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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11화 (11/101)

11화. 잘못된 오해

“아닙니다. 프레이아 님과 함께 갈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폐하께서 프레이아 님 눈치를 보느라 제게 쉽게 해코지도 못 하실 테고.”

이번에는 내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제국의 수장이란 자가 그렇게 속 좁게 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프레이아 님도 후작가를 벗어나 있고 싶었던 것 아닙니까? 밖에 나오신 김에 즐기십시오.”

대답 없이 잠시 그를 멀뚱히 쳐다봤다.

그에게 오늘 내 치부를 온전하게 드러냈다. 이미 눈치를 챘기에 이렇게 나서 준 것이겠지?

여전히 나는 그에게 받기만 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오늘 후작은 아스테인을 죽이려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회귀한 날 아스테인을 찾아가지 말 걸 그랬다.

그냥 내가 가짜라는 것을 만천하에 밝히고 세상에서 사라질 것을.

“참, 그때 찾아 달라던 분 말입니다.”

엘라네르의 이야기에 나는 감상을 집어넣었다.

“흔적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존재 자체가 지워진 느낌이 들 정도더군요.”

“얼마 전 빈민가에서 그 아이를 봤어요. 분명 그곳에 살고 있는데…….”

“흠, 그렇다면 누군가가 일부러 숨기고 있는 것일까요?”

이러다가 반년 안에 엘라네르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지? 차라리 내가 가짜라는 것을 온 천하에 밝히는 편이 나을까?

“프레이아 님께서 마음 편히 후작가를 나오기 위해서 그녀가 필요한 것 맞습니까?”

그가 진지하게 물어왔다.

어디까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좋을까? 회귀 전과 다름없이 그는 계속 나를 이유 없이 믿어주고 있었다.

그러니 전부 말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생각이 들었다.

“네, 꼭 있어야 해요. 그래야 제가 푸토르 후작가와 이별할 수 있어요. 저는…….”

그때 마차가 급격히 흔들렸다. 밖에서 소란이 일어났는지 큰 소리가 났다.

“습격이다!”

“마차를 지켜라!”

습격? 나는 말문을 잃고 밖을 쳐다보았다. 아스테인의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검을 뽑아 들고 일제히 마차를 에워쌌다.

후작의 짓일까? 그렇다면 이건 엘라네르가 사라진 이유와 관계가 있을지도 몰랐다.

진짜 성녀가 있으면 가짜는 쓸모를 다했을 테니까.

“프레이아 님,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아스테인이 다급하게 내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의 검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심장도 조금씩 가쁘게 뛰어올랐다. 그가 검을 뽑아 드는 순간, 그때의 기억이 순식간에 떠오를 것이다. 그날의 끔찍했던 환영들이.

“위, 위험한 거…….”

말을 잇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손끝이 하얗게 질리고 피가 통하질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손끝에 따스한 기운이 번졌다.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약속했지 않습니까?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겠다고. 프레이아 님과의 하루를 제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데요?”

그가 잡아준 손에서부터 전해진 온기는 근거 없는 믿음을 줬다.

이번에는 절대 그때의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아스테인을 믿자.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절대로 다치면 안 돼요. 절 위해서라도…….”

심장까지 전해진 온기는 잠시 내 곁을 떠났다. 그가 뛰쳐나가자 나는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도저히 밖을 내다볼 용기는 없었다.

신성력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간절한 기도뿐이었다. 하지만 요란한 소리 때문에 도저히 기도에 집중할 수 없었다.

마차 밖에서 들리는 검이 부딪히는 마찰음,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 신음들.

그 사이로 온전하게 들리는 것은 아스테인의 목소리였다.

“집중해, 오합지졸이다. 대공과 예비 성녀님의 행차인지도 모르고 덤비는 애송이들이다!”

암살자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조금씩 소리는 잦아들었다. 주변이 조용해지고 나자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아스테인!”

그의 얼굴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심장이 멎을 뻔했다.

아스테인은 내 놀란 마음도 모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연스럽게 휘어지는 눈에는 아픔이 없었다.

“이름을 불러주시다니, 영광이군요.”

“다친 거 아니죠?”

그에게 질문하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그의 수하가 아스테인에게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아스테인은 그것으로 구석구석 피를 닦았다.

차분히 살펴보니 다행히 상처는 없었다.

내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깊게 숨을 몰아쉬자 그가 날 쳐다봤다.

“전혀 다치지 않았습니다. 걸린 것이 있는데 어찌 다치겠습니까?”

