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특별한 나들이 (3)
“신성력으로 다 해결되면 편하긴 하겠지만, 그럼 저희가 할 일이 없습니다! 신성력이 만능열쇠도 아니고, 아가씨를 그런 도구로 이용할 수는 없죠.”
크리세우스도 그렇게 말해줬다.
“신성력을 맡겨놓은 것도 아니고, 아가씨의 특별한 힘은 아가씨를 위해 써야지 왜 남을 위해 써?”
“그러게나 말이야. 본인이 쓰고 싶으면 쓰는 거지만, 남이 아가씨에게 쓰라고 강요하는 건 웃긴 일이지.”
“나도 독버섯 사건 때 거기 있었는데, 당연하다는 듯 신성력을 요구하는 거 보기 그렇더라. 아가씨는 미래를 보고 행동하신 건데 말이지.”
기사님들도 하나같이 말을 보태줬다.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심지어 빈민가의 아이들도 내 마음의 짐을 덜어줬다.
“그때 만들어 주신 해독제 덕에 다른 동네 친구들도 살렸어요!”
“네! 신성력으로 치료만 해주고 그냥 가셨으면 친구들을 구하지 못했을 거예요. 예비 성녀님의 큰 뜻이 뭔지 이해했어요!”
그건 신성력을 갖추지 못한 내가 부리는 꼼수였다. 지금도 신성력을 쓰지 못해서 책의 힘을 빌리려 했던 거니까.
“프레이아 님이 감자 독에 대항하는 법을 찾아내신다면, 제국에 널리 알려야지요. 그게 더 모두에게 이로운 것 아닙니까. 역시 프레이아 님의 생각은 깊으십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닌데.
너무 다정하게 칭찬을 해주는 아스테인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어휴, 아가씨도 칭찬에는 약하시네.”
“성녀도 사람인데 당연한 것 아닌가?”
“부끄러워하고 겸손하시니 더 보기 좋지 않아? 귀족들도 그렇고 신전의 일부 인간들도 콧대만 높고 오만하던데.”
계속되는 칭찬에는 도저히 면역력이 없었다. 점점 더 얼굴이 붉어져서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
살면서 내가 이런 칭찬을 받아 봤던가?
회귀 전, 그 고단한 삶 동안 내게 칭찬을 해주던 사람은 아스테인 하나였다.
이건 내 인생에 처음 겪는 칭찬 폭풍이었다.
“사랑스러우신 분이야. 우리 대공님이 조금 전에 운 이유를 알겠네. 저런 분께 혼나면 속상하지.”
크리세우스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테인의 눈에 눈물이 맺힌 것은 봤지만, 그 이유는 다행히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혼난 거 아니니까 조용히 입 다물어.”
엄한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평소보다 약간 목소리의 톤이 높은 것도 같다.
“에이, 그럼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대공님이 왜 울어요?”
“닥…… 아니다. 나중에 성에 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너희가 얼마나 무능력했는지 제대로 문책할 테니.”
“뭐, 뭐 때문에 이러십니까? 우리 길드가 얼마나 완벽한 존재인데요?”
길드? 기사단이 아니라? 호기심에 고개를 들었다.
“완벽?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들어보면 깜짝 놀랄 거다.”
하지만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너머에서 날 쳐다보고 있는 기사님들의 표정 때문에 나는 다시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마치 갓 걸음마를 뗀 아기를 보듯 보고 있어서.
“저, 저기, 아스테인 님? 해지기 전에 아이들을 바래다줘야 할 것 같아요.”
겨우 엎치락뒤치락하던 강아지들이 떨어졌다.
8할 정도의 기사는 대공성으로 가져갈 감자를 나르기 위해 남았다.
나머지는 빈민가로 가는 나를 따라왔다.
이번에도 셀레미온은 마차를 함께 탔다.
“아가씨, 그런데 아까 대공님은 왜 우신 거예요?”
“글쎄……. 그건 나랑 대공님 사이의 일이라 말해 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기사님들이 다들 걱정하셨어요. 대공님께서 열 살 즈음에 황궁에서 괴롭힘을 받다 도망쳐서 가출했다던데요?”
“아…….”
그때라면 나와 그가 처음 만났을 때 아닌가?
내가 셀레미온을 빤히 쳐다보자 그 아이가 조금 어깨를 으쓱했다.
“그전까지는 눈물 많은 순둥이셨는데, 그날 이후로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리셨대요. 아껴주시던 백작님이 돌아가셨을 때도요. 조금은 냉정하다 싶을 만큼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셨다네요.”
“아스테인 님과 냉정하다는 말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이미지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내게 그는 언제나 따스한 햇살이었으니까.
“기사님들 말로는 대공님이 아가씨를 짝사랑해서 그런댔어요! 마음에 품은 여인을 위해 성기사가 되다니! 성기사는 모든 걸 절제하며 살아야 하잖아요. 꺄아, 소설 같아.”
셀레미온의 말에 나는 정색할 수밖에 없었다.
