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엘라네르의 숨겨진 의도
다들 낯선 울림에 몸을 웅크리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하지만 그 울림은 크지 않았고 금방 그쳤다.
“우와! 다들 봐봐! 저기 우물에 물이 들어오고 있어!”
나는 기사들의 외침에 눈을 깜박깜박했다.
잠시 멍하게 있다가 고개를 숙여서 우물 속을 들여다봤다.
우물의 옆면에서는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얼떨떨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저 멀리서 빈민가의 아이들이 달려왔다.
“우와! 물이 가득 찼어요!”
아이들의 기뻐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퍼졌다.
“엘라네르 누나보다 더 많이 채웠어!”
“역시 예비 성녀님은 달라!”
또 내가 원하지 않는 기적을 만들었다. 피곤한 마음에 살짝 돌에 팔을 짚고 섰다.
“어라?”
그런데 꿈쩍도 하지 않던 돌이 살짝 흔들렸다.
그걸 본 아스테인은 다시 한번 돌을 들었다.
이번에는 쑥 빠진 돌 아래에는 비밀 공간이 있었다. 그 속에 들어 있던 작은 상자.
“이건…….”
또 푸른 날개가 새겨져 있었다.
아스테인은 그것을 꺼내서 내게 건넸다.
조심스럽게 그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작은 팔찌가 들어 있었다.
푸른 사파이어가 메인으로 장식된 팔찌.
“성물입니까?”
“글쎄요, 이런 성물은 들어보지 못했어요.”
“그럼 신께서 프레이아 님께 주는 선물이 아닐까요?”
신이 내게 선물 같은 것을 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파란 보석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기운의 정체는 알 것 같았다.
엘라네르의 신성력. 그것이 담겨 있었다.
나를 가지고 노는 걸까? 조금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착용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니요. 이건 제 것이 아닐 거예요.”
알량한 자존심일 수도 있었다.
자신을 대신해 성녀가 되라고 말하는 이에게 반항하는 것이고.
신성력이 없어도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신성력이 없어도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후우, 빈민가만 한 번 돌아보고 이제 돌아가요. 감자 해독법도 찾아야 하고, 할 일이 많아요.”
“알겠습니다.”
* * *
빈민가에는 여전히 아픈 사람도 많고 굶주린 사람도 많았다.
“여기 감자가 많으니까 먹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예비 성녀님은 역시나 마음씨가 넓으십니다.”
“단델리온 대공님과 그 기사들이 여러분께 드리는 거랍니다.”
나는 나에게 쏟아지려는 칭송을 아스테인과 기사들에게 돌렸다.
“여름에 또 감자를 캐면 나누어 주신다네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대공님, 늘 이렇게 도움을 주시다니요.”
“더 풍족하게 제공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대공령에 공터를 준비할 테니 빈민가에서 합동으로 농사를 지어보도록.”
아스테인은 당장 이들을 돕는 일뿐 아니라 자립도 도우려 했구나.
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
몇 번을 봐도 아스테인은 성기사보다는 군주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아스테인 님은 신전으로 가기에는 역시 아까운 인재네요.”
내 말에 아스테인은 바로 눈썹을 추켜세웠다.
“저는 성기사가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묵직했다. 내게 맹세라도 하듯이.
“네. 대사제들보다 더 뛰어난 능력으로 사람들을 돌볼 것 같기도 해요.”
나는 아직도 그에게 성기사가 되지 말라고 말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엘라네르가 내게 계속 신전에 들어갈 것을 강요하는 이상, 아스테인이라도 말려야 하는데.
그래야 같은 미래를 반복하지 않을 텐데…….
“그런 일을 할 거였으면 차라리 사제의 길을 걸었겠지요.”
“그런가요?”
애써 감정을 숨기고 무심히 답했다. 아스테인이 또 조금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제가 성기사가 되려는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조금은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아스테인을 돌아봤다.
아스테인은 내 눈을 잠시 바라봤다.
“알고 있어요. 그때 말씀해 주셨잖아요.”
“……아닙니다. 그냥 모르는 편이 나으실 겁니다.”
씁쓸하게 웃는 그의 미소가 조금은 아파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감자를 나누어 주는 일에 열중했다. 그것을 마치고 난 뒤, 나는 환자들을 만났다.
불결한 환경에서 살아가다 보니 아무래도 늘 병을 달고 사는 이들이었다. 그나마 당장 급한 중환자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신성력으로 고쳐주는 건 재발을 막지는 못해요.”
