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그가 지키고 싶었던 사람
나와 아스테인은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황후를 쳐다봤다.
도대체 어떤 면을 보고 의심하는 걸까?
연회장 옆 조금은 어두운 건물, 급히 씻고 나온 아스테인의 조금은 흐트러진 모습.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멋들어지게 올렸던 머리는 핏기를 씻어냈는지 젖어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렸고.
심지어 그의 셔츠는 마지막 단추가 덜 채워져 있었고, 푸른 망토는 아스테인의 손에 매달려 있었다.
“폐하, 무슨 소리십니까? 오는 길에 습격이 있었습니다.”
아스테인은 차분하게 자신의 꼴이 이렇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 소리에 날 위아래로 훑던 카렌시아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스테인 때문에 긴장한 탓에 오는 내내 마차에서 곧은 자세를 유지했었다. 그 덕에 내 드레스는 구김 하나 생기지 않았다. 머리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아무리 꼬인 눈을 가진 사람이 날 봐도 의심할 거리가 없었다. 그것을 황후도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내가 놀라서 착각했네요. 대공도 프레이아도 그럴 사람들이 아닌데. 임신 중이라 예민해져서 그런 거니 너그럽게 봐줘요.”
아스테인은 황후의 사과 같지 않은 사과를 받아들이려는지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예민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모독하다니요. 그건 황후가 해서는 안 될 일이지요. 배 속의 아이가 듣고 무슨 생각을 할까요? 하물며 나는 곧 성녀가 될 사람입니다. 그런 모욕이 나와 신전, 그리고 후작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시나요?”
황후의 눈이 커졌다.
늘 입을 다물고 살았다.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반박하지 않았다. 몸과 마음에 어떤 상처가 나더라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랬던 나의 반항에 의아해할 만했다.
“신의 대리인인 나, 황제 폐하와 피를 나눈 대공, 우리가 받은 모욕을 제대로 사과하세요. 아니면 성녀님께 말씀 올리고 신전의 이름으로 정식 항의하겠어요.”
황후의 눈이 더 커졌다.
늘 주눅 들어 조용했던 소녀의 외침은 황후의 반성을 불러왔다.
“미안해. 내가 성급했어.”
황후는 내게 사과한 뒤 아스테인에게 돌아섰다.
“죄송해요, 대공.”
“…….”
그는 잠시 나를 보고 말을 삼켰다.
조금은 서운해졌다. 마음을 품었던 여인이 내게 혼나고 사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괴로워 보여서.
“제게는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역시나 괜한 짓을 했나 보다.
아스테인이 날 보는 시선이 바뀔까 겁났다.
지금까지 다정했던 내 기사님이 내게 실망해 차가워질까 두려웠다.
“하지만 다시는 프레이아 님을 모욕하거나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분은 그런 모욕을 받을 분이 아닙니다.”
그의 말에 놀라 고개가 아스테인 쪽으로 돌아갔다.
“오늘 푸토르 후작가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성녀님을 막 대하는 태도에 화가 나더군요. 황후 폐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습격까지 당한 분께 걱정의 말도 없으시고 실망했습니다.”
그의 말에 황후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도 후작가의 만행을 애써 외면했을 뿐, 그것이 잘못됐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테니.
“제 앞에서도 그러는데 제가 없을 때 어떻게 했을지 뻔해서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대공, 오늘 무엇을 보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모두 오해랍니다. 우리가 프레이아를 얼마나 열심히 보호해 왔는데요.”
“보호요?”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그에 비해 내 마음은 끝없이 말랑해졌다.
그가 황후 앞에서 내 편을 들어주는 것이 이렇게나 행복한 일인지 몰랐다.
황후에게 요구한 사과가 민망하게도 아스테인을 향한 마음이 짙어졌다. 얼굴이 화르륵 타오를 만큼.
“제가 아는 보호라는 의미와 다르게 아시나 봅니다. 저는 프레이아 님의 예비 성기사로서 오늘의 일들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신전에 고하고 당장 프레이아 님을 후작가에서 빼내겠습니다.”
아스테인은 그 말을 남기고 황후에게서 돌아섰다.
“가시지요. 다른 분들이 기다리시겠습니다.”
* * *
연회장으로 가는 마차 안. 짧은 거리인데도 침묵의 시간은 길었다.
그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아스테인에게 말을 꺼냈다.
“대공님. 왜 그러셨어요?”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내 부름에 답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건 전부 다, 내 탓이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황후 폐하와 싸우게 됐네요.”
마차로 돌아올 때 나는 힐끗 황후를 돌아봤었다.
황후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서, 민망해하고 수치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솔직히 기뻤다.
아스테인이 황후가 아닌 나를 옹호해줬다는 것이 너무나도 벅찼었다.
참, 옹졸하게도.
그런 내 심정도 모르고 아스테인은 걷는 내내 앞만 봤다. 황후에게는 얼굴 한 번 돌리지 않고.
