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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13화 (13/101)

13화. 제일 믿어요. 누구보다도

성녀가 다른 남자와 춤을 출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전 행사 때, 대사제와 공식적인 춤을 추고는 했다.

물론 성녀에게 무엇인가를 바라고 들러붙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누구와도 춤을 추지 않았다. 심지어 아스테인과도.

“그것이…….”

“성기사에게 성녀와의 춤은 가장 신뢰받는 자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저도 알아요. 그런데 그것이…….”

“저를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니요! 제일 믿어요. 누구보다도…….”

바닥에 그의 푸른 망토가 끌리는 것이 보였다. 그 망토가 작은 물결을 이루며 떨리고 있었다.

아스테인의 떨림에 조금 기뻤다. 나만 긴장한 것이 아닌 것 같아서.

그런데도 망설여졌다. 지금까지의 나는 원하는 것을 참고 사는 것이 익숙했기에.

“그러니 제 손을 잡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내게만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 애절하게 들리는 걸까?

그때 아스테인의 뒤쪽으로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푸토르 부자가 보였다. 특히 유테르안, 그가 우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게 내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아스테인과 춤을 추고 싶었던 소망을 이룰 때가 되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단델리온 경.”

그가 걸치고 있는 푸른 망토의 의미를 강조해서 말했다.

그의 커다란 손에 내 것을 겹치자 아스테인은 평범한 남자처럼 눈을 휘어주었다. 나도 오늘만큼은 평범한 여인이 될 수 있게.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프레이아 님.”

“저도 영광이에요.”

손을 맞잡고 중앙의 댄스홀로 갈수록 내 손은 긴장으로 차가워지는데, 아스테인의 손은 뜨거워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모일수록 더 그랬다.

“조금 긴장되네요.”

“처음이시지요? 공식 석상에서 춤을 추는 것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댄스홀의 끝에 도착한 나는 아스테인을 보고 마주 섰다.

뒤늦게 걱정이 됐다.

내 춤솜씨는 생각보다 별로였다. 아스테인을 망신시킬 수도 있을 만큼. 그래서인지 긴장이 드레스 밖으로 새어 나가려 했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더는 긴장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보라색 눈이 지그시 내 눈을 바라봤다.

그것을 홀린 듯이 보자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저도 수업 때가 아니라면 여인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것은 지금이 처음입니다.”

큰일이었다. 다시 몸이 떨려왔다.

심지어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는 곳에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사람들은 춤에 열중하느라 내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이렇게 여유로워도 될까요?”

“지금은 걱정하지 말고 이 순간을 즐기시는 것이 어떨까요?”

그가 황후 쪽을 보며 슬며시 고갯짓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었다.

임신한 황후 곁에서 일을 저지르지는 않겠지.

“대공님은 늘 여유로우시네요.”

“걱정이라는 것은 대비책을 세우는 일에만 하면 되는 거라고 외할아버지께 배워서요.”

빙그레 웃던 그가 내 손을 슬쩍 끌어당겨 날 그의 가슴 쪽으로 불러들였다. 내 허리를 감싸는 손길에 슬쩍 몸에 힘을 줬다.

서서히 움직이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니 주변은 보이지 않았다. 그를 망신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잔뜩 집중한 탓이었다.

“긴장하지 말고 제게 기대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더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아스테인의 리드에 따라 그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그 거리에 맞춰 내 심장도 조였다가 풀렸다가.

오늘 낮에 있었던 일들과 곧 있을지도 모르는 일만 없었어도 이 긴장을 즐겼을 것이다.

“힘들지 않으십니까?”

갑작스러운 운동 탓에 뺨에 살짝 땀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하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생각보다 즐거워서.”

그가 내 허리를 살짝 젖혔다. 그리고 내 얼굴 위로 겹쳐오는 아스테인의 상체.

아스테인의 얼굴에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입꼬리가 길게 올라간 미소가 내려앉았다.

그는 예쁜 미소의 이유를 내게 속삭여줬다.

“저도 프레이아 님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행복합니다.”

아아, 이건 진짜…….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몽땅 얼굴로 순식간에 쏠렸다.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다 보면 내 감정이 계속 외부로 드러날 것만 같아서.

겨우 한 곡이 끝났다.

하지만 우리의 춤은 이게 마지막은 아니었다.

* * *

“힘들지 않습니까?”

“조금요.”

“잠시 쉴까요?”

아스테인과 세 곡을 연달아 췄다. 분명 내 체력으로 버티기 힘들어야 하는데, 끝까지 그의 손을 놓지 못했다.

아니, 놓지 않았다.

겨우 플로어를 벗어나 쉬러 가려는데, 나를 찌르는 시선이 세 쌍 있었다.

