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특별한 나들이 (2)
아스테인은 자신의 몫을 반으로 잘라 들고 왔다.
아직 내 몫의 작은 조각도 먹지 못했는데. 심지어 아스테인은 기사라서 나보다 많이 먹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절 지켜줄 사람이 더 든든히 먹어야죠!”
조금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아스테인은 이런 나를 쳐다보며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아스테인 님이 드시는 걸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것 같으니까 드세요. 제 눈앞에서 바로.”
내 엉뚱한 요구에 아스테인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내가 눈에 힘을 힘껏 주고 손짓을 하자 그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그 작은 조각이라도 드십시오. 그리고 감자를 굽게 불을 피워두라고 해야겠군요. 일하고 나면 금방 허기질 겁니다.”
“알겠어요.”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남은 빵을 먹었다. 조금 거슬리는 일들 때문에 속이 불편했지만, 아스테인 앞이라 천천히 꼭꼭 씹어 먹을 수 있었다.
“이제 전 뭘 도우면 될까요?”
이미 밭은 거의 헤집어져 있었다. 캔 감자들은 한쪽에 산처럼 쌓여 있었고. 아스테인과 오는 바람에 일이 끝나고서야 나타난 얌체가 된 기분이었다.
“감자를 통에 나누어 담을 겁니다. 그 수량을 체크하고 정리하는 일을 도우시면 됩니다.”
“먹은 것에 비해 제가 힘쓸 일은 전혀 없네요?”
그런데도 밥을 꾸역꾸역 먹였다니. 조금 허탈해져 웃음이 나왔다.
“저 녀석들은 머리 쓰는 일이 더 힘을 쏟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스테인 님도 절 먹이려고 하셨잖아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드실까 해서…….”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아스테인의 모습에 나는 져주기로 했다.
“알겠어요. 열심히 문서를 만들게요. 저기 그런데 아스테인 님.”
“네, 말씀하십시오.”
“빈민가 아이들을 바래다줄 때 저도 잠시 다녀와도 될까요?”
“무슨 일이십니까?”
아스테인의 반문에 잠시 머리를 굴렸다. 어디까지 선을 그어 말해야 할까? 거짓말은 하기 싫지만 다 말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진짜 성녀라고 말하면, 혹시라도 그의 이 친절과 다정함이 엘라네르에게로 떠날까 봐.
“제가 찾아 달라 부탁한 사람을 저 아이들이 알아요.”
“네? 이런……. 부끄럽군요. 수하들이 제대로 일 처리를 못 했나 봅니다.”
그는 크리세우스 쪽을 노려봤다. 아스테인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크리세우스는 잠시 우리 쪽을 돌아봤다가 멀어졌다.
“아니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엘라네르는 조금…… 음, 특별한 존재라서요.”
“흑마법이나 주술이라도 씁니까?”
“그건 아니에요.”
엘라네르는 흑마법과는 대척점에 있는 존재였다. 그만큼 내가 부러워하는 존재이고.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것이 가능한 힘이라면…….”
아스테인은 살짝 몸을 기울여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시 그녀가 신성력이라도 가진 겁니까?”
그런 아스테인의 눈동자에는 불안함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게…….”
“프레이아 님이 신성력을 지닌 다음 대의 성녀인 것은 틀림없는데…….”
그가 의혹을 쌓아가는 모습에 심장이 조금 불길하게 뛰었다. 아스테인이 이대로 눈치 빠르게 엘라네르가 진짜 성녀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찌 되는 거지?
나를 버릴까? 아니, 나와는 상관없이 아스테인은 성기사가 된다고 할까?
그것은 그것대로 슬플 것 같았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그에게 성기사가 아닌 황제가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어떨까?
나 같은 고아 출신의 가짜 성녀는 황제가 된 아스테인의 곁에 설 수는 없겠지만.
“설마…… 신전의 미래를 위해 그 여자를 찾으라고 하셨던 뜻이……. 아니,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아스테인 님. 신의 뜻은 알 수 없는 법이랍니다.”
아스테인이 얼굴을 깊게 쓸었다.
그의 눈에는 혼란과 고통이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심각한 우리 모습에 슬금슬금 감자 쪽으로 가서 알아서들 일했다. 그것조차 내게는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아스테인은 주변을 살핀 뒤, 다시 작은 목소리를 이어갔다.
“신께서는…… 프레이아 님이 성녀 대관식도 치르기 전에 다음 대의 성녀를 내려보내신 겁니까?”
아, 아스테인은 내 말을 조금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 그것을 듣는 순간 내 심장이 무너질 뻔했다.
내가 예비 성녀만 아니었어도, 주변에 사람들만 없었어도, 깊은 오해에 빠진 그를 사랑스럽게 끌어안았으리라.
“신께서 벌써 프레이아 님을 하늘로 데려가려 하시는 겁니까?”
“네? 아니, 아스테인 님, 그게 아니라…….”
