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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24화 (24/101)

24화. 작고 소소한 즐거움

대공령은 다른 영지에 비해 작고 아담했다. 하지만 그 어느 영지보다 사람들이 활기찬 곳이었다.

“와, 작아도 있을 건 다 있네요?”

셀레미온이 잔뜩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을 살폈다.

괜히 눈치를 보게 되었다.

아무래도 후작가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탈을 하려니 긴장이 됐다.

“아가씨, 저기요. 시장인가 봐요.”

셀레미온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천막을 치고 여러 가지 물건을 내려다 놓고 있었다.

“저기 가봐요.”

셀레미온의 손에 이끌려 간 곳에는 작고 아기자기한 목각 인형이 있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에 이상하게 끌렸다.

사랑스러운 아기들이 뽀뽀하는 모습으로 만든 인형이었다.

“사랑을 불러온다는 라일락 나무로 만든 인형입니다. 라일락 향유에 재워두어 방향제로도 쓸 수 있죠.”

익숙한 향 때문이었다. 아스테인의 라일락 향이었다.

“귀엽네요.”

“아가씨와 같이 어여쁜 분이 사면, 분명 멋진 남자가 찾아올 겁니다.”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게는 이미 아스테인이 찾아와 있었다. 이루어질 수는 없는 사랑이지만.

“흐음……. 저는 사랑 말고 돈이나 벌 거예요. 돈 벌게 해주는 인형 있으면 줘봐요.”

옆에서 셀레미온은 부적인지, 인형인지를 고르고 있었다. 그사이 나는 아기 인형을 손으로 몇 번이고 쓸었다.

갖고 싶지만 아직은 살 수 없는 물건이었다.

“아가씨는 필요한 거 없으십니까?”

주인이 내게 하나라도 팔고 싶은지 권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가씨, 대공님께 선물하시면 어때요? 막, 힘이 강해지는 인형이라든가, 무슨 공격이든 막아주는 인형이요.”

“셀레미온, 넌 내가 누구인지 잊었어?”

성녀의 축복을 두고 부적 같은 것을 선물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 일이었다.

“아, 맞다. 헤헤, 저한테는 그냥 아가씨니까 잊었어요. 근데 그런 의미가 아니더라도 대공님은 좋아하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겠지?”

“그러니까요. 감사 선물을 드리려고 하는 거잖아요.”

셀레미온의 재촉에 나는 다시 인형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스테인에게 주고 싶은 것이 없었다.

“다른 곳에 가볼까요?”

셀레미온은 날 데리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잔뜩 흥분한 소녀의 체력은 내 것보다 강했다.

하지만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건 어때요?”

“음…… 너무 화려해. 아스테인 님은 너무 화려한 것은 좋아하지 않으셨어.”

“그럼 이건요?”

“그냥 장식품은 별로 쓸모없지 않아?”

그냥 누군가를 위해서 선물을 고르고 다닌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즐겁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으니까.

이런 작고 소소한 즐거움을 나는 모르고 자랐다. 이 작은 기쁨을 놓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발을 끊임없이 움직였다.

“어? 이건 소원 팔찌인가 봐요.”

셀레미온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아스테인이 내게 줬던 실 팔찌와 비슷한 모양의 팔찌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어머, 작은 아가씨가 잘 아네요.”

“그럼요. 여신께 소원을 빌면서 한 땀 한 땀 손수 실을 꼬아서 만드는 거잖아요. 그렇게 하고 다니다가 끊어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맞죠?”

셀레미온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이가 날 돌아봤다.

“어라? 그런데 아가씨는 팔찌가 끊어지지 않았는데도 소원을 이루셨네요?”

셀레미온은 내 팔찌가 신성력을 찾기 위한 소원 팔찌라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팔찌를 옷 소매 속으로 숨겼다. 아무래도 그런 의미의 팔찌가 아니었기에 지레 찔렸다.

“그러게…….”

어색하게 웃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셀레미온은 다행히 내 어색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활기차게 쇼핑을 이어나갔다.

“와, 실이 진짜 고와요. 다 비단을 만드는 명주실인가요?”

“그럼요. 소원을 이루기 위한 팔찌인데 가장 귀한 실을 써야죠. 염색약도 최고급으로 사용했답니다. 물론, 특별한 소원을 이루는 일에는 이것보다 더 귀한 재료를 쓰지만요.”

셀레미온은 궁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주인이 영,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자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의 눈동자 색을 닮은 녹색 팔찌를 샀다.

“어떤 소원에 어떤 재료를 쓰는데요?”

“연인과의 사랑을 기원할 때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모아 한 올 한 올 엮어서 만들지요.”

그 말에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회귀 전의 아스테인이 나에게 그런 마음을 품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때의 아스테인은 머리카락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다. 머리카락끼리 엮어서 길이를 늘일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가씨, 소원 팔찌는 어때요? 기사님들이 무운을 비는 의미로 많이들 한다잖아요. 거기에 아가씨의 축복을 같이 줘요.”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대신 팔찌가 그들에게 축복을 내려줄 수도 있으니.

