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우리 내기할까요?
회귀 전, 빈민가에서 있었던 독버섯 중독 사건, 그때는 이 여자도 피해자 중 하나였다. 빈민가의 아이들과 산에 올랐다가 식용 버섯과 착각해 아이들과 나누어 먹어 쓰러졌었다.
내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내게 지어줬던 밝은 미소는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렇군요. 아쉽지만 당신은 아니랍니다. 혹시 비슷한 외형의 친구를 모르나요? 좀 더 붉은 머리에 짙은 황금색 눈인데.”
여자는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눈꼬리가 축 내려갔다. 찾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너무 실망한 것 같아 괜히 내가 미안했다.
“헛걸음을 하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하군요.”
“아니에요. 그래도 이렇게 예비 성녀님을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나는 그녀가 다시 내민 들꽃을 받고는 그녀를 위해 환하게 웃어줬다.
“고마워요. 잘 말려서 간직할게요.”
“저기, 혹시, 가능하시면 제게 성녀님의 축복을 내려 주실 수 없나요? 식당에서 종업원을 구한다는데 꼭 붙고 싶거든요.”
순간 망설였다. 나는 가짜니까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없는걸.
하지만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신성력의 축복이 아닐지도 몰랐다.
“물론이죠. 이름이 뭔지 알려줄래요?”
“리라예요!”
나는 꼬질꼬질 더러운 여자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정수리 위에 손을 올렸다.
“리라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예요. 리라가 걷는 걸음걸음, 신의 영광이 함께 하길.”
리라는 세상 누구보다 밝은 얼굴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나는 바로 솔라르 경을 불렀다.
“이런 부탁 미안하지만, 입구까지 바래다줄래요? 혹시 귀족들에게 봉변을 당할 수 있으니까요.”
솔라르 경의 태도는 확실히 바뀐 것 같았다. 나를 자랑하고 다녔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어제와는 달리 솔라르 경은 내 부탁에 얼굴을 조금도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명쾌하게 대답을 했을 뿐.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기도실의 문을 닫은 나는 푹 한숨을 쉬었다. 내 시선이 닿는 곳에는 어제 아스테인이 내게 걸쳐준 로브가 곱게 접혀 있었다.
“오늘은 오지 않을 건가?”
나는 로브를 고이 들었다. 조금 섭섭했다. 손으로 로브를 쓸어내리는 내 손길이 허했다.
그와 매일 만날 시간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제 로브를 받으러 왔습니다.”
조금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반가운 마음에 몸을 돌린 나는 그대로 굳었다.
아스테인의 보라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심장이 조금 아렸다. 저렇게나 내게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그를 처음 봤다.
내가 그에게 무엇인가를 잘못했나 싶어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
“여기……. 감사했습니다.”
그는 말없이 내가 내민 로브를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뒤돌아섰다.
이런 그의 모습이 조금은 충격이었던 걸까?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하지만 애써 그것을 삼켰다.
그때 그가 다시 뒤로 돌아섰다.
그의 눈은 여전히 서늘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억누르는 듯했다. 화를 참는 듯한, 그런 소리.
“푸토르 후작가에는 언제까지 계실 생각입니까?”
“무슨 뜻인가요?”
“성녀는 사사로이 어느 가문에 속해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아닙니까?”
공식적으로는 그랬다. 몇 대 전까지만 해도 지켜지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왜 뜬금없이 내게 이런 소리를 하는 걸까?
나는 대답을 잠시 미루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내 눈에 보인 것은 꽉 쥐어진 아스테인의 주먹이었다.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걸 보자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겹쳐졌다. 진짜 성녀를 찾았던, 그날 밤의 일이.
* * *
조금 전 내 아버지란 자가 다녀갔다. 그는 내 손에 독약을 쥐여 주었다.
나는 오늘 밤, 푸토르 후작가로부터 버림받았다.
달조차 떠오르지 않는 차가운 겨울밤, 나는 독약을 쥐고 정원으로 향했다. 날 따르는 이는 아스테인 하나였다.
“아스테인 경, 이제 돌아가도 좋아요. 잠시 혼자 있고 싶군요.”
“성녀님!”
아스테인이 무릎을 꿇었다.
“성녀님께서 명한다면 저는 누구든 성녀님의 길을 가로막는 이를 제거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고 억눌린 소리로 계속해 소리쳤다.
“원하신다면 어디든 모셔다드릴 수도 있고, 무엇이든 이루어 드릴 수 있으니 말만 하십시오. 그 정도의 능력은 있습니다.”
힘줄이 솟을 만큼 꽉 쥔 손.
마치 모든 걸 알고 대신 화내주는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힘이 됐다.