장난기 가득한 그의 말투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누구였어요?”

“그냥 강도 떼 같습니다만, 조금 의외네요. 이렇게나 기사들이 많이 몰려 있는데 덤비는 미친…… 아니 겁을 상실한 녀석들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핏물을 다 닦아내고 나서 코를 찡그렸다.

“피 냄새가 너무 나는군요. 괴로우실 테니 저는 말을 타겠습니다.”

안 그래도 피비린내에 저절로 미간이 모이려던 참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웠다.

하지만…….

“곁에 계셔주시면 안 될까요? 불안해서요.”

내 부탁에 아스테인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게 조금 민망했다. 괜히 속마음을 드러낸 것일까?

“그게, 대공님을 밖으로 끌어내려고 한 짓일지도 모르잖아요. 저랑 마차 안에 있으면 아버지가 저 때문에 화약으로 공격하지 못할 거예요.”

다급히 둘러댄 말이었다.

그래도 아스테인을 설득한 것 같았다. 그가 잠시 고민을 했으니.

그는 자신의 수하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이것저것 의논하고 지시를 내렸다.

한참 뒤 그가 마차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평소에 나던 라일락 향 대신 피비린내와 함께.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만 참아주십시오.”

그는 내게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루크데린에 들러서 씻고 옷을 갈아입을까 생각을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프레이아 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와 대공님의 격리를 원한다?”

“네. 후작은 절 노리려고 했겠지만, 의뢰를 엉뚱한 곳에 했더군요. 어리석게도.”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사나운 얼굴이었다. 아스테인은 절대 이런 표정을 내 앞에서 짓지 않았다.

이런 것을 살기라고 부르는 것일까?

“어떻게 된 건가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반신전파, 인테르라는 자들이 프레이아 님을 노리고 있습니다.”

“네? 그런 곳이 지금 있다고요?”

나는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기억 속에 그런 존재를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신전의 이면을 모르는 제국민들은 여신과 성녀를 사랑했으니까.

“네. 신은 허상이며 신에게 의지하는 삶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설파한다고 하더군요.”

암살 의뢰를 했던 날, 가슴에 노란 카네이션을 꽂고 돌아왔던 후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이 후작에게 경멸의 의미를 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후작에게 받은 거액의 착수금 일부를 다른 곳에 쓸 생각이라더군요. 저를 죽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프레이아 님을 빼돌리려고 한답니다.”

“날 납치해서 죽이기라도 하려는 걸까요? 신전을 무너트리기에 얼핏 효과적으로 보이겠네요.”

차라리 이 기회에 내가 사라져 버린다면, 눈앞의 남자가 나로 인해 죽을 일은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아스테인은 고개를 저었다.

“죽이는 것보다 더한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아스테인의 눈빛에 다시 살의가 어렸다. 무슨 뜻인지 이해한 내 눈이 흔들렸다.

조금 어이없기도 했다. 진짜인 엘라네르가 아닌 내가 왜 이런 위기까지 겪어야 할까?

“제가 곁에 있을 테니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아스테인의 눈은 누구보다도 믿음직하고 따스했다.

“그건 아니에요. 단지…….”

“단지?”

“조금은 억울해서요.”

너무나도 분했다. 신이 원망스러웠다.

내게 이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지난 삶에서 가짜 성녀가 된 죗값은 이미 충분히 치렀다.

그런데도 되돌아온 삶에서조차 날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다니……. 신은 공평한 분이 아니셨다.

“프레이아 님은 제가 지켜낼 테니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를 멀뚱히 쳐다만 보았다. 어떤 감사 인사도 줄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애쓰는데도 나를 따라오는 액운에 아스테인을 휘말리게 하다니.

심장이 점점 내 목을 옥죄었다. 죄책감 때문에 숨을 쉬기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마음을 숨겼다.

“네. 믿을게요.”

오늘 하루만은 함께하고 싶었으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파트너로 함께하는 연회였다. 오늘만큼은 아스테인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 곁에서 절 지켜주세요.”

“물론입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늘 저 때문에 곤란한 일만 겪으시는 것 같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성기사가 되기 위해서 겪는 과정인 것을요.”

그는 손사래까지 쳤다. 하지만 내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러자 아스테인이 잠시 날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빈민가에서 하신 일을 전해 들었습니다. 프레이아 님은 역대 성녀님들 중에서 가장 자애로운 분 같습니다.”

“그들에게 모질게 굴었는걸요?”