“그럼…… 기사님들 수대로 살까? 그런데 성에 안 계신 분들도 있다던데……. 넉넉하게 사야겠지?”

“네!”

대량 주문에 신난 주인은 열심히 물건을 담았다. 셀레미온이 가지고 나온 금화로 돈을 내자 주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나, 이렇게까지 비싸지는 않은데요.”

“혹시 수량이 모자라면 더 가지러 올 거니까 그때 남은 돈에 맞춰서 주세요.”

* * *

우리는 이제 원래 계획한 의상실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어느 아가씨의 옷을 만들러 오셨나요?”

그런데 셀레미온이 내 등을 떠밀었다.

“셀레미온?”

“당장 입을 옷 말고는 없잖아요. 외출복도 지금 이거랑 두 벌밖에 없고.”

“사치하려고 나온 게 아니야.”

“사치하자는 게 아니라, 당장 생활에 필요한 옷은 있어야죠. 계절도 금방금방 바뀌는걸요.”

셀레미온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눈을 찡그리자 셀레미온은 약간 움찔했다.

“집사님이 아가씨의 위엄을 위해서 안 그래도 옷을 좀 사야겠다고 하셨어요. 돈에 여유도 있다고 하셨고요.”

“그건 내 돈이 아니야.”

“아니죠! 아가씨의 품위 유지를 위해서 내려온 돈이니까 아가씨 거죠!”

셀레미온은 움찔하면서도 또박또박 따졌다. 약간은 눈물이 글썽하기도 하면서.

“성녀님이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한 거 누려보라고 하셨다면서요? 평범한 귀족 아가씨들은 계절마다 예쁜 옷을 맞춰 입고 다닌단 말이에요!”

셀레미온은 나보다도 내 과거를 더 슬퍼하며 울려고 했다. 솔직히 나는 그런 거 별로 상관없었는데.

너무나도 구슬픈 목소리로 울먹이기 시작한 셀레미온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알았어. 대신 네 옷도 사자.”

“제 것도요?”

“응. 너도 옷을 맞추면 나도 할게.”

“하지만 저야 하녀복이 많은데요?”

“이렇게 같이 밖에 나올 때 입을 옷이 있으면 좋잖아.”

우리의 언쟁에 상점 주인은 혼자 입꼬리를 계속 올리고 있었다. 만족한 듯이.

내 몸의 치수부터 재고 셀레미온의 것까지 확인했다. 그런 뒤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선택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러자 셀레미온이 초조해했다.

“아가씨, 그런데 이렇게 오래 밖에 나와 있어도 될까요?”

“왜? 네가 나오자고 해놓고 뒤늦게 걱정돼?”

“아니 그게…….”

“무슨 일 생기면 네가 책임진다며?”

내가 샐쭉하게 대답하자 셀레미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괘, 괜찮겠죠?”

“대공령이라 무조건 안전하다고 말한 사람도 너였어.”

“아가씨랑 나온 거니까 괜찮겠죠?”

내 신성력을 믿는 것이라면 미안하지만 괜찮지 않을 것이다.

“그래, 우리 마음대로 나왔다고 아스테인 님이 혹시 화내면, 내가 막아줄게.”

아스테인이 화낼 수도 있다는 소리에 셀레미온이 다급해졌다.

그 아이는 옷을 더 둘러보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원래의 목적을 주인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주머니가 필요해요. 선물을 담을 주머니인데, 푸른 날개를 수놓아주세요.”

셀레미온은 내가 이야기했던 것을 그대로 외워서 줄줄 이야기했다.

의상실 주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간단하게 그림으로 그려냈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네, 이거 맞죠. 아가씨?”

“응. 내가 상상했던 모습이랑 같아.”

“소재는 어떤 것으로 할까요?”

점원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셀레미온이 나섰다.

“쿠키를 담아서 드릴 거니까 가볍고 얇은 비단이면 되지 않을까요?”

“아니야. 평소에도 사용할 수 있게 튼튼하고 질긴 것이 나을 것 같아.”

“그럼 양가죽으로 할까요?”

나는 만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량을 말하고 선금을 지급한 셀레미온은 이제 나가자는 듯 내게 재촉하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았다.

“하나는 조금 특별하게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말입니까?”

주인은 계속되는 주문에 얼굴에서 미소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가죽도 더 좋은 것을 쓰고 싶고, 보석 장식도 하고. 수는…… 내가 직접 놓을 테니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어.”

마지막 말은 조금 수줍어서 작게 말했다.

“대공님께 선물하시는 거니까 최선을 다해야 해요.”

셀레미온은 날 대신해 가슴을 내밀며 뻐기듯이 말했다. 그 모습을 보니 셀레미온이 오늘 이렇게 즐거워하는 이유가 이해됐다.

귀족 영애의 하녀라면 해 봤을 모든 일들. 이것을 이 아이도 오늘에야 겪었다.

