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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8화 (8/101)

8화. 당신을 좋아할수록

아스테인이 입술을 움직여 말할 때보다 더 간질간질한 기운이 내 온몸을 가볍게 떨게 했다. 손을 빼야 할 것 같은데 빼지도 못하고 그냥 그대로 그에게 붙들려 있었다.

솔직히 처음 닿은 그 느낌이 좋아 빼지 않은 것일지도.

회귀 전 아스테인은 다른 기사들과 달리 절대 내 손등에 입술을 대지 않았었다. 공식 행사에서는 닿은 척만 했다. 조금은 무서운 얼굴로.

“저기, 대공님. 여기가, 그…… 기도실인데…….”

손에서 땀이 날 지경이 돼서야 나는 그에게 겨우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아, 죄송합니다. 프레이아 님께서는 이런 접촉이 불편하셨을 텐데, 사과드립니다. 신께서 혹시라도 진노하셨다면 그 죄는 제가 받겠습니다.”

“그, 그런 거로 화내시진 않을 거예요.”

우리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나는 어색함을 이겨보고자 그에게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대공님께서는 왜 제 부탁을 의심 없이 들어주시고 제게 이렇게 친절하신가요? 비록 성녀가 되겠지만, 아직은 정적인 집안의 딸인데요.”

그가 코끝을 찡그렸다. 쉽게 답을 못하는 것이 곤란한 모양이었다.

“푸토르 후작이나 폐하를 경계하는 데 순진한 프레이아 님을 이용하려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그런 뜻으로 여쭌 것은 아니에요.”

눈이 저절로 커졌다. 괜히 물은 모양이었다. 아스테인이 불편해할 것 같았다.

“압니다. 제가 성기사가 되려 하는 것도 아시는 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성기사가 되려 하세요? 차라리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몸을 사리다 보면 반드시 기회가…….”

나는 황제가 곧 죽을 것이라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타인의 미래를 함부로 말해도 될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사적인 것을 물었네요.”

내 사과에 아스테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가 잠시 허공을 아련한 눈빛으로 쳐다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신과 성녀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자입니다. 물론 폐하와 다른 이복형제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목적이 없지는 않습니다. 저는 모두에게 공공의 적이니까요.”

나와는 다른 의미로 그는 외톨이였다.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아픔이 느껴져서 나도 같이 슬퍼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왔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에 가득 채워진 내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뭘 기대하는 건지 살짝 붉어져 상기된 내 얼굴이.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신을 만나야 하는 장소. 그곳에서 성녀가 될 자의 마음속에 불경한 욕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아가씨!”

똑똑, 노크와 함께 들려온 솔라르 경의 목소리에 얼굴에 돌았던 핏기는 사라졌다.

“잠시만요!”

당황한 나는 문 앞에 섰다. 기도실에는 안타깝게도 몸을 숨길만한 곳이 없었다.

아스테인이 나와 있던 것을 들키면 나도 그도 곤란해졌다.

내 눈짓에 아스테인은 발소리를 죽인 채 빠르게 벽에 붙어섰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살짝만 문을 열었다.

최대한 태연한 얼굴로 솔라르 경을 만났다.

“황후 폐하께서 신전에 방문하셨답니다. 아가씨께서도 오라고 성녀님께서 전하셨습니다.”

“네, 알겠어요.”

나는 안이 보이질 않게 막아가며 밖으로 나갔다. 몸이 빠져나온 뒤에는 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호위 부탁드릴게요.”

당연히 따라오겠지만 혹시나 해서 솔라르 경에게 당부했다.

이 기도실은 평소 나만을 위해 개방되는 곳이니 다른 사람들이 굳이 오지는 않겠지만, 확실하게 비워둬야 했다.

걷는 내내 기도실의 문을 돌아봤다. 하지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지금이 빠져나갈 기회인데 안에 있을 아스테인이 조금 걱정됐다.

“황후 폐하께 좋은 소식이 있나 봅니다.”

“폐하께요? 무슨 전언이라도 따로 들으셨나요?”

“최근에 뵌 모습 중, 가장 밝은 얼굴이셨습니다.”

이마를 찡그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이 시기의 황후에게 생긴 좋은 일이라면…….

“회임?”

“그것이라면 좋겠습니다. 후작가의 경사겠네요.”

아니, 그건…….

황후는 사산할 예정이었다. 그것도 내가 성녀가 된 직후, 조산하여.

그 일로 후작은 신전을 찾아와 내가 쓸모없다는 이유로 머리채를 잡았었다. 신성력이 있었으면 황실의 후손을 살렸을 거라고.

그때 얻은 산후병으로 황후마저 앓아누운 뒤, 후작의 날 향한 경멸은 극에 달했다. 황제가 죽은 뒤에는 날 더 미워하고 증오했다. 새 황제의 외할아버지가 될 기회를 놓쳤다며.

