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대공성에서의 첫날
이번 삶에서는 낯설지만 지난 삶에서는 익숙한, 그런 목소리가 코앞에서 울려왔다.
바람도 없는데 붉은 머릿결을 휘날리며.
“엘라네르? 당신이 도대체 왜 여기에……?”
나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찾으려니까 숨어버렸던 사람의 등장이 당혹스러웠다.
“내가 누군지 기억하네?”
엘라네르는 나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행복해 보이는구나.”
얼굴을 내게 들이민 엘라네르는 날 이리저리 관찰했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내리고 날카롭게 나를 노려봤다.
“다시 시작하는 소감은 어때?”
“당신도 시간이 되돌려진 것을 기억하는 건가요?”
엘라네르는 질문을 무시하고 자신이 할 말만을 이어갔다.
“내 힘으로 두 번이나 기적을 일으킨 소감은? 아니지, 내 힘으로 진짜 성녀가 되어 본 소감을 묻는 게 나은 거지?”
“무슨 뜻이죠? 설마 내가 오늘 쓴 힘이 당신의 신성력이었다는 소린가요?”
엘라네르가 입꼬리를 비틀며 차갑게 웃었다.
“탓하려고 온 거 아니야. 놀리려고 하는 소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기에는 그녀의 눈빛이 너무 진지했다. 그리고 차가웠고.
“네게 신성력을 빌려준 이유가 있거든.”
“그게 뭐죠?”
“그건 비밀.”
장난스럽게 검지를 입술 위에 올리는 모습에 나는 속에서 열이 올라왔다.
가짜인 나를 가지고 놀려고 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지난번보다 더 큰 비난을 받으라고 하는 짓 같았다. 사람들에게 더 큰 배신감을 안겨주려고.
“그것보다는 부탁, 아니 네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다시 진지한 얼굴을 하며 내게 다가온 엘라네르는 내 귓가에 시리도록 차가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 대신 네가 성녀가 되어 신전으로 가줘. 아니 넌 이번에도 가게 될 거야.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면.”
* * *
햇살 가득한 아침, 나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방에는 엘라네르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뭐야? 도대체!”
그저 불안감이 만든 꿈일 것이다. 아니 꿈이어야만 했다.
내가 어떻게 후작의 손에서 벗어났는데, 어떻게 그 지긋지긋한 푸토르 가에서 도망쳤는데!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거친 숨결은 답답하게 손안에서 맴돌았다.
“싫다, 진짜…….”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변하는 것이 없다고 알려주러 온 걸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다. 없는 엘라네르의 흔적을 찾아.
“꿈…… 꿈일 거야. 괜찮아.”
소리를 내며 스스로 다독였다. 몇 번이고. 불안했던 마음은 겨우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아스테인의 도움도 있었다.
“프레이아 님, 일어나셨습니까?”
문밖에서 자상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조금 마음이 차분해졌다.
“네, 잠시만요.”
나는 불길한 꿈을 잊기 위해 머리를 휘휘 저었다.
잠시 몸단장을 하고 방문을 열자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가 문 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잘, 주무셨……습니까?”
길이는 짧아 손목이 드러나지만 헐렁한 그의 튜닉. 구겨지거나 끌어 올려진 곳도 없는데, 왜 이러는 걸까?
“프레이아 님의 하녀가 곧 온다고 하니, 조금 불편하셔도 참으십시오.”
“네. 그런데 그 말씀 하시려 부르신 건가요?”
“아니요. 사실 제 기사들이 정식으로 인사드리고 싶다고 하여 같이 아침 식사를 청하려 했지만……. 음……. 다른 녀석들에게 차마 이 모습을 보여주기가…….”
그는 여러 번 말을 끊어서 했다. 지금 내 옷차림이 그렇게나 보기 싫은 것일까?
하긴, 실내복이라고는 하지만 남자의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 나서기는 그랬다.
그렇다고 어제 입었던 연회용 드레스를 입고 내려갈 수도 없고.
“제가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인사는 다음에 나누는 것으로 하지요.”
“네, 죄송해요. 번거롭게 해드려서.”
“아닙니다. 프레이아 님을 위하는 일이면 저는 뭐든 기쁩니다.”
고맙게도 그는 내 얼굴이 장미꽃잎처럼 물들기 전, 돌아가 주었다.
* * *
“아가씨! 괜찮으세요?”
한참 뒤, 내게 아침 식사를 가져온 것은 셀레미온이었다.
어쩐지 그게 속상했다. 아스테인이 다시 올 줄 알았는데…….
“응. 나는 괜찮아. 후작가에는 별일 없어?”
“어휴, 난리가 났었죠. 후작님은 당장 대공성으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하고, 도련님은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살벌했어요.”
