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공정하지 못한 재판 (1)
아스테인의 등 뒤에서 장미 넝쿨이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 장미 가지마다 더 따뜻해지면 터트리기 위해 꽃봉오리가 가득 맺혀 있었다.
그중에 한 송이가 철을 모르고 화려하고도 짙푸르게 피어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리로 갔다.
“세상에 정말 푸른색 장미가 있었군요.”
“어머니와 외할아버지께서 키우시던 것을 옮겨 심었습니다.”
“그랬군요.”
나는 그 꽃을 빤히 들여다보다 오른손으로 툭 건드렸다. 그러자 장미 가시가 날카롭게 나를 찔렀다.
그 감각이 너무나도 쓰라렸다.
“꽃은 아름다운데, 블루 로즈는 왜 그렇게 더러운 존재일까요?”
내 말에 아스테인은 답이 없었다. 대신 꽃을 향해 뻗었던 내 손을 그의 품으로 가져갔다.
그의 미간은 대단히 좁혀져 있었다.
조금 화가 난 것도…….
“피가 나질 않습니까?”
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다급히 내 손가락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는 손수건으로 동여맸다.
조금은 과한 처치였다.
“아프지 않아요.”
“작은 상처가 곪아 큰 상처가 되는 법이라 배웠습니다. 저는 프레이아 님의 손에 생기는 작은 상처도 이제 내버려 두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의 다정한 마음은 어째서 이렇게 한결같을까? 왜 매번 이렇게 심장이 터질 듯이 만드는 것인지.
그의 집에서 이렇게 보살핌을 받으며 보호받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아스테인을 향해 달려가는 내 마음을 멈추지 못하게 하니까.
“대공님! 신전에서 서찰이 왔……. 아이고 죄송합니다!”
크리세우스가 우리에게 달려오다가 급히 멈췄다. 그가 멈춤과 동시에 나도 내 손을 아스테인에게서 빼냈다.
조금은 허탈해 보이는 얼굴을 한 아스테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크리세우스를 돌아봤다.
“내놔.”
“여기요…….”
크리세우스가 잔뜩 주눅이 든 채로 서찰을 넘겼다.
봉인을 풀고 내용물을 읽는 아스테인의 얼굴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두워졌다.
“무슨 일인가요? 혹시 성녀님께서 화가 나셨나요?”
카렌시아가 돕겠다고는 했지만, 푸토르 후작과 피를 나눈 성녀님께서 쉽게 허락하실 일은 아니긴 했다.
“당장 프레이아 님을 모시고 신전으로 오라는군요.”
역시나, 내가 이곳에서 머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하룻밤의 꿈이겠지.
“푸토르 후작과 소후작이 신전에 이의를 제기했답니다.”
아스테인의 미간만큼 내 미간도 좁아졌다. 역시나 끈질긴 자들이었다. 푸토르의 피를 이은 카렌시아조차 그들의 잘못을 인정했거늘.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프레이아 님은 여기에 안전하게 계십시오.”
“아니요! 같이 가야죠.”
“후작이 무슨 꿍꿍이로 저지른 일인지 모릅니다.”
“알아요. 하지만 푸토르 가의 만행을 밝힐 증인은 나 하나인걸요.”
아스테인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도망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분명 성녀님도 푸토르 가와 같은 입장에서 움직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나였다.
“아스테인 님께 보호만 받지는 않을 거예요. 저 때문에 곤란해지실 수도 있는데 어떻게 혼자 숨어 있어요? 함께 싸우고 싶어요.”
나는 굳은 의지를 아스테인에게 전했다.
아스테인과 크리세우스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둘은 눈으로만 의사를 교환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조금 부러운 눈으로 보는 사이, 둘은 눈빛 교환을 끝냈다.
“알겠습니다. 대신 프레이아 님의 하녀분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그분이 증언해 준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설득해 볼게요. 대신 당장 그 아이의 동생들을 대공성으로 데리고 올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아스테인의 묵직한 말에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조금은 안심이 될 만큼.
“그런데 하녀님의 증언만으로는 부족하군요.”
아스테인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차린 나도 그를 따라 미간을 좁혔다.
“아스테인 님, 혹시요…….”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내 의견을 밝혔다.
진지하게 내 의견을 들어주는 두 사람의 모습이 뭔가 나를 들뜨게 했다. 후작가에서의 나는 늘 의견 없이 후작의 명을 따라야만 하는 사람이었으니.
“성녀님!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네요! 맞습니다!”
크리세우스가 날 보고 웃어줬다. 그 웃음은 칭찬의 의미였다.
“이야, 저희 주군이 왜 아가씨께 이리도 목을 매는지 알겠네요.”
“그게 무슨……?”
“크리세우스, 말조심하랬다.”
“아, 왜요! 주군이 아가씨를 따르려는 이유를 알겠다는데. 현명하고, 침착하고, 뭐, 얼굴도 주군 스타일……. 가, 갈게요! 갑니다, 가요. 가서 그들부터 확보할게요!”
크리세우스는 아스테인의 손에 쫓겨나고 말았다.
“그, 죄송합니다.”
