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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23화 (23/101)

23화. 평범한 소녀가 가질 추억 (3)

셀레미온은 아스테인의 말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네? 정말요? 임시로 맡아주시는 거 아니셨어요? 게다가 성기사는 얼마든지 그만두실 수 있잖아요.”

“프레이아 님이 성녀로 계시는 한, 내가 성기사를 그만둘 일은 없을 것 같구나.”

순간 두 가지 감정이 충돌했다.

우선은 벅찼다. 오랜 시간 마음에 품은 이가 내 곁에 있어 주겠다는 소리는 보석보다도 빛나는 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 제대로 운명을 바꾸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한심했다.

아스테인을 구하겠다고 해놓고 계속 그를 내 불행한 운명에 끌어들이는 것만 같았다.

“정말이세요? 우리 아가씨를 평생 지켜주는 성기사님이 되어주신다는 거, 진심인 거죠? 후작님도, 소후작님도 못 건드리게 해주실 거죠?”

셀레미온의 질문에 아스테인이 다시 눈을 휘어줬다.

“진심이니 걱정 내려놓아도 된다.”

“다행이다. 감사해요!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셀레미온은 아스테인에게 몇 번이고 나를 대신해 감사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아스테인이 나를 곤란한 얼굴로 쳐다봤다.

“프레이아 님의 하녀는 진심으로 주인을 섬기는군요.”

“셀레미온은 제게 친구이자 자매인걸요. 절 대신해서 매도 많이 맞아주었고, 후작님의 눈을 피해 늘 절 챙겨줬어요.”

“고마운 사람이군요. 프레이아 님이 신전으로 떠난 뒤에도 제 기사들이 후작가의 보복으로부터 보호할 겁니다.”

셀레미온이 또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을 나와 아스테인이 말려야 했다.

셀레미온이 떠나고 나와 그는 본궁의 구석에 있는 온실로 갔다. 따스한 온실에서는 이미 여름 꽃들이 얼굴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공성은 지낼 만하십니까?”

내가 예쁜 꽃에 취해 있을 때, 아스테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고작 이틀째인데요?”

“하긴, 그렇군요.”

“그런데…… 음, 조금 걱정되기는 해요.”

“푸토르 후작이 다시 프레이아 님을 데리러 올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침에 황궁에 다녀왔습니다.”

점심때가 다 되어가기는 했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황궁까지의 거리가 가까운 것도 아니고, 아마도 새벽부터 일어나 다녀왔어야 했을 것이다.

“황제 폐하가 이 상황을 이해하셨나요? 제가 아스테인 님과 가까워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셨을 텐데…….”

“황후 폐하께서 프레이아 님의 사정을 깊이 있게 말씀드려 주셨습니다. 형님은 성기사가 되려는 제 의지를 보고 만족해하셨으니 괜찮습니다.”

별로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선황제의 유지를 어기고 여전히 죄 없는 동생을 쫓아내려는 황제가 한심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연회 때의 습격 사건은 이대로 덮는 건가요?”

“아무래도 폐하가 관련된 일이라 후작의 죄를 묻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미간이 저절로 모였다. 화도 나려고 했다.

죄를 짓고도 뻔뻔하게 모든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을 신께서는 보고만 있을 참일까?

계속해서 인상을 쓰는 나와는 달리 아스테인의 얼굴은 평온했다.

“억울하지 않으세요?”

“예상하지 못한 일이 아니니까요.”

아스테인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 오히려 미소까지 지었다.

그걸 보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성녀는 내가 아니라 아스테인 님인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까지 마음이 넓지는 않습니다. 이번에는 넘어가지만, 또 프레이아 님까지 위협하는 일이 생긴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모든 것을 뒤엎어서라도.”

아스테인의 다짐이 또 한 번 내 심장에 각인 되었다.

* * *

다음 날, 나는 아침에 먹은 것이 소화가 되기도 전에 점심을 먹어야 했다.

많은 양이 부담스러웠지만 흐뭇하게 쳐다보는 기사들 때문에 도저히 그릇의 음식을 덜어낼 수가 없었다.

그건 저녁에도 이어졌고, 다음 날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셀레미온, 조금만 줄여주면 안 돼?”

“네, 안 돼요! 아가씨는 평생 못 드신 만큼 더 드실 필요가 있다니까요?”

“하지만…….”

“이틀 정도 잘 드셨다고 벌써 이렇게 피부에 윤이 나는데요. 절대 못 줄여드려요!”

셀레미온은 조금 엄하게 거절했다. 어제저녁부터 합류한 베이트만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셀레미온의 말이 옳답니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해지시죠.”

수발을 드는 사람이 둘로 늘어난 만큼, 잔소리도 두 배로 늘어서 난감했다.

“오늘은 낮에 티타임을 가질까요?”

힘겹게 식사를 이어가는 중에 베이트만 부인이 내게 권했다.

차는 식사 후, 또는 서재에서 책을 볼 때 마시고는 했다. 그래서인지 따로 티타임을 하자는 말이 조금 낯설게 들렸다.

내가 조금 고개를 갸웃하자 부인은 호호하고 웃으면서 다시 설명해줬다.

