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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31화 (31/101)

31화. 아스테인과 처음으로 둘이서 (2)

루크데린의 밤은 낮보다 밝았다. 화려한 꽃과 나비 모양으로 장식된 등불은 구석구석 아름다운 무늬의 빛을 내었다.

나는 한시도 쉬지 못하고 그것들을 눈에 담느라 바빴다.

“그렇게 신기하십니까?”

문득 옆에서 아스테인이 건네는 말에 부끄러워졌다.

“처음이에요. 루크데린 거리에 놀기 위해서 온 건요. 저녁에 돌아다니는 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축제를 즐기는 것도 이제야 해보네요. 감사해요.”

아스테인이 쓰고 있는 하얀 가면 너머로 보라색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동정을 받고자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지금까지 내 삶을 말하고 싶었을 뿐.

그게 아스테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라면 싫었다. 물론 그의 눈물이 아름답기는 했지만, 그가 다시 슬픈 얼굴을 하는 것은 싫으니까.

“열심히 즐겨야겠어요. 후회가 남지 않게, 밤새도록요.”

그래서 더 밝고 쾌활한 목소리로 그에게 외쳤다.

아스테인의 팔을 끌고 앞장서는 것도 내 몫이었다.

아스테인은 아무런 불평 없이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한참을 살피다 나는 마음에 드는 곳에 섰다.

“이거 해볼래요.”

장식장에 놓인 인형을 작은 활로 맞혀 바구니로 떨어트리면 그걸 받아가는 놀이였다.

하지만 내가 날린 촉이 둥근 화살은 인형 근처에 날아가지도 못했다.

“생각보다 어렵네요.”

나는 기가 죽은 채 활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내가 내려놓은 활을 들었다.

“갖고 싶은 인형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아니, 딱히 인형이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럼, 제가 활 쏘는 방법을 알려드려도 될까요?”

나는 잠깐 망설이다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아스테인이 가져다준 가면 말고도 검은색 가발을 쓰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도 될 것 같았다.

“가르쳐 주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아스테인이 내 뒤로 다가왔다. 그는 뒤에서 내 양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에게 완전히 안긴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이게 처음은 아니었다. 심지어 가까이서 춤도 췄는걸?

하지만 그때보다 긴장은 더 많이 됐다. 그와 말을 탔을 때보다 더 가까이서 그의 숨결이 느껴진 탓이었다.

“몸에서 힘을 빼십시오.”

“네…….”

하지만 그게 될 리가 없었다. 그의 체온과 라일락 향이 온통 날 감싸고 있었다.

“다리를 어깨너비로 먼저 벌려야 합니다.”

“이, 이렇게요?”

어쩌지? 큰일 났다.

혼자서 활을 쏠 때보다 몸이 더 굳었다. 어색해진 몸은 쭈뼛대느라 이상한 자세가 되었다.

그러자 뒤에서 살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춤을 추듯 내 팔을 잡고 살살 움직여줬다. 거기에 몸을 맡기자 어느새 나는 과녁을 향해 비스듬하게 서 있었다.

“이제 됐군요. 그럼 왼손으로 활을 들어보십시오.”

아스테인의 말에 따라 팔을 들어 올렸다. 아스테인은 내 팔을 잡고 그것이 아래로 처지지 않게 단단히 붙들었다.

그리고 남은 손에 화살을 들려줬다.

화살을 활시위에 건 뒤 잡아당겼다. 처음보다 쉽게 활시위가 늘어났다. 이건 아스테인의 힘이 작용한 덕분이었다.

“화살을 놓기 전, 크게 숨을 들이마셔야 합니다. 명중하고 싶은 대상을 집중해서 바라보십시오. 한쪽 눈을 감는 것도 집중에 도움이 됩니다.”

아스테인은 내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게 끝까지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내 심장이 얼마나 크게 요동치고 있는지 알고나 있을까? 여기서 도대체 어떻게 집중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의 향이, 그의 체온이 내 머리를 이렇게나 어지럽히고 있는데.

“활시위를 놓는 순간에 호흡이 흐트러지면 안 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세를 유지해야 원하는 것에 화살이 닿을 겁니다.”

애써 아스테인의 말에 집중하며 인형을 노려보았다. 시위를 놓기 직전에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손가락을 놓는 순간.

화살은 정확하게 내가 노린 인형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인형을 바구니에 쏙 들어가게 했다.

“와! 성공했어요!”

나는 살짝 동동 뛰며 좋아했다. 뒤를 돌아 아스테인을 찾으니 그가 흐뭇한 눈으로 칭찬을 해주고 있었다.

