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배려는 소중한 사람에게만
리라가 집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우리는 다시 루크데린 거리로 돌아왔다. 내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 했던 축제의 하이라이트, 봄의 여왕 선발대회를 보러 온 것이었다.
“못 볼 줄 알았는데 아직 시작을 안 했네요?”
리라를 바래다주고 오는 바람에 많이 늦어졌다. 그래서 반쯤 포기했었다.
마지막 결과라도 보면 다행이라 여기고 돌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장미를 선발하는 대회는 아직 시작하기는커녕, 주변이 어수선해 시작할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였다.
“주군, 잠시만요.”
먼 곳에서 우리를 호위하던 아스테인의 수하 하나가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아스테인은 그것을 전하면서 얼굴을 살짝 구겼다.
“소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소란이요?”
“네, 성인 남자들이 광장에서 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상대가…….”
아스테인이 조금 찝찝한 얼굴로 망설이다 내게 말했다.
“제스티안의 수하와 리라라는 여인의 약혼자라고 합니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우리가 리라를 좀 더 달래고 안정시키는 사이 그녀의 약혼자는 사고를 쳤다.
물론 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카르헨이라는 자가 경비대에 혼자 끌려간 것으로 정리됐다고 합니다.”
나는 눈을 잠깐 찌푸렸다.
아마도 이것은 권력과 돈의 차이로 빚어진 불공평한 결말이겠지? 조금 안타깝기도 하고, 살짝 화도 나려고 했다.
“크리세우스가 경비대로 갔습니다. 곧 풀려날 겁니다.”
“그럴까요?”
“네, 대신 내일이라도 형님을 찾아뵙고 제스티안이 저지르고 다니는 일을 항의해야겠습니다.”
심기가 불편한지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조금 낮게 깔렸다. 동생의 일도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황제를 찾아가는 일도 불편한 것 아닐까?
“같이 가요. 혼자 가면 황제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잖아요. 마침 황후 폐하께서 절 만나고 싶어 한다니 함께 가는 게 좋겠어요. 제가 곁에 있으면 신전 때문에라도 조심하겠죠.”
아스테인은 내 말에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곧 예쁘게 눈을 말았다.
“든든한 지원군이 곁에 계셔서 다행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아스테인은 여전히 변함없는 태도로 대해주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그런 한편,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아스테인을 설득하지 못했으니까.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아스테인 님, 아까 우리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잖아요. 정말로 제가 신전으로 가면 끝까지 성기사를…….”
“아! 이제 시작합니다. 저기 기사들이 좋은 자리를 잡아놨다고 하니 저쪽으로 가시죠.”
아스테인이 내 말을 끊어냈다.
“아스테인 님.”
그는 그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벌써 잊은 것은 아닐 테고, 성기사가 되면 안 된다는 내 말이 와닿지 않는 걸까?
나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를 살짝 노려봤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조금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여긴 아직 사람이 많으니, 나중에 성으로 돌아가서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스테인의 말이 옳았기에 나는 표정을 살짝 풀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아스테인이 눈을 반달로 만들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자상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오늘은 그의 미소를 보기 위해 나온 거니까, 나도 웃으면서 내 손을 그에게 겹쳤다.
* * *
새카만 밤이 절정에 달하고 난 뒤, 올해 봄의 여왕이 결정되었다.
나는 그 광경을 눈을 떼지 않고 끝까지 지켜봤다.
아름다운 사람들보다 더 화려하고 빛나는 장미들. 그들이 전해주는 달콤한 향기는 잠시 불안하고 혼란스럽기도 했던 마음을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혀주었다.
“와, 정말 다양한 종류의 장미가 있었네요.”
그리고 장미를 이용해 이렇게나 많은 물건을 만들어 낼 줄 몰랐다.
꽃꽂이한 바구니나 모자 장식은 기본이었다.
드레스의 장식이나 케이크에도 올라갔고, 심지어 마차를 온통 장미로 장식해서 참가한 사람도 있었다.
“봄의 여왕이라는 말에 걸맞은 장미들이 정말 많았네요.”
“마음에 드는 장미가 있었습니까?”
“상을 받은 장미는 이제 비싸게 거래된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육성한 장미로 우승하기 위해 귀족들도 참여한 것이지요.”
명예를 가진 장미의 값어치는 높아져 한 해 동안 비싼 값으로 팔린다고 했다.
그래서 가끔 평민이 우승한 경우, 그는 인생 역전을 이루기도 했다고.