“귀족 아가씨들은 티타임 때 친구를 불러 친분을 다지기도 해요. 지금의 성녀님도 신전으로 들어가기 전, 티타임으로 귀족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는 했죠.”

“아……. 하지만 나는 친구가 없다는 것을 알잖아요.”

성녀님과 나는 처지가 달랐다. 확실한 힘을 지녀 과시해야 했던 이와 힘이 없어 세상 뒤로 숨겨야 했던 이.

회귀 전 죽을 때까지 내게 친구는 셀레미온과 아스테인 단 두 명이었다.

“그리고 별로 친구를 만들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딱히 사람들을 만나 서로 가식적인 말을 하며 친분을 나눌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조용히 사색을 즐기며 숨어지내는 것이 더 편했으니까.

“호호, 어차피 지금 초대를 해서 귀족 영애들을 부르기엔 시간이 촉박하지요. 그러니 성안의 기사님들 중에서 가장 친한 분을 부르는 것은 어떤가요?”

“대공님! 대공님을 불러요, 아가씨!”

“그럴……까?”

“네! 또 로세틴 경이나 다른 기사님들을 부르면 어때요? 감사 인사도 할 겸 우리가 그분들께 대접해요.”

감사 인사라……. 하긴 아스테인에게도 다른 기사들에게도 받기만 했다.

내가 진짜 성녀라면야 제대로 된 축복으로 감사 인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것으로 보답할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내가 뭔가를 해줄 수 있을까? 난 돈도 없고…….”

“그이가 그러는데 신전에서 성녀님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품위 유지비를 보냈다고 하더군요. 대공께 마냥 신세를 질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요? 그럼…… 할까?”

내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셀레미온이 방방 뛰었다.

“좋아요! 저도 이런 거 해 보고 싶었어요!”

셀레미온에게 나는 첫 주인이었다.

다른 귀족 영애의 하녀라면 겪어 봤을 일을 못 해봤다. 그래서인지 나보다 더 설레했다.

“직접 다과를 장식하고 준비하는 것도 해 보시겠어요?”

“다과라면 쿠키나 케이크 같은 것을 말하는 건가요? 그런 것은 전혀 해보질 않았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요리사들이 하죠. 아가씨는 장식만 돕는 거예요.”

잠깐 고민을 해봤다. 아스테인을 초대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어제 날 환영해준 기사님들께도 감사 인사를 할 기회이기도 했고.

그렇다면 장식만 하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만들어 주는 것이 더 값어치 있지 않을까?

“내가 직접 쿠키를 만들어서 모든 기사님에게 나누어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요?”

베이트만 부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집사가 고지식하다 보니 그 아내도 그러진 않을까 걱정됐다.

“어머, 그러면 기사님들이 더 좋아하겠군요. 감사 인사로도 더 훌륭하고요.”

부인의 동의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부인은 곧 심각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흠…….”

“문제가 있나요?”

“왜요? 왜요? 우리 아가씨가 하고 싶다잖아요.”

셀레미온이 다급히 졸랐다. 나보다는 셀레미온이 더 하고 싶은 일이었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니,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아가씨, 아쉽겠지만 오늘은 우리끼리만 티타임을 가질까요?”

중년의 부인은 자상한 눈빛으로 웃어주었다. 마치 나와 셀레미온을 딸처럼 보는 것 같았다.

“기왕 선물하는 것, 조금 더 예쁘고 맛있게 만들어줘야죠.”

부인은 셀레미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돌아가신 후작 부인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날 안쓰럽게 여기면서 진짜 어머니가 되어주려 애쓰던 그분이.

“거기에 아가씨의 축복까지 곁들여서 기사님들에게 드리면 더 좋아하지 않을까요? 우리 남편도 부러워하겠군요, 호호.”

마지막 말에 먹던 빵이 목에 걸릴 뻔했다.

아침을 먹은 뒤 우리는 요리사들이 열심히 재료를 준비하는 주방으로 갔다.

“아이고, 아가씨,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혹시 음식이 도저히 입에 맞지 않으신 겁니까?”

요리사들은 날 보자마자 초조한 얼굴로 물어왔다.

“아니요. 맛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요리는 처음인걸요?”

이상하게 내가 맛있다고 하는데도 요리사들의 얼굴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정말이에요. 맛있어서 평소보다 많이 먹고 있는걸요.”

“네? 그게 많이 드시는 겁니까? 매번 음식이 남은 채 그릇이 돌아와서, 입에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양이 너무 많아서 다 못 먹은 거예요.”

요리사들의 눈이 갑자기 커다랗게 변했다.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 기사들이 먹는 양의 반밖에 안 되는데, 그게 많은 건가?”

“우리 집사람도 기사들이 먹는 만큼은 먹는데 말이지.”

“원래 성녀가 되려면 막 굶으면서 고행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대화에 끼어들기 힘들 만큼 다들 지나치게 진지했다.

“아니, 성녀도 사람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신성력을 얻어야 하는 거야?”

“먹지 않고 얻는 힘이라면 나는 그냥 배불리 먹고 지옥으로 가겠네.”

