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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6화 (6/101)

6화. 당신을 경멸합니다

집사는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다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로 눈을 돌렸다.

이미 익숙한 일이었기에 나는 차분히 그의 답을 기다렸다. 잠시 기다리자 그가 대답을 주었다. 그래도 이건 예전에 비하면 빠른 편이었다.

“루크데린 거리에 가셨습니다.”

그곳은 번화가였다. 귀족들을 위한 화려한 보석이나 옷 같은 사치품을 파는 곳.

“무슨 일로 가셨지요?”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겠다고 하시더군요.”

블루 로즈와 접선하려는 것일까?

내 기억 속 아스테인은 누구보다 강한 기사이긴 했다. 수십의 기사들이 덤벼들어도 한참이나 날 지켜낼 만큼.

하지만 그렇다고 암살자를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최소한 언제, 어디서 일을 저지를지 그것만이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언제 돌아오시죠?”

“저녁 만찬을 끝내고 늦게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일단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후작님이 돌아오시면 기별을 드릴 테니 방에서 쉬십시오.”

기별이라는 말에 살짝 놀랐다. 지금까지의 그는 내게 한 번도 이런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그래서 가주가 집에 왔는데 인사도 안 했다며 혼나기도 여러 번이었다.

나는 낯선 그의 태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사를 쳐다봤다.

“필요 없으신가 보군요.”

그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지 않고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푸토르 후작가의 수치인 나를 싫어하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고마워요.”

변한 듯 변하지 않은 그를 두고 방으로 돌아갔다.

셀레미온은 따뜻한 차와 다과를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

“아가씨, 있잖아요. 솔라르 경이 아가씨 자랑을 하고 다녀요.”

“나를? 도대체 왜?”

“빈민가에서 성녀님보다 더 찬양을 받는다면서요. 기적을 일으켰다고요.”

굳이 이런 걸 원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한 일은 기적이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기적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인 것을.

“그냥 약을 만든 거밖에 없어.”

“그게 기적이죠! 그런 걸 하나도 모르던 아가씨가 신이 주신 약을 전한 거잖아요.”

차라리 잘 됐다. 저렇게 믿다가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더 날 비난할 것이다.

아버지가 날 붙잡아 가짜 성녀로 만들지 못할 만큼.

“아가씨 덕분에 저도 어깨가 조금 올라갔어요.”

“그래?”

셀레미온의 반응에 양심이 조금 콕콕 찔렸다.

“그런데 집사님은 그걸로는 신성력을 찾은 거라고 말할 수 없다면서 무시하는 거 있죠.”

그거야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

집사의 가문은 대대로 신앙심이 아주 돈독한 집안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성녀가 되고 얼마 뒤, 잠시 집사 일을 쉬겠다며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다음 예비 성녀가 태어나면 돌아오겠다며…….

“쳇, 우리 아가씨가 성녀님만큼이나 대단한 일을 했는데……. 난 집사님이 싫어요.”

셀레미온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나를 추켜세우는 소리를 이어나갔다. 그것이 조금은 낯간지러웠다.

“그러니까 아가씨는 최고의 성녀님이 될 거예요. 후작님이랑 성녀님도 칭찬하실 걸요?”

“이게 칭찬받을 일이야?”

“그럼요! 얼마나 멋진 일인데요?”

아스테인에게도 말하면 칭찬해 줄까?

문득 손에 걸린 은실 팔찌를 쳐다봤다. 잘해오고 있다며 칭찬의 의미로 생일에 준 선물.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아스테인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 아가씨도! 그렇게 부끄러워요?”

얼굴이 빨개진 모양이었다.

겨우 표정을 갈무리할 때 즈음, 집사가 아버지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복잡한 감정을 숨기고 현관 쪽으로 이동했다.

현관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 화통한 소리.

그는 날 발견하자마자 더 기분 좋게 웃었다.

“프레이아, 네가 오늘 사람들 앞에서 기적을 보였다며? 허허허, 드디어 네가 신의 말씀을 전하다니! 곧 신성력도 제대로 발휘하겠구나.”

단단히 오해했구나. 아버지 쪽은 이렇게 믿고 방심해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날 끌어안기라도 하려는 듯, 몸을 휘청이는 아버지를 피해 슬쩍 한 걸음 뒤로 빠졌다.

그런데 아버지의 가슴에 그와 어울리지 않는 밝고 앙증맞은 꽃이 달려 있었다.

“눈엣가시는 늦어도 한 달 안에 뽑힌다고 하더니, 오늘은 신의 축복이 내게 닿은 날이구나.”

설마 블루 로즈에 의뢰를 성공한 거야?

내 불안함을 모르는 아버지에게서 진한 술 냄새가 났다. 그는 날 보며 연신 낄낄댔다.

“네가 집안에 들어온 뒤, 성녀의 대가 끊기는 줄 알고 어찌나 답답했었는지 알아? 응?”

취한 그는 사용인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게 독설을 퍼부었다.

“네게 들인 돈이 얼마인 줄 알고나 있느냐? 파미르 공작이 황후 폐하께 신성력이 없는 것을 눈치채고 성녀를 찾아다닌다고 어찌나 설쳐댔는지 몰라! 블루 로즈 놈들! 그때 내가 돈을 얼마나 주고 널 찾았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감히 날 무시해?”

후작가에 날 넘긴 것이 블루 로즈였다니. 생각도 못 했다.

