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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22화 (22/101)

22화. 평범해서 특별한 추억 (2)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환영합니다!”

투박한 모양의 케이크, 커다란 칠면조와 돼지 바비큐. 단출한 상차림이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날 위한 파티였다. 심지어 후작가에서 생일날에도 받아 보지 못한 대접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식당 안에 있는 30여 명의 기사들을 쳐다봤다. 아마 다른 일을 하러 간 기사들을 제외하고 모두 모인 것 같았다.

“아가씨, 왜 가만히 서 계십니까?”

크리세우스가 내 등을 슬쩍 밀면서 날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한쪽에 서 있던 셀레미온은 내게 투박한 접시와 포크를 내밀었다.

“기사님들이 아가씨랑 인사하고 싶으셨대요.”

“치사하게 대공님이 아가씨를 꽁꽁 숨기고는 보여주질 않아서 이 녀석들의 불만이 상당했습니다.”

셀레미온의 말에 크리세우스가 맞장구를 쳤다.

“어제도 도와주시고 앞으로도 신세를 지게 됐는데 이제 인사하러 와서 미안해요. 다들 위험한 일을 하시니 축복이라도 드렸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네요.”

내 대답에 크리세우스가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다시 내 등을 밀었다.

“저놈들은 아가씨께 축복을 바라고 파티를 연 것이 아닙니다. 그냥 새로운 가족이 생겼기에 아가씨를 환영하는 겁니다.”

“가족……이요?”

“네, 그럼요. 대공님을 믿고 따르는 가족 말입니다. 아가씨도 우리 대공님을 믿고 몸을 의탁하시는 거니 저희랑 같은 처지거든요.”

크리세우스가 찡긋 윙크하며 내게 말했다. 그 모습이 유쾌하기도 하고 조금 얼떨떨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크리세우스를 멀뚱히 쳐다봤다.

“물론 대공님의 애정을 모조리 받고 계신 분이라 저희가 아부하려고 이러는 것도 맞습니다.”

“네? 아니 그게…….”

“성녀가 될 분만 아니었어도 대공비가 되어 달라…… 으아악!”

어느새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아스테인이 나타났다. 그것도 빠른 속도로 크리세우스의 귀를 잡아당기며.

“아픕니다!”

“아프라고 잡아당겼다.”

“아니, 나처럼 말 잘 듣고 일 잘하는 수하가 세상에 또 어딨다고 맨날, 으아아! 귀 빠지겠네!”

“네놈은 귀 좀 빠져도 된다.”

아스테인의 힘이 더 세어졌는지 크리세우스의 비명이 커졌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하고.

“귀가 없으면 제가 명령을 어떻게 들어요?”

“차라리 네 혀를 뽑아줄까? 이 입만 살아서 나불대는 녀석아.”

“아가씨가 보고 있잖아요! 프레이아 님! 나 좀 살려줘요!”

마치 장난을 치며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으르렁대면서도 전혀 상대를 상처 입히지 않을 것 같은 모습.

진짜 친형제 같은 둘의 다툼에 웃음보가 터졌다.

입을 막았는데도 새어 나오는 웃음에 뒤로 돌아서자 크리세우스의 한탄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프레이아 님, 웃지만 말고 이 무식하게 생긴 대공님 좀 말려줘요. 이 괴물은 아가씨 말만 듣는다고요! 으아악!”

또 헛소리를 내뱉고 귀가 뽑힐 위기인 남자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아스테인 님.”

돌아서서 이름만 불렀는데도 아스테인의 손이 풀렸다.

“다시 한번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쫓아낼 거다.”

“에이, 나 없으면 누가 대공님 대신 온갖 더러…… 아니, 아닙니다.”

아스테인의 사나운 눈빛에 겨우 크리세우스의 입이 멈춰 섰다.

그 모습을 아스테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쳐다봤다. 그다음 그가 본 것은 기사들이 벌여놓은 식탁이었고.

“누구 마음대로 이런 짓을 벌인 거지?”

