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더럽고 비열한 집착
엘라네르는 분명 나를 보고 웃었다. 기쁜 것인지, 비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미소로.
나는 그 아이를 잡아야 했다. 단지 내가 가짜 성녀의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내게는 없는 신성력, 그러니 만들지 못했어야 마땅한 오늘의 기적. 그것과 엘라네르는 분명히 관계가 있었다.
“잠깐만요! 기다려요!”
나는 비틀거리며 그쪽으로 향했다. 아스테인은 내가 향하는 곳으로 몸을 돌리며 다급히 따라왔다.
“누구 말씀입니까?”
하지만 엘라네르는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다시 눈을 비볐다. 잘못 본 것이겠지? 그래, 빈민가의 사생아가 황궁에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화려한 붉은 머리에 황금빛 눈동자가 흔한 것은 아닌데.
연회 홀에 있던 붉은 머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그때 그 찾으라고 부탁한 사람 말입니까?”
“아니에요, 제가 잘못 봤나 봐요. 일단 가요.”
* * *
황후는 커다란 방의 화려한 침대에 편안히 누워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폐하의 몸에 특별한 징후가 없습니다. 딱히 이상이 없는 듯하니 염려 놓으십시오.”
“후우.”
의사의 진단에 카렌시아의 입에서 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일단 태아가 놀란 것을 진정시키는 약을 지어 올리겠습니다. 위급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니 제가 옆방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만약을 위한 것임에도 의사의 말에 카렌시아는 마음이 놓이질 않는지 내 손을 잡았다.
“프레이아도 같이 머물러주면 안 될까? 할 이야기도 있고.”
“네, 그렇게 할게요.”
유테르안은 오늘의 일을 수습하기 위해 후작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 물론 아스테인을 경계하고 노려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카렌시아는 황궁의가 지어준 약을 먹고 잠시 잠에 빠졌다.
그 옆에 의자를 가져다준 아스테인의 배려로 나는 자리에 앉았다. 아스테인은 말없이 내 곁에 서 있었다.
“대공님도 쉬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괜찮습니다. 이렇게 옆에서 프레이아 님을 지키고 있는 쪽이 더 편합니다.”
아스테인의 대답에 황후 근처에서 시중을 드느라 대기하던 시녀들이 얼굴을 붉혔다.
“저는 불편해요. 시녀님, 대공님께도 의자를 내어주겠어요?”
내 요구에 한 시녀가 쪼르르 의자를 챙겨왔다. 그 시녀는 아스테인을 다시 힐끔 쳐다보더니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황후는 잠이 들었고 내가 지키고 있었기에 할 일이 없는데도 시녀들은 계속 근처를 알짱거렸다. 차를 내어오고, 다시 다과를 가져다주고.
그때마다 그들은 아스테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고.
“꺄아.”
하도 난리들이라 시녀들의 시선을 따라 나도 아스테인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머리는 자연스럽게 내려와 있었다. 그가 찻잔을 들어 올릴 때마다 흔들리는 은발 머리에 불빛이 반사되었다. 기다란 은빛 속눈썹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짙게 깔린 보라색 눈동자에는 라일락 꽃이 피어 있었다.
“몸이 안 좋으십니까?”
“아, 아니에요.”
지금은 솔직히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계속 볼이 붉어지고 심장이 뛸 것 같았다.
그가 오늘 계속 들려준 말들. 그중 어느 것이 날 가장 설레게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가 고개를 살짝 젖힌 상태로 황후를 바라봤다. 그의 드러난 목선을 보자 도저히 치미는 열을 감당할 수 없었다.
찻잔을 들려다가 내려놓고는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러자 그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얇은 옷차림으로 너무 오래 밖에 있었나 봐요.”
그는 걱정스레 바라보다 시녀들을 불렀다.
“뜨거운 레몬티에 꿀 한 스푼을 섞어서 가져오도록. 황후 폐하께서 쉬시니 그 일을 끝내면 더는 들락거리거나 어수선하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스테인의 명에 시녀들은 조금 아쉬워했다. 하지만 성실하게도 내게 달달한 레몬티를 내어주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든 황후를 빼면 나와 아스테인만이 남았다. 나는 그의 친절한 배려가 담긴 레몬티를 조심스레 마시며 눈치를 봤다.
“그런데 대공님. 아이기스 말인데요. 어떻게 입수하신 건지 여쭤도 될까요?”
민망함과 망상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질문이 조금 효과가 있었다.
아스테인은 순순히 아이기스를 꺼내 내 손에 쥐여 줬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길쭉한 막대 모양이었다.
“한 번에 알아보셨군요.”
“네, 이곳에 새겨진 푸른 날개는 신의 표식이니까요.”
나는 손잡이 부분에 새겨진 날개를 스윽 만졌다. 그러자 그것이 푸른 빛을 내며 반짝였다.