“셀레미온, 그건 아스테인 님의 성심을 모독하는 일이야. 그분이 신을 얼마나 동경하고 성녀를 존경하는데 그런 말을 하니?”
내 목소리가 워낙에 서늘해 셀레미온이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요…….”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조심했으면 좋겠어. 나로 인해 입방아에라도 오르면 안 되잖아. 내게는 은인이신걸.”
“네…….”
크게 혼이 난 것도 아닌데 셀레미온이 잔뜩 주눅이 들었다.
대공령에서 인테르를 만난 이후로 조금만 혼나도 이랬다. 언제나 명랑한 에너지로 가득 찬 아이였는데.
그게 너무 안타까워서 소중한 하녀를 달래줘야만 했다.
* * *
다행히도 해가 지기 전, 우리는 빈민가에 도착했다.
“얘들아. 내게 혹시 엘라네르 누나가 자주 나타나는 곳을 알려주지 않겠니?”
마차에서 내린 나는 빈민가 아이들에게 부탁했다. 아이들은 잠시 망설이는 얼굴을 하다 내게 일러줬다.
“마을 밖에 있는 말라가는 우물에 종종 혼자 있다가 가요. 누나가 왔다 가면 다시 물이 차거든요. 그때 예비 성녀님이 오셨을 때도 채워주고 가셨어요.”
“고마워.”
다들 짐을 나르는 사이, 나는 아스테인에게 부탁해 둘이서 그 우물을 찾아갔다.
해 질 무렵의 우물 주변은 음침하고 섬뜩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이곳에 그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 맞습니까?”
“오늘도 올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혹시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요.”
우물가에는 역시나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내 머리에 올려졌던 모자는 바람에 속절없이 저 멀리 나무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 모자는 아스테인의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라고 했다. 나는 당황해 종종거리며 그것을 쫓아갔다.
“잠시 계십시오.”
아스테인은 그런 나를 달랜 뒤, 모자가 떨어진 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떨어진 것을 주워드는 모습조차 단정한 아스테인은 모자를 들고 흙먼지를 털었다.
그리고 내게 돌아선 그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프레이아 님, 위험합니다!”
그의 외침 사이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스테인의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춰 세웠다. 멈춰 선 나를 향해 아스테인은 다급히 달려왔다.
그가 뻗은 손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머리부터 감싸는 손길 뒤로 무언가 날아가더니 그것은 퍽 하는 소리를 내며 어딘가에 박혔다.
“괜찮으십니까?”
“네, 저는 괜찮아요. 도대체 뭐였죠?”
검을 뽑아 든 아스테인의 시선을 따라갔다. 시선의 끝에는 파랑새의 깃으로 만든 화살이 나무에 박혀 있었다.
“후작가의 짓일까요?”
아스테인은 대답을 하는 대신 손가락을 입술 끝으로 살짝 물었다. 청량한 휘파람 소리와 함께 그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우리 앞으로 몰려나왔다.
“주군, 무슨 일이십니까?”
“프레이아 님을 노리는 자가 있었다.”
“네? 도대체 어느 미친놈이 아가씨를!”
기사들은 아스테인만큼이나 눈빛이 살벌해졌다. 하나같이 무서운 눈빛을 보자 놀랐던 마음이 진정됐다.
이들의 곁이라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작가 놈들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겁니까?”
“이번에도 인테르의 짓일 수 있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특히나 아스테인이 옆에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고 흩어졌다.
아스테인은 화살이 박힌 나무로 갔다. 화살은 아스테인의 손에 의해 쉽게 뽑혔다.
“이건…….”
화살촉 뒤에는 작은 비단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아스테인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것을 풀어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군요.”
나도 그것을 받아들었다. 확실히 하얀 비단에는 아무런 글자도 그림도 없었다.
“무슨 의미일까요?”
“글쎄요.”
그런데 내 눈에 약간 이질적인 것이 보였다.
“아스테인 님, 이것, 사람 머리카락 아닌가요?”
내가 조심스럽게 비단에 감싸여 있던 것을 들어 올렸다. 붉고 굵은 머리카락 한 올을.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길이나 상태로 봐서는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왜, 아니 누구의 것일까요?”
“엘라네르.”
내 말에 아스테인이 나를 쳐다봤다.
또 한 번 등장한 그녀의 이름에 아스테인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어냈다. 그는 보기 드물게 잔뜩 불쾌한 감정을 나타냈다.
“왜 또 그 여자의 이름이…….”
“이 화살을 쏜 사람이 설마 엘라네르를 인질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특별한 힘을 지닌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랬다. 그때 그것이 꿈이 아니라면 엘라네르는 내게 신성력을 빌려줄 수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었다.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신성력을 지닌 이가 쉽게 누군가의 인질이 될 리는 없었다.
“그럼 본인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활을 날린 쪽과 협력 중일 겁니다.”