기사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크리세우스에게 향했다.

“치사한 놈들! 아가씨가 궁금하다고 하던 놈들이 누군데!”

“크리세우스.”

아스테인은 설명을 해보라는 듯, 팔짱을 꼈다. 크리세우스는 쭈뼛대면서 대답했다.

“다들 아가씨가 어떤 분인지 궁금해해서 인사도 나눌 겸 모시고 왔습니다.”

“내가 나중에 천천히 다 소개해주겠다고 했을 텐데?”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조금은 서늘했다. 덕분에 셀레미온도 아스테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괜히 나를 위하려다 기사님들이 혼이 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아가씨가 그리던 자유도 얻었고, 덕분에 우리 대공님도 마음의 평화를 찾으셨고. 이런 기쁜 날 파티를 해야죠.”

크리세우스는 은근슬쩍 아스테인에게 맥주가 가득 든 잔을 쓱 내밀었다.

그것을 받지 않고 무시한 아스테인은 내게 몸을 돌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뭐가요?”

“어제 연회에서 보니,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것을 불편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스테인의 눈에는 나를 향한 걱정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이런 눈동자는 어쩐지 늘 나를 설레게 했다.

그가 날 너무 아껴주는 느낌이 발끝에서부터 간질간질, 내 심장까지 타고 올라왔다.

“그래서 불편해하시지 않을 선에서 한 명씩 소개해 드리려 했습니다.”

“거짓말, 시커먼 우리가 아가씨랑 친해질까 봐 질투우아악!”

다시 귀를 잡힌 크리세우스는 싹싹 빌고서야 풀려났다.

나는 한숨을 쉬는 아스테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어제 사람들이 불편했던 건……. 제게 바라는 것들이 많은 사람들이어서 그랬어요. 이분들은, 음, 아스테인 님의 사람들이니 괜찮을 것 같아요.”

“봐요! 그러니 환영 파티랑 지옥 탈출 축하 파티를 해야 한다니까요!”

크리세우스는 기쁘게 내 손목을 잡고 기사들 사이로 날 데려갔다. 그리고는 기사들을 하나하나 소개해줬다.

내가 한 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사님들은 그 어떤 소원이나 부탁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이름을 말하며 인사를 나누었고, 대공성에서 일어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것 좀 드십시오. 오늘 갓 잡은 놈이라 누린내도 안 나고 맛있습니다.”

“이 칠면조 다리가 아주 쫄깃한데 드셔보시죠!”

“이 케이크, 저희가 다 같이 만들어서 모양은 투박하지만 맛은 끝내줍니다!”

“야, 디저트는 아직 나서지 말지?”

다들 내게 이것저것 먹이려 들기도 했다. 그 정성이 고마워 열심히 먹었다.

“와, 이렇게 맛있는 바비큐는 처음이에요.”

“후작가 놈들이 맛없는 것만 먹여서 아가씨가 이리도 여윈 겁니까? 많이 드셔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이 파티를 위해서 다 사냥해 왔단 말입니다!”

“이 맥주도 좀 드십시오.”

“규율 때문에 술은 안 돼요.”

“어느 멍청이가 술을 드렸어? 라즈베리 주스 어쨌냐? 얼른 말통으로 가져와!”

정말 별거 아니었다. 그냥 맛있게 먹고, 즐겁게 수다를 떨고, 크게 웃고.

다른 이들에게는 이런 것이 흔한 일상일까?

음식이 이렇게 매끄럽게 목을 타고 넘어간 것이 처음이었다. 소화도 잘될 것 같았다.

그리고 서른 명의 친구가 생긴 기분이 들었다.

“아스테인 님은 안 드세요?”

잠시 기사들끼리 떠드는 사이, 나는 아스테인을 돌아봤다. 그는 살짝 불만스러운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때 문득 아침의 일이 떠올랐다.

“흠, 제가 다른 기사님들과 친해져서 정말로 질투하는 거예요?”

기사님들의 유쾌함이 물든 탓에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아스테인의 얼굴은 더 심각해졌다.