“흠, 하지만 혼자서는 못 했겠네요. 아스테인 님의 힘이 아니었다면 안 됐을 거예요.”

“아닙니다. 혼자서도 해보십시오. 대신 제가 말한 것을 잊지 않으면 됩니다.”

나는 입술을 잠시 삐죽이면서도 그가 시키는 대로 해봤다. 확실히 자세가 달라지자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가 늘었다.

정확도는 그가 잡아줬을 때보다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다시 열 번의 시도 끝에 혼자 힘으로 인형을 손에 넣었다.

“와! 그래도 한 번은 혼자서 명중했어요. 물론, 힘이 모자라서 인형을 겨우 떨어트렸지만요.”

“근육이 모자랍니다. 아직 너무 몸이 연약하신 탓입니다. 그러니 식사량을 조금 더 늘려야겠습니다.”

아스테인은 상품으로 받은 아기 토끼 인형을 챙긴 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방금 그가 했던 말을 지킬 생각이었나 보다.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들을 여기저기 찾아다녔으니까.

“음, 맛있다. 아스테인 님도 드세요.”

걸으면서 먹어서인지 소화가 잘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평소와 달리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도 늘었다.

“이거, 먹고 싶어요.”

“이것도 맛있습니다.”

아스테인은 내가 가리키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사다 주었다. 나는 아기 새처럼 그것을 계속 받아먹었고.

“와, 진짜 맛있네요.”

“평소보다 잘 드셔서 다행이군요. 요리사를 바꾸면 성에서도 많이 드실까요?”

“밖에서 먹어서 그런 거예요! 요리사님들의 탓이 아니라요!”

아스테인과 이런 시간을 갖는 것이 처음이어서겠지?

셀레미온과 대공령의 시장을 구경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친구와 나들이를 하는 기분이었다면 지금은 데이트를 하는 것 같았다.

“저기 연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인형극을 한답니다. 보러 가시겠습니까?”

“네, 보고 싶어요.”

인형극을 보기 위해 모여 있는 저 연인들처럼, 나도 다정한 사람과 함께하고 있었다.

회귀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아스테인과 보내는 특별한 시간.

어느 것 하나 즐겁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억지로 즐거운 척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입술이 올라가는 짜릿한 경험들이 이어졌다.

입꼬리가 내려갈 틈 같은 것은 없었다.

“즐거우신 것 맞습니까?”

“네, 정말 나오기를 잘했어요. 그런데 너무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것 아닌가요? 아스테인 님이 상으로 얻은 시간인데요.”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은 프레이아 님의 미소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아스테인은 잔뜩 붉어진 내 볼을 감상할 뻔했다. 면역이 생겼다고 믿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럼…… 성공하셨네요.”

나는 눈을 곱게 접을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을 하라고 해도 할 수 없을 만큼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

나를 따라서 아스테인의 눈도 점차 예쁘게 휘어졌다.

“더 돌아다녀 보겠습니까?”

“각오하셔야 해요. 거리에 불이 꺼질 때까지 돌아다니며 놀 거니까요.”

아스테인이 준비해준 가면과 가발 덕분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은 내게 자유를 줬다.

마음껏 웃고 떠들고, 뛰어놀고. 단 한 번도 웃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저 행복했다. 아스테인과 함께라서.

* * *

루크데린 거리를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모르겠다. 길거리의 가게들뿐 아니라 상점들도 여러 군데 방문했다.

그러다 어느 음식점 앞에 왔을 때, 아스테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잠시 여기에 들러서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 돌아다니고 싶은데요?”

“걸음이 불편해 보이십니다. 다리가 아프신 것 아닙니까?”

아스테인을 속일 수는 없었다. 많이 걸어서인지 종아리 뒤쪽이 땅겨서 조금 전부터 걷는 것이 힘들어졌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소리 내어 웃을 때마다 아스테인의 눈이 휘어지는 것이 보기 좋았으니까.

그가 내 미소를 보고 싶어 했듯, 나도 그의 미소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티가 많이 났나요?”

“네. 그러니 휴식이 필요합니다.”

조금은 엄한 얼굴이 된 아스테인의 말을 따라야 했다.

그는 나를 음식점의 야외 테이블로 이끌었다.

“잠시 시원한 것을 마시면서 발을 쉬게 해야 합니다. 무리하다가는 근육이 뭉쳐 며칠 고생할 겁니다.”

아스테인은 곧바로 종업원을 불렀다.

우리에게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오던 종업원의 얼굴을 보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붉은 머리의 여인, 리라였다.

“손님,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하지만 리라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가면과 가발을 쓰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못 알아볼 줄은 몰랐다.

