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악몽에서 벗어나기
아스테인의 목소리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검 끝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유테르안은 내 목을 잡은 손을 뗐다.
양팔을 들어 올린 유테르안은 위협을 받으면서도 아스테인에게 도발했다.
“황궁 안에서 허락받지 않은 단검이라, 폐하께서 아시면 참으로 기뻐하시겠군.”
“그만해 유테르안. 프레이아의 호위를 위해 신전이 허락한 일이야. 게다가 나도 허락했고.”
“누님! 누구 편을 드는 겁니까?”
유테르안은 자신의 편을 들지 않는 카렌시아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봤다. 하지만 카렌시아는 단호했다.
“아버지가 오냐오냐 키우더니 미쳤구나? 감히 예비 성녀를 위협하고 협박하다니! 신전에서 알면 어쩌려고 그래?”
“신전이 황실보다 높은 존재입니까?”
“시끄러워. 네가 황실과 신전 사이의 관계를 망치려고 했다고 황제 폐하와 아버지께 고하기 전에 입 다물어.”
유테르안은 카렌시아의 태도에 분이 풀리지 않는지 씩씩댔다.
그 꼴을 보니 나는 카렌시아가 염려스러웠다. 이러다 유테르안에게 해코지를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됐다.
그런데 카렌시아의 입에서 더 믿기지 않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프레이아가 이제 성녀로서의 힘도 제대로 각성했는데 언제까지 너도 아버지도 프레이아를 핍박할 생각이지? 나는 황후이기 이전에 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더는 묵과하지 못하겠어.”
“무슨 뜻입니까?”
“프레이아의 거처를 옮겨야겠어. 성녀 대관식 전까지.”
내 눈도, 유테르안의 눈도 커졌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무덤덤했다. 아마도 이미 카렌시아와 이 상황을 의논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묵묵히 유테르안이 미쳐 날뛰지 못하게 검으로 그를 겨누고 있었다.
“어디로 데려갈 생각입니까?”
“너도, 아버지도 찾아가지 못할 곳에 둘 테니까 넌 신경 꺼.”
“누님! 아버지가 아시면……!”
“난 황후야. 푸토르 후작가의 영애가 아니라. 그러니 토를 달고 싶으면 황제 폐하께 건의해. 물론 오늘 너와 아버지가 저지른 실수로 나와 내 아이가 죽을 뻔한 일을 용서받을 수 있다면 말이야.”
카렌시아가 그의 죄를 물을 듯이 위협하자 유테르안은 반항할 수 없었다. 그건 명백히 황족 시해죄였다.
유테르안이 할 수 있은 일은 그저 아스테인을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카렌시아는 철없는 제 동생을 제압하기 위해 황궁의 기사들을 불렀다. 그들은 우리의 눈앞에서 유테르안을 치워줬다.
그가 사라진 뒤, 카렌시아는 아스테인에게 눈짓했다.
“빨리 준비를 끝내요.”
“감사합니다, 폐하.”
아스테인이 복도를 가로질러 급하게 사라졌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카렌시아를 돌아봤다.
“나랑 아이를 살려준 감사의 선물이야.”
“황후 폐하?”
“네게 신성력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잠깐 들긴 하더라.”
나는 카렌시아를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너무나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그녀를 구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아스테인이었다. 나는 오직 아스테인을 지키려 했던 것이고. 심지어 아스테인을 구한 것조차 내 힘이 아니었다.
“내가 실수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모든 것을 인내해오면서 살아왔던 너니까……. 성녀가 되기 전 마지막만큼은 고통받지 말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폐하…….”
“네게 신성력이 없었다면 차라리 둘이서 국외로 도망치라고 했을 텐데…….”
나는 카렌시아의 말에 눈만 끔벅끔벅해야 했다.
“고모님께는 내가 말해둘게. 며칠간은 대공성에서 지내다가 대공께서 성기사의 신분을 빠르게 얻으면 신전으로 거처를 옮겨.”
“아버지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폐하를 괴롭힐지 몰라요.”
내 염려 섞인 말에 카렌시아의 눈이 찡긋 감겼다.
“어릴 때야 나도 신성력이 없어서 구박 덩어리였지만 지금은 든든한 보험이 내게 생겼잖아. 걱정 안 해도 돼.”
카렌시아는 가볍게 자신의 배를 통통 쳤다.
나는 어떻게 감사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눈에 눈물만 가득 채운 채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카렌시아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아팠던 기억은 지우고 행복한 추억 많이 쌓아.”
“감사해요.”
나는 카렌시아를 마주 안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누는 가족의 온기에 지금까지의 아픔을 눈물로 흘려보냈다.
곧, 아스테인이 올라왔다.
“모시고 가겠습니다.”
“아버지가 곧 추격할지도 몰라요. 얼른 떠나요.”
그는 황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후작이 움직이기 전에 조금 급하게 움직여야겠습니다.”
