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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9화 (9/101)

9화. 파트너가 되어주세요. (1)

“!”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내가 놀라 소리를 지르려는 것을 그의 커다란 손이 가로막았다.

듬직하고 큰 검지가 그의 입술로 올라왔다.

“쉿, 밖에서 듣겠습니다.”

내가 눈을 크게 뜨고 깜박이자 그의 손이 슬며시 떨어졌다.

그의 온기가 떨어져 나가자 확실히 깨달았다.

짝사랑이어도 상관없었다. 나는 아스테인이 좋았다. 그래서 그에게 폐를 끼치지 말아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할 만큼.

“안 갔어요?”

“인사도 못 드렸고 전해드릴 말이 있어서 남았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내일부터 며칠간은 제가 못 올 것 같습니다.”

아쉬웠다. 그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하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네, 알겠어요.”

“혹시 남은 두 사람이 찾으시는 분이 아니라면 여기 기도실 입구에 자작나무의 가지를 꽂아 두십시오. 더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운신의 폭이 넓지 않기에 내가 나서서 찾아다닐 수는 없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이 핑계로라도 그를 보고 싶었다.

“황실 연회가 끝나야 뵙겠군요.”

제법 못 보는 시간이 길었다. 그건 싫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저도 어쩌면 연회에 갈지도 몰라요.”

“그렇습니까?”

“네. 저기 혹시, 그때 제 파트너가 되어주지 않으시겠어요?”

아스테인은 눈을 크게 뜨고 답을 하지 않았다.

아, 역시 싫은 걸까? 좋아하는 여인 앞에서 다른 여인의 파트너가 되는 건 곤란하긴 하겠지.

“함께 이동하면서 붙어 있으면 아버지께서 함부로 대공님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못 할 것 같아서요.”

괜히 핑계를 댔다. 거절의 말이 돌아올까 조금 민망해졌다.

“후작의 허락을 받기 힘들 테니 몰래 밀어붙여야겠군요.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후작이 싫어할 겁니다.”

“요즘 분위기로는 괜찮아요.”

“그럼 기쁜 마음으로 프레이아 님의 파트너가 될 날을 준비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그냥 예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심장이 뛰었다. 잠시 말없이 우리는 서로를 쳐다만 봤다.

한참 뒤 아스테인이 정말로 이제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산책을 핑계로 정원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 그가 빠져나가기로 했다.

“참, 프레이아 님. 본의 아니게 호위와 나누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내게 조금은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 눈에는 걱정도 가득했다.

“성녀도 인간입니다. 그러니 욕심을 내도 되고, 화를 내도 됩니다. 너무 참고 살지 마십시오.”

오늘도 아스테인은 언제나처럼 내게 가장 필요한 위로를 남겨주었다.

* * *

아스테인이 보낸 여인들은 모두 엘라네르가 아니었다. 도대체 그녀는 어디로 숨었을까?

초조해졌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면 안 되는데.

한 번쯤은 다시 빈민가로 나가볼까 했지만, 도저히 틈이 나질 않았다.

“그날 이후 왜 신성력이 돌아오지 않는 거냐? 기도가 부족한 것 아니냐?”

후작은 성녀님이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다시 예민해졌다. 언제든 내게 다시 폭력을 가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예전 같으면 나는 웅크리거나 벌을 피하려고만 했을 것이다.

“그렇게 쉽게 돌아올 신성력이었다면 진작에 돌아왔을 거예요. 너무 조급해 마세요.”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조금은 용기를 내기로 했다.

아스테인의 격려를 늘 가슴에 품고.

“이 상태로 황실 연회에 나갔다가 네가 신성력이 없다는 것을 들키는 날에는 끝장인 것 모르느냐?”

“연회에서 제가 신성력을 쓸 일이 있을까요? 인제 와서 가지 않으면 더 이상한 눈길을 받을 거예요.”

내 말대꾸에 언제나처럼 후작의 손이 올라왔다.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하려고 움츠러들던 나는 여기 없었다.

조금은 달라지고 싶었다.

엘라네르가 돌아오고, 내가 떠날 때 더 당당해지기 위해.

“제가 신성력을 되찾는다면 성녀의 몸에 손을 대신 아버지께서 신께 벌을 받으실 수도 있어요.”

그의 손이 멈칫했다.

“게다가 성녀의 몸이나 얼굴에 상처가 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거예요. 신성력이 있는 자의 몸이 상할 리가 없잖아요.”

아직은 작은 용기 탓에 목소리가 떨려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후작의 손이 내려간 것이다. 대신 그는 날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봤다.

나는 긴장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손에 힘을 줬다.

물러서지 말자.

“건방진 것. 네가 길거리에서 죽어가던 것을 누가 살렸는지 잊지 말아라.”

후작이 방에서 나간 뒤, 나는 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응.”

천성이 반항할 줄 몰랐던 탓에 이러는 게 힘들었다. 매번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 아가씨, 이제 성녀님의 위엄을 찾아가시는 것 같아요.”