“제 뜻을 따라 움직여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 후작이 의뢰한 암흑 길드 인테르와는 결이 다른 순하고 성실한 녀석들이죠.”
“그 인테르라는 곳은 반신전파라고 했던가요?”
“네, 맞습니다.”
“오늘 연회에서도 절 노린 것 같죠?”
카렌시아를 떨어트린 화살들은 애초에 내가 목표였던 것이 틀림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계속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복잡한 상황에 나는 미간을 잔뜩 모았다. 회귀 전보다 더 복잡하게 꼬인 상황에 머리가 아팠다.
아스테인은 내가 이마를 짚고 있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봤다.
“아니에요. 따지자면 그들을 불러들인 후작의 탓이죠. 그런데 대공님을 돕는 이들이 이걸 어찌 찾은 거죠?”
“찾는 거라면 못 하는 게 없는 친구들입니다. 골동품으로 암거래되는 것을 찾아냈더군요.”
“그랬군요.”
“성물이니 프레이아 님께 돌려드리겠습니다.”
이것을 들고 잠시 고민을 했다.
내가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사심을 담아 허락할 일은 아니지만, 이건 아스테인을 지키는 일에 쓰고 싶었다.
“대공님께 성물의 인연이 닿은 이유가 있겠지요. 잠시 더 보관하세요. 성기사로서 절 호위하는 일에 쓰셔도 좋을 것 같아요.”
내 대답에 그가 가만히 웃었다.
그의 손 위에 성물을 다시 올려주려 했다. 그때 커다랗고 뜨거운 아스테인의 손이 내 것과 닿아버렸다.
놀란 나는 툭, 그것을 아스테인의 손에 떨어트렸다. 그러자 그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으으음, 프레이아. 옆에 있어?”
황후가 깨어나 사과할 타이밍을 놓쳤다. 나는 아스테인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 폐하, 저 여기 있어요.”
내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난 카렌시아는 시녀를 불러 따스한 물까지 한 모금 마셨다. 간단하게 식사를 끝낸 뒤, 카렌시아는 나와 아스테인을 불렀다.
“식사는 했어?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요.”
내 말에 카렌시아가 눈을 살짝 흐렸다.
“요즘에도 굶고 그래? 그래서 먹는 양이 줄어서 이렇게 마른 거야?”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기에 나는 그저 웃어줬다.
하지만 눈앞의 두 사람은 심각한 얼굴을 했다.
“시녀분들이 계속 다과랑 차를 줘서요. 괜찮아요.”
“너는 늘 뭐든 괜찮다고 하는구나?”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자 그녀가 살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있잖아 나, 잠시 대공과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은데 자리 좀 비워줄래?”
* * *
복도로 나온 지 꽤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불쾌한 사람만 마주하고 말았다.
“어이, 가짜 누님.”
마주치고 싶지 않아 그를 피해 자리를 옮기려 했다. 하지만 유테르안의 손은 내 손을 낚아챘다.
오전에 멍이 들 뻔한 그 자리였다.
“기둥서방은 어쩌고 혼자이실까?”
“황궁은 듣는 귀가 많으니 말조심하시죠.”
“아무도 지나가지 못하게 했지, 이미. 내가 그리 허술해 보여? 그리고…….”
유테르안은 내 말에 완전히 빈정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는 팔을 휘둘러 강제로 나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쿵’ 하고 부딪힌 어깨가 찡하게 울렸다. 뼈가 닿은 탓이었다. 충격에 몸을 비틀대는 사이 그가 내 턱을 붙잡았다.
그리고 불쾌한 얼굴을 내 코앞에 들이밀었다.
“다들 오늘 널 성녀 취급해 주니까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아?”
유테르안의 뱀 같은 검은 눈이 나를 진득하게 노려봤다.
“오늘 만든 기적, 네 힘 아니잖아? 가짜 성녀 씨?”
순간 떨려버린 눈동자.
그것을 숨기려 유테르안의 가슴을 힘껏 밀어냈다. 그는 어쩐 일인지 순순히 밀려났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내가 때렸던 뺨이 아직 붉었다.
“반대쪽 뺨마저 붓고 싶지 않으면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말아요.”
내 말을 도발이라고 여긴 것일까?
그가 기분 좋게 껄껄댔다.
“가짜 주제에 어디까지 기어오르려는 거야?”
순간 말문이 막혔다. 숨이 잠시 멎은 것 같다.
“내가 모를 것 같아? 신성력도 없는 주제에 도대체 무슨 수로 기적을 만든 거야? 그놈이 도운 건가?”
알고 하는 소리는 아니구나.
사실 오늘의 힘은 절대 내 것이 아니었다.
분명 시작은 내 힘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지닐 수 있는 작은 신성력이었다. 기적을 만들 수 없는.
그리고 제 할 일을 끝낸 신성력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아스테인이 죽던 순간, 그때와 모든 것이 같았다.
“그놈이라뇨, 대공을 모욕하지 말아요.”