“그게 신의 뜻이라 할지라도 전 못 보냅니다. 프레이아 님이 지금껏 어찌 살아왔는데요. 겨우 조금 숨통이 트이려 하는데 신께서 이리도 무정하시단 말입니까? 신께서 이리 잔인한 분이셨습니까?”
예쁜 보라색 눈에 맑은 눈물이 한 방울 고였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째서 저런 오해를 하는 거지?
물론 원래 정해진 미래대로라면, 내 삶의 끝은 멀지 않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절대로요.”
나는 손을 뻗어 아스테인의 얼굴 근처로 가져갔다.
그가 날 걱정해주는 것이 너무 좋았다. 나는 차마 하지 못했던 신을 향한 원망을 그가 해 줘서 감사했다.
잠시 근처에서 망설인 손은 곧, 아스테인의 눈가에 닿았다.
“신의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니 마음 놓아요.”
내 손가락에 아스테인의 작은 눈물방울이 옮겨왔다. 늘 내게는 듬직하고 믿음직하기만 했던 아스테인의 약한 모습이 낯설었다.
아스테인을 꼭 끌어안고 토닥여주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곤란할 만큼.
날 정말로 아껴주고 걱정해주는구나.
그게 미래의 성녀를 향한 존경심일 뿐이라 해도 괜찮을 만큼 가슴 깊은 곳이 따스해졌다.
“그럼 뭡니까? 그 여자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자유를 위한 열쇠. 제가 드릴 수 있는 정보의 전부랍니다. 만약을 대비해 아스테인 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좋아요.”
“절……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다시 상처받은 얼굴. 철렁하는 마음에 나는 정말 열렬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유일하게 믿는 분이 아스테인 님이라고 했잖아요.”
“비밀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절 신뢰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까?”
아스테인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왜 서운한지도 이해했다.
하지만 내게는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아스테인 님이 누구보다 소중해서라고 말하면 서운하지 않으시겠어요?”
아스테인의 눈이 조금 풀린 것도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뭔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그 사람을 찾는 순간, 모든 진실을 아스테인 님께 가장 먼저 알려드릴게요. 제가 제일 믿고 의지하는 분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물어도 아스테인 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니까요.”
이제야 그의 얼굴이 완전히 풀렸다.
마음속에 안도의 한숨과 미소가 동시에 찾아왔다. 키도 크고 건장하게 생긴 기사님이 조금은 귀여웠다.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될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일이 끝나고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그 여자를 찾기 위해 더 애를 쓰도록 지시도 하겠습니다.”
아스테인의 기사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상대는 신성력을 가진 진짜 성녀가 될 사람이니.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그저 빙그레 웃자 아스테인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부끄러운 꼴을 보였군요. 믿어주신다 했는데 약한 모습이나 보이고 무능력하기까지 하다니요.”
잔뜩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작은 충동이 생겼다. 속마음을 이야기하면 아스테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스테인 님이 이리도 귀여운 줄은 미처 몰랐네요.”
아스테인은 얼굴을 붉히는 것으로 내 말에 반응했다. 새빨개진 얼굴은 그의 귀여움을 조금 더 끌어올렸다.
아스테인의 장난기 많은 수하가 와서 놀리기 딱 좋아질 만큼이나.
“우하하하, 우리 주군은 아가씨 앞에만 가면 어린이가 되는군요! 아가씨, 우리를 위해서라도 절대로 대공님의 곁을 떠나시면 안 됩니다!”
평소 같았으면 아스테인의 손이 바로 크리세우스의 귀로 갔을 텐데.
스스로 민망한 짓을 했음을 아는 건지, 아스테인은 입을 꾹 다물고 크리세우스를 노려봤다.
“이야, 내가 평생 주군의 약점을 못 잡을 줄 알았는데 드디어 잡았군요. 이건 두고두고 평생 놀려먹을 수우아아악!”
크리세우스의 입은 1절만 하기에는 한없이 가벼웠다. 결국, 크리세우스의 귀는 아스테인의 손에 잡혔다.
“적당히 해라.”
아스테인이 그 상태로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잠시 멍한 얼굴로 우리 쪽을 보던 기사들은 일제히 다시 감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볼이 빵빵한 것으로 보아 다들 웃음을 참고 있었다.
“후우, 제가 정말 못난 꼴을 보였군요.”
아스테인은 뒤늦게 밀려드는 후회에 한숨을 깊이 쉬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모습들조차 보기가 좋았다.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이런 일이 가능할까? 단순한 주종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부러워요.”
아스테인은 크리세우스의 귀를 잡은 손에 힘을 스르르 풀고 나를 돌아봤다. 당연하게도 그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크리세우스 님도 그렇고, 다른 기사님들도 그렇고 다 아스테인 님의 친구 같아 보이는걸요. 저에겐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조금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아스테인은 손을 풀고 온전히 나를 쳐다봐 주었다. 크리세우스의 반항 같은 것은 신경 써 줄 필요가 없다는 듯이.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기 위해 대공성에 오신 것 아닙니까. 제가 곁에서 친구가 되어드릴 테니 기운 내십시오.”
