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공정하지 못한 재판 (2)
“푸토르 가의 기사, 테이안 솔라르라고 합니다.”
“푸토르 가에서 5대째 집사를 이어가고 있는 베이트만 가문의 폴리데르, 성녀님과 대사제님들께 인사드립니다.”
너무나도 뻔하게 후작의 측근들로만 불러왔다.
특히나 집사 가문의 충성도는 온 제국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정도였다.
“너무 대놓고 후작의 충복을 둘이나 데려왔군.”
아스테인이 불편한 내색을 보였다. 누가 봐도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증인이었다.
“이들은 예비 성녀님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기도 했으니 누구보다 사정을 잘 알겠지요.”
카르텔로 대사제는 또 조곤조곤 아이를 가르치듯 말했다.
“신전에서 고행과 봉사만 하던 대사제가 후작가의 사정까지 속속들이 잘 아는군. 마치 푸토르 가의 충직한 개처럼.”
아스테인이 입을 잔뜩 비틀며 말했다. 언제나 반듯하던 아스테인의 모습이 조금 낯설 정도였다.
“대공!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예비 성녀님을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이 취급한 사람보다야 낫겠지.”
카르텔로는 씩씩대며 성난 개처럼 굴었다.
하지만 용맹한 늑대가 으르렁대자 차마 덤비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만들 하세요.”
차분하고 맑은 성녀님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스테인은 곧바로 사죄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하룻강아지는 여전히 씩씩댔다.
“카르텔로, 대공의 말이 무례하긴 했으나 프레이아에게 했던 그대의 언행 역시 불손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대사제는 성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성녀님은 둘이 겨우 진정되자 직접 증인을 심문했다.
“솔라르 경, 그대는 프레이아의 호위 맞나요?”
“맞습니다. 가문의 기사 중 제가 가장 예비 성녀님의 측근에서 근무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예비 성녀를 모신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예비 성녀님께서 빈민가에서 기적을 일으켰을 때도 제가 곁에서 모셨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프레이아가 주장하는 일을 목격했었나요?”
후작가의 사람들이 그 일을 모두 알지는 못했다.
신성력이 역대 성녀 후보 중에서 가장 약한 빈민가 출신의 입양아. 그래서 내가 혹독하게 수련하고 있다고만 여겼다.
“저는 후작가 내부에서는 호위를 서지 않기에 그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와 관련해 프레이아의 행동이 바뀐 것을 본 일은 없나요? 상처를 봤거나?”
하지만 솔라르 경은 모를 수가 없었다.
“몸에 상처가 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거짓말! 그날도 호위했잖아요!”
셀레미온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스카프로 가렸어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멍이 컸어요!”
“아니요.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때 예비 성녀님의 행동에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역시 푸토르 가의 사람은 어쩔 수 없구나.
씁쓸한 맛이 속에서부터 올라왔다.
“무슨 일이었는지 당장 고하게.”
카르텔로 대사제는 신나서 떠들어댔다.
솔라르 경은 내 시선을 애써 피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날 쳐다볼 자신은 없구나.
“저를 따돌리고 누군가를 만나고 다니셨습니다.”
솔라르는 아스테인을 슬쩍 쳐다봤다.
“그즈음 제게 성녀라면 부정적인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하는 것 맞냐며 이상한 질문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 후작님과 의견 충돌이 부쩍 늘었습니다.”
카르텔로가 조금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는 누군가가 예비 성녀님에게 접근해 후작과의 다툼을 뒤에서 지시했다. 이 뜻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불안한 심장 박동이 기억을 되살렸다.
나를 마녀라고 확정 지었던 대사제의 욕심 가득한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했다.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예비 성녀님이 몰래 만난 사람은 누구였나?”
“그것도 제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봐서는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알겠군.”
카르텔로는 아스테인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솔라르 경.”
계속 내 눈을 피하는 사람과 겨우 눈을 맞췄다.
“경은 내가 앞으로 성녀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나요?”
“예비 성녀님, 그걸로 기사를 협박이라도 하려는 겁니까?”
이번에도 나선 것은 카르텔로 한 사람이었다.
그날처럼 위세 등등한 남자의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대사제는 내가 성녀가 된 이후에도 날 존경하고 받들 생각이 전혀 없군요.”
“그게 무슨 소리……?”
“그게 아니라면 조용히 입을 다물고 끼어들지 말아요. 성녀와 신이 아닌 자의 수족으로 사는 이를 신께서는 용납하지 않으니.”
이전에는 내가 가짜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대사제의 눈치를 많이 봤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차라리 지금이 저자를 제대로 가르칠 기회였다.
“오해십니다. 어찌 저를 그런 자로 모십니까?”
“오해? 나는 어제 신성력으로 사악한 자들을 찾아내 죄인의 낙인을 찍었는데, 또 해볼까요?”
조금은 날카롭게, 그리고 매섭게 그를 다그쳤다.
