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평범해서 특별한 추억 (1)
“아니요. 그것은 가장 강력한 신성력의 속박이 맞습니다.”
진짜 속박이었다는 사실에 접견실의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
여기서 평온한 얼굴을 유지한 사람은 집사와 성녀님밖에 없었다.
나조차도 놀랐으니까.
“베이트만은 신의 시험을 이겨내어 진실을 증명했습니다. 그 증거로 그의 목을 확인하세요.”
카르텔로와 아스테인이 함께 집사에게 다가갔다. 집사는 크라바트를 풀고 자신의 목을 내어 보였다.
“푸른 날개의 흔적이 목에 새겨져 있습니다.”
“속박의 흔적이…… 맞습니다.”
카르텔로가 억눌린 목소리로 인정했다.
드디어 나를 괴롭힌 자들의 죄를 증명했다.
“고모님! 어째서 우리에게 이러십니까?”
유테르안이 발악을 하든 말든 성녀님은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집사의 속박부터 풀어냈다.
“내게 변명할 일이 남았나요?”
평온했던 얼굴은 후작 부자를 향하면서 서늘한 기운으로 채워졌다.
그 기세에 눌려 후작이 움찔하고야 말았다.
“신전과 프레이아의 미래를 위해 훈육하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그것을 부디 고려하여…….”
“학대를 인정한다는 뜻이군요.”
“고모님! 어찌 저희를 추궁하려 합니까? 성녀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우리 가문이 했던 노력을 잊으셨습니까?”
“더 떠들수록 가문의 명예만 떨어질 뿐이니 조용히 하세요.”
성녀님의 분노는 진심이었다.
후작가 사람들을 노려보는 그분의 눈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프레이아가 왜 지금까지 신성력을 쓰지 못하고 있었는지 알겠군요. 아무리 성녀라 할지라도 학대로 마음이 검게 물들어가는데 어찌 쉽게 신성력을 쓸 수 있었겠나요?”
성녀님의 말에 10명의 대사제는 침묵을 유지했다. 후작 쪽 대사제들이 끼어들 분위기도 아니었다.
“후작과 소후작, 두 사람은 앞으로 프레이아에게 접근하지 말 것을 명합니다.”
성녀님의 지시에 성기사들이 밖에서 들어왔다.
그들은 정중한 태도로 후작과 소후작을 신전 밖으로 데리고 나갈 준비를 했다.
“고모님, 이대로 푸토르 가와 신전이 등을 돌리겠다는 겁니까? 지금까지 푸토르 가의 힘을 등에 업고 신전과 황실의 결속을 강화한 것을 잊으셨습니까?”
유테르안이 충격받은 후작 대신 악을 쓰며 덤볐다. 그러자 카르텔로도 그를 지지했다.
“성녀님, 그간 푸토르 가에서 쌓은 공적도 있는데 이렇게 매정하게 내쳐야 하겠습니까?”
“상처를 치료할 타이밍을 놓쳤다면 다른 곳이 썩기 전에 도려내야 하는 겁니다.”
단호하게 말하며 나를 돌아보는 성녀님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게 얼마나 미안해하고 계신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고모님! 세상 사람들이 고모님의 실체를 알아도 상관없으신 겁니까?”
유테르안이 이제는 성녀님을 두고 협박을 했다.
“성녀에게 명예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랍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신이 내게 내린 숙명을 완성하는 것이지요.”
“고모님! 후회하실 겁니다! 작은 누님이 정말 성녀가 될 사람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괴롭혔다 한들 이겨냈어야지요!”
“이제는 프레이아의 힘까지 의심하는 건가요? 한심하군요.”
끝까지 발악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유테르안은 비참한 꼴로 끌려나갔다.
그러자 접견실에는 적막만이 남았다.
“그럼, 이제 프레이아의 앞날을 결정해야 하는군요.”
아스테인은 성녀님의 말씀에 즉각 반응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프레이아 님이 성녀 검증을 받게 될 때까지 대공성에서 제가 모실 생각입니다.”
“안 됩니다. 어찌 예비 성녀님을 사사로이 대공의 성에서 머물게 합니까? 그러다가 추문이라도 생기면 어찌합니까?”
카르텔로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번 건으로라도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거나.
“저랑 아가씨는 본궁을 쓰고 대공님은 별채를 쓰고 계세요! 꼭 보면 음흉한 사람이 자기 같은 생각을 한다니까!”
셀레미온이 입을 삐죽이며 대답하자 카르텔로의 얼굴이 붉어져서 난리가 났다.
“보다시피 아직 신전에는 푸토르 가의 잔재가 남은 듯합니다. 완전히 정리되기 전까지는 신전보다는 제 성이 안전합니다.”
“대공! 날 지칭하는 것입니까?”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아스테인은 카르텔로를 무시하고 성녀님과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인테르가 성녀님과 예비 성녀님을 동시에 노린다면 성기사들이 두 분 모두를 지키기도 어렵습니다.”
