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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25화 (25/101)

25화. 아스테인의 비밀 친구들

아스테인의 기사들이 인테르의 하수인을 둘러쌌다. 그들은 전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동시에 검을 뽑아 그자를 향해 겨누었다.

“단델리온의 기사들인가? 하하하.”

로브를 쓴 자는 자신을 에워싼 기사들이 가소롭다는 듯, 듣기 싫은 목소리로 웃어댔다.

기사들 중심에서 그자의 팔을 자를 듯이 검을 들이밀고 있던 아스테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온 거지?”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하지만 로브를 쓴 사람은 여전히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웃음만 계속 흘렸다.

아스테인은 험악한 얼굴을 한 채 위험한 자의 얼굴을 확인하려 로브를 벗기려 했다.

하지만 아스테인의 손은 허무하게도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인테르의 수하는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아니! 저놈, 마법사예요?”

옆쪽에 서 있던 크리세우스가 황망하게 외쳤다.

아스테인은 작은 신음을 울렸다.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마법을 쓰는 자라면 골치가 아프군.”

크리세우스를 비롯한 기사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아스테인은 묵묵히 그들의 의견을 듣고 있었다.

“대공령에 저런 자가 드나든다면 아가씨가 위험합니다.”

“보통 마법사는 아닌 것 같지 않습니까? 스크롤도 없이 공간이동이라니요.”

“흑마법사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흑마법. 그것은 신성력과 반대되는 어둠의 힘이었다. 세상의 모든 증오와 분노를 모아서 사악한 일을 벌이기 위해 쓰는 힘.

그것을 지닌 자들은 세상에 몇 없다고 들었다. 성녀가 있는 우리의 대륙에는 특히나.

“아니, 그런 위험한 놈이라면 우리가 있어도 프레이아 님을 노렸겠지.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셀레미온은 안 그래도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할 만큼 더 창백해졌다. 자신의 고집으로 밖에 나온 탓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믿나 보다.

“셀레미온, 괜찮아.”

“기사님들이 눈치채고 몰래 따라오지 않았으면…….”

“몰래가 아니야. 내가 처음부터 부탁드렸어.”

내 말에 셀레미온의 눈이 커졌다가 가늘어졌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부터 이야기해줄 걸 그랬다.

“성에서 가까운 곳이고 안전한 영지라고 해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 그런데 너는 너무 들떠 있고.”

셀레미온은 마음이 놓였는지 질렸던 얼굴에 조금은 핏기가 돌아왔다. 다행히 서운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미리 부탁드렸어. 네가 눈치채지 못하게 멀리 떨어져서 우릴 지켜봐 달라고 했지. 그래야 네 흥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거든.”

“죄송해요. 제가 철없이 굴어서. 차라리 처음부터 밀착 호위를 받았다면 놀랄 일도 없었을 건데요.”

“아니야! 덕분에 정말 즐거웠어. 둘만 다녀서 보통 사람처럼 즐길 수 있었는걸.”

내 위로에도 셀레미온은 영 기운을 내지 못했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나서줬다.

“네 덕에 인테르를 잡을 기회를 얻을 뻔했단다. 내가 부족해서 놓친 것이지. 그러니 그렇게 죄지은 표정을 짓지 않아도 된다. 프레이아 님이 즐거우셨다니 그걸로 충분히 네 역할을 한 것이다.”

아스테인의 위로에 셀레미온은 겨우 어깨를 살짝 폈다.

아스테인은 셀레미온과 내 상태를 한 번 더 확인한 뒤 기사들에게 명했다.

“크리세우스, 너는 이 녀석들을 데리고 광장을 한 번 더 점검해라. 혹시 인테르의 흔적이나 다른 추종자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기사들이 흩어지는 것을 본 뒤, 우리는 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 * *

“큰일이 있으셨다면서요?”

성에 돌아가자마자 베이트만 부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셀레미온은 다시 죄지은 얼굴이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위험하다고 했잖니.”

“셀레미온도 많이 놀라고 혼났으니까 꾸중은 그만 해요.”

베이트만 부인은 내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어 주었다.

“볼 일은 잘 보고 오셨나요?”

셀레미온은 날 대신해서 오늘의 수확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베이트만 부인은 그런 나와 셀레미온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즐거우셨다는 소리죠?”

마지막 일만 아니었어도 완벽한 하루였다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아스테인과 나가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들 만큼 즐거웠고.

나는 대답 대신 조금 부끄러운 듯이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제 공부를 시작해야겠군요.”

“공부……요?”

베이트만 부인의 말에 내가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의 계획에는 이런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대공님께 드릴 주머니에는 아가씨께서 직접 수를 놓겠다면서요?”

“아…….”

“어릴 때 잠깐 배우고 못 배우셨잖아요. 이번에 제대로 배워 보는 거죠.”