일그러지는 대사제의 얼굴을 보니 통쾌했다.
“지은 죄가 없어 낙인을 받지 않을 자신이 있으면 계속 떠들어도 된답니다.”
내 힘이 아닌 것으로 허세를 떨었다. 나중에 이것 때문에 더 욕을 먹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신전에 해악을 끼치는 자에게 경고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 그런 뜻은 아닙니다. 저는 예비 성녀님을 존경하는 의미로 더는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신성력 앞에서 꼬리를 말아 넣는 자에게 시원한 웃음을 보여주는 것은 덤이었다.
대사제의 입을 막은 뒤 나는 본론으로 돌아갔다.
“솔라르 경, 다시 묻겠어요. 내가 성녀님의 뒤를 이를 후계자라고 생각하나요?”
“물론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거 아나요? 내가 푸토르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푸른 날개의 단장이 될 수 없어요.”
크리세우스가 얻어온 정보였다.
푸토르 후작은 솔라르 경에게 감히 성기사단의 수장 자리를 약속했다.
“물론 황실 친위대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인이 더 잘 알지 않나요? 기사가 자신의 실력을 갈고닦을 생각은 하지 않고 권력에 기대려 하다니, 한심하군요.”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큰 것을 보지 못하고는 했다.
물론, 후작이 당근만 제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족을 인질로 삼아서 협박도 했겠지.
“누님, 우리가 하찮은 기사의 증언을 위해 부당한 거래라도 했다는 뜻입니까?”
“사람이 욕심으로 눈앞이 가려지면 진실을 보지 못하기도 하거든요.”
“프레이아, 그럼 저 기사가 거짓을 말했다는 건가요?”
“아니요. 그저 사실을 누군가에게 이익이 되도록 호도한 거예요. 물론, 그때 만난 사람은 단델리온 대공이 맞아요.”
유테르안은 경멸스럽게 날 쳐다봤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가뿐히 비웃어주었다.
“인테르, 반신전파의 문제로 대공과 대책을 세웠어요. 그들이 의뢰를 받고 대공님을 암살하려 했고, 그 대금으로 절 해치려 한다는 정보를 들었거든요.”
아스테인과 미리 짜둔 이야기를 내뱉었다.
“그리고 이거…….”
나는 아스테인이 연회 때 선보였던 성물 아이기스를 내보였다.
“대공께서 미리 대비한 덕분에 이렇게 아이기스도 찾아냈어요.”
딱 맞아떨어지는 정황에 후작 쪽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쐐기를 박아야 했다.
“본질에서 벗어난 일까지 해명해야 하는 상황이 슬프고 답답하네요.”
처량하고도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솔라르 경이 입을 떼려고 했다.
“아가씨, 저는…….”
“맞는 말이군요. 결국에는 작은 누님의 하녀 말고는 우리가 학대했다는 증거나 증인은 여전히 없군요.”
유테르안은 마음이 약해진 자의 입을 막았다.
내가 불쾌함을 담아 그를 노려보자 그가 여유롭게 웃었다.
“기사는 확실히 집안 사정까지 들여다보지는 않았으니 증인으로 부적합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 폴리데르, 자네가 자세히 설명할 차례야.”
유테르안이 집사를 내세웠다.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예, 도련님.”
집사는 성녀님 앞으로 나섰다.
“저는 제 피를 걸고 증언하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하는 말인가요? 한마디 말실수로도 죽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물론입니다. 저는 신의 뜻대로 살고 있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저건 독실한 신자가 신앙심을 걸고 진실을 증명하는 방법이었다.
거짓을 말하면 피를 거두어가는 형벌을 받는다. 그것이 아주 작은 거짓이라 할지라도 피하기 어려웠다.
“좋아요. 신성력으로 그대의 피를 속박합니다.”
성녀님의 손길에서 푸른 빛이 잠시 일렁였다.
성녀님의 의식이 끝나자 유테르안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저것은 진짜 속박이 아닐 것이다. 후작 쪽과 성녀님은 집사가 거짓 증언을 할 거라 믿고 이미 대화를 나눈 모양이었다.
조금 씁쓸한 기운이 입 안을 맴돌았다.
처음부터 이 재판은 공정하지 못했다. 결정권자가 기울어져 있었으니.
“아가씨는 푸토르 가에서 학대를 받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후작이 아니었다.
“자네! 도대체 무슨 말인가?”
“폴리데르! 네가 감히 우리 가문을 배신해? 지금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후작과 유테르안의 눈에 당혹감보다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카르텔로 역시 말도 안 된다면서 열심히 후작의 변을 내세웠다.
“분명 예비 성녀님이나 저 사특한 대공이 사주한 것일 겁니다.”
그의 말에 몇몇 대사제들도 동조하듯 웅성거렸다.
하지만 그 웅성거림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
“거짓말일 수 없지 않나.”