나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1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마차가 아닌 말이었다.
그는 날 말 위에 태워준 뒤, 훌쩍 뛰어올랐다. 내 어깨에 푸른 망토를 단단히 묶고서야 말을 출발시켰다.
“이랴!”
황궁의 정원을 가로질렀다. 얼마 전까지도 차가웠던 봄날 밤의 바람이 조금은 따스하게 느껴졌다.
아스테인의 온기와 그의 망토에 배어 있는 라일락 향. 그것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다.
우리는 황궁의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빠져나갔다. 나가자마자 우리의 곁을 아스테인의 기사들이 에워쌌다.
“마차는 잘 출발했겠지?”
“네, 위장한 저희 기사들도 있습니다. 잘 속아 넘어갈 겁니다. 인테르도, 푸토르도.”
“좋아. 출발한다.”
“예! 주군!”
말은 빠르게 늦은 밤길을 가로질렀다.
내게 자유를 선물해 주기 위해.
* * *
말의 속도가 조금 느려진 것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커다란 성 앞에 왔을 때였다.
“단델리온 대공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프레이아 님.”
내 착각이 아니라면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조금은 들떠 있었다.
“제가 다치지 않으면 주신다던 하루가 길어져서 기쁩니다.”
그리고 귓가에 닿는 그의 목소리에 내 귀도 그만 들떠버리고 말았다.
성문이 열리자마자 아스테인의 말이 성문을 통과했다. 일행이 모두 통과하고 나자 성문은 빠르게 닫혔다.
더는 누구도 들이지 않겠다는 듯이.
“돌아오셨습니까? 아니, 그런데 이분은 도대체……. 아! 그분이시군요!”
성의 사용인들은 단델리온을 반갑게 맞이했다. 나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고.
그런데 단델리온의 성은 생각한 것보다 조용하고 삭막했다. 황궁처럼 화려한 장식도 없었다.
“미리 방을 준비하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그래도 대공이 안내해준 방은 삭막하기보다는 따스하고 단아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에요.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된 탓인걸요.”
“성에 상주하는 하녀가 없는지라…… 일단 급하게 후작가에 사람을 보내 프레이아 님의 하녀를 모셔오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셀레미온을 인질로 삼을지 몰라요. 그러니 빨리요.”
나는 후작이 날 돌아오게 하려고 어떤 짓을 할지 예상이 되었다. 그건 막아야 했다.
“혹시 가능하시면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아원에도 경비를 보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셀레미온의 동생들도 지켜주세요.”
“전부 가능합니다. 후작이 무슨 짓을 할지 그리도 걱정됩니까?”
“혹시나요. 그들이라면 분명히 날 돌아오게 하려고 무슨 짓이든 할 거예요”
나는 소름 끼치던 유테르안의 광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라면 나를 잡기 위해 후작보다 더 끔찍한 짓을 할지 몰랐다. 내가 그의 곁에서 도망쳐 날아가지 못하게 깃털을 하나하나 뽑으려 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프레이아 님을 위해서라도 지키겠습니다.”
“감사해요. 저기 그런데 혹시 엘라네르의 행방은 더 알게 된 것이 있나요?”
나는 조금 조급해졌다.
유테르안이 그 아이를 찾겠다고 나선 이상, 한시라도 빨리 만나야만 했다. 절대로 뺏길 수 없었다.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만, 생각보다 행적이 묘연합니다. 그녀를 아는 이도 없고, 닮은 이의 목격담도 더는 없으니까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창가에서 태어난 엘라네르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아이였다. 외톨이에 보호자도 없는.
“누군가가 마치 흔적을 지운 것 같더군요.”
내게는 몇 번이나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무슨 의도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납치일까요?”
“저를 돕는 이들은 제국 최고의 정보원들입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놓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이미 자신이 성녀인 것을 알아차리고 가짜인 나를 피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반드시 찾아야 해요. 유테르안이 먼저 찾으면 분명히 그녀를 이용해 신전을 장악할지도…….”
이런, 실수였다. 둔한 사람이라고 한들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특히나 아스테인이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역시나 그가 나를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엘라네르라는 사람을 찾으면 혹시, 프레이아 님이 푸토르 가에서 완전히 벗어나실 수 있는 겁니까?”
그의 말에 나는 눈을 깜박일 수 없었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내가 가짜 성녀라서 진짜가 필요하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성녀가 되는 일에 걸림돌입니까?”
여기서 그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그가 지난 삶에서처럼 끝까지 날 믿어주는 일은 없겠지?
“만약 프레이아 님께서 성녀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라면 제가 반드시 제거해 드리겠습니다.”
내 눈이 더 커졌다. 눈이 커진 만큼 심장도 커졌는지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커졌다.
그가 반드시 나와의 약속을 지킬 것만 같아서.
하지만 결단코 그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아니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돼요.”
진짜 성녀님을 해쳤다가 어떤 벌이 내려질지 예상할 수 없었다.