셀레미온은 이런 상황을 매우 기뻐했다.

“솔라르 경이 그러는데 빈민들이랑 평민들이 하루가 멀다고 꽃이며 과일이며 들고 찾아온다면서요?”

엘라네르로 추정되는 이들의 방문 이후, 다들 날 보겠다며 찾아왔다. 그들 중에는 날 다시 찾아온 리라도 있었다.

“아가씨의 축복 때문에 취직됐다던 빈민가 아이요. 그렇게나 아가씨 찬양을 하고 다닌대요.”

“쓸데없는 짓을.”

“빈민들과 평민들 사이에서 아가씨의 약이 크게 유행이라잖아요. 신의 약이라고.”

덕분에 나는 성녀로서의 이미지를 굳히고 있었다. 엘라네르에게 모든 것을 돌려주는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도.

“아가씨가 이렇게나 잘되니까, 도련님도 오랜만에 오신다네요.”

도련님이란 말에 미간을 좁혔다. 아카데미에서 후계자 교육 중인 유테르안, 그 아이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엘라네르를 찾아와 내 눈앞에 들이밀었던 것이 그 아이였으니까. 그는 후작 못지않게 내게 폭언을 퍼붓던 이였다.

[더러운 가짜 주제에!]

[성녀 자리에서 당장 내려와. 내가 널 끌어내리기 전에.]

“언제 온다는데?”

“연회 날 아침에요.”

기억과는 달랐다. 유테르안은 회귀 전, 졸업할 때까지는 방학이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 불길함은 연회 날이 되어서 실체를 보였다.

“아가씨! 이거 봐요! 와, 도대체 누구지?”

셀레미온의 호들갑에 방문 앞으로 갔다. 베이지색의 단아한 쉬폰 드레스와 드레스에 어울리는 우아한 장신구, 그리고 하얀 구두.

“누가 보낸 거야?”

“모르겠어요. 예비 성녀님께 드리면 된다고 했다는데요?”

상자 안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다. 이걸 입어도 되는 걸까?

셀레미온이 예쁘다고 설치며 옷을 들어 올렸을 때 드레스에서 무엇인가가 툭 떨어졌다.

자작나무의 가지였다. 그것을 보낸 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좋아하는 티를 내서는 안 되는데, 입꼬리가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드레스의 고운 천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뭐야, 가짜 누이 따위를 연모하는 멍청한 놈도 있어?”

그때 무례한 목소리가 퍼졌다.

이 집에서 저런 거친 말을 하는 남자는 하나였다.

“안녕? 가짜 누이?”

“도, 도련님 오셨어요?”

셀레미온이 겁먹은 채 인사하는 동안 나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붉은 머리의 청년이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어 왔어. 귀찮지만 연회에서 가짜 누이의 파트너를 하라지 뭐야? 네 감시역을 맡아서 말이지.”

그의 입꼬리가 진득하고 소름 돋게 올라갔다. 온통 불쾌하게도.

“파트너라뇨?”

내 질문에 유테르안이 다시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더러운 손이 깨끗한 드레스에 닿았다.

그게 끔찍하게도 싫었다.

그는 셀레미온에게 손짓했다. 셀레미온은 잔뜩 눈치를 보다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웠다.

“가짜인 걸 들키면 곤란하잖아?”

유테르안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숨결이 이마에 닿았다. 그 뜨거운 것이 너무나도 역겨웠다.

“파트너가 되어주기로 한 분이 있어요.”

“누구 마음대로? 아버지가 허락했어?”

아직 아스테인으로부터 연락은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라면 분명 내게 와 줄 것이다.

“유테르안이 내 파트너가 되는 것도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회귀 전, 후작은 황족이나 공작 가문의 여인을 유테르안에게 붙여주려고 했다. 그만큼 아들을 애지중지했다.

그 때문인지 유테르안이 나를 데리고 공식 행사에 가려고 하면 늘 반대했다. 아마도 내가 빈민가 출신이라 고귀한 제 아들 곁에 서는 것조차 싫었던 것이 아닐까?

“무슨 소리야? 아버지 지시인데.”

의외였다. 내가 황궁에서 무슨 사고라도 칠까 걱정이 되었나 보다.

입꼬리를 비튼 유테르안은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나는 그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가 또 다가왔다. 그것이 서너 번 반복되었다. 결국, 나는 벽에 붙어서야 했다.

유테르안은 벽을 짚고는 내게 기묘한 미소를 보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두드러기라도 날듯 기분 나쁜 끈적임이 느껴졌다.

“많이 컸네? 가짜 누이? 나한테 말대꾸도 하고?”

대답하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유테르안이 검지로 내 턱을 밀어 올렸다.

“그래 봤자 가짜면서 어디서 이렇게 건방져?”