푸토르 후작, 유테르안, 그리고 황제.

“오, 프레이아, 아니 예비 성녀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스테인이 허리에 감은 손을 풀자마자 황제가 내게 다가왔다. 가식적인 얼굴로.

어쨌든 호적상 황후의 동생인데도 그와 따로 만난 적이 없었다. 후작이 숨겨온 탓도 있지만, 고아는 고귀한 황족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아직은 그냥 푸토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이름도 아닌 성을 대는 내게 황제는 껄껄 웃었다.

“하여간 성녀들은 다 고지식하다니까. 우리는 가족이기도 한데, 정 없이 성을 부르라니.”

과도한 친밀감을 표현하는 그에게 나는 불편함을 감추고 웃어주었다.

“그럼 편하실 대로 하셔도 돼요.”

“허허허. 그래 프레이아. 네 호위이자 파트너가 내 동생이라고?”

“네, 단델리온 대공께서 곧 성기사로 임관하실 예정이라 그 연습 겸 저를 수행하기로 하셨어요.”

“그렇군…….”

황제는 아스테인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못마땅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수도 있었다. 증오로 똘똘 뭉친 눈이라는 게 더 적당했다.

황제의 시선은 아스테인에게서 잠시 벗어나 옆을 향했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차마 나와 아스테인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우리를 노려만 보는 사람들. 후작 부자를 바라보는 황제의 입꼬리가 한쪽만 비뚤어졌다.

“그래, 내가 오늘 황후의 임신을 축하하기 위해 불꽃놀이라는 것을 준비했다. 좋은 자리를 내어줄 테니 즐기도록.”

“불꽃놀이요?”

나는 처음 듣는 소리에 황제에게 반문했다. 회귀 전에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였다.

“동대륙에서 건너온 물건이라더군. 예쁜 별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다니 기대해.”

“별이 쏟아진다고요? 신성력이나 마법도 아닌데 그게 가능한가요?”

“약간의 마법은 들어갔다더군.”

“마법이라니요?”

마법은 부정한 것이었다. 좀 더 편한 생활을 위해 마법이 쓰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마법은 화려함을 더하기 위해 쓴 것이다. 신께서도 이렇게나 아름다운 발명품은 보지 못했을 테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든 것으로 밤하늘을 밝히다니.”

화약을 말하는 것이었다.

마력이나 신성력 없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신비한 검은 가루. 동대륙에서는 그것을 사람을 죽이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발전시키고 있었다.

심장이 불쾌함을 호소했다. 그 가루가 누굴 노리는지 명확했기에.

“사람을 죽이는 것이요? 신전에서는 그런 위험한 살상 무기의 수입을 원치 않을 겁니다.”

신의 권위를 빌려보기로 했다. 황실도 신전과의 대립은 원치 않을 것이다.

“허허허, 그런 걱정은 넣어 놓아도 된다. 이건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야. 동대륙에서 이걸 만든 자들은 액운을 쫓기 위해 사용한다고 하더군.”

황제는 물러섬이 없었다.

“큰 소리를 내면서 터지면 악령이 달아난다던가? 다 황후와 내 아이를 위한 것이지.”

나는 그 말에 눈을 찌푸렸다.

“위험한 것은 아니겠죠? 황후 폐하의 배 속에 있는 태아가 놀랄 수도 있어요. 임신 초기라면 늘 걷던 길도 다시 봐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이 계획을 무르게 하려 말을 끌었다.

최소한 그것을 어떤 식으로 이용해서 아스테인을 위협하려는지만 알아내도 좋을 텐데.

“놀라기야 하겠어? 그리고 놀란다 해도 예비 성녀가 이렇게 든든히 곁을 지키고 있으니 걱정할 것이 있나 싶군.”

내게 신성력이 없다는 사실을 차마 황제에게도 말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절대 황후도 아이도 구할 수 없었다.

황제는 나와 아스테인의 어깨를 번갈아 토닥이더니 홀의 중앙으로 갔다. 그는 가볍게 손뼉을 쳐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자, 다들 잘 즐기고 있는 거지? 마음껏 마시고 즐겨도 좋다. 대신 잠시 후의 축하 쇼는 잊지 말고.”

황제의 비릿한 웃음은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그대로 연회는 점점 무르익어갔다.

샴페인을 나누고, 춤을 추고, 대화를 나누고. 모두에게 즐거운 순간이었다.

이곳에서 행복한 분위기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

“프레이아 님?”

“대공님, 우리 당장 돌아가요. 폐하가 하는 말 들으셨죠?”

“너무 염려는 마십시오. 충분히 예상했고 대책은 다 있으니.”

“하지만 아버지만이 아니라 폐하까지 이러시는 거면 정말 철저하게 준비된 함정일 거예요.”