내가 진짜 행세를 했단 이유로 커다란 죗값을 치르게 한 신께서, 자애로울 리가 없었다.
“자세한 것은 그분을 찾고 나면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혹시 내가 가짜 성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아스테인은 아무것도 몰라야 했다.
그때처럼 내게 이용당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다시 내가 가짜임이 밝혀졌을 때, 그가 철저한 배신감을 느끼고 내게서 떠나야 살 수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서운하세요?”
“아닙니다. 말씀해주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지요.”
“죄송해요. 제가 끌어들여 놓고 진실은 말씀드리지 못하다니…….”
“괜찮습니다. 저도 프레이아 님께 말 못 하는 비밀이 있는 것을요.”
그가 차분히 웃으면서 대답하자 무거운 마음이 슬쩍 가라앉았다.
“대신 제가 최선을 다해 그 여자를 찾아올 테니 그때 진실을 알려주십시오.”
대화를 마친 아스테인은 내가 입을 만한 옷도 구하고, 잠시 정리도 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혼자 남은 나는 방을 잠시 구경했다.
여인을 위해 꾸며진 것 같지만 소박한 방. 커다란 규모로 봤을 때는 아마도 대공비가 될 여인의 방 같았다.
장식장에 놓인 작은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귀엽다. 이건 아스테인일까?”
거기에는 은발 머리의 작은 소년이 같은 머리카락 색을 가진 우아한 여인의 품에 안겨 있는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배경이…….
“푸른 장미네?”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꽃일까? 얼핏 배경은 이곳 대공성 같기도 한데…….
이곳에도 커다란 정원은 있었다. 밤이라서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곧 피어날 장미 넝쿨도 있긴 했다.
나는 초상화에서 눈을 떼고 방을 다시 둘러봤다. 하녀가 없다니 오늘은 스스로 씻고 자야 할 것 같았다.
“욕실이 어디지?”
문이 두 개이고, 하나는 복도로 통했다. 그러면 당연히 다른 하나는 방에 딸린 욕실이 틀림없었다.
겁도 없이 나는 벌컥 그 문을 열었다.
“꺅, 죄송해요.”
하지만 그곳에는 욕조 대신 상의를 벗은 아스테인이 있었다. 급히 문을 닫은 나는 진정되지 않는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을 했다.
대공비의 방이 대공의 방과 연결되어 있을 줄이야.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아스테인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아까 그 문을 통해서.
그는 내게 옷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만, 이것밖에 없어서……. 제가 십 대 때 입던 옷입니다. 프레이아 님께서 너무 작으셔서 이거면 맞을 것 같습니다.”
“가, 감사해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피하니까 그의 가슴 앞이었다. 조금 전에 본 맨몸의 반듯한 결이 선명하게 떠올라 나는 다시 얼굴을 붉혀야 했다.
“대공비가 될 여인을 위한 방이라 제 방과 연결되어 있음을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욕실을 찾다가 그만.”
“욕실은 제 방에만 붙어 있습니다. 제가 옆방을 쓰면 불편할 테니 별궁으로 가서 기사들과 지내겠습니다.”
“여러모로 민폐를 끼쳐드리네요.”
“아닙니다. 제가 원해서 프레이아 님을 모신 것을요. 편히 쉬십시오.”
아스테인은 내게 옷을 건네주었다. 그러다가 팔이 스쳤다.
그때 그가 작은 신음을 흘렸다.
“대공님! 어디 다치신 거예요?”
“그게…… 아닙니다.”
“저랑 했던 내기 탓에 아닌 척하시는 거 아닌가요? 황후 폐하를 구하려다가…….”
나는 그의 상태를 살피려 손을 뻗었다. 그는 내 손길을 피하며 다시 깊은 침음을 삼켰다.
“정말 아닙니다. 그저 곤란해서 이러는 겁니다. 이러다간 제가 못 참을 것 같아서 흠흠. 제가 얼른 내려가야 쉬실 테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나는 얼굴에 인상을 쓰고 빠르게 사라진 그를 걱정스레 지켜보았다.
내가 불편한 것일까? 괜히 그의 성으로 온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스테인의 방에 딸린 욕실에서 그가 준비해둔 따뜻한 물로 씻은 뒤, 그가 건넨 침의를 걸쳤다.
튜닉이라 여자인 내가 입어도 딱히 불편함은 없었다. 헐렁해서 그렇지.
그는 십 대 때에도 덩치가 컸구나.
“그때도 이렇게 라일락 향이 났나 봐.”
나는 그의 향기에 취한 채 창가로 갔다. 아직은 성문 앞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그것이 낯설 만큼.
그래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아스테인이 곁에 있으니까. 그가 내게 해준 다짐은 그의 체향과 함께 나를 든든히 지켜주고 있었다.
이제 쉬려고 침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안녕? 오랜만이네.”
“……엘라네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