아까와는 달리 조금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생긴 조금 불안했던 기억은 깔끔하게 지운 채.

“가죽에 수를 놓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니 쉽게 손수건에서부터 시작합시다.”

대공성에 온 뒤로 내게는 하루하루가 배움이며, 낯선 도전이었다. 그리고 한 발짝 내디뎌 얻은 첫 경험들은 신전에서의 삶보다 모두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알겠어요.”

입가에서 미소가 떠날 날이 없을 만큼.

* * *

늦은 밤, 단델리온 대공성 별관에는 백여 명의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흔히 사람들이 기사라고 생각하는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건장한 체격과 탄탄한 근육. 그것을 가진 기사들은 성에 상주하는 이들이고 프레이아도 익히 아는 얼굴들이었다.

하지만 마른 체격에 날렵하게 생긴 이들은 프레이아가 만나지 못한 자들이었다.

“주군, 다녀왔습니다.”

크리세우스는 이들을 지나쳐 그곳에서 가장 고귀한 남자 앞에 섰다.

“흑마법사들의 동태는 파악했나?”

“저희가 파악한 자 중에서 오늘 대공령에 나타난 자는 없습니다.”

“네가 파악하지 못한 자라는 소리군.”

크리세우스는 약간 자존심이 상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대륙에서 가장 많은 마법사의 현황을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는 건 저희밖에 없습니다.”

아스테인은 크리세우스의 보고를 들으며 턱을 만지작만지작했다. 초조할 때면 가끔 하는 행동이었다.

“인테르는?”

“아직 특별한 움직임이 없습니다. 다만, 신전의 반대편에서부터 사람들에게 포교 같은 것을 하는 모양이더군요.”

“성녀와 신의 존재가 무의미하다?”

“네. 그런 점은 참, 마음에 드네요. 솔직히 신전은 없는 편이 낫죠. 주군을 뺏기지 않으려면.”

크리세우스가 가볍게 말을 내뱉자, 아스테인의 보라색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수장이라는 놈이 이런 소리를 하고 다니니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이라는 오해를 받고 살지.”

“우와! 누가 우리더러 나쁜 놈이래요? 억울하다!”

아스테인은 억울해하는 크리세우스를 보며 조금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그걸 본 크리세우스는 분한지 고개를 빳빳이 들며 아스테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내가 왜 수장이에요? 주군이 주인이지.”

“나는 주인이 되겠다고 한 기억이 없다.”

크리세우스는 아스테인의 말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물론 그 시도는 아스테인의 손가락 하나로 차단됐지만.

주변에 있던 이들은 그런 크리세우스의 모습을 보며 낄낄댔다.

크리세우스는 그런 동료들의 모습에 서러웠는지 아스테인을 향해 탄식을 토해냈다.

“와. 이 주군 좀 보게! 잠깐 성기사를 하는 것 가지고 신분 세탁까지 하는 겁니까?”

“누구 마음대로 잠깐이지?”

지금까지 장난스러웠던 분위기는 아스테인의 말 한마디에 차갑게 식었다.

다들 서로의 눈치만 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크리세우스가 모두를 대표해서 나섰다.

“황제의 눈을 피하려고 잠깐 성기사가 되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

“주군! 정말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아가씨를 쫓아 신전으로 들어가기라고 하겠다는 거예요? 우리도 버리고, 영지에서 주군만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버리고? 신을 그렇게나 믿는 것도 아니면서?”

아스테인은 잠시 말없이 창문 너머의 건물로 시선을 돌렸다.

프레이아의 방에는 늦은 밤인데도 아직 불이 환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여인은…….

“어차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황제가 급사라도 하지 않는 한, 나는 돌아가신 황제 폐하와의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

“그 망할 약속요? 주군께서 더 뛰어난 자질을 가졌는데도 황태자 자리를 포기하게 만든 그날 일 말입니까?”

아스테인은 복수심에 눈이 멀어 피에 굶주렸던 자신의 과거를 잠시 떠올렸다.

모후와 외조부를 죽인 자들을 향한 복수. 그것을 허락받은 대신에 포기했던 자신의 미래.

그리고 그때 만났던 작고 여린 소녀.

“신전에서 숨죽이고 있다 보면 기회가 오겠지. 신께서 내게 기회를 주지 않을 셈이라면 형님이 끝까지 무사히 천수를 누리실 테고.”

“명분을 만들고 신전의 도움을 받고자 아가씨에게 의지하려던 것 아닙니까?”

처음에 성녀님을 찾아갔을 때만 해도 그 이유가 맞았다. 그가 꿈꾸는 미래를 펼칠 때 누구보다 든든한 자신의 편으로 신전을 끌어들이기 위해.