“후작가 역사상 이런 예가 있었나 싶습니다. 후작가의 따님들이 황후에 성녀에, 푸토르 후작가에 오길 너무 잘했습니다. 하하하!”

솔라르 경의 찬사 어린 말들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성녀님의 방문 앞에서는 무거운 마음에 도저히 얼굴이 펴지질 않았다. 이대로 인상 쓰고 들어갔다간 황후나 성녀님이 한소리를 할 텐데.

“아가씨?”

“아,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당연히 제가 할 일입니다. 노크해드릴까요?”

“네, 부탁드릴게요.”

솔라르 경이 노크하는 모습을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쳐다봤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무거운 일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내게 소중한 사람의 불행을 막을 기회라고만 여겼다.

주변에 있는 다른 이의 불행한 미래를 아는 것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그것이 날 미워하는 이의 친딸이라도.

“들어와요.”

성녀님의 푸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화려한 여인이 성녀님의 옆에 앉아 있었다. 엘라네르처럼 붉고 화려한 머리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

황후 카렌시아, 그녀가 날 향해 검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잘 지냈어?”

“예, 폐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얼굴은 너무 피곤해 보이는데? 너무 무리하는 것 아냐?”

“아닙니다. 염려 감사해요.”

날 보는 황후의 시선이 한껏 여유롭고 편안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배 위에 올려져 있는 손.

“자리에 앉아요, 프레이아.”

성녀님의 말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황후가 직접 내게 차를 따라줬다. 그 몸짓이 매우 차분하고 조심스러웠다.

사랑받아 발랄하고 쾌활했던 황후가 변했다.

“프레이아, 폐하께서 드디어 황실의 자손을 잉태했다고 하시는군요.”

“축하드려요.”

“고마워. 모두 고모님의 진심이 담긴 기도 덕분이에요.”

“신께서 황후 폐하의 간절함을 아신 탓이지요. 겨울이 끝날 무렵이면 귀한 분이 탄생하겠군요. 저는 뵙지 못할 것 같아 아쉽지만요.”

카렌시아는 성녀님의 말씀에 얼굴이 흐려졌다. 성녀님이 날개를 달고 떠나는 날은 황후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불안함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제 아이가 세상의 빛을 볼 때 고모님이 계시지 않는다니, 전 어쩌죠?”

“이젠 프레이아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성녀님은 흐뭇한 눈으로 날 돌아봤다. 민망해서 고개를 들기 힘들었다. 어쩌면 지난 삶에서 그녀의 아이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 탓일지도 몰랐다.

“프레이아, 신성력을 쓸 수 있는 거야?”

“아니요, 아직은 아니에요.”

“봐요, 고모님. 얘는 아직 멀었다잖아요. 이대로 성녀가 됐다가는 후작가에도 화가 될 텐데…….”

황후가 후작가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자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황후도 어릴 때는 신성력이 없다는 사실에 눈치를 보며 자랐다.

그래도 푸토르 후작의 피를 이어받은 딸이라 나와는 대우가 전혀 달랐다. 특히 황태자비로 간택 받은 뒤에는 모든 이의 사랑을 받았다.

천덕꾸러기가 되어가던 나와 달리.

“신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는 것이 신성력의 시작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께서 이 아이에게 괴질의 원인도 알려주고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치료법까지 일러 주셨는걸요.”

소문이란 게 이렇게 부풀려지고 확대되는구나.

“혹시라도 저나 제 아이가 잘못되면 프레이아에게 도움받을 수 있겠네요.”

“그렇겠지요. 그러니 그런 불길한 걱정 같은 것은 미리 하지 마십시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런지, 저는 불안하기만 해요.”

고모와 조카가 다정하게 미래의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내게는 그것이 남의 일같이만 느껴졌다. 어차피 두 사람도 내게 관심이 없었고.

혼자 이방인이 되어 넋을 놓고 말았다.

아스테인은 잘 빠져나갔겠지?

인사도 못 했다. 화약에 대해서도 더 물어볼 걸 그랬다. 내일도 찾아오기는 할까?

손등에서는 아직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고 머릿속에는 그만이 가득했다.

“그런데 단델리온 대공은 정말 성기사가 될 거래요?”

황후의 입에서 아스테인의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되는데.

황제는 아스테인을 증오해 치워 버리고 싶어 했다. 그렇다면 황후는?

“네, 결심이 굳어 보이더군요.”

“폐하의 핍박을 피해 결국 도망치는군요. 안됐어요. 두 분의 어머니 때부터 이어진 악연이 대를 이어가다니…….”

다행히도 황후는 황제와 달리 아스테인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폐하께서 나랑 대공 사이를 오해하는 바람에 일이 더 커졌죠. 그래서 대공이 도망치려나 봐요.”

황후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무슨 의미일까?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황후 폐하를 폐하의 오해로부터 지키려면 성기사가 되는 편이 낫긴 하겠지요.”

