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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30화 (30/101)

30화. 아스테인과 처음으로 둘이서 (1)

“신성력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잘 보고 똑똑히 기억해요. 이 힘을 누가 불러왔는지.”

내 말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라네르의 도움 같은 것은 다시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를 구해야만 했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그러자 팔찌에 달린 푸른 사파이어에서 따스한 기운이 번져왔다.

“아아아! 이게 말로만 듣던 신성력……!”

아이의 어머니가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와 동시에 따스한 푸른 빛은 날개가 되어 아픈 아이의 가슴 위로 내려앉았다.

벌어졌던 상처는 완전히 오므라들었고, 부러져 비틀린 뼈는 제자리를 찾아갔다.

곧, 아이는 평온한 숨을 쉬며 잠이 들었다.

“아아아! 기적이 왔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예비 성녀님.”

“따스한 물로 핏물을 닦아내면서 체온을 올려주세요. 그래야 회복이 빠를 거예요.”

“네, 네, 알겠습니다!”

아이의 엄마와 의사가 부지런히 잠든 아이를 보살피는 모습을 잠시 들여다봤다.

아이를 마사지하면서도 연신 내게 기적을 내려줘서 감사하다며 인사하는 여인의 모습에 뭔가 입이 씁쓸했다.

이 인사는 내가 받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소후작, 내게 할 말이 없나요?”

나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고 유테르안을 향해 돌아섰다.

분한 얼굴을 한 그는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프레이아 님을 평생 괴롭힌 것으로 모자라 또 망신을 주려고 했군. 오늘 일은 신전뿐 아니라 황실에도 보고할 것이다.”

으드득 이를 간 유테르안은 결국, 내게 고개를 숙였다.

“누님의 능력을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유테르안은 사고를 당한 아이의 어머니에게 보상의 의미로 금화가 든 주머니를 던지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하아……. 이런 상황은 만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괜찮으십니까?”

내 불안한 마음을 눈치챈 아스테인이 물어왔다. 나는 팔찌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지 않고 그를 쳐다봤다.

“그만 성으로 돌아가요. 진짜 쉬고 싶어요.”

아스테인은 지친 내 목소리에 더는 캐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 * *

성에 돌아오자마자 마주한 것은 잔뜩 들뜬 집사였다. 그는 내가 또 기적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경외심 가득한 찬사를 쏟아냈다.

신과 성녀를 존경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알지만 속이 편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내 방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혀 주는 셀레미온도 즐거운 얼굴이었다.

나만 여전히 찝찝하고 떨떠름한 상태였다.

“오늘 너무 잘됐지 뭐예요. 도련님께 한 방 먹이고, 성물도 발견하고. 후작가에서 진짜 땅을 치고 후회하겠어요.”

셀레미온은 팔찌를 넣어둔 상자를 내 침대맡에 올려줬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그리고 내게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비단을 내밀었다. 얼핏 보면 그것은 버려야 할 쓰레기 같은 모습이었다.

“버려요?”

“아니, 일단 놔둬.”

그냥 엘라네르의 경고라고 보기에는 석연찮았다.

무엇인가 내게 전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낼 쉬운 방법은 곁에 있었다.

“이 상자에 같이 넣어둘까요?”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엘라네르의 팔찌. 분명 같은 날 두 물건이 내 손에 들어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녀가 남긴 메시지를 알아내려면 엘라네르의 신성력을 이용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셀레미온 앞에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엘라네르가 무슨 말을 남겼을지 알 수 없으니.

“응. 일단은 넣어둬.”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엘라네르가 친 거미줄에 걸린 나비가 된 기분이 들었다.

셀레미온은 비단을 곱게 접어서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인테르인지 뭔지는 왜 계속 아가씨를 노린대요? 그런 미친 것들은 신성력으로 바로 천벌을 내리면 안 돼요?”

“신성력은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는 데 쓰는 힘이 아니야.”

근본적으로 신성력은 사람을 구하는 기적을 위해 존재하는 힘이었다. 오직 남을 위해 쓰이는 힘.

그래서 성녀에게 성기사가 필요한 것이었다.

“흐음, 신성력이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줄 알았어요.”

“내가 아닌 남을 위한 힘이니까.”

“그래서 성녀님이 더 멋있는 것 같아요.”

셀레미온은 나를 찬양하면서 침대 위를 정리해줬다. 그 뒤, 그녀는 나에게 쉬라면서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잠옷을 입고 침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침대 옆 협탁 위에는 셀레미온이 남기고 간 상자 말고도 수를 놓던 손수건이 올려져 있었다.

아스테인을 위해 수를 놓던 손수건이었다. 그걸 보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하아……. 어렵다.”

나는 셀레미온이 넣어준 비단과 사파이어 팔찌를 꺼냈다. 양손에 쥐고 그것을 번갈아 보던 나는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솔직히 두려웠다. 늪에 빠진 사슴이 된 기분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치고 버둥거려도 벗어날 수 없는.