그는 내 걱정 어린 부탁에 조금 곤란한 얼굴을 했다. 계속 간절하게 부탁하면 내 말을 따라줄 것 같았다.

“대공님, 저를 위해 성기사가 되는 거라면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저는 대공님께서…….”

하지만 내 설득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서운한 얼굴이 눈에 들어와 버려서.

“절 믿지 못하시다니 조금 섭섭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다시 그의 얼굴을 봤을 때는 어느새 서운함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면 이젠 즐기십시오. 저를 믿는 만큼 즐겁게 보내십시오. 지금껏 자라면서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웃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아…….”

나는 그를 보고 한참이나 눈을 끔벅여야만 했다. 그의 마음이 너무 가슴 가득 나를 채웠기에.

한 번도 내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자세히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야 오래전부터 프레이아 님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요.”

“무슨 소리……?”

그때 내 앞으로 유테르안이 다가왔다. 나와 아스테인의 얼굴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그건 유테르안도 마찬가지였다. 손가락에 힘을 주고 꿈틀대는 것이 언제든지 아스테인의 멱살을 잡아채고 싶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죠, 유테르안?”

아스테인의 눈썹이 다시 비틀어졌다. 내가 그에게 말을 붙이는 것조차 싫어하는구나.

“작은 누님께 춤을 청하러 왔습니다.”

그는 아주 예의 바르고 단정한 사람처럼 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늘 이런 식이었다. 날 그렇게나 경멸하고 미워하면서 밖에서는 단 하나뿐인 다정한 남동생인 것처럼 굴었다.

“미안해요. 체력이 모자라 더 이상의 춤은 불가능할 것 같군요.”

“……누님. 대공과는 한참이나 춤을 췄으면서 동생의 춤 신청을 거절하면 다들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요? 아버지가 특히 화내실 것 같은데?”

후작을 이용해 내게 협박을 해대는 것도 여전하구나.

이제 여기에는 후작 때문에 덜덜 떨고 도망치던 여자아이가 없는데.

“성녀가 될 나와 성녀의 충직한 성기사가 될 단델리온 대공님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푸토르 가의 사람밖에 없지 않나요?”

나를 아스테인의 곁에서 떼어놓으려는 이유야 뻔한 것 아닐까? 그럴수록 나는 아스테인의 곁에 단단히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작정이었다.

오늘 애초에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그것이었으니.

“누님.”

유테르안의 검은 눈 주변이 조금 붉어졌다. 흥분한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람들이 많은 장소가 아니었다면 벌써 내게 소리를 질렀겠지.

“다신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사람처럼 구시는군요?”

명백한 협박. 이젠 두렵지도 않았다.

그래봤자 빛도 들지 않는 다락방에 가두고 기도나 하라며 며칠 감금하는 것이 끝이다. 아니면 뺨을 몇 번 저들의 손에 내어주면 되고.

그게 무서웠다면 회귀하자마자 차라리 다시 죽음을 택했으리라.

“이봐, 푸토르 소후작.”

아스테인의 서늘한 목소리가 나와 유테르안의 사이를 갈랐다.

“성기사가 될 자는 성녀의 집안일에 참견하지 말지?”

아직 작위를 버리지도 않은 아스테인을 도발하는 유테르안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쏠려버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큰 싸움이 날 것 같았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유테르안이 망신을 당하는 일은 상관없었다.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아니었다.

“대공님, 제 동생의 무례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내가 누님의 동생인 것은 잊지 않으셨군요? 성기사가 될 자에게 정신이 팔려 잊으신 줄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비꼬고 도발하는 유테르안의 행동 때문에 아스테인의 주먹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프레이아, 오늘 연회 어때? 재밌어?”

그때 황후의 목소리가 맑고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우리 곁에 몰려든 사람들이 길을 터주었다.

황후는 조금 전, 서로 불편했던 상황은 잊은 듯이 굴었다. 내게 남몰래 윙크까지 하며.

“아니, 유테르안. 너는 내게 축하하는 것도 잊고 여기서 뭐 하는 거니? 오늘 관심받아야 하는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황후의 말 한마디에 유테르안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도 황후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누님도 참, 농담도 잘하십니다. 제가 누님을 얼마나 걱정하고 아끼는지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작은 누님께 축복을 부탁드리러 온 참입니다.”

뱀이 혀를 내두르듯 자연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유테르안의 그런 모습이 너무 역겨워서 속을 비우고 싶었다.

“그래? 그럼 이제 프레이아는 내가 데리고 다닐게.”

황후는 명쾌하고도 단호하게 유테르안에게 명했다. 그리고 아스테인에게 도도하게 명했다.

“단델리온 대공, 그대의 오늘 역할이 프레이아의 호위이니 날 따르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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