환자 수가 많기도 했고, 만성질환자도 있었다. 엘라네르가 준 팔찌면 이들을 쉽게 고칠 수 있었다.
하지만 오기가 생겼다. 엘라네르의 도움 같은 것은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할 생각이었다.
“엘름 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물 대신 매일 마셔요.”
하지만 이건 근본적인 치료책이 아니다.
“그리고 집 안에 곰팡이들이 자라지 않게 환기도 하고 더러운 것들을 다 정리해요.”
나는 곰팡이들이 싫어하는 식물의 즙을 알려줬다. 그리고 그들에게 약속을 받아냈다.
“조만간 또 빈민가에 올 테니까, 그때는 내가 집집마다 돌아다녔을 때 곰팡내가 나면 안 되는 거예요. 쥐나 더러운 벌레들도 생기지 못하게 하고.”
단단히 약속을 받아냈다.
특히 빈민가의 아이들이 내게 손가락까지 걸어가면서 맹세했다.
“예비 성녀님 말이면 뭐든지 들을래요!”
“맞아요! 신의 말씀을 대신 전해주시는 거잖아요!”
진실을 숨긴 탓에 약간의 죄책감이 있었지만 그건 쏙 숨겼다. 죄책감은 뿌듯한 마음에 가려졌다.
지식을 나누어 주는 일은 언제나 내게 만족감을 안겨줬다.
예전에 성녀님의 신성력으로 내 것이 아닌 기적을 만들고 칭송을 들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제 볼일이 다 끝나신 겁니까?”
아스테인은 흐뭇한 얼굴로 곁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따스한 그의 눈빛에서 아스테인의 마음이 느껴졌다.
“네.”
“그럼 이만 돌아가 볼까요?”
우리는 마차로 돌아왔다. 엘라네르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련 때문일까?
발걸음을 쉽게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성녀님! 도와주세요! 우리 아이가 마차에 치였어요!”
빈민가의 사람은 아니었다. 옷차림을 보니 조금 사는 형편이 나은 평민 같아 보였다.
“의사는요? 의사를 불러서 응급처치는 했나요?”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했어요. 얼른 신성력으로 치유하지 않는 이상은요.”
여인은 울먹이면서 외쳤다.
하지만 그걸 지켜보던 아스테인의 눈빛은 살짝 날카로워졌다.
“여기에 예비 성녀님이 계신 것은 어찌 알았지?”
아스테인의 경계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의아한 부분이었다.
“여기에, 빈민가로 오면 예비 성녀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누가 그런 소리를 했나?”
“우리 아이를 친 사람이요. 빈민가에 오늘 나오신 것을 봤다면서 얼른 모셔오면 우리 아이가 살 수 있다고 했어요!”
나는 그런 소리를 했다는 사람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딱히 내가 예비 성녀라는 티를 내고 이곳에 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곳의 사람들이 평민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내 이야기를 떠벌렸을 리도 없고.
이건 누가 봐도 수상한 일이었다.
“프레이아 님,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중년의 여인은 통곡하며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부탁드려요! 우리 아이를 살려주실 분은 예비 성녀님밖에 없어요. 제가 거짓을 고한 것이라면 당장 제 목숨을 거두어가도 됩니다. 그러니 제발!”
나는 여인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옷에는 핏자국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영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최소한 이 여인의 말은.
“아스테인 님.”
아스테인도 나와 같은 생각은 한 것 같았다. 여인의 옷차림을 눈여겨 확인한 그는 내게 조심스럽게 당부했다.
“프레이아 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사고를 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외면할 수는 없잖아요.”
정말 목숨이 위태로우면 어차피 내 힘으로는 구할 수 없겠지만.
나는 외출복 주머니에 들어 있는 상자를 더듬었다. 그리고 아스테인에게 말했다.
“어쩌면 기회일 수도 있잖아요. 인테르가 수작을 부리는 것이라면 잡을 기회요.”
상자 속의 물건을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인테르의 짓이라면 확인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피해서 도망 다니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아스테인의 허락이 떨어졌다.
“환자가 있는 곳으로 가요.”
* * *
여자가 안내한 곳은 빈민가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의사의 집에 피투성이가 된 아이가 누워 있었다.
“예비 성녀님, 제발 부탁드려요.”
하지만 아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난감해졌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신성력이 아니면 불가능이었다.
여기저기 부러져 신음하는 아이의 피부는 벌써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조치를 하지 않으면 숨이 끊어질 것처럼.
“응급조치는 끝냈습니다만, 출혈이 너무 심합니다.”
