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파트너가 되어주세요. (2)
피식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유테르안에게서 흘러나왔다.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무시하고 유테르안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읏!”
그때 내 팔목이 강하게 붙들렸다. 평소라면 아스테인의 은실 팔찌가 차여 있을 왼팔이었다.
“어딜 가려고? 다시 들어가.”
“뭐 하는 짓이에요?”
“들어가서 내가 준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이거 놔요.”
“싫은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는 그를 뿌리치려 힘껏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유테르안의 손아귀 힘이 더 강해졌다.
찌르르 손목에 아픔이 전해졌다. 멍이 들지도 몰랐다.
그때 뒤에서 셀레미온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팔목에 멍이 들겠어요. 살살 다뤄주세요. 도련님.”
“넌 뭐야? 미래의 가주에게 반기를 드는 사용인이라……. 이 집에 남을 이유가 있을까?”
나로 부족해서 셀레미온에게까지 날을 세우는 유테르안의 모습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어째서 후작도, 그 아들도 이렇게나 똑같을까?
회귀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까지 부자지간이 똑 닮았다.
“예비 성녀인 내 수발을 드는 아이에게 손댈 생각 말아요.”
그때처럼 내 소중한 것들을 뺏기지는 않아야 했다. 그런 아픔은 그때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러니 내가 강해져야 했다.
“이봐, 프레이아. 네가 잊었나 본데, 성녀랑 푸토르 후작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네가 성녀가 되고 싶으면 내게 얼마나 잘 보여야 하는지 잊었어?”
성녀 따위 필요 없었다. 당장에라도 가짜임을 세상에 밝히고 이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건 내 쪽이었다.
내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엘라네르를 찾지 못해서만은 아니었다.
아스테인을 위협하는 후작의 음모를 지켜보고 막아야 하니까, 내가 바로 떠났을 때 내 소중한 것들을 후작이 망가트릴지 모르니까 남아 있는 것이었다.
소중한 것을 지킬 힘을 키울 때까지만, 참아 줄 작정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시면 참으로 좋아하시겠네요. 예비 성녀의 팔목에 멍이 들어 있다면 누가 의심받을까요?”
그 소리에 겨우 유테르안의 손에 힘이 빠졌다.
아픈 왼쪽 손목을 오른손으로 감쌌다. 손목에는 손자국이 붉게 남았다.
고맙게도 셀레미온이 눈치 빠르게 다른 하녀들에게 명해서 연고를 가져다줬다.
나는 그것으로 손목을 달래며 유테르안을 힘껏 노려봤다.
“나는 같이 갈 파트너가 있으니 이만 볼일 다 봤으면 각자 갈 길 가죠?”
유테르안은 약을 바르고 있는 내 손을 얌전히 쳐다봤다.
그 시선조차 싫어서 빠르게 약을 발랐다.
“약으로 되겠어요? 부으면 어째요?”
“괜찮아. 약으로 충분해.”
다행히 멍이 들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약을 다 바른 뒤,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유테르안을 다시 지나쳐 걸어갔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날 건드리진 않았다.
대신 그는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참 많이 변했네?”
일일이 대꾸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그를 무시하고 묵묵히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게다가 아버지가 그리도 막았는데 네게 파트너가 생겼다니……. 이 옷을 선물한 놈인가? 성녀가 될 여자가 아무 남자나 만나다니, 역시 천박하네.”
[너, 저 성기사를 마음에 품기라도 한 거야? 역시 가짜 성녀라 천박하게 남자랑 놀아나기나 하는구나? 더러운 것, 푸토르 가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랬지?]
그의 말에서 과거가 겹쳐졌다.
유테르안이 엘라네르를 적극적으로 찾은 이유도 그것이었다.
나를 향한 경멸과 멸시.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날 예비 성녀로 만든 당신 아버지와 당신 가문도 천박하긴 마찬가지죠.”
이번에 내가 한 도발은 도가 지나쳤던 모양이었다. 유테르안의 손이 높이 올라갔으니.
이대로 뺨을 맞으면 입술이 터져서 연회는 못 가겠지?
오늘만큼은 아스테인의 곁에서 그를 지키려고 했는데……. 그의 파트너가 한 번은 되어보고 싶었다. 그 꿈은 이루지 못할 것 같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턱이 아플 만큼 이를 악물었다. 혹시라도 이러면 상처가 덜 나지 않을까 해서.
“그만두시오.”
그때 내 코에 향긋한 라일락 향이 퍼졌다. 잔잔한 호수를 울리는 듯한 낮고 안정적인 목소리가 날 안심시켜줬다.
눈을 뜨자 역시나 그가 있었다. 유테르안의 거친 팔을 붙잡고, 무시무시한 얼굴로.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누구 허락을 받고 들어온 거야?”