“그분을 지켜주고 싶어서 성기사가 되려는 거라고 들었는데…….”
그것이 후회될지도 모르겠다. 그는 마음에 둔 여인에게 망신을 줬고, 매몰차게 굴며 다른 여인의 편을 들었다.
그것이 얼마나 속상할까?
“저 때문에 연모하는 분께…….”
내 말이 끝나기도 전, 갑자기 그가 얼굴을 들었다. 그의 눈은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커다랗게 변해 있었다.
마치 올빼미의 눈이라도 된 것처럼.
“무슨 소리……입니까……?”
조금은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황후 폐하와 성녀님께 들었어요. 두 분이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요. 황제 폐하께서 두 분 사이를 오해하셔서 성기사가 되시는 거라고…….”
“네? 그 여자가 그랬습니까? 제가 좋아해서 지켜주려고 했다고요?”
내 귀와 눈이 잘못된 것 같다. 그가 황후더러 ‘그 여자’라고 한 게 맞는 걸까?
평소 정중한 그의 태도를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늘 반듯한 언어만 사용했다. 평소의 예의 바른 모습처럼.
“어이가 없군요.”
그의 대답에 그날 이후로 박혀 있던 작은 가시가 녹아 사라졌다.
“그렇구나…… 다행이다.”
나도 모르게 튀어 나간 속마음에 얼굴이 붉게 물들어 버렸다. 그건 나만이 아니었다. 아스테인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그, 그게, 상대가 황후 폐하라 곤란하실까 봐…….”
다급한 변명에 아스테인의 얼굴이 다시 진지해졌다.
살짝 화난 얼굴.
“저는 겉과 속이 다른 이들과 그들을 두둔하는 이가 제일 싫습니다.”
그 분노의 대상이 누군지 알기에 내 마음이 또 따스하게 데워졌다.
“그런데 대공님. 이렇게 날을 그대로 세우셔도 될까요? 지금도 후작가에서 대공님을 죽이려 하는데…….”
“모른 척하고 지나가기에는 후작가 사람들의 만행이 도가 지나쳤습니다.”
그는 이제 멍 자국이 흐려져 티가 나지 않는 내 목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는지 힘줄이 솟아 있었다. 그게 또 고맙고 고마웠다.
그에게 갚아야 할 빚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물론 꼬리를 잡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꼬리요?”
“선대 황제께서 저희 형제들에게 내린 유지가 있습니다.”
처음 듣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창밖을 조금은 그리운 눈으로 내다봤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황궁,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추억이 가득했을 공간.
“형제끼리는 절대 살육을 하지 말 것.”
“하지만 지금의 폐하는……!”
“네. 후작가를 조종해 절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후작가와의 대립은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걸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니, 마음에 들지 않아요.”
아스테인은 잔잔하게 웃어주었다. 하지만 곧 누구보다 진지하게 얼굴을 굳혔다.
“덤으로 이번 기회에 프레이아 님을 확실하게 후작가에서 빼 오고 싶습니다. 혼자 힘으로 나오기에는 힘들어 보입니다.”
“그건…… 그러다 후작가와 원수를 지게 될 거예요! 저 혼자 할 수…….”
눈에 힘을 주고 나만 쳐다보는 아스테인의 시선에 말문이 막혔다. 당장이라도 날 구원해 줄 것 같아서.
“소후작은 절대 프레이아 님을 놓아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위험한데 제 일에까지 얽혔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프레이아 님과의 하루를 위해서 절대 다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와의 하루. 그 말에 심장이 콩콩 뛰면서 나를 부추겼다.
“그, 대공님께서 지키고 싶다던 사람이 혹시요…….”
“네, 프레이아 님입니다.”
그의 달콤한 대답에 얼굴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마차 안의 공기는 이상하게도 가라앉았고.
이젠 아스테인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괜히 마차 밖만 쳐다봤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두 글자를 내뱉었다.
“왜요?”
그의 대답을 듣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아스테인은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며 답을 미뤘다.
“누구보다 존경받는 성녀님이 되실 거라 믿으니까요.”
목소리가 평소보다 묵직하게 들렸다. 눈동자의 색은 조금 더 짙어졌고.
“그렇군요. 역시 성심이 깊으신 분이시네요.”
조금 설레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다.
마지막에 남은 건 죄책감이었다.
* * *
연회장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황제 부부는 아직이었다.
덕분에 황제 부부 대신 내게로 모인 호기심 가득한 눈빛들. 그게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때 사람들이 내 앞에 몰려들었다.
“어머, 예비 성녀님께서 사교계에 나타나시다니, 정말 영광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나는 최대한 자애로움을 가장해서 웃어주었다.
회귀 전에 몇 번 정도는 마주쳐 이름을 알 만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예전에도 내게 관심이 많았다.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성녀가 될 내게 바라는 것이 있거나.
“제가 다음 달에 광산을 사기로 했는데 축복을 내려주실 수 있습니까?”