“크리세우스 님은 정말 유쾌한 사람이군요.”
내 칭찬에 그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가 펴졌다. 귀찮아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아끼는 수하인 모양이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도 미소 짓는 것을 보니.
“사람들 앞에서 조금만 진중해지면 좋을 텐데…….”
“어쩌면 그게 장점일 수도 있죠.”
“녀석에게 너무 칭찬해주지 마십시오.”
“적당한 칭찬은 사기를 높여주는걸요.”
“아니, 그 의미는 아닙니다. 그저 제가…….”
아스테인이 갑자기 말문을 닫았다. 몇 번이나 입을 들썩이던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하십시오.”
“뭐예요, 그러면 꼭 아스테인 님이 질투하시는 것 같잖아요.”
그래 줬으면 좋겠지만.
나는 덧없는 욕심에 빙그레 웃으며 속마음을 지나가는 말로 내보였다.
그런데 왜 아스테인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을까?
“맞습니다, 질투. 칭찬은 제게만 해주십시오.”
내 작은 욕심이 이루어지다니. 내 볼은 그 욕심의 대가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내 속마음을 아스테인에게 들켰다고 하더라도 소용없을 만큼.
“네. 그럴게요.”
내 대답에 휘어지는 그의 미소가 오늘도 싱그러웠다.
* * *
“프레이아, 푸토르 후작가에서 나갔다고요? 그리고 택한 곳이 단델리온 대공성이고요?”
신전에 도착한 나는 접견실에서 성녀님과 푸토르 후작과 유테르안, 그리고 몇몇 대사제들과 마주해야 했다.
신전에서 성녀님 다음으로 가는 권력을 쥔 이들. 열 명의 대사제 중 절반 이상이 푸토르 후작의 사람이었다. 물론 그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성녀님의 발언권을 이길 수 없겠지만.
“어제 급히 의탁할 곳을 찾아 제 성으로 모셨습니다. 반신전파인 인테르의 습격도 낮에 있었기에 제 성이 안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아스테인의 대답에 발끈한 것은 푸토르 후작의 수족인 카르텔로 대사제였다.
“신전보다 안전한 곳이 어딨다고 그런 말을 합니까? 예비 성녀를 빼돌려서 무슨 짓을 하려고요?”
그가 소리를 지르자 몇몇 대사제들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푸토르 후작은 그저 가련한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고.
“예비 성녀님을 어린 시절부터 학대한 푸토르 가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오.”
“학대라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유테르안은 뻔뻔하게도 사실을 부정했다.
“프레이아, 사실인가요? 학대를 받았다는 것이?”
성녀님이 유테르안을 막고 물어봐 주셨다. 의외였다. 성녀님도 후작가의 잘못을 그저 묻으려고 하실 줄 알았는데.
“네. 사실입니다. 어제 그것을 목격한 황후 폐하께서도 인정하셨습니다.”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끝까지 내 생각을 내뱉었다. 그리고 시선을 성녀님께 맞췄다.
성녀님의 눈이 흔들리며 움직였다. 늘 사람을 당당히 보라고 하신 분이 내 시선을 슬쩍 피하기까지 했다.
“프레이아, 오해다! 학대라니!”
“누님이 제대로 힘을 썼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겁니다.”
유테르안의 말에는 가시가 숨어 있었다.
“그래 맞다. 나는 그저 신성력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은 너를 훈육하기 위해 엄격히 가르친 것뿐이란다.”
“맞습니다. 원래 엄하게 사람을 다룰수록 재능이 더 잘 키워진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카르텔로가 후작의 말에 번드르르한 얼굴로 역성을 들었다.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다 보면 모진 소리나 행동을 하게 될 수도 있지요.”
카르텔로와 몇몇 대사제들은 푸토르 후작과 결탁해 신전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잦은 폭력과 정신적인 학대를 교육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아스테인은 그런 대사제들을 향해 낮게 으르렁대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렇다고 외부인이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 일은 아니지요, 대공.”
유테르안은 아스테인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대답했다.
“앞으로 프레이아 님을 측근에서 모실 성기사가 어째서 외부인이라는 거지?”
“무사히 성기사가 될 수 있을 때 할 소리지요. 푸토르 후작가에서는 누님을 강탈해간 무뢰한이 성기사가 되도록 두진 않을 겁니다.”
노골적으로 협박을 해대는 유테르안의 행태에 치가 떨렸다. 아직은 내가 가짜라고 폭로를 할 수 없기에 아스테인을 건드리려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후작가에서 나간 겁니다. 그리고 후작가에서 성녀의 기사에 간섭할 자격은 없어요.”
내 반박에 유테르안의 입꼬리가 불쾌하게 비틀렸다. 눈에는 살의를 담았고.
“누님. 우리 푸토르가 신전에서 어떤 의미인지 모르십니까? 이대로 가문과 절연하겠다는 뜻입니까?”
“소후작, 진정하십시오.”
잔뜩 날을 세운 유테르안을 달랜 카르텔로가 나를 돌아봤다.