“아닙니다.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그것이 참된 성녀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프레이아 님을 존경합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심장 깊숙한 곳 어딘가가 살짝 언 것처럼 시렸다.

“그렇군요……. 고마워요.”

그가 내게 친절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 * *

황궁의 연회장에서 떨어진 한적한 건물 앞.

“여기는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의 사용인들이 대기하는 공간이랍니다.”

조금 허름한 건물 주변에는 각 가문의 마차가 보였다. 아직 푸토르가의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기서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잠시 혼자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아스테인이 마차에서 먼저 내리려고 했다.

“그게…….”

황궁 입구에서 모두 커다란 검을 내어줬기에 비무장 상태였다. 그도 그의 기사들도.

그것이 조금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잡으려 했을 만큼.

“제 수하들은 믿을 만한 자들입니다. 검이 없어도 프레이아 님을 지킬 겁니다.”

그가 내 손을 내려다보며 따스한 눈빛을 보내줬다. 너무 민망하고 당황스러워 바로 손을 뒤로 뺐다.

“대공님의 수하들이니 배신자만 없다면 안전하겠죠.”

얼이 빠진 것인지 입에서는 아무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얼굴은 그대로 달아올랐다.

조금은 엉뚱해 보였는지 아스테인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저는 거짓말을 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작은 거짓말이라도 가차 없이 내치는 것을 아는 녀석들이니 그런 걱정은 거두십시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안심이 되기도 하고, 조금 찔리기도 했다.

지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회귀 전에는 했기에…….

아스테인은 내가 놓아주자 수하에게 깨끗한 새 옷을 받아들고 사라졌다.

한참이나 그를 기다리다 지겨워진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잠시 근처를 거닐어도 될까요?”

아스테인의 기사들은 내게 너무나도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입니다.”

“저희가 따르겠습니다. 단지 주군과 너무 멀리만 떨어지지 않으면 될 것 같습니다.”

아스테인의 기사들은 한 걸음 떨어져서 뒤를 따라왔다.

혼자 상념에 빠지다 보니, 계속 아스테인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스스로 성녀가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아스테인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그에게만큼은 경멸을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생겼던 용기는 황궁으로 오는 길에 사그라지고 말았다.

“조금 멀어지셨습니다.”

“미안해요. 이만 돌아갈까요?”

몸을 돌려 다시 건물 쪽으로 가려는 순간, 내 귓가에 황후의 맑고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프레이아. 왔어?”

나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잘 지내셨나요? 황후 폐하?”

“그럼. 당연하지.”

“왜 연회장에 안 계시고 여기 계세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스테인과도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을 모르는 카렌시아의 얼굴은 그저 반가움으로 가득했다.

“폐하께서 누군가를 만난다면서 사라져버렸거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지루해서 잠시 산책 나왔어.”

황제가 만난다는 이는 당연히 후작이겠지.

“넌 왜 혼자야? 유테르안은?”

“그는 아버지와 올 거예요.”

“어머, 왜? 너랑 파트너를 하겠다고 아카데미에 휴가를 내고 온다고 들었는데?”

황후도 알고 있었구나.

“내가 네게 파트너가 없다고 부탁하니까 좋다며 수락했단 말이야.”

나는 얼굴을 굳혔다. 정말로 쓸데없는 호의였다.

“다른 분이 제 파트너가 되어주셨어요.”

“뭐? 도대체 누군데? 네가 아는 남자가 있어?”

카렌시아가 의아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그녀는 내 뒤에 서 있는 기사들을 봤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연회를 즐길 옷차림이 아니었다.

그러자 주변을 살핀 카렌시아의 눈이 커졌다가 가늘어졌다.

“설마, 단델리온 대공? 그가 네 파트너가 되어준다고 했다고?”

조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

“네. 성녀님의 명으로 절 호위하려고 따라오셨어요.”

“무슨 짓이야? 폐하가 그를 얼마나 증오하는데 그의 개인적인 호위를 받는다는 거야? 후작가가 오해를 받으면 어쩌려고? 게다가 아직 성기사도 아닌 사람인데 네가 개인적인 호위로 써도 되는 거야?”

참,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황후에게는 자랑하고 싶었다. 그가 나를 지키기 위해 따라왔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자랑은 내가 할 필요가 없었다.

“저는 예비 성기사니까요.”

아스테인의 등장에 황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믿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황궁에서 이 무슨 낯뜨거운 짓이야? 성녀답지 못하게!”

말도 안 되는 오해가 황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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