“저희 아이가 가주가 될 수 있게 신의 가호를 내려주실 수 있나요?”
그게 아니면 성녀가 될 내 행동에 흠이 있지는 않나 지켜보고 트집을 잡으려거나.
“예비 성녀님께서 왜 대공님과 함께 오셨을까요? 당연히 푸토르 가의 후계자에게 에스코트를 받으실 줄 알았는데요.”
“대공님과 특별한 관계인가 봐요.”
“어머, 폐하께서는…….”
저절로 얼굴이 굳어만 갔다. 어느 쪽도 싫었다. 내게 성녀로서의 삶을 강요하는 것만 같아서.
회귀 전에도 충분히 겪었던 일인데, 어째서 이렇게나 익숙해지지 않을까?
이것은 본능적인 거부일지도 모르겠다.
“예비 성녀님께서 공식적인 자리는 처음이라 부담스러워하시니 너무 몰려들지는 말도록.”
근엄한 목소리가 내 앞에서 넓게 퍼졌다. 사람들로부터 나를 분리한 아스테인의 등이 유달리 듬직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불만스러운 사람들의 표정.
“아니, 우리가 성녀님을 괴롭히는 것도 아닌데…….”
“왜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프레이아 님이 이렇게나 뒷걸음질을 쳤는데?”
아스테인의 말에 다들 입을 꾹 다물고 반박하지 못했다. 그건 그가 지금 대공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우직하고 원리원칙을 따지던 성기사 아스테인. 그는 다른 성기사보다 귀족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다.
그 이유를 이제야 눈치챘다. 그건 아스테인이 그들을 누르던 대공에서 작위를 버리고 그들보다 아래인 기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비난의 화살이 미래에 꽂히게 할 수는 없었다.
“다들 뭐가 그리도 불만인가요?”
매번 보호만 받아서는 안 됐다. 나는 아스테인을 지키러 돌아온 거니까.
“단델리온 대공께서는 성녀님의 분부로 날 호위하는 겁니다.”
아스테인의 옆으로 가면서 그의 푸른 망토를 툭 건드렸다. 연미복 위에 갖춘 망토는 그가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을 알렸다.
“그리고 저는 예비 성녀로서 황후 폐하의 회임을 축하하고 폐하의 아이를 축복하러 온 것이지, 여러분 개개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러 온 것이 아니에요.”
예전의 나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 했다.
가짜이기에 더 자애로운 척해야 하고, 미움받지 않으려 애썼으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내가 가짜라는 것이 밝혀질 텐데, 굳이 성녀인 척하며 억누르고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나중에 정식으로 내가 성녀가 된 후, 그때 신전으로 찾아오세요. 지금은 해줄 수 없으니.”
내 서늘한 말투에 사람들은 불만이 있으면서도 참았다. 아무래도 황제에게 미움받는 대공보다 예비 성녀인 내가 더 무서운 모양이었다.
이러다 내 정체가 밝혀지면 누구보다도 먼저 날 비난하겠지만.
“잘하셨습니다. 당당한 프레이아 님의 모습이 보기 좋군요.”
사람들이 멀어진 뒤 아스테인이 흐뭇한 얼굴을 했다. 내 머리에 손이라도 얹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때 대공님이 그러셨잖아요. 성녀도 인간이니 무조건 참을 필요는 없다고.”
그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열렬한 내 지지자임을 보여주려는 듯.
아스테인의 도움으로 겨우 여유롭게 연회장의 분위기를 익힐 즈음.
“황제 폐하, 황후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들이 도착했다.
황제와 함께 나타난 황후는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황후의 배에 시선을 고정했다. 밝게 웃는 그녀의 미소를 보자 이상하게도 속이 뒤틀렸다. 시기심 때문은 아니었다.
“평범한 여인의 삶은 어떤 걸까……?”
“혹시 황후 폐하가 부러우십니까?”
“아니요. 황후 폐하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태어날 아이가요.
나는 차마 뒷말을 전하지 못했다.
“자, 오늘은 황후의 회임을 축하하러 다들 이 자리에 모였다. 마음껏 즐기고 웃으며 내 아이에게 좋은 에너지를 전하도록.”
황제의 축사와 함께 조금 잔잔하고 느린 왈츠 선율이 흘러나왔다. 황제는 임신한 황후를 천천히 조심스레 댄스 홀로 데려갔다.
발을 맞춰 움직이는 부부. 참 보기 좋고 부러운 모습이었다.
나는 평생 꿈꿔 보지 못할 광경.
“대공님? 역시 우리는 황후 폐하께 축복만 드리고 돌아…….”
그에게 몸을 돌리며 말을 꺼내던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동화 속 왕자님이라도 된 것처럼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굽혔으니.
“프레이아 님의 첫 춤을 미래의 성기사인 제게 함께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마치 이곳에는 나와 그, 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로지 나를 위해 기다려온 기사처럼.
그렇게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