왜 이런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운 고양이 같을까?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어머, 진짜예요?”

“흠흠…….”

“그래도 저와 제일 친한 기사님은 아스테인 님인 걸요. 게다가 저는 아스테인 님만 믿잖아요. 저분들도 아스테인 님의 기사여서 편한걸요.”

그를 달래는 말에 아스테인의 미간에 살짝 잡혔던 주름이 펴졌다.

은은하게 퍼지는 그의 미소가 아름다웠다. 이제는 이 미소가 익숙해졌는지 볼에 오르는 열의 양이 줄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그를 쳐다보는 건 여전히 조금 부끄러웠지만.

“아가씨, 닷새 뒤에 저희가 가꾸는 밭에 감자 캐러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크리세우스가 아스테인의 눈치를 보며 옆으로 왔다.

“감자요?”

“네. 우리 기사들의 식량으로도 쓰고, 필요한 양보다 많이 캔 감자는 빈민가에도 나눕니다.”

“어머, 기사님들이 키운 건가요?”

“네, 올해 첫 감자죠. 가을에 수확할 감자 심을 준비도 할 거랍니다. 곧 빈민가에 가실 거라니 가져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회귀 전에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기사들이 이런 일을 한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프레이아 님이 하기에는 버거운 일이다. 흙먼지에 더러워질 수도 있고.”

“하긴 프레이아 님은 연약하셔서 힘들겠죠? 나들이 겸 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요.”

아스테인의 말에 크리세우스가 바로 꼬리를 내렸다.

“혹시 아스테인 님도 감자 수확을 돕나요?”

반은 걱정을, 반은 기대를 담고 물었다.

“처음부터는 아니고 중간에는 갑니다. 관리도 해야 하고, 기사들 격려도 할 겸 점심을 챙겨 갈 겁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비록 친근감을 느끼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기사들이 부담스러웠다. 친절을 받아 보는 것이 너무 낯선 탓이 컸다.

하지만 아스테인의 영지도 구경해 보고 싶고, 빈민을 돕고도 싶고, 감자도 캐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끌리는 건 나들이였다.

아스테인과 함께하는 나들이.

“아스테인 님이 가시면 따라갈게요.”

내 말에 아스테인이 살짝 눈을 휘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의 답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자 옆에서 크리세우스가 수선을 피워댔다.

“다들 봤어? 대공님이 우리 괴롭히면 이제 아가씨께 다 이르자고. 꼼짝도 못 하시니…… 으아악!”

오늘 저녁은 끝까지 조금 시끌벅적할 것 같았다.

* * *

대공성에서의 두 번째 아침을 맞았다.

셀레미온은 후작가에서와 달리, 해가 한참이나 뜨고 난 뒤에야 날 깨우러 왔다.

“아가씨, 잘 주무셨어요?”

“왜 이렇게 늦게 깨웠어?”

“어제, 밤늦게까지 노느라 피곤하시잖아요. 후작님도 없는데 이 기회에 늦잠도 자보고 하는 거죠.”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푹 잤다.

혹시 엘라네르가 나타날까 잠들기 전 눈을 감는 것을 무서워 한 일이 무색할 만큼.

“대공님도 기사님들도 아가씨가 쉬고 싶은 만큼 쉬게 해주라고 했어요.”

“그분들은 어디 가셨어?”

“다들 할 일 하러 가셨겠죠?”

나는 가볍게 치장하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셀레미온의 말대로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어제와 달리 조용한 것이 아쉬울 만큼.

“아가씨 몫이라면서 기사님들이 음식을 남겼는데요, 꼭 다 드셔야 한댔어요.”

“내 몫이라고?”

“네, 평소에는 남김없이 다 먹어 치우는데 아가씨 몫이라서 참았대요. 수프 준비해 올 테니까 잠시만요.”

잠시 후 셀레미온이 가져온 것은 수프보다는 스튜 같은 모습이었다.

“토마토 스튜야? 게다가 양은 왜 이렇게 많아?”

