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특별한 나들이 (1)
베이트만 부인에게 수놓는 법을 다시 배운 뒤, 나는 쉬지 않고 그것을 복습했다.
목표는 하나였다.
아스테인을 위한 주머니에 직접 푸른 날개를 수놓는 것.
그리고 그에게만 특별히 선물할 수 놓인 손수건. 아스테인의 선물로 고민하고 고민하다 결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졸린 눈으로 여러 번 내 손가락을 찔러가면서도 열심히 연습했다.
“진작 배워둘걸.”
열 번이나 엄지를 찌른 순간에는 솔직히 후회했다.
성녀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그저 시간만 흘려보냈던 과거를.
이렇게나 재밌는 것들이 많은데, 왜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을까?
베이트만 부인과 셀레미온과 함께 하는 티타임도 즐거웠고, 쿠키를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도 신기했다.
쇼핑하는 동안에는 시간이 가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늦지 않았다고 해줘.”
아스테인에게 누구보다도 멋진 손수건을 만들어 주려고 마음먹은 것은 내게 빠른 결정이었다.
비록 열한 번째 바늘에 찔리고 말았지만.
“아얏!”
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프레이아 님, 주무십니까?”
아스테인이었다. 그는 오늘 내 뒤를 따라다녔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샀고 무엇을 하려는지도 봤겠지?
하지만 그의 선물은 사지 않았기에 내가 무엇을 주려는지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을 방 안 곳곳에 숨기고는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맞이한 것은 그의 라일락 향이었다.
언제나처럼 싱그럽고 산뜻한 향기. 어쩜 이렇게 매번 날 설레게 하는지 모르겠다.
“무슨 일이세요?”
그가 내게 내민 것은 목각 인형이었다.
광장에서 몇 번이나 쓸어보고 만져봤지만 차마 사지 못했던 부적.
아스테인은 내가 이것을 갖고 싶어서 만졌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건 아니었는데……. 사랑을 이루어주는 부적은 내가 가질 수 없기에 애초에 미련 없이 내려놓았었다.
“이거……. 그 상인이 무슨 뜻으로 파는 것인 줄 알고 사셨어요?”
“라일락 나무로 만들었다면서 향유에 담갔다가 빼서 방향제처럼 쓰면 좋다고 하더군요.”
아스테인에게는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구나. 그러니 이런 것을 내게 가져다주지.
하지만 다행이었다. 그 뜻을 알고 줬다면 민망할 뻔했다. 내 속마음을 들킬지도 모르니까.
“고마워요.”
나는 그것을 받으려 양손을 펼쳐 내밀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눈이 커다랗게 변하면서 미간이 좁아졌다. 조금 화난 얼굴이었다.
“손가락이 왜 이렇습니까?”
그는 목각 인형을 주는 대신, 내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눈앞으로 가져갔다.
“그게……. 연습을 하다가요.”
“무슨 연습이요?”
“수를 놓아보려고 하다 보니 서툴렀네요.”
“그런 것을 왜 하십니까? 그러다 고운 손이 상처투성이가 되겠습니다. 지난번에 장미에 찔린 상처도 아직 남아 있는데요.”
그는 내 방과 연결된 문으로 자신의 방에 급히 들어갔다가 나왔다. 손에는 약이 든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아스테인은 조심스럽게 바늘에 찔린 자리에 약을 바르고 얇은 비단으로 상처 부위를 동여매려 했다.
“기사들에게 감사 인사 같은 것을 한다고 이렇게 손을 혹사하는 겁니까? 그런 일은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눈빛도 조금 사나웠다.
“해드릴 수 있는 게 그런 것밖에 없는걸요. 좋은 검을 선물해 드리고 싶었지만, 아직은 제게 그런 재산이 없어서…….”
“녀석들 무기는 제가 알아서 잘 보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손수건이라도 해드리고 싶었어요.”
“그놈들의 아내나 연인이 알아서들 잘 만들어 주겠지요.”
마지막으로 천을 동여매는 그의 손길에 조금 힘이 더 들어간 것 같았다. 내가 움찔하자 그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느슨하게 다시 매어줬다.
“죄송합니다.”
“혹시……. 또 질투하시는 거예요?”
“……제가 또 못난 꼴을 보였군요.”
나는 귀 끝이 살짝 붉어진 아스테인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자 이제는 목덜미도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치료를 마무리하고는 가지고 온 약을 정리했다.
“그럼 하지 말까요?”
“……꼭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을 나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얼핏 그가 내게 집착하는 걸까 하는 착각이 들 만큼 사랑스러운 장면을.
다른 여자가 이런 그를 지켜본다면, 나도 지금의 아스테인처럼 질투를 느낄지도 몰랐다.
“아스테인 님의 손수건이랑 주머니에만 제가 직접 수를 놓으려고 했던 건데……. 하지 말아야겠네요.”
약상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아스테인의 움직임이 멎었다.
나를 쳐다보는 눈에는 혼란이 자리 잡았다.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다른 분들도 고맙지만, 아스테인 님이 가장 고맙잖아요. 그래서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는걸요?”