“대공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하죠. 최대한 빨리 신전 안에 남아 있는 푸토르 가의 흔적을 지우겠어요. 그동안만 프레이아를 부탁하죠.”
성녀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꿈만 같은 상황에 심장이 떨리고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려 했다.
하지만 애써 감정을 참아냈다. 설레는 얼굴을 들켰다가는 신전으로 돌아와야 할 테니.
“프레이아와 대공에게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다들 나가보세요.”
몇몇 대사제는 심각하거나 불만스러운 얼굴로, 카르텔로는 불안한 얼굴로 나갔다.
솔라르 경은 몇 번이고 날 쳐다보다 억지로 나갔다. 그의 얼굴에는 뒤늦은 죄책감이 가득해 보였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나자 성녀님이 아스테인을 부르셨다.
“대공, 내가 하늘로 돌아가는 날에나 볼 줄 알았는데 의외의 일로 또 만나게 됐군요.”
성녀님의 말씀에 심장이 덜컹했다.
이건 미래가 바뀌었다는 뜻일까?
“모든 것이 신의 뜻이겠지요. 신의 뜻을 따르지 못한 내게 내려지는 벌일 것이고.”
신이 내리는 벌? 이건 이전의 삶에서는 전혀 없던 이야기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 성녀님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성녀님이 쓸쓸한 얼굴을 하셨다.
“미안해요, 프레이아. 이 정도로 고통받는 줄은 미처 몰랐답니다. 아니…… 외면한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성녀님.”
“가족이라는 이유로 감싸줘서는 안 됐는데……. 성녀라면서 공정하지 못했어요.”
자신의 잘못을 내게 고백하는 성녀님의 모습이 유달리 심장을 파고들었다.
“완벽한 인간이 있다면 그건 신이겠죠.”
내 말에 성녀님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데아 님도 완벽하진 않답니다. 그래도 신성력을 찾았으니 다행이군요. 그 힘으로 신전을 바로 세워주길.”
성녀님의 말에 잠시 피가 돌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직 신성력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엘라네르를 찾아 신전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내게 신전을 맡기겠다니…….
죄책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성녀님께라도 진실을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가 옆에서 프레이아 님을 보필하겠습니다.”
하지만 곁에 있는 아스테인 때문에 차마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프레이아 님은 어제 보였던 힘과 오늘 보여주신 현명함과 강인함으로 신전을 잘 이끄실 겁니다.”
저렇게나 흐뭇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데…….
내가 멋진 성녀가 될 거라고 기대하며 내 곁에 머무는데…….
가짜라는 사실에 아스테인이 실망하면 어쩌나 겁이 났다.
“저기 성녀님…….”
“할 말이라도 있나요?”
성녀님께서 자애로운 눈으로 나를 돌아보셨다.
붉은 머리와 황금색 눈, 성녀님과 엘라네르는 피를 나눈 탓인지 닮아 있었다.
진짜 성녀라서 그런지 분위기마저 똑같았다.
그 탓에 전날 밤의 꿈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나 대신 네가 성녀가 돼서 신전으로 가줘. 아니 넌 이번에도 가게 될 거야.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면.]
그게 꿈이 아니라면.
엘라네르의 경고가 사실이라면.
나는 내가 가짜라는 것을 아직 들키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프레이아?”
현명해지자, 프레이아. 성급할 필요는 없어.
내게는 아직 5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다.
그러니 일단 엘라네르를 찾아서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확인부터 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 행동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카르텔로 대사제와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 후작님과 가까운 사이예요. 그리고 성스러운 푸른 샘을 지키는 성기사들도 후작가와 연계되어 있어요.”
진실을 말하는 대신 회귀 전에 알고 있던 정보를 성녀님께 말씀드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신전의 비리를 전부.
듣고 있던 성녀님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내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이들도 있었군요. 그래요, 신이 선택한 프레이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내가 그들을 쳐낼 것을 약속하죠.”
“신이 절 선택하셨다고요?”
성녀님의 마지막 말이 거슬렸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내게 하지 않은 말씀이었다.
“어제 신께서 내게 말씀하셨답니다. 그리고 날 꾸짖으셨지요. 내가 그간 해온 어리석은 짓을 바로잡을 기회도 마지막으로 주셨답니다.”
성녀님이 후작가를 버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웠다. 내가 꾼 꿈과 관계가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신이 성녀님을 찾아갔다.
“프레이아, 날 원망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만, 꼭 말해주고 싶었어요. 보호해주지 못한 것, 진심으로 미안했어요.”
“아니요, 전……. 괜찮아요.”
“대공, 아이기스는 프레이아를 지키기 위해 그대에게 맡깁니다. 대공성에서 지내는 동안, 이 아이가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머지않아 단조로운 신전으로 돌아와야 할 테니.”
아스테인은 고개를 숙여 성녀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그걸 지그시 바라보던 성녀님은 양손을 들어 내 볼을 감쌌다.