“아스테인 님의 정원에 있는 푸른 장미가 대회에 나왔다면 바로 우승했겠죠?”
“이미 모후께서 들고나와 우승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인연이 되어 선황 폐하의 눈에 띄어 황후가 될 수 있었죠.”
조금은 쓸쓸한 눈을 한 아스테인이 천천히 말을 했다. 내가 괜히 말을 꺼낸 것일까?
후작은 아스테인의 어머니를 나쁘게 표현했었다. 악독한 여자였다고.
하지만 아스테인의 반응을 보면 그런 분이 아니었을 것 같았다. 성에 있던 그분의 초상화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느꼈었다.
자애롭고, 온화한 분.
“좋은 어머니셨나 봐요.”
“딱히 그렇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니로서는 제게 최고였지만, 남들에게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형제들에게는요.”
아스테인은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말을 꺼내는 바람에…….”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모후께서 그걸 들고 나가는 바람에 블루 로즈가 악독한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블루 로즈라는 소리에 얼굴이 살짝 굳었다. 별로 달가운 화제가 아니었다.
아스테인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이어나갔다.
“덕분에 이제는 그 아름다운 장미를 다른 이들에게 공개하기 힘들어졌답니다.”
“역시 블루 로즈는 별로네요.”
나도 모르게 쌀쌀맞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아스테인이 나를 돌아봤다.
“그때 말씀하신 일 말입니다. 프레이아 님을 후작에게 보낸 것, 그게 블루 로즈가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증명하면 그들의 이미지가 바뀔 수 있겠습니까?”
나는 왜 아스테인이 그런 암흑 길드의 편을 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어떤 거짓이나 다른 의도가 들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진심으로 오해를 벗겨주고 싶다는 간절함만이 가득할 뿐.
“오해라면 제가 사과해야겠죠.”
아스테인은 그 말에 달빛보다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내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제 광장을 정리하고 모닥불을 피울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울려 춤을 춘다고 하더군요. 함께하시겠습니까?”
나는 잠시 다리를 쳐다보았다. 리라가 일하는 가게에서 쉬기도 했고 마차를 타고 한동안 옮겨 다닌 탓에 움직임이 좋아졌다.
종아리가 살짝 뭉쳐 땅기는 느낌이 들던 것도 사라졌다.
“좋아요. 아스테인 님과 함께라면 해볼래요.”
그러자 이미 밝게 웃던 그의 얼굴에서 더 빛이 났다.
아직은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아스테인을 달래서 미래를 바꿔야 하는 책임이 내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스테인을 위해 지금은 조금만 즐기기로 했다. 내게는 이것이 마지막 일탈일지도 몰랐다.
“다리가 아프면 반드시 쉬어야 합니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함께할 시간은 많으니까요.”
하지만 아스테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내게 잠시나마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게 해줬다.
* * *
모닥불을 피워 놓고 사람들이 원을 그리고 섰다. 남녀가 교차하고 서서는 파트너와 팔을 끼고 발을 번갈아 가며 중앙을 향해 차면서 둥글게 돌아가는 군무를 함께 췄다.
집시라고 불리는 떠돌이 집단이 주로 추는 춤이라고 했다.
“지난번보다도 춤을 잘 추시는군요.”
“재밌어서 그런가 봐요.”
다른 사람들은 중간중간 파트너가 바뀌기도 했지만, 아스테인은 그것을 요리조리 피하게 해줬다.
모르는 사람과 손잡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이해한 것 같았다. 아니면 단순히 호위의 문제일지도 모르고.
어쨌든 그 덕분에 나는 긴 시간 동안 아스테인과 더 가까이, 더 오랫동안 함께 춤을 출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다리에 무리가 가는 것 같습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신난다고 너무 오랫동안 뛰어놀았다.
이제는 더 무리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스테인은 사람들 속에서 나를 안전하게 밖으로 빼냈다. 손과 몸으로 다른 이들을 막아주는 모습이 유달리 듬직하게 보였다.
“성으로 돌아가 쉬면서 근육을 풀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따스한 물에 족욕이라도 하면서요.”
리라의 가게에서는 정신이 없어서 족욕을 못 하고 나왔었다.
“그래야겠죠?”
이마에 몽글몽글 솟아오른 땀을 아스테인이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몸을 맡기는데 장미 향이 살짝 섞인 봄바람이 불어왔다.
아직 남아 있는 불안과 근심을 날려버릴 만큼 달콤하고 설레는 바람.