하지만 외면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나는 팔찌를 쥔 손에 힘을 주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복도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바로 방문에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스테인의 목소리에 나는 팔찌와 비단을 후다닥 치워버렸다.

문 앞에 선 그의 손에는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지난번에 날 치료해줄 때 들고 왔던 약이 든 바구니가.

“들어오세요.”

그가 왜 약 바구니를 들고 왔는지를 떠올린 나는 다급히 방문을 활짝 열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이 방에 들어온 것이 처음도 아닌데…….

아스테인이 지나가면서 흘린 라일락 향 때문일까?

“여기 앉으세요.”

침대 옆에 있는 테이블 쪽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가 먼저 자리에 앉고, 나는 그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죄송해요. 깜박 잊었어요.”

아스테인이 조금은 서운한 눈빛을 보냈다. 그것에 살짝 뜨끔했다.

유테르안과 엘라네르 때문에 정신이 없기는 했다. 마음도 복잡하고.

미안한 마음 탓에 조금 더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그의 상처를 돌보기로 했다.

“일단 상처부터 다시 볼게요.”

내가 묶어주었던 손수건은 여전히 그의 손에 매여 있었다.

“이런……. 피가 정말 많이 났었네요.”

손수건을 치우자 보인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그때는 그렇게 깊어 보이지 않았는데.

심지어 아스테인은 그 이후 아픈 기색 한번 내지를 않았다.

그것이 속상했다. 내게는 약한 모습을 보여줘도 되는데.

“몰랐습니다. 프레이아 님이 매어준 손수건이 지혈을 잘해 줬나 보군요.”

내가 눈을 잔뜩 찌푸리고 한참을 들여다보자 그가 조금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나는 잘게 한숨을 쉬고는 약병을 들었다.

부드러운 천에 독한 증류주를 부었다.

“피부터 닦을게요.”

분명히 상처 사이로 증류주가 들어가 따가울 텐데도 그는 단 한 번도 움찔하지 않았다.

그것이 듬직해 보여야 하는데도 속상했다.

누군가의 주군이 되면서 생긴 습관일 것이다. 성녀로 살 때 내가 남들에게 선한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혔던 것처럼.

“아프면 아프다고 엄살을 부려도 되는데요.”

그래서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그는 잠깐 눈동자를 굴릴 뿐, 여전히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조금 서운한 마음에 입술이 살짝 모였다.

나는 그대로 그의 손등에 식물의 뿌리로 만든 하얀 고약을 뿌려줬다. 깨끗한 천으로 다시 상처를 감싼 다음에 매듭을 묶을 때 즈음, 아스테인이 말을 꺼냈다.

“내일 소독도 프레이아 님께 맡겨도 되겠습니까?”

“별로 아프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조금은 심술이 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픕니다.”

그는 짧고 다급하게 외쳤다.

“아프다는 티를 냈다가 제가 믿음직한 놈이 아닌 것처럼 보일까 봐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진짜죠?”

“네. 맞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아스테인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조금은 그가 어린아이처럼 보여서.

“알겠어요. 그럴게요.”

“그리고 함께 보내기로 한 하루 말입니다.”

아스테인은 조금 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그가 보이는 반응에 어쩐지 얼굴이 조금 뜨거워지려고 했다.

“네, 언제가 좋을까요? 아니, 뭘…… 하면 좋을까요?”

“신전에 다녀오는 날에 루크데린 거리에 갈까 합니다.”

루크데린은 제국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대공령보다 더 화려하고 활기찬 거리. 세상 사람들 누구나 쇼핑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러 가는 곳.

하지만 내게는 전혀 추억이 없는 곳이었다.

“얼마 전 가셨던 대공령의 거리보다 훨씬 볼거리가 많을 겁니다. 게다가 그날은 봄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 축제의 마지막 날입니다.”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장미꽃이 활짝 피는 계절에 열리는 아름다운 거리 축제. 평민이든, 귀족이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축제이기도 했다. 특히 연인들을 위한 축제.

그래서 제국의 어린 소녀들이라면 한 번쯤 축제에서의 낭만을 꿈꿨다.

예비 성녀가 되어야만 했던 나만 빼고.

“위험하지 않을까요?”

나는 인테르의 존재를 떠올리면서 미간을 좁혔다.

“아이기스가 있지 않습니까?”

인테르가 흑마법을 동원한다면 아이기스가 효과적일 것 같았다.

“그럼…… 믿고 따라갈게요.”

아이기스보다 아스테인을 믿었다. 나를 위하는 그의 마음을.

내 허락에 아스테인의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 밝아진 것을 보았다.

* * *

“프레이아,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졌군요.”

그날 이후로 오랜만에 신전에 왔다. 성녀님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지셨다.

