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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14화 (14/101)

14화. 제발, 도망쳐요.

황후의 명에 아스테인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유테르안의 눈은 황후 앞에서도 날카로워졌다.

“누님, 왜 이자가…….”

“유테르안, 너도 따라다니려면 따라다니고.”

카렌시아의 목소리가 보기 드물게 딱딱해졌다. 늘 경쾌하고 시원했던 목소리는 사라졌다.

“물론 나는 내 남동생을 믿어. 그런데 내 아이의 외삼촌이 내 아이의 숙부에게 무례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

카렌시아의 말에 유테르안이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아스테인을 노려보고는 있었지만.

“폐하께 송구스럽습니다.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일 뻔했군요.”

“어머, 대공께서 왜 사과하세요. 원래 성기사와 성녀의 춤은 서로 간의 신뢰를 의미한다면서요? 비록 둘 다 아직 예비이지만, 내 소중한 동생이 성기사가 될 당신을 믿고 맡기겠다는 뜻인걸요.”

유테르안은 그 말에 다시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아스테인의 여전히 한없이 예의 바르고 단정한 모습과 비교되게.

철없는 아이와 어른이랄까?

“그걸 이해 못 하고 자신과도 춤춰달라며 떼쓰고 투정 부리는 막내가 잘못한 것이죠.”

카렌시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현명한 사람이었다.

결국, 유테르안은 황후에게 인사를 하더니 황제와 후작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버렸다.

“후우, 내가 내 동생을 잘못 봤나? 저렇게나 철없는 아이는 아니었는데…….”

카렌시아의 목소리가 착잡했다.

하긴, 그녀는 유테르안의 다른 얼굴을 평생 모르고 살았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이 낯설 것이다.

“프레이아. 어차피 성녀가 될 거면 사람들을 만나두는 편이 좋을 거야. 신전을 이끄는 일에 귀족과 황실 힘이 절대적이잖아?”

이건 두 번째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진짜 성녀가 아니어서 지난 삶에서 본 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신전은 왜 모두를 위한 곳이 아닐까? 정작 아프고 힘든 사람들을 도울 기회는 몇 번 안 됐다.

신전의 힘을 과시하기 좋을 때만 쓰는 것이 신성력이었다.

“싫은 건 나도 알지만, 신전과 제국의 관계가 있잖아.”

카렌시아가 내 귓가에 살짝 속삭였다. 나는 마지못해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렌시아는 내 허락에 날 사람들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공정하게, 차별 없이 사람들을 하나하나 소개해줬다. 덕분에 연회장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소란은 없이 마무리됐다.

“고마워요. 아까 저 때문에 마음 상하셨을 텐데요.”

“아니야. 그건 정말로 내가 잘못한 거였어. 어떻게 너랑 대공을 두고 그런 생각을 한 건지. 내가 미쳤었지.”

그녀는 내게 다시 진심으로 사과해줬다. 그런 카렌시아의 모습에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아까 내가 너무 속 좁게 굴었던 것 같아서.

“죄송해요. 아까 제가 무례했었죠?”

“아니. 사실 대공의 말을 듣고 부끄러워졌어. 나도 어릴 때 너랑 같은 일을 겪고도 네가 겪는 일들을 외면했잖아.”

카렌시아는 조금 민망한 듯이 작게 웃었다. 그러더니 배를 잠시 쓰다듬었다.

“내 아이가 이런 비겁한 엄마를 만나게 하고 싶지는 않아. 엄마의 어리석고 한심한 모습을 보여준 건 오늘 하루로 족해. 그러니까 정말로 날 용서해줄래?”

그녀가 전해주는 진심 어린 말들이 내 심장을 조금 간질였다. 푸토르가 내게 남긴 커다란 상처의 일부가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여전히 나는 널 도울 수 없는 처지지만……. 뒤에서라도 응원할게. 이제 네 처지면 후작가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거야. 넌 이제 진짜 성녀가 된 거나 다름없으니까.”

마지막 말에 잠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카렌시아가 온 마음을 담아 말했기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싸워 이기는 것까진 바라지 않아요. 그저 지킬 수만 있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을요.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을요.

카렌시아는 다시 자신의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나도 그녀의 배를 지그시 바라봤다.

카렌시아가 지금 지키고 싶은 것이 그녀의 배 속에 있었지? 결국에는 잃고 말 아이……. 나는 문득 중요한 게 생각났다.

“폐하, 입덧이 끝난 뒤에 절대 양젖은 드시지 마세요.”

“응? 왜? 양젖은 신이 내린 음식이라고들 하는걸.”

나도 확신은 가지 않았다. 그녀가 조산한 이유를. 하지만 의심 가는 바가 있었다.

태아에게 많은 영양을 준다고 믿어왔기에 입덧이 끝난 산모들이 의사의 추천으로 양젖을 많이들 먹어왔다.

그건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위 귀족들이나 신선한 양젖을 먹고는 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카렌시아와 같은 시기에 조산을 한 여인도 양젖을 먹었다.