울컥 치미는 감정을 참기 힘들었다. 그의 마음을 외면하는 일은 더 힘들었다.
“아니요. 나는 여기서 지금과 같은 성녀로 있을 거예요.”
나는 조용히 독약을 바닥에 흘려 버렸다. 아스테인이 알 수 없게.
“성녀님…….”
“그러니 경도 지금처럼 내 곁에 항상 있어 주세요.”
나는 차마 그에게 나쁜 부탁을 할 수 없었다. 내 구정물을 아스테인같이 빛나는 사람에게 튀게 할 순 없으니까.
* * *
“맞는 말씀이에요. 조언 감사해요. 곧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신전으로 거처를 옮겨야겠어요.”
아스테인이 혹시라도 불구덩이로 뛰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조금 더 현명해져야 했다.
후작가에서 나오는 것으로 더 운신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진심입니까? 약속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의 갈라진 목소리가 조금은 애틋했다. 내 스카프에 닿아 있는 눈에는 여전히 분노가 가득했다.
그때도 지금도 그는 언제나 같았다.
“아직 정리할 일이 있어서요. 그러니 조금만 더 있다가 후작가에서 나올게요.”
“무슨 일입니까? 돕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서부터 느껴지는 진실한 마음이 나를 계속 툭툭 건드렸다.
그때도 지금도, 언제나 내게 한결같은 사람.
“제가 스스로 할 일인걸요. 마음만 받을게요.”
아스테인에게 마냥 의지할 수는 없었다.
내가 바뀌지 않는다면 그때의 비극은 다시 반복될 테니.
“하지만……!”
“그것보다 이걸 봐주세요.”
나는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어제 후작이 흘린 것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뭔지 아시나요?”
그는 잘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게 물건을 받은 뒤, 냄새를 맡고 가루를 문질러보았다. 그의 미간이 급격히 좁아졌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화약이군요.”
“화약이요?”
“동대륙 쪽에서 건너왔습니다. 불을 붙이면 폭발을 일으키는 물질이지요.”
내가 밤새 서적을 뒤져도 찾아내지 못한 것을 아스테인은 단번에 맞췄다.
“암흑 길드에서 수입해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드는 데 쓰지요.”
“블루 로즈 같은 곳이요?”
내 질문에 아스테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내게 덤덤하게 내 생각을 정정하려 했다.
“블루 로즈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암흑 길드가 아닙니다.”
“돈만 주면 뭐든 한다고 하던걸요?”
내 목소리가 조금 까칠해졌다. 도저히 덤덤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빈민가를 전전하던 불쌍한 아이를 돈을 받고 찾아내서 지옥으로 밀어 넣은 자들이고요.”
“블루 로즈가 그랬다고요……?”
아스테인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차마 그 희생자가 나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어제 후작에게 이야기를 들은 뒤, 나는 빈민가에서의 일을 기억해내고 말았다.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 누구도 보호하지 않던 아이. 작은 신성력을 사악한 힘으로 오해받아 빈민가에서도 쫓겨난 아이.
그게 나였다.
[꼬마 아가씨, 내가 고아원에 바래다주지.]
이젠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 나이 많은 남자의 손에 이끌려 후작의 손에 넘겨졌다.
“네, 그들의 짓이 확실해요.”
은인이라고 여겼었다. 정말 고맙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블루 로즈의 길드원이었을 그 남자에게 원망을 쌓았다.
“확신하십니까?”
“네, 당연하죠.”
그가 입을 살짝 다물었다. 아스테인의 눈동자가 조금은 가늘어졌다고 느껴졌다.
“프레이아 님께서는 그들을 싫어하시는군요.”
나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문득 성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은 남에게 표현하지 말 것.
그건 성녀가 아니더라도 지켜야 할 일이었다.
이미 목의 상처를 들켰을지도 모르는데 더는 추한 모습을 보이지 말자.
“이건 블루 로즈에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내가 만든 침묵을 깨고 조용히 대답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어떻게 확신하시나요?”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참으로 이기적인 사람이구나. 나 역시 그에게 숨기는 것이 많으면서 그가 내게는 모든 것을 말하길 바랐다.
우리는 원래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던 사이다.
회귀 직전, 며칠이 이상했던 거다. 나에게 유독 다정하고, 선물도 하고.
“손이 불편하십니까?”
무의식중에 팔찌를 찾아 더듬었다. 그것을 본 아스테인이 바로 내게 물어왔다.
서운했던 마음은 아스테인의 질문이 따스하게 녹여버렸다.
그의 관심은 크든 작든 늘 좋았다.
“아니에요. 그것보다 블루 로즈가 아니라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 아버지 가슴에 노란 카네이션이 달려 있었어요. 관계있을까요?”
