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테르가 정말로 신전을 무너트릴 수 있다면…… 그냥 두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지금까지 인테르에 늘 적대적이었던 아스테인의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네? 아니 왜……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신전으로 가서 억지로 성녀 행세를 해야 하는 위험은 사라질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내심 신전이 무너지길 바랐습니다.”
아스테인의 억눌린 목소리가 심장 주변을 맴돌았다. 그것은 작은 감동이 되어 물결치며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성력의 위력을 아는 나로서는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그런 말씀, 함부로 하다가는 신께서 벌을 내리실지도 몰라요.”
작은 목소리는 적잖이 떨렸다. 그건 지난 삶의 고통이 나를 짓누른 탓이었다.
아스테인은 이런 나를 조금은 안타까운 눈으로 봤다.
왜 고통받으면서도 신을 편드냐는 의미겠지?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아스테인 님을 신전에서 봤을 때는 정말 성심이 깊은 분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네요.”
나는 조금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살짝 멋쩍게 웃었다.
“프레이아 님께 잘 보일 방법이 그것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늘 그랬지만 아스테인이 한 번씩 던지는 말은 내 심장을 너무나도 심하게 흔들어댔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온몸의 피부가 화끈거렸다.
덕분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몇 번 벙긋거렸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먼저 말을 이었다.
“인테르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프레이아 님을 향한 공격을 멈추겠지요. 그들이 그래서 멈춰준다면, 제게는 그들을 적대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행동하겠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아스테인 외의 사람들에게 내가 가짜라는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말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최소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성녀가 되어야 한다’는 엘라네르가 한 말의 의미라도 알아내야 했다.
“진짜가 따로 있다는 말은 아직 세상에 할 수 없어요.”
“그건 그렇겠지요. 그랬다가는 푸토르 소후작이 기세등등해지겠군요.”
“그렇겠죠?”
나는 조금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밖을 내다봤다. 집시들은 아직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대공령에서 보았듯이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아니면 손가락질을 해대며 욕을 하고 내쫓거나.
하지만 그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들은 어째서 저렇게 우호적인 거죠?”
젊은 연인 하나가 집시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멀어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집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서로 말을 섞었다.
전혀 불편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서로 만난 것이 기쁜 듯 보였다.
“젊은 사람들, 특히 부유한 평민들 중에는 인테르의 의견을 존중하는 이들도 많다고 하더군요.”
“왜요?”
“아무래도 신전은 지금까지 부와 권력, 거기에 고귀한 혈통까지 지닌 이들에게 생긴 문제를 우선시해서 해결해 주었으니까요. 작년에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당연히 알고 있었다.
파미르 공작령의 외곽, 평민들의 거주지역에서 가장 먼저 발병했다. 푸토르 후작가와 사이가 나빴던 공작은 성녀님의 힘을 빌리는 것을 수치스러워했다.
결국, 전염병을 은폐하며 혼자 해결하려다가 황궁이 있는 하인델까지 병이 옮아왔다.
“하지만 그때는 인구가 많고 황제가 사는 하인델부터 치유해야 했어요.”
“그중에서도 귀족들의 타운하우스, 그곳부터 성녀님께서 정화하셨죠. 명분이야 황궁에 전염병이 옮아가는 것을 다급하게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지만요.”
분명 카르텔로를 비롯한 푸토르 후작가와 가까운 대사제들의 입김이 작용했었을 것이다.
기부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들부터 구해야 한다.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성녀님의 힘이 아니더라도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이들임에도…….
“순서가 어찌 되었든 성녀님은 이틀에 걸쳐 모든 전염병을 잠재웠지요. 그래서 표면적인 불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젊은 평민들 사이에 좋지 않은 시선이 생긴 것은 사실입니다.”
마음이 심란해졌다. 역대 예비 성녀 중에서 가장 신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나였다.
그래도 어린 시절 내게는 신전이 최종 목적지였다.
그렇기에 이렇게까지 변해버리고 손가락질받는 신전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성녀님께서 당신이 벌을 받는다고 표현하셨을까요?”
“성녀님이나 신전을 비난하고자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저 역시 성기사가 되어 신전의 비호를 받을 생각을 했었으니까요.”
“황제 폐하의 괴롭힘으로부터요?”
“아닙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고…….”
그는 조금 곤란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곧 결심한 듯이 내게 대답했다.