“당신이라……. 내 아무리 황제 폐하께 미움받는다고 해도 아직 작위도 물려받지 못한 애송이가 황실의 피를 이어받은 내게 할 호칭인지 모르겠군.”
아스테인이 가문의 후계자를 붙든 탓일까? 저택에 소란이 일어났다.
아니, 초대받지 못한 손님 때문에 소란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일지도. 집사와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이 뒤늦게 달려와 계단 아래에 몰려들었다.
“대공 각하, 아무리 각하라 하실지라도 후작가에 이리 함부로 들어오실 수는 없습니다.”
집사가 항의했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그것을 무시하고 유테르안을 노려봤다.
“예비 성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쪽이 무슨 자격으로?”
아스테인과 유테르안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무슨 소란이야?”
난리 통에 후작까지 끼어들었다. 후작은 제 아들이 아스테인의 손에 붙들려 있는 모습에 두 눈을 부릅뜨고 달려왔다.
“대공,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스테인은 후작이 달려오고서야 유테르안을 잡았던 손을 풀었다.
유테르안은 나와 아스테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분한 모양이었다.
“아버지, 천박한 누님이 저와 연회에 함께 가지 않겠답니다. 요즘 신전에 들락거리더니 남자를 하나 꾀어냈나 봅니다?”
유테르안의 말에 후작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그는 내게 분노의 화살을 돌렸다.
“성녀가 오해받을 짓을 해서 되느냐? 부끄럽게 이 무슨 소리야? 연회에는 유테르안과도 갈 필요 없겠구나. 당장 방으로 돌아가!”
그러자 아스테인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흰색 연미복에 푸른 망토를 입고 왔다. 나는 그것의 의미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예비 성녀님께 그 가족들이 모욕적인 언사를 하다니, 어이가 없군.”
“대공, 그 무슨!”
“뭐, 푸토르 소후작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아스테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약간의 조소를 담은 그는 두 남자에게 양피지를 들이밀었다.
그것에는 신전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쪽이랑 프레이아 님이 연회에 갈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봉인을 뜯어낸 아버지의 얼굴에 불쾌함이 감돌았다.
유테르안이 그것을 받아 소리 내어 내용을 읽었다.
“예비 성녀, 프레이아 푸토르의 호위를 예비 성기사 아스테인 단델리온에게 맡기겠다. 오늘 연회에 파트너로 참석해 성녀를 보호할 것. 이걸 고모님이 쓰셨다고?”
두 남자 모두 눈이 바들바들 떨렸다. 성녀님의 친서였기에 더 배신감을 느꼈으리라.
아스테인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여유롭게 지켜보며 비웃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기다리던 그는 당당한 걸음으로 내 앞에 다가왔다.
“프레이아 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커다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그것에 내 손을 겹치고 싶었지만, 푸토르 부자의 눈치가 보여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정말로 손을 내밀어도 될까?
“기다려, 누님!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명령서야? 신전이, 성녀님이 감히 우리 가문의 의사에 반하다니 말이 돼?”
유테르안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반신전파들이 예비 성녀님을 노린다는 첩보가 들어와 보호하려는 것이니 물러서라.”
날 노리는 자들이 있다고? 아니 그것보다 반신전파라니. 이건 회귀 전에는 전혀 알지 못한 이야기였다.
“무슨 말입니까?”
후작이 의아한 눈으로 물어왔다.
“암거래한 불법 무기로 프레이아 님을 암살하고 성녀의 대를 끊으려 한다는 첩보다.”
자신이 준비했던 암살 작전의 대상자가 나로 바뀐 탓일까? 후작의 얼굴이 조금은 복잡하고 난해해졌다.
지금 상황이 이해되질 않는 모양이었다. 동시에 내가 아스테인과 함께 가는 상황의 의미도 깨달은 듯하고.
“말도 안 돼! 그들은 절대 프레이아를 노릴 리가……!”
아차 하고 말을 멈춘 그는 아스테인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스테인은 그런 시선에 질 남자가 아니었다.
여유롭게 그 시선을 받아넘긴 그는 후작에게 다시 사무적인 말을 이어갔다.
“만약을 대비해 나와 대공가의 기사들이 모두 예비 성녀님을 호위하는 것으로 신전과 협의를 끝냈다. 또한, 이는 황제 내외분도 부탁하신 일이다.”
아스테인의 말에는 후작이 갖추지 못한 힘이 있었다. 경박하지도 않았고, 성급하지도 않았다. 그저 시키는 대로 따르고 싶은 말투.
후작가의 사용인들과 기사들 사이에 불안한 웅성거림이 퍼졌다.
“아버지, 예비 성녀가 외간 남자와 다녀도 되겠습니까? 이러다 추문이라도 난다면……!”
유테르안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스테인의 검이 하얀빛을 내며 뽑혀 나왔기에.