기름기 흐르는 그의 얼굴에는 세월을 거치며 쌓인 욕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예비 성녀님께서 아직 어리셔서 잘 모르나 본데, 후작가와 신전의 관계는 긴밀해야 합니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듯한 말투에 말없이 눈썹만 들어 올렸다.
“지금 신전이 황실과 벌인 자선 사업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푸토르 후작과의 사이가 틀어져 황제에게 밉보이면 어찌 될지…….”
카르텔로가 역성을 들자 후작이 내 눈치를 보면서도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예비 성녀라는 분이 이리도 정세를 읽지 못하고 제멋대로 굴다니 걱정이군요.”
“성녀가 하는 일은 정치가 아니에요.”
“누가 정치를 하라 했습니까? 그저 황실과 신전이 잘 이어지도록 푸토르 가와 화목하게 지내라는 것이지요.”
“왜 신전의 이익을 위해 프레이아 님이 희생해야 하지?”
아스테인이 발끈하여 나섰다. 그러자 카르텔로가 피식 비웃었다.
“황실의 미운털이 박힌 사람을 신전에서 품어주려 했더니 은혜를 모르는군요. 성녀란 원래 그런 자립니다. 희생과 헌신의 상징. 모릅니까?”
나는 다시 부딪히려는 아스테인을 손으로 막으며 앞으로 나섰다.
“희생과 헌신은 신전이 아닌 가여운 사람들을 위한 것이에요. 그것이 여신 데아께서 신성력을 내려주고 기적을 만들게 한 이유입니다.”
이건 회귀 전부터 가진 의문의 답이었다.
“가끔 일으키는 기적으로 많은 사람을 어찌 구합니까? 다 신전에서 황실과 함께 자선 사업을 하는 덕에…….”
“일부 대사제와 푸토르 후작가의 배가 부르겠죠.”
“아니, 이 무슨 막말이십니까? 아직 성녀도 되지 못한 분이 사제들을 모욕하는 겁니까?”
“이미 대사제가 되었는데도 예비 성녀를 보호하기는커녕 폭력과 학대를 옹호하는 이도 있는 것을요.”
내 인생 최고의 비꼼이었다. 나도 내가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 줄 몰랐다.
이런 내 모습이 낯선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날 이상한 눈으로 봤다. 특히나 유테르안이.
“프레이아 님의 말이 옳습니다.”
아스테인만은 장하다는 얼굴로 내 편을 들어줬다. 그의 당부를 잘 따르고 있는 나를 칭찬하듯.
“아니, 애초에 학대당했다는 주장도 예비 성녀님이 일방적으로 하시는 말이 아닙니까.”
“그래, 프레이아. 내가 널 어찌 키웠는데 이리 날 모함하는 거냐?”
“모함이요?”
나는 뻔뻔한 후작의 말에 숨이 막힐 뻔했다. 이건 모두 성녀님이 끝내 자신의 편을 들어주리라는 믿음 때문이겠지?
원망을 가득 담아 성녀님을 쳐다보았다.
“제 말을 못 믿으시면 증인을 데려오면 될까요?”
“프레이아, 증인이 있나요?”
“네, 제 하녀 셀레미온, 그 아이가 모든 것을 지켜봤어요.”
내 요청에 따라 셀레미온이 접견실에 들어왔다.
잔뜩 주눅이 든 아이는 후작과 유테르안이 짓고 있는 무시무시한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그 아이는 깊은숨을 몰아쉬고는 증언했다.
“프레이아 님이 정해진 일정을 지키지 못하면 다락방에 가두고 온종일 굶기셨어요.”
“그건 고행의 한 방법 아닙니까? 신성력을 얻지 못하는 우리 사제들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하는 일입니다.”
카르텔로의 말에 셀레미온이 발끈했다. 그리고 슬쩍 후작을 노려봤다.
“허락받지 않은 사람과 만났을 때도, 몸이 너무 좋지 않아 기도를 걸러도 빛 하나 들지 않는 곳에 가뒀단 말이에요.”
셀레미온이 씩씩댔다. 그 모습을 지켜보려니 심장이 시큰거렸다.
내 편이 있다는 것이 정말로 고마워서.
“게다가 후작님이 손찌검해대서 입술이 터진 게 몇 번인데요? 매질도 열흘에 한 번은 당했어요. 몇 주 전에는 목을 졸라서 온통 피멍을 들여놓고!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요!”
나는 문득 아스테인을 돌아보았다. 셀레미온의 증언을 듣는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갔다.
당장이라도 후작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은 듯, 점점 서늘해졌다.
셀레미온이 내 편을 들어주는 것과는 조금 다른 심장의 울림이 전해졌다. 너무 뜨겁고 따뜻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예비 성녀님의 측근 아닙니까? 예비 성녀님의 생각에 동화되어 작은 일을 부풀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참을 이어진 침묵 끝에 카르텔로 대사제가 겨우 변명거리를 찾아냈다.
“아, 그래요? 그럼 푸토르 가에서 사람을 데려와 증언을 서게 하죠?”
내 말에 유테르안이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하죠. 그래야 공평하니.”
유테르안의 미소가 조금은 불길했다.
푸토르 가의 가장 충복들만이 접견실로 들어왔으니 그럴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