“프레이아 님께서 제게 진실을 알려주셨으니 저도 솔직해야 하겠지요.”
나는 눈을 조금 크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는 조금 더 난감한 얼굴을 했다.
“사실……. 모후와 외조부께서는 제가 반란을 일으켜서라도 황제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분들의 명예를 되찾아주길 바랐고요. 그래서 제 곁에 크리세우스를 남겼답니다.”
“크리세우스 님이 말했던 두 분의 유지라는 것이 그거였군요?”
“네, 하지만 저는 선황 폐하와의 약조가 있기에 반란을 일으킬 수는 없는 처지입니다. 여전히 저를 따르는 이들은 제가 황제가 되길 바라지만요.”
나는 침을 살짝 삼켰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도대체 왜, 기회가 왔는데도 황위 다툼에 뛰어들지 않은 거지?
“저를 따르는 이들, 그리고 두 분의 유지를 무조건 저버릴 수는 없어 신전으로 가려고 한 겁니다. 혹시라도 기회가 생겼을 때, 신전의 지지를 얻는다면 황위 다툼이 쉬워지니까요.”
“하지만 아스테인 님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황권 다툼에 뛰어들지 않으셨잖아요.”
나도 모르게 이미 사라진 시간의 일을 입에 담아버렸다. 놀라 입을 막아버리자 그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말해도 되는 것일까? 지난 삶에서 모든 것을 숨겼던 나를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을까?
비록 지워졌다고는 해도 그의 꿈이 나로 인해 모두 망가져 버렸는데…….
“무슨 뜻인지 여쭤봐도 됩니까?”
아스테인은 역시나 내 말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잠시 그의 눈을 쳐다봤다.
그는 내가 믿는 순간마다 언제나 실망하게 하지 않고 나를 믿어줬다. 심지어 그의 진심을 의심했던 순간에도 늘 날 신뢰했다.
그러니 나는 그에게 솔직해야 했다. 그리고 그래야 그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제가……. 시간을 되돌렸어요.”
아스테인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당신은 이전 삶에서도 나의 성기사였어요.”
우리의 지워진 시간을 덤덤하게 말하려 애썼다. 하지만 중간중간 울컥 쏟아지는 감정을 감당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차가 성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나는 그와 나의 비참했던 마지막을 눈물과 함께 쏟아내야 했다.
“가짜 성녀인 나를 진짜라 믿고 싸운 당신을 죽인 건 결국 나라고 생각해요. 당신을 속였으니까요.”
결국, 나는 또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아스테인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그를 죽음으로 내몬 내가 부담스러운 것일까?
“미안해요. 당신을 죽여놓고 또 찾아와서 위험에 빠트리기나 하고……. 너무 뻔뻔하죠? 그러니 날 따라 신전으로 가서 성기사가 되겠다는 다짐은 하지 마…….”
나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의 넓은 가슴이 내 얼굴을 가로막아서.
그날 절벽에서 떨어질 때 안겼던 가슴이었다. 그때처럼 그는 나를 그의 품에 온전히 가두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단단한 그의 품에서 나는 건강하게 뛰고 있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시간을 되돌려서까지 살린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열심히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을.
“저를 다시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대공성의 사람들은 이미 모두 잠이 든 시각, 나는 내 방으로 조용히 돌아왔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으읏, 아스테인 님. 잠시만요.”
나는 의자에 앉아 약간의 민망함이 담긴 신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잔뜩 주었던 힘을 풀고 살짝 뒤로 물러났다.
“많이 아픕니까? 생각보다 근육이 많이 뭉쳤습니다. 말렸어야 했는데 제 실수로군요.”
아스테인은 안타까운 눈으로 내 다리 위에 올려진 수건을 내려다봤다. 수건에서는 따끈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사실 아프다고 말하기는 애매했다. 간지럽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뜨거운 수건 위에서 아스테인이 주무르는 손길이 너무 섬세했다. 그것도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내 다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니 부끄러움은 배가 됐다.
“이제 멀쩡해진 것 같아요. 그만하셔도 돼요.”
이대로는 민망해서 안 될 것 같았다.
아스테인이 먼저 뭉친 근육을 풀어주겠다고 했을 때 거절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근육 뭉침을 만만히 보시면 안 됩니다. 잠들기 전에 혈액 순환이 잘되도록 온찜질을 하며 미리 풀어야 합니다.”
