 쓰이나 봐. 내가 그분을 모실 수 없으니까 그러나 싶기도 하고.”
“황후 폐하와 닮았다고요?”
내 질문에 카렌시아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녀는 몇 번이나 입을 들썩이다가 겨우 말을 내뱉었다.
“응. 나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화려한 여자라고 했어. 눈동자는 너처럼 예쁜 황금색이고. 집시들의 수장이라는 말도 있더라.”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하필이면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