“그렇게 하고 싶으시면 하셔도…… 됩니다.”
그는 말을 끝내고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아무런 방해 없이 목각 인형이 내 손에 떨어졌다.
그의 소중한 마음이 담긴 인형을 선물 받았다.
“고마워요. 잘 간직할게요.”
“다음에는 더 좋은 것을 사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진심이었다. 아스테인이 준 선물이 하나 더 늘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인 것을.
“너무 소중해서 매일 지니고 다니고 싶어요.”
“프레이아 님의 곁에 매일 있으면서 지켜드리는 존재는 이 인형이 아니라 저일 겁니다.”
아스테인은 그 말을 하고는 다급히 밖으로 나갔다. 뒷덜미를 붉게 물들인 상태로.
나는 아스테인 덕분에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얻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심장은 내게 불면의 밤을 선물했다.
* * *
외출하고 며칠 뒤, 나는 셀레미온과 함께 기사들이 감자 수확을 하는 일을 도우러 갔다.
빈민들도 돕는 일이라니 기쁜 마음으로 준비하고 나갔다.
감자밭은 성에서 살짝 떨어진 마을 옆에 있었다. 가는 길에 보이는 마을에는 새하얀 벽에 붉은 지붕으로 지어진 집들이 가득했다.
“마을이 깨끗하고 단정하네요.”
마차 밖을 내다본 감상을 셀레미온이 말했다.
그 말에 나도 창가로 눈을 돌렸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행복한 얼굴이에요.”
“그러게, 어지간한 귀족들보다도 행복해 보이네.”
내가 봐왔던 평민들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삶에 지친 이들이 아니라 삶을 즐기는 이들.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가 충분히 만족하는 삶을 사는구나.
“대공님이 정말 잘 다스리나 봐요.”
“훌륭한 지도자의 자질을 갖췄으니까.”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기시감이 찾아왔다.
아스테인은 그냥 성기사로 살다 죽기에는 정말 아까운 인재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는 황제가 더 잘 어울렸다.
기사들을 대하는 태도, 영지민과 빈민들을 위한 마음, 모두가 그걸 말해줬다.
“그런 분이 아가씨를 위한 성기사가 된다니까 너무 든든해요.”
나는 다시 눈을 돌려 마차 밖에서 날 호위하며 따르고 있는 아스테인의 넓은 등을 확인했다.
지금까지는 내 욕심 때문에 아스테인에게 성기사가 되면 안 된다는 소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엘라네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가 곁에 있길 바라는 마음 탓이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
“뭘요? 후작가에서 나온 거요?”
“아니야. 아무것도.”
애써 숨겨오고 외면했던 마음의 짐이 고개를 들었다.
아스테인에게 보호받는 것이 좋아서, 행복해서, 모른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엘라네르를 찾는 일만큼, 아스테인을 설득해 성기사를 그만두게 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가 내 곁을 떠난다 해도.
“아가씨, 도착했어요!”
셀레미온의 외침과 동시에 마차는 감자밭에 도착했다.
감자밭에는 기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빈민가에서 봤던 아이들도 5명이나 있었다.
“아스테인 님, 저 아이들은……?”
나는 마차에서 내리다 말고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프레이아 님의 지시를 따르며 일하다 알게 된 모양입니다. 오늘 감자를 캐니 와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고 일러준 모양이더군요.”
“거리가 멀 텐데…….”
“마차로 태우고 왔을 겁니다.”
“기사님들의 마음이 주인을 닮아 넓네요. 배려심도 깊고.”
내 칭찬에 아스테인이 빙그레 웃어줬다.
“과찬입니다.”
그게 조금 더 내 양심을 찔러댔다.
마음의 가책을 숨기기 위해 나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점심을 준비해온 요리사들을 돕는 것부터 시작했다. 어쨌든 내가 여기에 온 것은 고생하는 기사님들을 돕기 위해서였으니까.
“자, 다들 밥 먹고 일하지?”
아스테인의 부름에 기사들과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점심은 커다란 호밀빵에 잘 구운 소고기와 토마토, 양파, 치즈를 끼워 넣은 요리였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배가 부를 것 같았는데 여기에 커다란 소시지와 달걀부침도 줬다.
때마침 아이들이 좋아할 젤리도 있었다.
“와, 맛있겠다!”
“오길 정말 잘했어!”
아이들은 너무나도 행복한 얼굴로 음식을 받아 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조금 뜯어 먹더니 더는 먹질 못하고 다들 쳐다만 보고 있었다.
“집에 있을 식구들이 생각나서 못 먹는 거니?”
내가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네……. 엄마랑 아빠는 이런 거 못 먹어봤을 거예요.”
“내 동생은 단 거 정말 좋아해서 남겨가려고요.”
빈민가 아이들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예뻤다. 사람 수에 맞춰 가져온 거라 여유분이 없어 더 나누어 주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만큼.
“자,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칼을 들고 아이들 몫의 빵을 반의반 정도를 잘라주었다.