그것은 눈앞의 남자가 내게 준 선물이었다.
“사람도 많고 다리도 불편하니 제게 많이 의지하고 걸으셔야 합니다.”
이런 작은 마음 씀씀이조차 정말 고마웠다.
“아스테인 님, 도대체 이런 배려는 누구에게 배운 건가요?”
조금은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면서 물었다. 그가 내민 손에 내 것을 얹자 그가 빙그레 웃으면서 날 끌어당겨 그의 곁에 바짝 붙어서게 했다.
“선황 폐하와 외조부께 배웠습니다. 두 분 다 여자에게는 친절해야 한다고 가르쳤거든요.”
“그렇군요. 그럼 아스테인 님은 모두에게 친절하다는 소리를 들었겠네요.”
조금은 뚱한 목소리가 나왔다.
참, 유치하게도 이건 질투였다. 내가 아닌 이에게도 나에게 하듯 다정했다고 생각하니 심술이 났다.
“아니요. 두 분이 말씀하신 배려는 소중하게 생각하는 여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아스테인의 말에 나는 멀뚱히 그를 쳐다봤다.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곧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러자 심장이 콩콩 존재를 알렸다.
소중한 여인. 그게 나라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내가 가짜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그런 말을 해주는 것이 너무 설렜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작은 그림이 그려졌다.
단델리온의 대공비. 미래에 대공비의 방을 쓰는 사람이 여전히 나일 수도 있을까? 정말로?
“고, 고마워요. 소중하게 여겨줘서요.”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숙이고 있었다. 아스테인은 이런 날 또 배려하고 있는지 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다.
조금 마음이 진정된 후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아스테인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고 끊임없이 웃어주고 있는 그의 보석 같은 눈과.
“그런데 도대체 왜 저 같은 걸 소중하게 여겨주시는 건가요? 전 진짜도 아니고…….”
조금은 대범하게 먼저 질문을 꺼냈으면서 목소리는 소심하게도 작아졌다.
사실 회귀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가 이렇게나 내게 늘 친절한 이유가 궁금했다.
아스테인은 질문을 듣고 따뜻하게 웃었다.
“제게 어머니와 같은 위로를 건네주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게 혹시 저와 처음 만난 그날이었나요?”
“네, 맞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 시기에 아스테인은 여러 문제로 방황했다고 들었다. 나는 아직 그날의 일이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에게 내가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기억이 나지 않나 보군요.”
“음……. 죄송해요. 다시 그 장소에 가면 떠오를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내일 황궁에 갔다 오는 길에 갈까요?”
조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떠올리고 싶었다. 아스테인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추억.
그것이 아스테인의 마음속에서만 살게 둘 수는 없었다. 내 마음속에도 그 추억이 함께하길 바랐다.
“꼭 기억해낼게요.”
아스테인에게 약속했다. 그러자 다시 그의 얼굴에 예쁜 미소가 꽃피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성기사가 되는 일은 포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건 저도 양보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프레이아 님께서 신전으로 가면 저도 갑니다.”
“아스테인 님.”
조금은 고집스러운 모습으로 아스테인은 그 문제에 관한 대화를 거부했다.
내가 아무리 달래고 얼러도 그는 듣지 않았다.
그가 날 얼마나 걱정해서 하는 행동인지 알기에, 화를 낼 수도 그렇다고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왜 이야기는 계속 제자리걸음일까?
“잠시, 제 뒤로 붙으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아스테인이 나를 감싸듯 보호하며 앞을 주시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집시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테르인 것 같습니다.”
집시가 왜……?
하지만 금방 그들이 신을 싫어하는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에게서 버림받은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하늘의 별자리를 보거나 카드를 이용한 점을 보면서 미래를 예측했다. 그것이 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기에 미움받는다고 말하고는 했다.
“신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를 믿어야 해요.”
“신이 아니어도 인간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랍니다.”
그들이 내 앞으로 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가면과 가발로 모습을 숨겨서 나를 알아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우리에게도 신전의 부당함을 역설하고는 지나쳤다.
“아스테인 님.”
“쉿, 조심하십시오. 다행히 프레이아 님을 노리고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들을 피해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창밖으로 집시들을 보면서 아스테인에게 조심히 권했다.
“그런데 지금 이 기회에 저들을 잡아들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아스테인은 잠시 눈을 찡그렸다.
곧 나는 아스테인에게서 예상 밖의 대답을 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