“대공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낮고 서늘하게 후작가에 퍼져나갔다.
“감히 예비 성녀님을 모욕하고도 푸토르 가의 후계자라고 말할 수 있나?”
그 말에 후작가 안이 조용해졌다.
“황후 폐하와 성녀님의 남동생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외부인인 내 앞에서 이러면 평소에는 어떨지 눈에 선하군.”
후작가 안에 흐르는 침묵은 아스테인의 승리를 의미했다. 유테르안과 후작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서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홀로 집 안에 들어온 아스테인을 죽이려 들진 않을까 걱정됐다. 아스테인에게 모욕을 받고 참을 후작이 아니니.
그걸 아스테인도 모르지는 않았다.
“이제 이야기가 끝났다면 나는 성녀님을 모시고 가겠다. 대공가의 기사들이 저택 주변을 에워싸고 기다리고 있어서 말이지.”
대공가의 기사들이 와 있다는 소리에 후작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유테르안은 제 아버지가 입을 다물자 거친 숨소리만 내며 분을 삭여야 했다.
나는 그런 푸토르 부자를 조금 낯선 눈으로 봤다.
내게는 한없이 무섭고 두려워 피하고 싶었던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아스테인의 말 한마디에 꼼짝도 못 하다니.
속이 시원하면서도 불안했다. 분명 이들은 이렇게 물러날 사람들이 아니었다.
특히 유테르안. 그는 후작보다 더 교활한 뱀이었다.
“그럼 다들 황궁에서 만나도록 하지. 프레이아 님?”
아스테인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으면 날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쳐다보는 두 구렁이 앞에서 나는 잠시 고민했다.
또 한 번 나 때문에 아스테인에게 화가 미칠까 봐.
그때 문득 날 기다리고 있는 아스테인의 손과 눈이 내 눈에 들어왔다.
믿어도 돼. 아스테인이라면.
나는 그의 커다란 손 위에 내 것을 올렸다. 그의 손은 생각보다 조금 뜨거웠다. 어쩐지 그게 기분이 좋았다.
약간의 굳은살로 거친 아스테인의 손이 나를 그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곁으로 가자, 늘 나는 라일락 향이 은은하게 나를 감쌌다.
“누님! 부디 흠 잡힐 짓은 하지 마십시오.”
유테르안이 조금은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내게 경고했다. 아스테인은 가소롭다는 듯이 콧소리를 내고는 날 이끌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후작가 사람들이 열어주는 길을 통과한 우리는 마차가 있는 곳까지 조용히 걸었다.
그저 예비 성녀와 예비 성기사.
그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없는 신으로 묶인 사이.
길을 터주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저 신의 말을 따르는 충실한 종으로만 보이길 바랐다.
사용인들의 시선을 버텨내며 건물을 벗어난 곳에는 이미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여기입니다.”
단델리온 대공가의 마차. 그것은 마치 아스테인을 마차로 형상화 시킨 것 같았다. 은빛 바탕에 새겨진 보라색 장식들. 그리고 그처럼 크고 널찍했다.
아스테인처럼 안정감을 주고, 편안하겠지?
“자리가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전혀요. 대공님을 닮아…… 편안하네요.”
호기롭게 말했지만 마지막 말은 기어들어 갔다.
맞은편에 앉은 아스테인은 내 답에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조금 전 후작가에서와는 다른 따스한 음성을 내게 들려줬다.
“프레이아 님을 제 마차에 태우고 파트너가 되어 연회를 가는 날이 오다니, 영광이군요.”
그의 말에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그냥 흔한 귀족 영애가 되어 연회를 즐기러 가는 주인공이 된 느낌. 남들에게는 평범했던 일상이 처음으로 나에게 주어졌다.
내게는 낯선 일탈. 그것도 연모하는 남자가 내 파트너가 되었다.
“저도요.”
설렘을 숨기고 수줍게 대답했다.
“오늘은 황실의 경사를 축하하는 자리라 평소보다 더 화려할 거라고 하더군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뒷머리가 아파졌다.
평범한 연회는 황후의 회임 축하연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걸 망각했다.
“저기, 대공님? 오늘 연회, 원래 오실 생각이었나요?”
한때 연모했던 여인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것을 축하하는 자리가 편할 리가 없었다.
“폐하께서 부른 곳에 가지 않으면 경을 치겠지요. 얼굴만 비추고 오려고 했습니다.”
그래, 있고 싶지 않았을 텐데 나 때문에……. 배려하지 못했다. 그가 불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애초에 황제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괴로웠을 텐데.
“그럼 저랑 일찍 돌아와요. 불편하실 텐데, 죄송해요. 제가 괜히 파트너를 청해서.”
내 말에 아스테인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곧 그의 눈동자는 가늘어졌다.
내가 내뱉은 소리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