이제 5개월도 남지 않은 시간 탓일까?

“대공이 내 말을 잘 따르고 있군요. 얼굴도 더 밝아진 것을 보니.”

“성녀님의 당부대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고 있어요.”

나는 최대한 밝은 얼굴로 아스테인의 행동을 칭찬했다.

아스테인의 성으로 가서 보낸 보름은 내 모든 삶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하루들로 채워져 있었다.

늘 내게 친절한 사람들.

바라는 것 없이 내게 다가와 주는 사람들.

유쾌한 에너지를 나누어주는 사람들까지.

그리고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까지.

“며칠 전에는 감자 독의 해독법도 널리 알렸다면서요?”

“아직은 실험 중이에요. 어느 것이 효과적인지 확인하려고요.”

“신의 말씀을 통해 찾아낸 방법이라면 충분히 프레이아가 바라는 대로 될 거랍니다.”

아니, 이건 신의 말씀이 아니었다. 오로지 지식의 힘이었다. 사람들의 경험이 쌓여서 만들어진 결과물들.

아스테인의 서재에는 그의 외조부가 모아둔 식물에 관한 자료들이 많았다. 독초를 연구했다더니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 중에서는 당연히 감자도 있었다.

“구토와 위경련을 일으키는 환자에게 설사를 일으키다니요.”

“감자 독이 퍼지는 시간이 늦어진다는 소리에 떠올린 생각이에요. 독소가 조금이라도 빨리 배출되지 않을까 해서요.”

“그걸 성공하면 빈민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거랍니다.”

신성력이 없어도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잘하고 있군요. 예비 성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는 것 같아 내 마음이 놓입니다. 사람들을 위한 기적도 이제 안정적으로 만들어낸다니, 마음 편히 떠나도 될 것 같군요.”

그 말에 순식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엘라네르를 찾지는 못하고 계속 휘둘리고 있다는 뜻이니까.

“새로운 성물을 발견했다고 들었는데, 가져왔나요?”

나는 조심스럽게 팔찌를 내밀었다.

팔찌를 장식하고 있는 커다란 사파이어가 짙푸른 색을 내며 반짝였다.

신성력을 빌려 쓰고 잠시 색이 옅어졌던 사파이어는, 첫날보다도 더 깊고 짙은 푸른색을 띠었다.

“신의 힘이 느껴지는군요.”

엘라네르의 신성력을 성녀님은 신의 것이라고 여겼다. 하긴, 신의 힘이나 신에게 빌려온 신성력이나 같은 힘이니까.

“신께서 이것을 프레이아에게 준 것에는 의미가 있을 거예요. 이 성물을 발견하면서 데아 님이 들려준 신언은 없었나요?”

신언이라……. 이 팔찌를 발견한 날 밤, 나는 엘라네르가 남긴 말을 확인했다. 엘라네르가 남긴 비단에 선명하게 떠오른 메시지는 그녀가 내게 했던 말과 같았다.

『신전으로 가서 진짜 성녀가 되어라.』

나는 차마 이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러자 성녀님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셨다.

“이상한 일이군요. 성물은 신언과 함께 내려오는 것을.”

“잘…… 모르겠어요.”

신이 아닌 엘라네르가 준 물건이었다. 그녀가 신이라도 되지 않는 한, 그것이 신언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의문이 계속 들기는 했다.

아무리 뛰어난 성녀가 될 인재라지만, 일개 성녀가 성물을 만들어내고 신성력을 빌려준다니.

“그렇군요. 신께 다 뜻이 있을 테니 기다려 봅시다.”

“네. 알겠어요.”

애써 긍정의 뜻을 만들어내며 찻잔을 기울였다. 최대한 멀쩡한 척,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런데, 황후 폐하와는 연락을 하나요?”

“아니요, 그날 이후로 따로 연락은 없으셨어요.”

“아무래도 대공의 성으로 황후 폐하께서 연락하기가 껄끄러운 모양이군요.”

황제가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황제는 내가 지금 아스테인의 성에 머무는 것조차 고까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테인이 예비 성녀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뜻이니까.

“임신 초기에 놀랄 일을 겪어서인지, 자주 배가 아프고 힘든 모양이더군요.”

“네? 설마 유산기가 있는 건가요?”

“황궁의들이 괜찮다고는 한답니다. 하지만 많이 불안해하는 것 같더군요. 프레이아는 황후 폐하의 여동생이니 가서 위로해주는 것이 어떨까요?”

나는 성녀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아직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했다.

카렌시아는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은인인 것을.

“잘 지내는 것을 확인해서 다행이군요. 집에 조심히 돌아가요.”

성녀님과의 만남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여느 때처럼 아스테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볼일은 끝나셨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가면이 들려 있었다.

오늘 축제에 갈 때 쓸 가면이.

“이제 가볼까요?”

그의 말에 이상하게도 두근두근, 심장이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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