“글쎄요. 조사해봐야 합니다. 암거래 중인 물건일 거라서요. 아직 황실에서도 정식으로 취급하지 않는 위험한 물건입니다.”
“큰일이네요……. 아버지께서…… 대공님을 황실 연회 때 이걸 이용해 해치려고 하셔서요.”
내 말에 아스테인은 생각에 잠겼다. 날 보는 눈빛이 오묘했다.
그는 한참 후에야 내게 물어봤다.
“제게 계속 후작의 계획을 알려주셔도 됩니까? 위험하지 않을까요? 설마 후작가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입니까?”
그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할 줄 몰랐다.
왜 후작에게 반기를 드냐고, 자신에게 계속 알리는 이유가 뭐냐고 물어볼 줄 알았다.
“제 몸은 제가 잘 지킬 수 있으니 프레이아 님은 부디 자신을 지키십시오.”
조금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내 조급한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 때문에 그가 죽었는데, 또 나로 인해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어째서 모를까.
“하지만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블루 로즈와의 접선에는 실패했지만 다른 곳에 의뢰를 완료한걸요.
폐하도 대공님이 성기사가 되든 되지 않든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이런 것뿐이라…….”
“압니다. 후작을 배신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이렇게밖에 못 하시는 것을요.”
“대공님…….”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어제 만난 제게 베푸시는 친절은요. 프레이아 님의 입장도 있지 않습니까?”
황제까지 연루된 일이라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아무런 힘이 없는 내가 그를 도울 방법은 이런 것밖에 없었다.
괜찮다는 아스테인을 보니 점점 갑갑해졌다. 오전에 셀레미온이 걱정했던 것보다 얼굴이 더 어두침침해졌을 것이다.
아스테인은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렇게 걱정된다면 저랑 내기하시는 거, 어떻습니까?”
아스테인의 얼굴에 약간의 장난기가 맴돌았다. 내 앞에서는 거의 처음 보여준 모습이었다.
아기 사제님들과 놀아 줄 때만 그들을 위해 보여줬던 얼굴이었다. 멀리서 내가 흐뭇하게 지켜보기만 하던 그것.
그 탓에 얼굴이 살짝 뜨거워졌다. 너무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던 모습이라.
“네? 내기요?”
“제가 황실 연회가 끝난 뒤에도 다치지 않고 멀쩡하다면 제가 이기는 것으로. 제가 다치거나 죽으면 프레이아 님이 이기는 것으로요.”
“그런 내기는 안 해요! 어떻게 당신의 목숨을 걸고 그런 내기를 해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외침에는 애절하고도 간절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절대 그의 목숨을 가지고 가벼운 내기 따위를 할 생각이 없었다. 농담으로도 싫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시신을 마주하는 것은 회귀 전 그날 하루로 충분했다.
“저는 질 리 없으니까 하는 소리입니다.”
아스테인은 장난기를 지우고 말했다. 그의 올곧은 시선이 내게 닿았다. 너무나도 단단해서 절대 지지 않을 것만 같은 의지가 느껴지는 시선이.
“내기가 싫으시면 제가 필사적으로 살아남을 이유를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차라리 이쪽이 낫네요.”
“그럼 황실 연회가 끝나고도 제가 다치지 않는다면 제게 상을 주시겠습니까?”
어째서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눈으로 내게 부탁할까? 나는 처음 보는 그의 낯선 모습에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지금 이런 것에 설레고 정신 못 차릴 때가 분명 아닐 텐데……. 하지만 심장은 이미 이성을 저리 밀어내고 그를 향해 열심히 뛰어가고 있었다.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절했다가 그가 시무룩해할까 봐.
“그럼 제가 살아남는다면 프레이아 님의 하루를 제게 맡겨주십시오.”
다시 그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조금 전의 장난기 있는 웃음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진심 어린 미소였다.
내 심장이 철렁할 만큼 아름다워 갖고 싶은 미소.
“약속하면…… 절대 다치지 않으실 거예요?”
아스테인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 손을 가져갔다. 살짝 거친 것도 같으면서도 부드러운 그의 입술이 내 손등에 닿았다.
손등 위에서 아스테인의 입술이 움직였다. 낮고도 진지한 울림이 기도실을 가득 채웠다.
“물론입니다.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손등에서부터 알 수 없는 울렁임이 전해졌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 심장도 요동쳤다.
“프레이아 님의 하루를 얻기 위해서라면 머리카락 한 올도 상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손등 위로 이어진 진득한 키스. 말캉하고도 뜨거운 것은 내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의 체온이 그의 입술을 타고 내 손으로 건너왔다.
내 심장을 불태울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