“깨끗하지 않은 양젖은 어두운 기운이 묻어 있을 수도 있어요. 피하셔야 해요. 소중한 첫 아이를 위해서라도요.”

그때는 몰라서 지켜주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내게는 조카인 아이를 이번에는 지켜야 했다.

회귀해서 다행이었다. 내게 진심을 보여준 사람에게 나 역시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됐다.

“알았어, 그럴게. 네가 있어서 정말 든든해.”

그녀와 나 사이에 어떤 유대감이 생겨난 듯했다. 나는 이제 푸토르 후작가 사람 중 황후에게만 진심으로 웃어줄 수 있었다.

“황후 폐하, 잠시 프레이아 님을 맡겨도 되겠습니까?”

아스테인이 나와 카렌시아를 지켜보다 말을 꺼냈다. 그는 날 보더니 조금은 편한 얼굴을 했다. 카렌시아의 태도에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그래요. 볼일 보고 오세요. 천천히 와도 좋아요.”

카렌시아는 내게 팔짱을 끼고는 웃으며 아스테인을 쫓아내듯 보냈다. 그가 떠나고 나자 카렌시아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흐음, 내가 오해했었구나.”

“뭘요?”

“어릴 때 말이야. 대공께서 아버지께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우리 집에 드나들었거든. 이상하게 집을 구경시켜달라고 내게 조르더니.”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손님이 와도 밖에 나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때는 보이는 곳마다 다 상처투성이였으니.

“참, 한결같은 사람이구나. 단 한 사람을 위해 그늘을 만들어 주는 늘 푸른 나무.”

“네?”

“저분이 네 성기사가 된다면 믿음직할 거 같아. 잘 됐어. 혹시라도 내가 했던 말은 잊어. 그가 날 위해 성기사가 되는 건 절대 아니었으니까.”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말은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대공께서…….”

“누님들, 볼일은 끝나셨습니까?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아스테인이 사라지자 유테르안이 귀신같이 붙어왔다.

카렌시아의 얼굴에는 조금 전 동생을 혼내던 엄한 눈빛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당연하지. 내 곁에 미래의 성녀가 이렇게 든든히 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프레이아를 더 자주 부를 걸 그랬어.”

나는 유테르안을 향해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카렌시아는 환하게 웃었다.

내게는 한없이 미운 사람이었지만 카렌시아에게는 소중한 동생이니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연회 때는 그리 불러도 오질 않더니, 무슨 바람이 든 거니?”

“누님 서운하십니까?”

“뭐, 그렇긴 했지만 내 임신을 축하하러 왔으니까 봐줄게.”

아스테인이 자리를 비우자 이 자리에는 화기애애한 푸토르 가의 남매가 남았다. 역시 나는 이곳에 끼어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물론 바라지도 않았고.

“참, 누님. 오늘 폐하와 아버지께서 누님을 축하해주려고 불꽃놀이라는 것을 준비한 것 아시지요?”

“그래. 정말 기대된다.”

“놀랄 수 있으니 귀는 막으셔야 합니다. 소리가 크거든요.”

화기애애한 남매의 모습에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카렌시아도 불편할 날 배려하려 했다. 그녀는 유테르안과 내 사이에 서서 그를 가로막아 주었다.

“작은 누님도 불꽃놀이를 보고 가실 거지요?”

하지만 유테르안은 내게 질척였다.

그것이 싫어서 밀어내고 싶었지만 곤란한 얼굴의 카렌시아를 보고 삼켰다.

유테르안이 이러는 것을 보면 분명히 뭔가 또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었다.

“프레이아, 같이 볼 거지?”

“저는…… 황후 폐하께 축복만 드리고 그만 돌아가고 싶어요. 피곤해서…….”

“작은 누님,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셨을 텐데요. 누님 곁에 있으라고요. 그거 황명입니다?”

비열한 유테르안의 미소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 * *

시간이 흐르고 밤하늘에는 점점 짙은 어둠이 깔렸다. 2층 발코니에서 보이는 하늘은 그믐이라 달빛조차 없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앞으로 있을 불길한 불꽃놀이를 예견이라도 하듯이.

“자, 다들 자리는 잡았겠지?”

나는 2층 발코니에 황제 부부와 함께 있었다. 거기에 유테르안까지.

이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특히나 1층에 있는 아스테인과 떨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황후, 저쪽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될 거야. 하늘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이니 아래쪽은 절대 볼 필요가 없어.”

하지만 나는 1층 테라스에 있는 아스테인만을 쳐다봤다. 하늘에서 어떤 아름다운 것이 쏟아지든 상관이 없었다.

그게 아스테인을 죽이는 무기가 아니라면.

“저 남자에게서 시선을 좀 떼지 그래?”

그때 뻔뻔한 유테르안이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아스테인과 떨어지게 된 것은 모두 이 남자 탓이었다. 황제가 불꽃놀이의 시작을 알리고 사람들을 발코니와 테라스로 내보낼 때, 아스테인의 곁으로 가려던 나를 막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자 유테르안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저 남자를 애틋하게 쳐다보면 당장이라도 저놈의 목을 비틀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가짜 누님?”