“그러게나 말일세. 그는 피의 맹세를 했으니…….”
유테르안과 후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다리를 묶었다.
성녀님의 힘을 빌려, 도저히 꼼짝도 할 수 없는.
“여러분은 설마 성녀님의 힘을 의심하는 건가요?”
나는 너무나도 맑고 경건한 얼굴로 입을 살짝 벌린 남자들에게 따져 물었다.
“아니면, 성녀님께서 거짓으로 피의 속박이라도 걸었다고 말할 건가요?”
당당한 내 말투에 유테르안이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다혈질답게 무례한 요구를 했다.
“고모님, 고모님의 속박에 뭔가 실수가 있었나 봅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그래야 노쇠한 제 아버지를 잊은 어리석은 집사가 헛소리한 것을 반성하지요!”
그는 성녀님의 권위를 짓밟는 짓을 했다.
당연하게도 몇몇 대사제의 항의가 이어졌다.
“아무리 성녀님의 조카라지만 말이 지나칩니다. 사과하십시오.”
소란이 이어지며 논쟁이 벌어지려는 순간, 성녀님께서 조용히 손을 들었다.
“다들 조용히 하세요. 베이트만, 일단 당신의 증언을 마저 듣고 싶군요.”
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성녀님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고모님! 어찌 이러십니까?”
“유테르안, 나는 고모이기 이전에 성녀입니다. 공적인 장소이니 예의를 갖추세요.”
유테르안을 혼내는 모습에 나는 눈썹을 꿈틀댔다.
뭔가 이상했다. 지금까지의 성녀님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푸토르 가에서 하는 사악한 짓을 눈감아주고, 심지어 내가 가짜인데도 성녀가 되도록 도왔던 사람과 같은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조용해졌으면 다시 증언을 듣도록 하죠.”
그러자 집사가 당당하면서도 공손한 자세를 잡고 덤덤히 말을 이었다.
“10년 전, 프레이아 님이 후작가에 입양되었을 때만 해도 황후 폐하와 같은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확실히 그랬던 기억도 있었다. 반년도 가지 못한 대우였지만.
“하지만 그 이후 프레이아 님이 전혀 신성력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안 후작님은 고행이라는 이름 아래 학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증언은 셀레미온의 것보다 더 구체적이었다.
애써 기억 저편에 숨겨놓았던 아픔이 하나하나 되새김질 됐다. 왜 죽지 않고 버텼는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팠다.
그때 어깨에 따스한 기운이 닿았다.
“괜찮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어깨를 짚어주고 작게 위로를 건네는 아스테인의 손길에 조금은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러기 위해 오늘 그렇게나 바쁘게 움직이고 애쓴 것 아닙니까?”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묵묵히 계속 증언을 이어가는 집사를 바라봤다.
“그리고 목이 졸렸다는 날, 제가 그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후작님께서는 술에 취해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더는 증인이 필요할 것 같지 않군요.”
성녀님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집사는 증언을 끝내고 내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나와 맺은 오전의 약속을 지킨 것을 확인하듯이.
* * *
후작가로 들어가는 비밀통로. 이것은 크리세우스가 알려줬다.
“예비 성녀님을 믿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한 죄를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원하던 대로 집사 베이트만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내 힘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날 인정할 수 없었겠죠. 이해합니다.”
회귀 전, 후작가의 사용인 중에서 날 가장 경멸한 자.
그건 역대 가장 신앙심이 깊은 현자, 대사제 베이트만의 후예인 집사였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때마침 떠올렸고, 크리세우스의 정보력으로 그것을 확인한 뒤 이곳으로 찾아왔다.
“예비 성녀님이 성녀가 될 때까지 곁에서 편안하게 수발을 들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자로서, 부끄러운 짓을 했습니다.”
그는 선대의 유지를 충실히 따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푸른 날개를 보고 무릎을 꿇었던 집사는 이제 나를 성녀의 후계자로 인정했다. 기적을 직접 본 것만큼 성심을 돈독히 하는 것은 없었기에…….
“신전으로 가서 모든 것을 밝히고 후작에게 벌을 묻겠습니다.”
부담스러울 만큼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그래도 이건 내게 기회였다.
“분명 후작은 이리저리 핑계를 대서 피할 거예요.”
“저를 믿으십시오. 저는 오직, 성녀가 되실 분을 위해 헌신하는 존재입니다.”
충실한 후작의 종이라 생각한 이는 알고 보니 신의 정직한 날개였다.
* * *
“그럼 이제 결론을 내야 하는 건가요?”
성녀님은 후작과 소후작 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이번에는 후작이 나섰다.
“부끄럽지만 오늘 이 재판이 열리기 직전, 성녀님과 만났습니다. 혹시 속박을 이용한 증명을 요구하는 이가 있더라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기로요. 누구든 작은 말실수로 죽으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차라리 성녀님의 권위를 떨어트리기로 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