하얀 옷 앞을 온통 붉게 물들인 의사가 다가왔다. 옷차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의사는 최선을 다했고, 그는 이제 신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혈은 됐나요?”
“네, 하지만 이미 흘린 피가 너무 많아서 소용이 없습니다. 점점 체온이 내려가고 호흡이 느려지고 있습니다.”
나는 코끝을 살짝 찡그렸다. 지금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줄 방법이 무엇인지도.
하지만 알량한 자존심이 방해했다. 선뜻 엘라네르의 힘으로 돕겠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기적이라도 내리지 않는다면 이 아이는 죽을 것입니다.”
이대로 내가 엘라네르의 힘을 쓴다면…….
나는 또 모두에게 진짜 성녀로 비칠 것이었다. 이것이 과연 내게 이로운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것을 원하는 것은 내가 아닌 엘라네르였기에.
“프레이아 님, 괜찮으십니까?”
내가 넋을 잃고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 아스테인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를 멀뚱히 쳐다봤다. 나를 온전히 신뢰하는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얼굴.
그걸 보면서 입술을 뜯었다.
“내가……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자신감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전혀 실망하거나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고도 듬직한 미소를 은은하게 지어주었다.
“아직 정식 성녀가 아니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하면 설령 실수한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 나만 바라보고 기대하고 있는 의사와 아이의 손을 잡고 우는 여자도 그렇게 생각해 줄까?
신성력이 만드는 기적은 무엇이든 다 해내야 한다고 다들 생각하는 걸.
그때, 문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누님이라면 절대 실수하지 않겠죠. 무려 푸른 날개의 기적을 일으키는 예비 성녀님인데, 아이를 살리는 것쯤은 쉬운 일 아닙니까?”
어째서 이곳에 유테르안이 있는 걸까?
내 얼굴이 굳는 것과 동시에 아스테인이 으르렁댔다.
“성녀님의 명으로 푸토르 소후작은 프레이아 님의 곁에 올 수 없다.”
그러자 유테르안이 양팔을 들었다. 무방비한 사람인 척.
“내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내 피해자를 작은 누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나는 한쪽 눈썹을 크게 들어 올렸다.
설마……?
예상 밖의 행동을 하긴 했지만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다. 비열하고 잔인하게도.
“나를 불러내려면 정정당당하게 성녀님께 허락을 받아요.”
“밤중에 아이가 튀어나올 거라고 마부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저 역시 사고가 났을 때 누님이 밖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조금은 뻔뻔한 얼굴로 대답하는 유테르안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불이 날 것 같았다.
“누님, 제게 따지는 시간에 얼른 아이를 구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입술을 짓이겼다.
유테르안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내 신성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가짜라는 것을 밝히려 이런 일을 굳이 한 것이다. 사람의 목숨을 걸고.
“혹시 신성력이 없어 못 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 말에 아스테인의 검이 뽑혀 나왔다.
차가운 검은 유테르안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유테르안은 여전히 양팔을 들고 비릿하게 웃고만 있었다.
“내게 화낼 시간에 얼른 아이를 구하라니까요? 의사도 못 고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곧 숨이 멎겠는데요?”
나는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온몸에 골절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피투성이의 몸을 보자 나는 과거의 환상이 떠올랐다.
나를 지키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진 그 사람이.
“아스테인 님, 검을 거두어도 돼요.”
깊은 한숨을 몰아쉰 나는 아스테인의 가슴을 쳐다봤다. 지금은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내게 안정을 줬다.
그리고 아직도 눈물을 쏟으며 기다리는 아이의 엄마.
“따뜻한 물을 준비해줘요.”
유테르안은 삐딱하게 쳐다보며 비웃었다.
“깨끗한 천도요.”
하지만 나는 꿋꿋이 명령을 내렸다.
원기를 회복하는 차까지 준비시킨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주머니를 뒤졌다.
그곳에는 아까 착용을 거부했던 팔찌가 들어 있는 상자가 있었다.
한 손으로 조심스레 그것을 열고 팔찌를 찾아 쥐었다.
“소후작, 당신은 성녀를 배출하는 가문의 일원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군요.”
나는 유테르안을 향해 날카롭게 대꾸했다.
결심을 끝냈다. 자존심 같은 것을 따질 이유가 없었다. 생명이라는 가장 큰 가치를 두고 나는 어리석게 자존심을 찾고 있었다.
그것도 나를 시험하려는 자 앞에서 그랬다니.
“푸토르 소후작, 잘 봐요.”
진작 아스테인의 말대로 해야 했다.
이것이 엘라네르의 의도대로 행동하는 것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