그에 비해 지난밤 나는 너무 조용히 보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엘라네르와의 만남을 빼면.
“아무도 안 왔는데?”
“아니에요. 왔다가 대공님의 기사들에게 패해서 도망쳤댔어요.”
“뭐?”
전혀 몰랐다. 아스테인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않았다.
“새벽에 듣기로는 황제 폐하가 어제 연회 일로 진노하셔서 후작님께 근신하라고 했대요.”
아마도 이건 카렌시아의 도움이 컸을 것 같았다. 고맙게도.
“그래도 도련님이 언제 올지 모르겠어요. 대공님 욕을 엄청나게 하다가 뭔가를 찾아야 한다면서 기사들을 빈민가로 보냈어요. 그걸 찾으면 대공님도 아가씨를 포기할 거라나?”
나는 미간을 좁혔다. 엘라네르를 찾기 시작했구나. 불길했던 꿈과 함께 좋지 않은 예감이 엄습했다.
얼굴은 초조함에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때 내 표정을 살피던 셀레미온이 조심스레 내게 말을 붙였다.
“그래도 후작가에서 벗어나서 다행이에요.”
“응.”
“성녀님이 될 때까지 이제 대공님의 보호를 받는 거죠?”
문득 가짜인 내가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 정말 괜찮은 일인가 의문이 생겼다. 성급한 결정으로 아스테인에게 폐를 끼칠지도 몰랐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 같아서 걱정돼요.”
“상관없어. 대공님은 별채에서 주무시는걸.”
“하긴. 이제 누가 푸른 날개의 기적을 보인 아가씨를 모독하겠어요?”
이건 확실히 문제였다. 내 의지와 능력과는 상관없이 모두에게 성녀로 각인되었다. 신성력으로 기적까지 일으키는 강한 예비 성녀로.
“식사하고 계시는 동안 저는 방을 정리할게요.”
셀레미온은 후작가가 정신없는 틈을 타 내 소지품을 몇 개 챙겨 아스테인의 기사와 도망쳤다고 했다.
“정리할 게 많지는 않지만.”
몇 벌 되지도 않는 실내복과 외출복을 들고 왔다. 셀레미온은 금방 끝내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거요.”
손수건에 싸인 은색 실 팔찌.
“소중한 거 맞죠?”
“응……. 고마워.”
고작 하루 떨어졌지만 내게 가장 소중한 물건. 나는 그것을 조심스레 팔에 걸쳤다.
* * *
아침을 먹고 난 뒤, 나는 한참이나 망설인 후 아스테인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아스테인은 날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한 미소로 날 반기며.
“오셨습니까?”
“네. ……그게 후작가에서 벗어나니까 할 일이 없어서요.”
솔직하게 말하면 복잡한 마음을 달래러 그를 보러 온 거지만. 차마 속내를 시원하게 비추지 못했다.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볼을 붉히지도 못하고 조금은 어색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러자 그가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제가 지내는 곳을 소개해 드려도 될까요?”
꽃망울을 터트리려는 수줍은 꽃처럼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성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여기는 서재입니다. 외조부께서 모으셨던 책들이 종류가 다양해 읽을 만할 겁니다. 무료하시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십시오.”
낡은 종이가 내뿜는 냄새가 생각보다 좋았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에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약초학도 있네요?”
“……아마 독초 연구를 하시느라 가져놓았나 봅니다.”
“어머, 외조부님께서 해독제를 만들어서 유포하셨나 보군요.”
“……글쎄요?”
아스테인이 조금 곤란해 보인 것은 기분 탓일까?
다음은 커다란 회의장 느낌이 나는 곳이었다. 테이블이 길게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여기는 식당입니다. 저와 기사들은 항상 이곳에서 함께 식사를 합니다.”
“기사님들이요? 몇 명이나 되시나요?”
“상주하는 녀석들은 50여 명입니다. 다들 제 영지에 흩어져서 평소에는 영지를 관리하지요.”
정확한 규모는 따로 알려주지 않았다.
“녀석들이 프레이아 님과 만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제 절 도와주신 분들 말이죠?”
“그 녀석들도 있고, 다른 녀석들도 있습니다.”
“기사님들께 성녀의 축복은 무운을 가져다준다고 하죠. 대공님의 기사님들이라면 저라도 축복을 내려드려야겠어요.”
아스테인은 내 말에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조금은 겁먹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아스테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저는 대공님입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세요?”
“푸토르 소후작에게는 이름을 불러주면서 말입니다. 제가 위험할 때만 불러주실 겁니까?”
“제가 그랬……나요?”
“네.”
아스테인의 얼굴이 너무 심각했다.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제 이름을. 저는 프레이아 님의 기사가 아닙니까.”