유테르안의 기분 나쁜 경고와 함께 주변에 매캐한 냄새가 퍼졌다. 그리고 곧, 펑펑 터지는 소리가 연회 홀 주변을 가득 채웠다.

“꺅, 소리가 너무 커요.”

폭죽이 터지는 소리 사이사이 황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도 즐거워하는 목소리.

“황후, 재밌소?”

“네, 어디서 이런 것을 구하셨어요?”

이 발코니에는 우리 네 명밖에 없었다.

눈앞의 황제 부부는 나와는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다정하게 붙어 타닥거리다 펑 터지는 폭죽을 보며 미소를 짓는 이들.

그 속에서 홀로 닥쳐올 미래에 불안에 떠는 나.

나는 유테르안에게 손목을 붙들려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었다.

“놔요.”

“싫은데?”

나를 잡아먹을 듯한 유테르안의 뒤로 별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분명 아름답고 신비로웠어야 하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유테르안과 후작이 만든 끔찍한 것이었다.

황제 부부만 없었어도 유테르안의 뺨을 내려치고 아스테인의 곁으로 갔을 텐데.

“사람들이 보고 있잖아. 뭐 하는 짓이야?”

뺨을 때릴 수 없기에 나로서는 말을 놓는 것으로 최대의 반항을 했다.

“다들 불꽃에 정신이 팔려서 아무도 우리를 보질 않을걸? 아, 저놈은 예외인가? 널 뚫어져라 보고 있네?”

유테르안이 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스테인이 서 있었다. 잔뜩 화난 얼굴로 유테르안을 노려보며.

“왜 계속 헛소리야? 놔, 놓으라고!”

“아버지가 널 지키라고 하셨거든. 괜히 그 자식의 근처로 갔다가 화를 입지 말라면서.”

“대공을 암살하려는 계획이라도 세웠어?”

“난 그런 소리 안 했는데?”

뻔뻔한 소리를 해대는 유테르안은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놈이 걱정돼? 그래서 미칠 것 같아?”

커다란 굉음 사이로 전해지는 악의에 미칠 것 같았다. 그것보다 더 날 괴롭히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렇게나 사랑하는 이를 지키고 싶다고 해놓고 지키지도 못하는 바보였어?

지독한 무력감이 밀려왔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면 말이야. 오늘 그를 고이 저세상으로 보내는 편이 낫잖아?”

‘쫙’ 하는 마찰음은 고맙게도 폭죽 소리에 묻혔다. 유테르안의 고개는 힘껏 꺾였다. 하지만 황후 부부는 우리의 이런 사정을 몰랐다.

나는 폭죽이 터지는 소리를 틈타 유테르안에게 분노를 일갈했다.

“닥쳐!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

감히 내 앞에서 아스테인의 죽음을 거론하다니. 나는 도저히 유테르안을 용서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회귀 전, 그때의 사달을 일으킨 것도 이자였다.

엘라네르를 후작의 앞에 데려온 것이 유테르안이었으니.

“더러운 게 감히!”

유테르안의 고개가 내게로 돌아왔다. 그런 그의 눈에 광기가 살짝 어렸다. 그는 내 곁에 바짝 붙어섰다.

팔을 낚아챈 그는 내 팔을 뒤로 젖힌 뒤 억지로 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자, 이제 시작이야. 똑바로 봐. 네가 내게 반항한 대가가 뭔지.”

황제 내외가 눈치채지 못하는 각도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불꽃에 정신이 팔린 다른 이들도 몰랐고.

내 상황을 눈치챈 이는 역시나 아스테인 하나였다.

그는 아래쪽에서 나에게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처럼 보였다.

나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에게 마음속으로 외쳤다.

도망쳐요, 거기에서 벗어나야 해요. 제발, 아스테인!

“마침 쓰레기들이 모두 같은 자리에 모였군.”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올라가는 입꼬리.

그 의미를 알아들은 것은 나와 유테르안뿐이었다.

“무슨 말인가요, 폐하?”

“황후, 내가 또 다른 선물을 준비했는데. 잠시 안으로 갈까?”

“어머,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두고요?”

“더 아름다운 것을 준비했거든.”

역겨웠다. 하나같이 자신들이 쌓아가고 있는 죄의 무게는 모르고 자신만을 위하는 꼴이.

카렌시아가 불쌍했다. 자신의 남편이 이름만 황제이지 더럽고 옹졸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다니.

어쩌면 그때의 사산은 황제가 만들어 놓은 업보였을지도.

황제 부부가 뒤로 돌아서자 유테르안은 귀신처럼 팔을 풀었다. 내가 당한 일을 보지 못한 황후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황제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발코니의 문을 닫았다.

그 순간 지금과는 다른 커다란 펑 소리가 났다. 눈을 뜨기 힘들 만큼 눈부신 섬광도. 그건 아스테인이 있던 테라스의 옆쪽에서 일어났다.

“안 돼!”

나는 절망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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