그의 커다란 손이 얼굴을 밀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중심을 잃기에는 충분했다.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내 손이 바닥에 쓸렸다. 다행히 까지지는 않았지만 붉게 멍이 들 것 같았다.

“잊지 마. 너는 내가 후작 가문을 이어받을 때까지 가짜인 것을 들키지 않고 가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존재인걸.”

바닥을 짚은 내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는 익숙한 학대에 눈물을 흘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스테인이 참기만 하지는 말라고 했으니.

“내가 후작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건 알고 있나 보네요.”

“뭐?”

“난 미래의 성녀예요. 성녀를 이렇게나 괴롭히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나요?”

내 반항에 유테르안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글쎄, 진짜 신이 있고 무서운 존재라면 네가 지금 이 꼴로 살진 않겠지.”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정중한 사람인 것처럼.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를 유테르안은 못마땅하게 봤다.

팔짱을 낀 그는 내 방의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하녀들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뚜껑을 열자 거기에는 금색과 은색의 실이 화려하게 수 놓아진 검은색의 드레스가 들어 있었다.

“이걸로 준비해. 내 파트너니까 나랑 맞춰 입어야지. 안 그래?”

나는 대답을 거부한 채 그것을 노려봤다. 그는 답이 필요 없다는 듯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셀레미온이 다시 방으로 들어온 뒤, 걱정스레 날 돌아봤다.

“아가씨, 괜찮아요?”

“응. 괜찮아. 아무 일 없었어.”

“그럼 이제 준비해도 될까요?”

연회 준비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다. 목욕도 해야 하고 머리도 치장해야 하고.

목욕을 하러 가기 전에 아스테인이 줬던 은실 팔찌를 뺐다. 깨끗하게 씻어냈지만, 그의 피가 묻었던 흔적은 옅게 남아 있었다.

이걸 들여다보니 헝클어졌던 머릿속이 좀 진정됐다. 며칠 동안 그를 보지 못해 애가 탔던 마음도 풀렸다. 그런 한편으로는 염려가 컸다.

“오늘이었지……?”

아스테인을 암살하겠다고 한 날.

화약과 노란 카네이션 말고는 아직 단서가 없었다. 아스테인이 알아보고 대비를 하는 것 같았지만,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그래서 더 그의 파트너가 되겠다고 한 건데.

그가 보낸 것이 확실한 선물들 말고는 소식이 전혀 없는 것도 내 불안을 부채질했다.

“후우…….”

“아가씨 목욕 준비 끝났어요.”

“그래, 나갈게.”

은실 팔찌를 손수건에 감싸 서랍 안에 고이 집어넣었다.

셀레미온을 따라가자 하녀들이 내게 들러붙었다. 후작가에서 이런 대접과 시중은 거의 받아보지 못했다.

특히 이 정도의 치장은 성녀의 대관식 이후로 처음이었다.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너무 화려하잖아.”

머리에 꽂을 온갖 장식들은 전부 유테르안이 가져온 상자에서 꺼내왔다. 나는 손을 들어 그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아스테인이 보낸 상자의 단아한 것들을 착용했다. 그가 보낸 것들은 하나같이 기품 있고 우아했다. 유테르안이 보낸 화려하기만 한 천박한 것들과는 달리.

“아가씨, 그럼 드레스는요?”

“오전에 선물 들어온 베이지색 드레스로 해줘.”

“도련님께서 화내실 텐데…….”

“상관없어. 아니,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의 파트너로 함께 가느니 아예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휘둘려질 생각은 없었다.

셀레미온은 염려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내 굳은 의지를 확인한 셀레미온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아스테인의 드레스를 가져왔다.

나는 고운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쓰다듬었다. 사르륵 스쳐 지나가는 촉감이 좋았다. 라일락 향도 나는 것 같고.

셀레미온의 도움을 받아 옷을 입고 나자 하녀들이 내 앞에 전신거울을 가져다줬다.

“와, 여신 같아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엠파이어 스타일의 드레스는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꾸민 듯 꾸미지 않은 것 같은 자수도 차분함을 더했다.

마치 나 한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은 드레스.

나도 모르게 한 바퀴를 돌았다. 촤르륵 펼쳐지는 드레스 자락이 꽃 같아 보였다.

“어울려?”

“네! 너무너무요. 오늘 연회에서 아가씨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분은 없을 거예요.”

셀레미온의 칭찬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나는 다시 거울을 들여다봤다. 후작이 목에 남겼던 멍 자국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새하얀 성녀복보다는 화려한, 내 인생에서 가장 예쁜 드레스를 입은 내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모습을 얼른 아스테인에게 보여주고 싶어.

“다들 고마워. 다녀올게.”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바로 미간을 좁혔다.

“뭐야, 왜 내가 준 옷이 아니지?”

검은색에 금사와 은사로 수놓아진 연미복을 입은 유테르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머리를 멋들어지게 올린 유테르안은 방 안의 하녀들을 노려봤다.

“내 옷은 내가 정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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