“차라리 셀레미온에게 부탁할게요.”
“아침까지 기다렸다가는 일어나자마자 고생할 겁니다.”
오늘 많이 늦을 것이라 이야기해둔 탓에 셀레미온은 먼저 잠이 들어 있었다. 베이트만 부인도 집으로 돌아갔고.
하녀라면 한밤중이라도 내 부름에 응해야 하는 게 맞지만, 내가 먼저 쉬라고 해놓고 다시 깨우기는 그랬다.
아스테인이 내 방에 따라 들어온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여인의 손보다는 제 손이 더 근육을 푸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아스테인은 오늘따라 고집을 피웠다. 평소 내가 바라는 것을 다 들어주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게 짜증이 나거나 싫은 것은 아니었다. 좋은 편에 가까웠다.
“미, 민망해요. 아스테인 님께 맨발을 보이는 것도, 이렇게 만지게 하는 것도…….”
나는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괜히 발가락을 꼬물거렸다. 아스테인은 그런데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결국 끝까지 아스테인의 손길을 받고야 말았다.
그는 깨끗한 수건으로 내 다리에 남은 물기까지 제거하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은 아스테인에게 조금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입꼬리를 조금 끌어올렸다.
“그야 오늘 프레이아 님이 제게만 비밀을 털어놓아 주었으니까요.”
노래를 부르지 않는데도 아스테인의 목소리는 노래하듯 들떠 있었다.
아스테인은 내 발에 편안한 슬리퍼를 신겨주었다. 여전히 입꼬리가 올라간 그를 보니 진작 말할 걸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
“아스테인 님. 그런데요.”
“죄송하지만 절 설득하려는 건 소용없을 겁니다.”
그는 참 눈치가 빨랐다. 심지어 거절도 빨랐다.
그것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나는 무릎 위에 놓인 내 손을 모아 쥐었다.
“하지만 지금의 황제가 죽었을 때 황위 다툼에 제대로 참여하려면요.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때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아스테인이 내 손을 그의 손에 담았다. 양손 가득 그의 온기가 전해지도록 단단히.
그러고는 내 손이 모인 곳에 그의 뜨거운 입술을 갖다 댔다. 그의 입술은 다정하게 날 간질여 주었다.
고개를 든 그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색이 짙어져 있었다.
“프레이아 님이 알려주신 미래 덕에 단단히 준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한 번 내린 결정을 바꿀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무엇보다 저와 프레이아 님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엘라네르라는 여자를 꼭 제 손으로 찾아낼 겁니다.”
나는 단단히 다짐하는 아스테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를 믿기에, 그의 말대로 모든 것을 따르고 싶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이 쉽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미래를 겪은 자만이 가진 불안감이었다.
“저와 프레이아 님이 신전으로 가는 일은 엘라네르, 그 여자를 찾아낸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편히 쉬십시오.”
“네……. 알겠어요.”
나는 아스테인을 이길 수가 없었다.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도 그의 말이 맞았다. 아직은 시간도 기회도 남았으니까.
“그리고 이거, 아까 딴 인형입니다.”
토끼 인형을 꺼내든 그는 내 침대 옆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 옆에는 그가 줬던 또 다른 목각인형이 있었다.
아스테인은 목각인형을 잠시 툭 건드렸다.
그러더니 가볍게 웃었다.
“이 목각인형이 영, 쓸모없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뭐? 저 인형의 의미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내 얼굴이 화르르 타올라 버렸다.
나는 조금 황당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조금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니.
“아스테인 님!”
“얼른 주무십시오. 너무 늦었습니다.”
아스테인은 약간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밖으로 도망치듯 나갔다.
그런 그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좋았다.
그와 나 사이의 간격이 한 걸음 더 줄어들었다.
“정말…… 다행이야.”
그는 언제나처럼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어주었다. 조금은 행복한 얼굴로 아스테인이 놓아둔 토끼 인형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 옆, 목각인형 밑에 깔린 비단이 살짝 빛났다. 도대체 언제부터 저 비단이 밖에 나와 있었던 거지?
그리고 그 빛이 선명한 무늬를 그리려는 순간, 아스테인이 선물해 준 목각인형이 비단 위에서 비틀댔다.
그것은 내가 손 쓸 틈도 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런…….”
뽀뽀하던 두 아기가 둘로 갈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