“일하러 왔는데 굶으면 일하기 힘드니까 조금은 먹고 남은 건 집에 가져가서 나눠 먹는 거야.”
먹고 싶은 욕구와 집 식구들 생각에 망설이던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겁지겁 먹어댔다.
그걸 흐뭇하게 보다 내 몫을 육 등분으로 나누었다.
“자, 천천히 먹으렴. 더 있으니까.”
“그러면 예비 성녀님은요? 배고프지 않으세요?.”
“나는 아침에 정말 배부르게 먹어서 괜찮아.”
여전히 내 아침은 저녁 만찬 수준이었다.
“그래도 배고프면 여기 널린 게 감자인데 다 같이 구워 먹고 가면 되지 않을까?”
내 말에 아이들이 환하게 웃었다.
작은 행복을 만끽하는 아이들의 맑은 웃음이 내게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오길 잘했다고 말해주듯이.
“헤헤, 예비 성녀님은 마음씨가 천사예요.”
“그러게요. 엄마가 그때 저희 목숨 구해주신 분이라면서, 빈민가에 와주신 성녀님은 누나가 처음이랬어요!”
“야, 누나라니! 예비 성녀님이지.”
아이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한가득이었다.
신성력을 찾아야 한다며 기도나 하고 앉아 있었다니. 어차피 갖지 못할 신성력을 찾는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한 명의 사람이라도 더 돕고 다닐걸.
“그 누나랑 눈이 너무 똑같이 생기셔서 말이 헛나왔네, 헤헤.”
“나랑 닮은 사람이 있어?”
“아니요. 머리카락 색부터 전혀 다르게 생겼어요. 엘라네르 누나는 빨간 머리인걸요.”
엘라네르? 나는 익숙한 이름에 눈을 찌푸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가 대답한 아이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그 누나 이야기는 비밀이잖아!”
“아, 맞다!”
엘라네르의 이름을 말한 아이는 손으로 입을 막고는 눈치를 봤다.
아스테인이 애를 썼는데도 못 찾은 엘라네르의 정보가 왜 이 아이들에게 있을까?
“엄마 아빠에게도 비밀인 친구니?”
두근대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의외의 곳에서 엘라네르의 흔적을 찾다니…….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눈빛을 나누었다. 작게 내가 그들을 구한 은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보였다.
한참을 자기들끼리 쑥덕대던 아이들은 다 같이 나를 돌아봤다.
“으음, 예비 성녀님이니까 말씀드릴게요. 부모님들은 모를 거예요.”
“저희 눈에만 보이는 누나거든요.”
“가끔 와서 아플 때 치료를 해주고 가요. 먹을 걸 나눠 주기도 했어요. 요정 같은 신비한 누나예요.”
왜 아스테인이 노력을 했는데도 엘라네르를 찾지 못한 것인지 이해가 되려고 했다.
“원래 빈민가에 살던 누나가 아닌 거니?”
하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분명히 엘라네르는 빈민가 출신의 아이였다. 후작이 건드려놓고 쫓아낸 하녀가 그곳에서 출산하고 키웠으니까.
“글쎄요? 예비 성녀님이 저희를 살려주신 이후에 처음 찾아왔어요.”
빈민가에서 봤던 엘라네르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엘라네르는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도 사람들 머릿속에 있는 흔적을 지워버린 것은 그녀 자신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짓까지 하면서 내 앞에서 사라진 이유가 뭘까?
정말로 날 가짜 성녀로 만들어 비참하게 버리려고 이러는 거야? 숨이 콱 막힐 것 같았다.
“나도 그 요정 같은 분을 만나고 싶은데……. 내게 소개해주지 않을래?”
나는 한마디 한마디를 힘겹게 내뱉으며 부탁했다.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다시 의견을 교환하더니 나를 돌아봤다.
“물어볼게요.”
“그래……. 부탁할게.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니까, 꼭…….”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간절하게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이제 얼른 먹으렴.”
아이들은 다시 즐겁게 내가 나누어준 몫을 먹었다. 나는 내 몫으로 남긴 작은 조각마저 먹질 못했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엘라네르의 일을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댔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그녀가 있었다니. 이번만큼은 엘라네르의 흔적을 놓칠 수 없었다.
“잘 먹었습니다!”
식사 시간이 끝나갈 무렵, 아스테인이 다가왔다.
“프레이아 님, 식사를 거의 거르셨군요.”
그는 언제나처럼 내 상태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아침을 너무 과하게 먹었나 봐요.”
“아이들을 위해 더 챙겨왔어야 했는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말로 입맛이 없어서 먹지 못한 건데……. 아스테인은 내 뜻을 너무 고귀한 쪽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기사님들도.
“아가씨, 저희가 얼른 감자를 마저 캘 테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모닥불에 구워 먹으면 맛이 기가 막힙니다.”
“우리 아가씨는 역시 천사였어. 그렇지?”
조금 과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나는 차라리 감자라도 캐면서 부담스러운 눈길을 피하려고 했다.
그걸 아스테인이 붙잡았다.
“이거라도 드셔야 합니다.”
조금은 단호하면서도 엄한 선생님 같은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