마지막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안 돼요. 지옥으로 가는 건. 여러분은 내게 최고의 요리사인걸요. 그러니 내 앞에서 지옥으로 가겠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 주세요.”

내가 빙긋 웃으면서 이야기하자 요리사들의 얼굴이 펴졌다.

“진심이십니까?”

“네. 그럼요.”

“그렇다면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적게 드십니다.”

“그러게요. 툭 건드리면 부러질 것같이 생기셔서…….”

그들은 계속 내 건강을 걱정하더니 슬금슬금 뭔가를 꺼내왔다.

요리사들이 내민 접시에는 간식이 듬뿍 올라가 있었다.

“그러니 이것 좀 맛보십시오.”

아침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견과류가 가득 든 쿠키와 과일이 가득한 타르트, 반듯한 모양의 케이크까지.

그들은 내가 배우고 싶었던 다양한 다과를 잔뜩 가지고 나왔다.

“사실 성에 여인이 없어서 저희가 실력 발휘를 못 하고 있었지 뭡니까? 에너지를 내는 쿠키류는 그래도 좀 먹는데 말입니다.”

일단은 맛부터 보기로 했다. 정말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이 맞는지.

우선 쿠키부터 집어 들었다.

“맛있다. 정말 맛있어요!”

약간은 몸서리칠 만큼 달았다. 이런 건 처음 맛보는 자극이었다.

그제 기사님들이 만들었다는 케이크보다도 달콤한 맛에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아이고, 벌써 다 드셨네요. 한 개 더 드릴까요?”

나는 또 받아서 먹었다. 약간 중독성이 있는 맛이었다. 왜 후작이 내게 디저트류는 거의 먹지 못하게 했는지 알 만큼.

후작의 말대로 단 것은 정말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견과류 때문에 고소한 맛도 있네요.”

“이번에는 제 타르트를 드셔보십시오.”

딸기가 잔뜩 올라간 타르트는 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입속에 퍼지는 향기로움과 독특한 식감은 한 번 먹기에는 아쉬울 정도였다.

“이것도 너무 맛있어요.”

“제 케이크도 드셔야 합니다!”

케이크는 기사들이 만들었던 어설픈 생크림 케이크와는 질이 달랐다.

포크로 집을 때는 꾸덕꾸덕했지만, 입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는 부드러움. 치즈가 이렇게 달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쩌죠?”

나는 베이트만 부인을 돌아봤다. 왜 그러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부인을 향해 나는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다 맛있어서 뭘 배워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떤 것을 선물해 드려야 할지…….”

요리사들은 서로 자신의 디저트를 가르쳐 주겠다며 싸웠다. 하지만 현명한 베이트만 부인은, 선물 포장이 가능한 것으로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려주셨다.

“쿠키 말고도 스콘이나 마들렌도 있습니다!”

물론 요리사들은 끝까지 미련을 가졌지만.

할 일을 정하고 난 뒤 우리는 정원 한쪽에서 티타임을 하기로 하고 나갔다.

“차보다 디저트가 많은 것 같네?”

이미 많이 맛을 봐서 배가 불렀는데도 요리사들은 내게 많은 다과를 보내왔다.

셀레미온은 나보다도 신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많이 먹어.”

“아가씨를 위해서 만든 건데요.”

“같이 먹는 거잖아. 많이 먹고, 남은 건 동생들한테 가져가.”

“정말 그래도 돼요?”

“그럼, 당연하지. 그런데 새집은 괜찮아?”

“대공님이 과분한 집을 내어주셨어요.”

아스테인은 나만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고 있었다.

집사의 새집도 짧은 시간 안에 괜찮은 곳으로 구해줬다고 했다.

“정말 대공님 같은 분이 아가씨를 도와서 다행이에요.”

“우리 남편도 대공님 칭찬을 많이 하더군요. 힘도 있고, 어느 정도 권력도 있는 사람이 성심이 깊어 성기사가 되려 한다면서요.”

나는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아스테인을 칭찬하는 말을 들을 때면 나도 기분이 좋아서 입꼬리가 올라갈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늘 죄책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공님은 성기사가 되기엔 아까운 인재인 것 같아.”

“하지만 아가씨의 우직한 성기사로서 그분보다 어울리는 분도 없을 것 같군요.”

뭔가 가라앉은 기분을 그래도 달콤한 디저트들이 달래줬다.

“참, 아가씨. 쿠키를 담을 주머니도 필요하군요. 이건 아무래도 주문제작 해야겠죠?”

베이트만 부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바로 고민거리가 생겼다.

“루크데린 거리는 아직 나가기 힘들 것 같고…… 대공령에도 의상실이 있을까? 거기서 주문해야 할 것 같은데.”

“성으로 오면서 봤는데 큰 곳은 아니어도 있었습니다.”

“우리 오늘 당장 가면 안 돼요?”

셀레미온이 해맑게 웃으면서 물어왔다.

“글쎄, 아스테인 님이 허락하시면?”

“에이, 선물하려고 가는 건데 허락받고 가면 들키잖아요.”

나보다 셀레미온이 조금 지나치게 들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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