엘라네르의 목적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그리고 애초에 프레이아 님을 노린 것은 아닌 것 같군요. 충분히 노릴 틈이 있었는데도 일부러 위협만 한 것 같습니다.”
나는 다시 새하얀 비단을 봤다.
아스테인의 생각이 옳다면 이건 분명 단순히 머리카락을 내게 보내기 위해 사용한 비단은 아닐 것이었다.
“이걸 가져가야겠어요.”
내게 신성력이 없어 이것을 바로 해독하지 못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아스테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단을 내밀었다. 비단을 건네주고 되돌아가는 손에 거슬리는 것이 보였다.
빨간 줄, 아스테인의 손등에 피가 서서히 고이고 있었다.
“아스테인 님! 다치셨잖아요!”
“아, 그랬군요.”
“이렇게 깊이 파였는데, 아픈 것도 모르셨어요?”
“이 정도 상처는 그냥 씻기만 해도 됩니다.”
싫었다. 나를 구하려다가 아스테인이 다쳤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가슴 아팠다.
왜 매번 나를 위해 이 남자가 다치고 희생해야 하는 걸까?
나는 다급히 품에서 손수건을 찾았다.
그것을 아스테인의 상처 위에 꾹 누르자 손수건은 금세 붉게 물들었다. 과거의 잔상이 스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손을 떨어가며 손수건을 동여맸다.
아스테인은 그것을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신성력으로 치료해주시지는 않는군요.”
“그게…….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신 벌이에요.”
“이게 벌이라면 저는 이쪽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아스테인의 말에 마지막으로 매듭을 짓던 손가락이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그는 내가 손수건을 예쁘게 묶어 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돌아가면 직접 소독도 해주시겠습니까?”
“알겠어요. 하지만 절대 다치지 않겠다는 약속, 다시 해주세요.”
“음……. 인테르나 후작가에서 계속 프레이아 님을 노린다면 약속을 못 지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원망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아스테인이 빙긋 웃어버렸다.
“그러니 그때 약속한 상을 먼저 주십시오.”
“뭘요?”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이미 들어주고 있는 것 아닐까? 대공성에 온 이후로 우리는 늘 함께 있는데.
그런 의미를 담아 대답하는 대신 아스테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때 제게 주시기로 한 시간은 둘만의 시간입니다. 하지만 프레이아 님과 둘만 보낸 시간은 없습니다.”
면역력이 생겼다고 생각한 내 얼굴이 아스테인의 앞에서 다시 붉어지려고 했다.
“알겠……어요. 대신 진짜로 다음부터는 피 한 방울도 내선 안 돼요.”
“알겠습니다. 저는 목표가 있으면 무조건 완수하는 사람이니 믿으십시오.”
* * *
안전한 곳에서 쉬고 있자, 기사들이 돌아왔다.
“주군, 벌써 사라졌습니다.”
“빠른 데다가 귀신같은 놈인데요? 흔적이 없었습니다.”
아스테인은 기사들의 보고에 잔뜩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너희들이 이렇게 무능한 녀석들인 것을 오늘 너무 많이 알았군.”
“우리 문제가 아닙니다. 상대가 마법을 쓴 것 같습니다.”
아스테인은 그 말에 눈썹을 크게 올렸다.
“그때 대공령에 나타났던 사람과 동일인인가?”
아스테인의 물음에 나는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 내 목숨을 노린다면, 과연 나는 무사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같은 자 같습니다. 그때처럼 눈앞에서 사라졌으니까요.”
기사의 보고에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걸까요? 이번에는 죽일 수도 있었는데…….”
내 눈썹이 떨렸다. 이건 두려움 탓이 아니었다.
엘라네르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성녀와 반신전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이 머리카락의 주인이 인테르와 협력한다는 뜻이겠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것이다.
“분명, 뭔가 사연이 있을 거예요.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니 다시 우물로 가요.”
다시 찾아간 우물은 황량했다. 바닥이 말라 이끼마저 자라지 못할 만큼 마른 곳.
내가 빈민가를 왔을 때는 물이 채워졌다고 했는데…….
“응? 왜 여기는 이끼가 끼어 있지?”
우물 안도 바짝 말랐는데 바깥쪽 돌에 이질적인 흔적이 있었다. 홀린 듯이 그곳에 다가갔다.
“뭔가 이상하군요.”
아스테인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이끼 아래에 희미하게 새겨진 흔적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푸른 날개, 신의 표식이었다.
“아스테인 님, 이 돌을 뺄 수 있을까요?”
아스테인은 내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들 수 있을 줄 알았던 돌은 힘이 센 아스테인의 손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상하군요.”
“보이는 것과 다른 걸까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여기에는 분명 엘라네르와 관계된 열쇠가 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돌 앞에 앉았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푸른 날개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푸른 빛이 일렁였다.
“오오, 저게 신성력이야?”
이번에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힘이었다. 이건, 또 엘라네르의 힘?
우르르릉.
푸른 빛이 사라지자마자 땅에서 울림이 전해졌다.
“뭐야? 지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