하지만 그곳에서 프레이아와 재회한 이후로 그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너희는 그런 생각으로 프레이아 님을 대하려고 했던 것인가?”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아가씨 그 자체로도 저희는 좋습니다!”

“나도 그래서 따르려는 거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차라리 날 필요로 하는 사람의 곁에 있겠다는 거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을 계속 필요로 한다면, 언제까지고 자신이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야망 없는 사람이라 욕을 하더라도. 가족의 유지도 받들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라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그래서 우리를 버리겠다는 겁니까? 아니면 곁에 두겠다는 겁니까?”

“내가 황제의 꿈을 포기한다는 이유로 너희들이 실망해서 떠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그 소리에 크리세우스가 입술을 살짝 물어뜯었다.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을 하는 주인이 조금 원망스러운 모양이었다.

“쳇, 알았어요. 뭐. 성기사의 비밀조직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죠. 아니, 그렇게 되면 우리 주인은 주군이 아니라 아가씨인 건가? 그럼 더 좋네.”

크리세우스의 투덜거림에 아스테인도 피식 웃고 말았다.

결국에는 이럴 거면서 늘 투정이다. 황제가 언제 될 거냐, 그냥 당장이라도 황궁으로 가서 황제를 암살하면 어떻냐고 조르며.

“그것도 나쁘지 않군. 너희는 내 말보다는 프레이아 님의 말을 더 잘 들을 것 같으니,”

“네네, 그럴 겁니다. 그건 주군도 마찬가지이지 않나요? 나중에 주군을 설득해 줄 분도 아가씨니까 우리가 잘 보여야죠.”

약간은 몹쓸 꿍꿍이가 남아 있는 것도 같지만, 아스테인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모후와 외조부의 유언과는 다른 길을 가더라도 자신이 행복하다면 유지를 따른 것과 다를 바가 없을 테니…….

언젠가는 이들도 이해해줄 것이다.

“그나저나 크리세우스. 일 처리는 어찌 되고 있는 거지?”

“뭘…… 말입니까? 시킨 것은 뭐든 잘하고 있는데요?”

아스테인은 조금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헛소리하던 수하를 괴롭힐 건수를 찾은 것처럼.

“사람도 못 찾고, 과거의 일도 아직 진실을 못 밝히고…… 게다가 오늘은 인테르가 들어오게 내버려 뒀지 않아?”

크리세우스는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후작의 동향 감시는 잘되고 있나? 그 소후작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은 것 같던데?”

“그 화난 오징어 같은 놈만큼은 잘 지키고 있습니다!”

눈치 빠른 수하는 아스테인이 잔소리를 할 틈을 주지 않았다.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런데 아가씨께는 언제 가십니까? 이러다 아가씨께서 먼저 잠드시겠는데요? 아가씨께 드릴 게 있지 않았나요?”

언제나 이건 잘 통했다. 그리고 이건 크리세우스가 프레이아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스테인은 눈썹을 올렸지만 더는 잔소리를 이어가지 않고 별채를 떠났다.

그런 그가 향한 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향이 옅어졌군.”

침대 옆 협탁, 거기서 그는 작은 보라색 병을 하나 꺼냈다. 크리세우스가 늘 놀리는 부분이었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다.

병에 든 액체를 정말 티가 나지 않을 만큼 살짝 손목과 목 뒤에 발랐다.

“하아……. 유치하군.”

가끔은 이런 자신이 한심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기도실에서 목에 상흔을 지닌 채 잠이 들었던 여인이 자신의 품에 파고들면서 했던 행동이 잊히지 않아서.

멍 자국 때문에 분노해 부들부들 떨던 그의 옆으로 프레이아가 고개를 살짝 떨궜다. 불편해 보여 그녀에게 자신의 어깨를 빌려줬다.

그러자 그녀가 점점 자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 때문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우연인지 그녀가 파고들던 곳에는 라일락 꽃잎이 옷에 살짝 붙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늘 그녀는 라일락 나무 아래에 있었다.

그와 처음 만났던 어린 시절에도, 그가 후작가에 몰래 찾아갔던 그 시절에도.

신전에서 다시 재회한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늘 그녀는 눈을 감고 향을 맡고 있었다.

그것이 부러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는 향을 닮고 싶기도 했고.

적당히 향이 날아갈 때 즈음, 그는 대공비의 방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하는 손은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떨렸다.

“프레이아 님, 주무십니까?”

방 안에서 뭔가 약간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린 후에야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세요?”

문이 열리자 그의 빛이 눈앞에 나타났다. 삶의 희망이자, 목표가.

“이걸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는 낮에 대공령의 광장에서부터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그것을 본 프레이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바로 예쁘게 말리는 눈꼬리.

“이건…….”

“한참을 보면서 만져보고도 사지 못하시길래 제가 선물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서로 마주 보고 뽀뽀하는 아기 모양의 목각 인형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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