“재미없는 대공님보다는 저랑 친구를 하는 것이 더 즐거울 겁니다.”
“에이, 우리가 더 재미난 놈들입니다.”
갑자기 기사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는 우르르 몰려왔다. 정말 친구가 되어주려는 듯이.
하지만 곧, 기사들은 다시 감자 무더기로 쫓겨났다.
“아스테인 님. 하고 싶은 거라면 뭐든 다 하라고 해놓고 이러시면 곤란해요.”
아스테인의 헛기침을 보고는 소리 내어 웃었다. 여전히 마음속에는 무거운 돌덩이가 얹어져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즐겨도 되지 않을까?
내게 겨우 찾아온 봄날이니까. 언제 그칠지 알 수 없는 적당히 시원하게 불어오는 이 봄바람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밝은 기운이 넘치는 유쾌한 사람들의 곁에서.
* * *
“자, 이게 마지막 상자입니다.”
다들 땀을 흘려가며 감자를 정리해서 해가 지기 전에 일이 끝났다.
“한 상자에 10파운드씩 156상자나 나왔네요. 그중에서 씨감자로 여름에 심을 것을 빼면 146상자가 남아요.”
나는 감자의 상태와 크기별로 정리한 문서를 들여다보며 아스테인에게 말해줬다.
그걸 듣는 빈민가 아이들의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자신들의 몫이 얼마인지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 되었다.
“오늘 도와준 너희들은 두 상자씩 가져가렴.”
아스테인이 빈민가 아이들에게 자상하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빈민가의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약간의 환호성을 질렀다.
“네! 감사합니다.”
단순히 얻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한 노력의 대가였다.
아이들이 스스로 뿌듯해하는 것이 보여서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서른 상자는 빈민가로 가지고 가서 나누어 줄 테니 아이들의 것과 함께 싣도록.”
빈민가에 나누어 주는 양이 좀 적은 것도 같았다. 내가 아는 기사단의 규모에 비해 비축하려는 감자의 양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감자는 반드시 서늘하고 어두운 곳에서 보관해야 해. 싹이 나면 먹으면 안 되는 것은 알지?”
나는 빈민가 아이들에게 신신당부했다.
가난한 아이들이다 보니 배가 고프면 뭐든 닥치는 대로 먹고는 했다. 지난번 독버섯처럼.
그러다 또 탈이 나면 안 되는 일이었다.
“네? 안 돼요? 싹 날 때까지 남아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배고프면 가리지 않고 먹긴 하는데요.”
“안 돼. 그거 다 독이야. 많이 먹으면 배탈도 나고 속이 뒤집혀서 탈진하기도 한단다. 싹이 나지 않고 껍질이 초록색이기만 해도 도려내고 먹어야 해.”
내 말에 아이들이 조금 슬픈 눈을 했다. 먹을 것을 버려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나 보다.
부모들이 감자 싹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말리지 않고 먹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감자 독에 당했을 때 치유법은 있습니까? 만약을 대비해 미리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스테인이 아이들을 조금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음…… 대공성에 돌아가면 책을 뒤져봐야겠어요. 분명히 방법이 있었거든요.”
분명 독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도 조금 가물가물했다. 정확한 정보를 알리는 편이 낫기에 아직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신중한 내 모습에 아스테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보니 뭔가 속이 묘하게 일렁였다. 이상한 기분, 이게 뭔지 알고 있었다.
“다들……. 감자에 싹이 나지 않게 신성력으로 해결하라는 말을 안 하시네요.”
불쑥 이상한 괴리감을 입 밖으로 냈다.
지금의 성녀님은 예비 성녀 시절 목격한 문제들을 신성력으로 곧잘 해결하곤 하셨다. 물론 빈민들보다는 귀족들이나 부유한 상인 위주였던 것 같지만.
그래서인지 내가 성녀가 됐을 때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신성력으로 해결해달라는 부탁을 늘 받아야 했다.
물려받은 신성력이 작았기에 모든 것을 들어주지는 못했다. 카르텔로 대사제가 정한 순서대로 기적을 일으켜야만 했다.
지체 높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 일들 위주로.
“지난번에 빈민가에서 독버섯 해독제를 만들어 줬을 때도 다들 신성력으로 치료하는 게 빠르지 않냐고…… 그랬거든요. 왜 힘을 쓰지 않냐고…….”
다들 내 말에 눈을 크게 뜨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바람에 우물쭈물 이어서 말했다.
“세상의 모든 일을 신성력에 의존해서 산다면, 인간이 노력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아스테인이 먼저 답해줬다.
신성력을 믿고 따르는 그의 입에서 나온 답이기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과연 그럴까?
나는 초조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