“즐거운 추억도 많이 쌓아주세요. 평범한 소녀가 누렸어야 했던 것들 말입니다.”
성녀님께서 내 볼에 천천히 입술을 대셨다. 입술은 상당히 따스했다.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의 것처럼.
“그 모진 시련을 잘 견뎌왔구나, 대견하게도.”
* * *
보름에 한 번은 신전에 오기로 약속한 뒤, 우리는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아직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성녀가 될 분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우리 베이트만 가문이 할 일입니다. 어리석게도 아가씨를 믿지 못한 과오를 용서하십시오.”
“그건 오늘의 증언으로 모두 갚았으니 더는 죄책감을 지니고 있지 않아도 된답니다.”
내 용서에 집사는 너무나도 부담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치 내가 신이라도 된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베이트만, 프레이아 님이 부담스러워하니 그만 쳐다보는 게 낫겠어.”
언제나처럼 내 기분을 눈치챈 아스테인의 중재로 집사가 눈에 힘을 풀었다.
“이제 어쩔 생각인가요? 참, 가족들은 안전한가요? 그들이 절대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은데요.”
“이미 가족들은 안전가옥으로 보내두었습니다. 어제 아가씨의 힘을 제 두 눈으로 목격한 뒤, 후작이 이런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들을 제 기사들이 데려오고 있습니다.”
아스테인은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던진 말을 듣고 두세 수 앞을 내다봤다.
“그럼 앞으로는요? 지금까지의 베이트만 가문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 것으로 알았는데, 내가 피해를 줬네요.”
“아닙니다. 이 또한 우리 가문이 짊어져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저는 계속 아가씨를 모시고 싶습니다.”
아스테인을 쳐다보자 그가 빙그레 웃어주었다.
“프레이아 님이 편한 대로 하십시오. 대공성에는 집사 가족이 들어올 공간은 충분히 있습니다.”
조금은 불편할 것도 같고…….
아무래도 회귀 전의 기억이 유쾌하지 못한 탓에 집사가 여전히 거북하기는 했다.
그에게야 일어나지 않을 미래지만, 내게는 여전한 과거였다. 쉽게 잊지 못할 상처였고.
“대공성에 상주하는 여자 사용인이 셀레미온 양밖에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제 아내가 함께 아가씨를 모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조심스럽고도 정중하게 말하는 집사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때문에 모시던 주인을 배신했으니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내가 나중에 다시 그의 기대를 저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저렇게나 나를 경외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에게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무거운 마음을 지우지 못한 나는 셀레미온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셀레미온, 뭐가 그리 좋아?”
셀레미온은 마차에 타기 전부터 얼굴에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살짝 들떠서 계속 콧노래도 흥얼거렸고.
“아가씨가 그 악마 같은 소굴을 탈출했잖아요! 나쁜 후작님이랑 소후작님은 망신도 당했고요. 이제 든든한 대공님의 보호를 받으니까 얼마나 좋아요?”
때마침 정리를 끝내고 마차에 오르던 아스테인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덤덤히 말했다.
“응. 절벽에서 떨어지더라도 날 지켜낼 사람의 보호를 받게 되어서 다행이야.”
아스테인의 시선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내게 답해줬다.
“불구덩이로 떨어지더라도 프레이아 님만큼은 지킬 겁니다.”
“꺄아아, 대공님은 동화 속 왕자님 같아요.”
셀레미온이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고는 집사가 혼냈다.
“아가씨는 공주님이 아니라 성녀님이 될 분이란다. 오해받을 소리는 조심하거라. 신께서도 노여워하실 테니.”
집사의 한소리에 셀레미온이 입을 삐죽였다. 나는 애써 감정을 삭여야 했고.
집사 덕분에 다시 한번 내 처지를 파악해야 했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나는 모두에게 이미 성녀가 될 사람이라 인정받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꼼짝없이 성녀가 돼야 할지도 몰랐다.
“아스테인 님, 저 앞으로 빈민가에 자주 가서 봉사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인테르의 위협이 있어서 늘 조심해야 하긴 합니다만……. 미리미리 준비하고 제 기사들과 함께하면 안전할 겁니다.”
내 간절한 눈빛에 아스테인이 빙긋 웃으며 답해줬다.
그의 답에 나도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줬다.
엘라네르를 찾는 일을 아스테인의 기사들에게만 맡겨놓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직접 나서야 했다. 그 아이를 내가 찾아오든지, 차라리 가짜임을 밝히고 사라지든지.
* * *
성에 도착한 나는 편한 옷을 입고 침대에 앉았다. 그저 쉬고 싶은 마음만 한가득이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아가씨, 접니다.”
크리세우스였다.
문을 열자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그가 서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가시죠.”
셀레미온이 있는데 왜 그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스테인도 있는데…….
조금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따라나섰다. 그가 데리고 간 곳은 아스테인이 소개했던 식당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아스테인의 기사들이 모두 날 기다리고 있었다.
기대와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