회귀 전에는 그렇게나 쉽게 부를 수 있던 이름이었다. 지금의 내게는 너무 수줍은 이름이었고.
“저기……. 아스테인 님.”
내 부름에 아스테인의 미소에서 라일락 향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어찌나 그 미소가 달콤하고 싱그러운지 보고 있는 나마저 같이 동화될 만큼.
“그리고 말입니다.”
아스테인이 다시 진지해졌다. 그의 심각한 얼굴에 나도 덩달아 긴장했다.
“대공성의 기사들이 프레이아 님을 기다리는 것은 성녀의 축복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왜죠?”
“그건, 음…….”
아스테인은 많이 곤란해 보였다. 심지어 한숨까지 쉬어댔다.
“그건 천천히 만나보시면 알 겁니다. 솔직히, 그들에게 프레이아 님을 보이고 싶지는 않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이 정말 싫은 모양이었다. 저렇게 질색하면서 왜 소개하려는 걸까?
“아스테인 님이 싫어하시는 거면 저는 굳이 그분들을 만나지 않아도 돼요.”
“그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프레이아 님이 불편할 것 같으면 만나지 않아도…….”
아스테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기 복도 끝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울렸다.
“으아아! 드디어 뵙는군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대공님께서 아가씨가 힘드신 것을 알고 어찌나 매일매일을 한숨만 쉬고 넋을 놓고 살던지. 정말 은인이십니다. 그러니 내가 진작에 후작가로 쳐들어가서 아가씨를 빼 오자니까, 뭐 하신 겁니까, 진짜!”
기사 같아 보이지 않는 날렵한 몸의 남자는 내 손까지 덥석 잡아가며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우리 황후 폐하께서 남기신 유언을 져버리면서까지 아가씨를 쫓아 신전으로 가겠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그만해라, 크리세우스.”
“차라리 얼른 황위를 뺏고 푸토르 후작가를 멸문…….”
“경고했다. 손도 떼.”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들에 눈이 동그래졌다. 더 듣고 싶었다. 아스테인의 과거와 마음을.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헌신하는데 우리 존재가 부끄럽다고 아가씨 앞에서는 정체도 드러내지…….”
“할 말 못 할 말 가리라고 했다.”
조금은 사납게 으르렁대는 아스테인의 손에 남자는 쫓겨났다.
하지만 그 남자는 생각보다 끈질겼다.
“아가씨, 혹시 우리 대공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하면 제게 다 물어보십시오. 제가 기저귀 차던 시절부터 죄다…….”
“크리세우스!”
“으악, 갑니다. 가요!”
대공성의 이미지가 조금 달라졌다.
어제 처음 왔을 때만 해도 그저 삭막하고 정적인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밝은 곳이구나.
아스테인은 크리세우스라는 남자를 저 멀리까지 쫓아낸 뒤에야 고개를 저으며 내게 돌아왔다.
왜 그가 이들을 내게 소개하지 않으려고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스테인 님. 저한테 숨기시는 게 많으셨네요?”
미소 어린 질문에 아스테인이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띄게 보였다. 사레들린 듯이 기침을 끊임없이 해댔으니까.
“죄송합니다.”
그는 조금 먼 산을 보며 앞으로 걸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살짝 볼을 붉힌 것이, 들켜서 많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채 말없이 날 정원으로 이끌었다.
“사실…… 오래전에 프레이아 님을 봤습니다. 라일락 숲 아래에서요.”
“그랬어요?”
“그곳에서 혼자 울고 계셨습니다.”
“그랬나요?”
나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 일에 미간을 좁혔다. 죽음을 앞두고 많은 기억을 되살렸지만, 아스테인의 일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안개가 낀 것처럼.
“그때 저도 형제들의 괴롭힘에 황궁에서 도망쳐 나왔었지요.”
그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더니 조금 불만스럽게 말했다.
“전혀 기억나지 않나 보군요.”
아스테인의 서운함에 당황스러웠다.
고아원에서 후작가로 갔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라일락 숲도 있긴 했지만, 그의 모습은 거기에 없었다.
“그게…….”
“기억해 주실 때까지 저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네?”
살짝 뾰로통한 그의 반응이 솔직히 귀여웠다. 귀여워서 볼이라도 끌어 잡아당기고 싶을 만큼.
“꼭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프레이아 님과 어떻게 만났는지를.”
혹시 그가 나를 조건 없이 늘 믿어주는 일과 관계있는 것일까?
“알았어요. 꼭 기억해낼게요.”
내 다짐과 함께 그의 미소가 다시 싱그럽게 피어올랐다.
그런 그의 뒤편으로 신비로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저건…… 블루 로즈, 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