“그러게요. 안타까워요. 주변의 다른 여인들도 좀 들여다보지.”

“어릴 때부터 한 번 마음을 주면 놓지 못하는 분이었지 않습니까?”

가슴속에 차가운 겨울바람이 순식간에 불어와 내 마음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가 말했던 지키고 싶다던 사람이 나이길 바랐는데……. 심장 한쪽이 찡하며 울렸다.

하긴 우린 어제 처음 만난 사이였는걸.

그가 첫눈에 내게 빠져 날 지키고 싶어 한다는 건, 어느 동화 속에서나 있을 이야기였다.

이해하는데도 쓰라렸다.

“생각해보면 황자 시절에 성녀님을 뵙는다는 핑계로 신전이며 우리 집이며 참 자주 드나들었네요.”

황후는 조금 즐기는 듯 말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밉게 느껴졌다.

나는 역시 가짜 성녀구나.

“내 선택이 둘의 운명을 가른 것 같아요. 내가 고른 남자가 황제가 되었잖아요.”

황후의 말에 이를 갈 뻔했으니.

황후의 선택으로 그 모든 아픈 일들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원망해서는 안 되는데 원망이 쌓이려고 했다. 지난 삶에서 모든 잘못은 내게 있었는데, 남에게 비난을 돌리다니.

내가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애써 황후에게서 눈을 떼고 대화에 집중하지 않으려 했다.

“이번 연회가 대공께는 마지막 사교모임이 될 수도 있겠군요. 오해를 잘 마무리하고 신의 품으로 오길 바라야겠어요. 신전이 정쟁에 휘말리는 것은 원치 않으니까요.”

“그래야겠죠. 프레이아? 너도 이번 연회 때는 참석하는 게 어때?”

하지만 황후는 날 대화에 끌어들이려 했다.

“아버지가 허락하시지 않을 거예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대답했다. 태연한 척하느라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그걸 본 황후가 내게 안타까운 눈길을 보냈다. 내 상태를 오해한 모양이었다.

“내가 초대장을 보내면서 아버지를 설득할게. 이제 네게 좋은 일도 생겼고, 곧 성녀가 될 테니 황실과 돈독하게 지내야지.”

잠시 황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푸토르 후작에게는 자식이 셋 있었다. 나보다 세 살 많은 황후 카렌시아, 나보다 한 살 어린 아들 유테르안, 그리고 나와 동갑인 엘라네르.

그리고 그들 중 황후만이 그나마 내 처지를 공감하고 이해하는 편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날 구해주거나 돕지는 않았지만.

“네, 알겠어요.”

마음이 복잡했다. 황후에게는 유감이 없기에 그가 잘못되길 바라진 않았다.

그런데도 아스테인을 생각하자 유치찬란해지려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이렇게 질투라는 어두운 감정이 자라는 걸까?

나는 치졸한 마음을 숨기려고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전, 이만 기도하러 갈게요. 나중에 태어날 황실의 귀한 자손을 건강하게 출산하시는 데 도움이 되려면 얼른 신성력을 찾아야죠.”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말로라도 황후의 행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정말로 나쁜 마음으로 물들 것 같았다.

허리를 숙여 두 분께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복도에는 솔라르 경이 있었다.

그는 내 어두운 얼굴에 슬쩍 눈치를 봤다.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괜찮아요. 피곤해서 그래요.”

나와 솔라르는 다시 기도실을 향해 걸었다.

기도실의 문까지 가는 길, 사제님들과 신도들을 많이 마주쳤다. 대부분이 맑고 순수한, 온화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그게 날 괴롭혔다.

문 앞에 선 나는 문득 답답한 마음에 손잡이를 돌리다 말고 솔라르 경을 돌아봤다.

“성녀라면 시기, 질투, 분노 이런 부정적인 마음을 갖지 않아야겠죠?”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자애로운 분이기에 성녀님 아닐까요?”

“그렇죠? 그래야겠죠?”

내가 누구로 살아가는지를 자각하는 순간, 심장은 깊게 가라앉았다.

엘라네르를 찾고 제자리로 돌리기 전까지는 사람들의 눈에 언제나 착한 사람으로만 보여야겠지? 조금 갑갑하게 느껴졌다.

나도 인간인 것을, 심지어 성녀도 아닌.

진짜 성녀인 엘라네르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을까?

“후우…….”

한숨을 쉬며 기도실 문을 열었다.

“인사도 못 하고 보냈네.”

조금 아쉬웠다. 날 지켜주고 싶다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그를 향하는 마음이 조금 바보 같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받은 것이 더 많았다.

그에게 주었던 마음은 꼭 돌려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시렸던 마음이 조금은 덜 아팠다.

“그래서 아직 안 갔습니다.”

아스테인의 목소리를 듣자 좋아하는 마음 말고는 다 사라져버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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