심지어 빵도 내 팔뚝만 했다. 3분의 1만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은데.

“토마토 비프 수프라고 하셨어요.”

“고기가 이렇게 많은데?”

한 숟가락만 펐을 뿐인데도 고기와 채소가 한가득 올라왔다. 아침부터 먹기에는 부담스러울 만큼 가득.

“에이, 다져진 거잖아요. 큼지막하게 들어 있어야 스튜죠.”

“하지만 아침부터…….”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대공님도 그랬어요! 다 드셔야 한다고.”

어쩔 수 없이 느린 속도로 꾸역꾸역 다 먹었다. 빵은 절반도 못 먹었지만.

“좋아요! 잘하셨어요. 이제 뭐 할 거예요?”

갑자기 찾아온 여유로운 하루. 딱히 뭘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내 삶은 대부분 기도와 참회의 시간으로 채워져 있었다. 신성력을 찾기 위해 신께 매일매일 온종일 매달려야 했으니까.

“뭘…… 하지?”

순간 조금 막막해졌다. 기도 말고는 할 줄 아는 일이 아무것도 없구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대공성 구경은 다 하셨어요? 생각보다 넓어서 저는 다 못했어요.”

“어제 조금.”

본관의 건물과 정원에 관해서는 들었다. 하지만 별관 건물은 기사들의 숙소라고 했다.

“내가 다녀도 될 만한 곳은 다.”

“그럼 우리 산책해요. 날씨가 정말 따뜻해서 햇빛 받으며 돌아다니기 딱 좋아요.”

셀레미온의 청에 우리는 함께 정원으로 나갔다.

셀레미온은 푸른 장미를 보자 어린아이 같은 탄성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정말 예뻐요. 대공님은 이런 걸 어떻게 구하셨대요? 아가씨 방에 꽂아두면 너무 잘 어울리겠다. 냄새 맡아봐도 돼요?”

셀레미온이 조금은 과하게 설레고 있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다. 이 아이도 나 때문에 같이 주눅이 들어 살아야 했으니까.

“셀레미온, 고마워.”

“어휴 당연한 일을 했는데요 뭘.”

“곁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

이번에는 셀레미온을 잃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를 살리게 된다면, 나는 미래를 바꾸게 된다. 아스테인도 구할 수 있을 것이고.

“아가씨가 신전으로 들어가면 따라갈 수 없는 게 제일 아쉬워요.”

“내가 신전으로 가지 않으면 계속 내 곁에 있어 줄 거야?”

“네? 성녀가 신전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가짜니까 신전에는 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셀레미온에게 진실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조금은 씁쓸하게 웃고 있는데 묵직하고 단정한 발소리가 들렸다.

“여기 계셨습니까?”

아스테인의 손에는 커다란 챙이 달린 하얀 모자가 들려 있었다.

“이제는 햇빛이 따가워 피부가 상할지도 모릅니다.”

여자도 없는 성에 모자가 어디서 난 걸까?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아스테인이 조금 어색하게 웃었다.

“어머니의 유품 중에서 가져왔습니다.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

“아, 감사해요.”

“제가 씌워드려도 되겠습니까?”

아스테인의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을 가리려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셀레미온의 도움을 받았다. 혹시라도 정돈된 내 머리가 망가질까 조심조심하는 손길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 됐습니다.”

“와, 아가씨! 진짜 잘 어울려요!”

거울이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아스테인이 씌워준 모자를 보고 싶었는데.

“어쩜, 대공님은 정말 친절하시네요. 나중에 대공비님이 생기면 정말 다정한 남편이 되실 것 같아요.”

셀레미온의 말에 짧은 순간 내 얼굴이 굳어버렸다. 순간적으로 아스테인 옆에 다른 여인이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버렸다.

그러자 심장이 불쾌하게 쿵쾅거렸다.

“나는 프레이아 님만을 위한 성기사가 될 거라서 대공비 같은 것은 들이지 않을 생각이란다.”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강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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