그걸 깨닫고 나자 나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안으로 가능할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임시 직원을 더 구하면 되니 보름 내외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특별한 주머니를 우선으로 제작해서 바로 갖다 줬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이건 제가 직접 만들어 빨리 보내드리겠습니다.”

만족스러운 구매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온 지 꽤 된 탓에 이제 해가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이제 돌아갈까?”

“네! 얼른 돌아가요. 늦었어요!”

셀레미온과 나는 아까 시장이 서 있던 광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해가 지는 것에 맞춰 야시장을 열려는지 상인들이 낮에 팔던 물건들을 치우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다양한 물건들은 처음 보는 먹거리들에 밀려났다.

“이런, 대공님의 선물은 못 구해서 어떡해요?”

“그러게. 그래도 너무 늦었으니까 이제는 돌아가야지. 이러다 진짜 혼나겠다.”

“그…… 제가 혼날게요. 아가씨를 부추겨서 나왔으니까요.”

그걸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순진한 셀레미온을 속인 것만 같아서. 정확히는 속였다기보다는 따로 말해주지 않은 것이다.

주눅 든 아이에게 더 늦게 가도 된다는 소리를 해줄까 하고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들린 이상한 소리에 나는 신경을 뺏겨버렸다.

“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시장의 가장 중앙에는 이상한 무늬가 새겨진 로브를 깊이 뒤집어쓴 사람이 있었다.

“신성력은 허상입니다.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신기루입니다. 인간은 노력을 통해 고난을 극복하고 발전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막는 것이 신성력이란 말입니다!”

남자의 외침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작은 호기심조차 끌지도 못했다.

대부분은 그냥 힐끔 쳐다보고는 무시하고 지나쳤다. 몇몇은 조금 서서 듣는 듯하다가 손가락질을 하며 혀를 찼고.

“아가씨, 저 사람 뭐예요?”

“인테르……. 반신전파의 사람……인 것 같은데?”

나를 노리는 집단의 사람이 이곳 대공령에 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외치는 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봤다. 그는 내가 쳐다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지 계속해서 이상한 논리를 이어나갔다.

“우리가 사는 곳의 주인은 신이 아닌 인간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무슨 문제만 생기면 신을 찾아가고, 신의 대리인이라 외치는 성녀를 찾아갑니까?”

성녀를 향한 악의.

다행히 그 악의가 내게 직접 닿지는 않았다.

저자와 우리의 거리는 제법 멀었고, 이쪽은 쳐다보고 있지 않았으니까.

“인간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가능성을 지녔습니다. 성녀라는 존재는 세상에 쓸모없습니다.”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역시나 인테르는 내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었다.

사냥꾼의 목표인 나는 이제 몸이 떨리는 것을 참기 힘들어졌다. 지금 이곳에 내가 있다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됐다.

“셀레미온, 서둘러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네, 이상한 사람이 다 있네요. 정말 싫어.”

아스테인에게 얼른 알려야 했다.

안전하다고 생각한 그의 영지에도 인테르가 이미 침입해 있었다니. 그도 충격을 받을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인테르의 하수인을 힐끔 쳐다봤다.

“……!”

그때를 맞춰 그자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해가 지느라 주변에는 어둠이 가득했다. 그런데도 저 사람의 눈빛은 누구보다 빛이 났다.

마치 노을이 눈에 옮겨 온 듯이 황금빛으로.

“누구지?”

저 눈빛이 낯이 익었다. 언젠가 저자와 분명 만났다. 회귀 전에……. 아니 이번 삶에서도 분명히 마주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성큼성큼 내 쪽을 향해 걸어왔다. 당장이라도 나를 끌고 갈 듯이 눈빛을 빛내며.

“아, 아가씨! 저 사람 우리한테 오는 거 맞아요? 아가씨를 해치려는 거 아니에요?”

셀레미온이 잔뜩 겁을 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소중한 하녀는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자신이 대신 저 사람을 상대하겠다는 듯.

“셀레미온 위험해. 내 곁에 붙어.”

“하지만 저자가 아가씨를 위협하려는 거면 어째요? 인테르라는 미친 것들이 지난번에도 습격했다면서요?”

“응. 하지만 날 죽이지는 못할 거야.”

내게는 날 지켜줄 사람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섣불리 나서지 말고 내 곁에 있어.”

셀레미온은 떨면서도 절대 내 앞에서 비켜서지는 않았다.

어느새 그자는 우리 앞에 다가왔다.

해는 이제 넘어가 버렸고 어둠 속에 가려진 자의 얼굴은 여전히 확인하기 힘들었다.

그는 날 보호하려던 셀레미온을 밀어내고 내게 가느다란 팔을 뻗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움켜쥘 듯이.

“안녕? 예비 성녀?”

내 목을 노리고 다가오던 팔이 갑자기 덜컹하고 멈췄다.

그러자 로브를 뒤집어쓴 자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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