“그 자식이 욕먹는 건 싫은가 봐?”
“성녀를 배출한다는 가문의 수장이 될 자라면 말을 가려 해요. 더러운 상상은 그만하고.”
“아까의 일이 네 힘이라는 소리는 못 하네?”
신전과 관련된 다른 사람이 이 질문을 했다면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가짜라는 사실을 밝혀 후작가에서 벗어나도 상관없으니.
하지만 유테르안에게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차라리 진짜인 척하는 편이 후작과 이 자를 방심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진짜 성녀 엘라네르를 확보할 때까지는.
“웃기지 말아요. 헛소리라 답하지 않는 것뿐이니까.”
내 대답에 유테르안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치 자신이 승리했다는 듯이 자신감 있게.
“그래? 그렇다면 지금 다시 내 앞에서 신성력을 보여주지 그래?”
나는 눈썹을 꿈틀댔다. 하지만 즉각적인 반응을 하진 못했다.
몇 번이고 다시 시도했지만 신성력은 나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으니까.
“역시, 안 되는 거지?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아쉽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네가 가짜인 것을 만천하에 드러냈어야 했는데.”
“푸토르 후작가의 수장이 될 사람이 할 소리인가요? 내가 가짜라면 그런 이를 예비 성녀로 내세운 푸토르 가의 명예가 어찌 추락할지 알고?”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이곳에 가짜밖에 없다면 어딘가에 진짜가 있다는 소리잖아? 아마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어머니 몰래 내 이복 남매를 만들어 두지 않았을까? 어쨌든 지금까지 진짜 성녀들은 모두가 푸토르의 피를 이어받았으니까.”
나는 유테르안의 정확한 예측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회귀 전처럼 엘라네르를 유테르안이 먼저 찾아낸다면 어쩌지?
내 계획이 완전히 망가질지도 몰랐다. 그리고 끔찍한 미래가 반복될지도.
“그래서 혹시라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진짜 성녀를 찾기라도 한다면요? 날 푸토르 가에서 내칠 거예요?”
불안감을 숨기려 최대한 냉정하게, 삐딱한 태도로 물었다. 그게 실수였을까?
유테르안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내 뺨에 가져다 댔다. 내 피부 위로 차가운 뱀이 스쳐 지나간 듯했다.
아스테인의 손과 내 손이 닿았을 때와는 정반대의 체온에 몸을 떨었다.
그는 얼굴을 최대한 내게 가까이 가져왔다.
언제 마셨는지 모를 술 냄새가 퍼져왔다.
“널 왜 내쳐? 집안의 비밀을 아는 여자인데. 저택의 지하실에 가두고 망가질 때까지 괴롭혀야지.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서 나만 널 마음껏 즐기며.”
나는 참 미련했다. 유테르안이 내게 보이던 감정이 지금껏 그저 푸토르 후작가를 망신시키는 가짜라서 날 미워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렇게 비틀린 집착과 욕망으로 날 바라보는지도 모르고.
회귀 전, 후작이 유테르안을 내게서 떼어놓으려던 이유를 깨달았다. 유테르안의 더러운 집착을 후작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뺨과 허리를 감싸려는 더러운 손길을 피하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그를 양팔로 힘껏 밀어내려고 했다.
“이거 놔요! 역겨우니까!”
하지만 늘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마른 여인의 몸으로 성인 남자를 이겨낼 수 없었다.
“가짜 성녀가 동생이 아닌 외간 남자랑 붙어먹는 것이 더 역겨운 일인 것을 몰라?”
“함부로 말하지 말랬지!”
“넌 조신하게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가짜 성녀 역할을 하다가 내가 진짜를 찾으면 널 위해 만든 감옥으로 옮겨오면 되는 거야.”
나는 다시 한번 힘껏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뺨이라도 때리면 되겠지! 하지만 이어진 협박에 멈췄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 자식부터 처참한 꼴로 눈앞에서 죽여줄게.”
나는 끔찍했던 회귀 전이 떠올라 부르르 몸을 떨었다. 후작으로도 부족해 유테르안마저 아스테인을 위협하다니.
이 모든 것은 내 탓이었다. 역시나 내 곁에 아스테인이 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믿었다. 믿고 싶었다. 믿어야만 했다.
“웃기지 마. 그는 너 같은 교활한 자에게 지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성녀답지 못한 행동이었지만 지금의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모욕이었다.
“네가 감히…….”
“누구더러 계속 가짜라는 거야? 당신 같은 사람이 푸토르 가의 차기 가주라니, 여신 데아께서 당신을 용서할 것 같아?”
유테르안의 눈에 분노가 가득 찼다. 그는 제 아버지가 그랬듯이 목을 잡고 날 바닥으로 내치려고 했다.
“그만해, 유테르안!”
카렌시아의 목소리. 그리고 유테르안의 목을 겨누는 아스테인의 단검.
“손 떼라. 목이 잘리고 싶지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