“시원한 사과 주스와 치즈케이크를 부탁하지.”

아스테인의 주문을 받고 돌아가는 리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저 여인을 그렇게 빤히 쳐다보십니까?”

“그게……. 그때 기억나요? 엘라네르일지도 모른다고 제게 보냈던 여인요.”

“아, 그렇군요.”

“열심히 사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네요.”

나는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계속 쳐다봤다.

조금 뭉클한 기분도 들었다.

리라는 잠시 후 우리에게 주문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맛있게 드세요.”

“고마워요.”

내 인사에 리라는 케이크를 내려놓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어머, 어머머머!”

내 목소리를 기억하는구나.

“쉿,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나온 것이니 소란을 일으키지 말도록.”

아스테인의 조금은 서늘한 당부에 리라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잠시 후 입을 뗀 리라는 너무나 반가운 눈으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리라는요?”

“그 예비…… 아니 아가씨 덕분에 주급도 꼬박꼬박 받고 잘 지내고 있어요! 예비 성녀님의 축복을 받았다니까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를 받아서 몸값도 제법 올랐답니다.”

마지막 문장은 나만 들으라는 듯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가짜 축복을 내린 입장에서는 감사 인사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일하는 게 힘들지는 않나요?”

“물론 가끔 질척대는 늙은 귀족들이 있어서 피곤하죠. 그래도 이곳에서 일할 수 있어서 행복해요. 진짜 다 아가씨 덕분이라니까요.”

리라는 내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그리고 빈민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한참이나 떠들어댔다.

“늘 말라 있던 우물이 이젠 물이 마르지 않는대요. 그래서 요즘 빈민가에는 봄부터 종종 생기던 설사병도 없어요.”

회귀 전 이 시기 빈민가에는 예년보다 심한 전염병이 돌았다.

매년 늦봄이 되면 더러운 물 때문에 종종 그런 일이 있긴 했지만, 그때는 유달리 지독했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을 만큼.

“다들…… 아프지 않은 건가요?”

“얼마 전에도 오셔서 잔소리하셨다면서요? 그 덕분에 올해는 무사히 넘긴 것 같아요. 심지어 천식 환자도 줄었는걸요? 다 아가씨 덕분이에요.”

오늘 신전에서도 성녀님께 칭찬을 받았다.

빈민들을 위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전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이들의 삶에 도움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마냥 기뻐해도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신성력이 없어서 한 일과 엘라네르의 힘이 만든 기적이 섞여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진짜 성녀라는 이미지를 계속 덧씌우고 있었다.

숨이 막혀서 죽을지도 모를 만큼.

“프레이아 님이 민망해하니 그만했으면 좋겠군.”

그때 아스테인이 나섰다. 언제나처럼 그는 내 좋지 않은 기분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죄, 죄송해요.”

“아니, 괜찮다. 그런데 혹시 뜨거운 물을 양동이에 담아 줄 수 있나? 수건도 필요하다.”

“아, 네. 준비해 드릴게요.”

리라가 순식간에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지켜보던 아스테인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역시나 아스테인이 걱정스레 내게 물어왔다.

그 모습이 조금 날 울컥하게 했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갑갑해진 속을 털어놓고 싶어졌다.

“사람들은 내가 백조인 줄 알아요. 나는 진짜 백조가 나타나면 쫓겨날 거위일 뿐인데요. 우아하게 날지도 못하는 주제에 백조인 척하면서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마저 속여야 하는 그런 거위요.”

나는 조금 기운 빠진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괜히 말했을까? 엘라네르를 찾고 나서 말해주기로 약속했으면서.

하지만 그때까지 참기가 힘들어졌다.

이대로 엘라네르의 함정에 빠져 차가운 얼음물 속으로 끌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내 영혼부터 얼었다가 산산이 부서질 테니.

아스테인이라도 이런 내 처지를 이해해주면 안 될까? 부디 차마 직접적으로 전하지 못한 말의 의미를 알아주길…….

나는 초조하게 아스테인의 답을 기다렸다.

“프레이아 님이 백조가 아니라 하더라도 제게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고, 지켜드리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한 박자 늦은 대답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가 내뱉은 말을 곱씹자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며 존재를 알려왔다. 설마…….

“처음부터 프레이아 님이 거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성으로 모셨으니까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가 뛰어올랐다.

지금까지 그가 내게 실망할까 봐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스테인이 내 곁에 있어 주길 바랐기에 숨겨야 했다. 그가 날 바라보는 눈이 차가워질까 무서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아스테인의 입술만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입술이 조금씩 다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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