내가 신성력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것일까? 그 이후로 나는 망가진 새장 속에 사는 깃털 뽑힌 새가 되었다.

“뭐, 블루 로즈와 비슷한 것들은 많으니까.”

그의 가슴에 달린 노란 꽃을 다시 봤다. 노란 카네이션?

그것의 꽃말을 아는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런 것을 받고도 기분이 좋은 걸까?

당신을 경멸합니다.

내 마음을 대변하는 꽃을 노려봤다.

“건방진 자식, 다음 주 황실 연회에서 콧대를 무너트려 주겠어! 뭐 수치심을 느끼기도 전에 다른 세상으로 가겠지만, 하하하하.”

심장이 다시 불길하게 뛰었다. 아스테인은 지금 조금 방심하고 있는데.

“누구 말씀이세요?”

최대한 나긋하게, 그의 비위를 맞춰가며 말을 꺼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프레이아. 이대로 제발 신성력을 되찾거라. 내가 무덤에 들어가 선대 후작님의 얼굴을 당당하게 보려면 말이다.”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생각보다 많이 취했다.

집사와 기사 하나가 아버지를 부축하려 했다.

나는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내가 방까지 모셔갈게요.”

지금이 기회였다. 아스테인을 노리는 자들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은.

평소 같으면 아버지가 날 밀쳤겠지만, 술에 취해서인지 기분이 좋아서인지 내게 몸을 맡겼다.

“제가 하겠습니다.”

집사는 내게 아버지를 맡기기 싫은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요.”

아버지의 팔을 어깨에 걸친 뒤, 나는 낑낑대며 3층에 있는 그의 방으로 갔다. 그나마 이 집에서 날 안쓰럽게 보던 후작 부인이 돌아가신 뒤 온기라고는 남지 않은 가주의 방. 그곳 침대에 그를 눕혔다.

집사는 혹시라도 내가 넘어질까 날 따라왔다.

“따뜻한 꿀차를 가져와요. 이대로면 내일 일어나서 고생하실 거예요.”

집사를 떼어낸 나는 아버지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공손하게 물었다.

“아버지, 단델리온 대공이요.”

“쳇, 그 자식 이름은 내 앞에서 꺼내지도 말아라!”

날카롭게 변하는 눈빛에 움찔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제 신께서 제게 말씀을 전해주시기 시작했으니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려는데, 그자의 명줄을 어찌 끊어달라고 할까요?”

내 말이 끝나자 아버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더니 피식 웃었다. 갑자기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침대 위에 눕혀 버렸다.

나를 노려보는 눈에는 광기가 가득했다. 힘을 준 손은 내 호흡을 압박했다.

오랜만에 당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저 협박일 뿐, 이제 내게 공포심조차 안겨주지 못했다. 그만큼 내가 무뎌졌다.

날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날부터는 그저 무덤덤하게 아버지의 분노가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지금처럼, 발톱을 숨긴 채 얌전히 웅크린 고양이가 되어.

“신께 그런 불경한 것을 빌었다가 겨우 돌아오려는 신성력을 또 뺏길 참이냐? 우리 가문에 신의 분노라도 끼얹으려고?”

그 소리에 실소가 나오려는 것을 참아냈다.

우스웠다. 우리 중에서 가장 신의 분노를 받아야 할 사람이 내뱉는 소리가.

“단델리온 그 개자식은 내가 알아서 불태워 죽일 것이니 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때도 지금도 모순되는 아버지, 아니 후작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신이 원망스러웠다. 후작이 아닌 나에게 모든 죗값을 치르게 한 신이 미웠다.

“꿀차를 가져 왔…… 후작님!”

집사가 후작의 아래에서 숨을 쉬지 못하고 하얗게 질려가는 나를 조금은 놀란 눈으로 봤다.

나는 집사를 보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차피 나를 구하지 않을 자였다. 차라리 보지 않는 쪽이 수치심이라도 줄어들 것 같았다.

“후작님.”

집사가 다시 후작을 불렀다. 직접적인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후작의 손에 힘이 살짝 풀렸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후작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목에 있던 압박감에서 해방된 나는 콜록콜록 기침했다. 생각보다 강하게 잡고 있었던 것 같았다.

기침이 그친 후 겨우 상체만 일으켜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후작을 따라 방에 올라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아까 후작이 날 밀치며 침대 위에 떨어트린 조각을 집사 몰래 손에 움켜쥐었다.

“그만 돌아가시는 편이 났겠습니다.”

“도와주려 했는데 방해만 됐군요. 미안해요.”

집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평소 같으면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봤을 텐데, 내게 뒤늦게 동정이라도 생긴 것일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가려면 지금이었다. 손에 쥔 것을 숨겨야 하니까.

나는 다시 인사불성인 채로 몸을 흐느적대는 후작을 피해 방을 빠져나갔다.

“이게 뭐지?”

방으로 돌아온 나는 손을 펼쳤다.

반쯤 탄 종이와 검은색 가루. 재라고 보기에는 조금 다르게 생겼다.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분명 목재가 탔을 때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그 속에 낯선 다른 냄새가 섞여 있었다. 달걀이 썩는 것도 같고, 코가 매캐한 것이 불쾌했다.

“예감이 좋지 않아.”

이건 분명 아스테인을 죽이려는 것과 관계가 있다.

나는 손에 든 것을 작은 주머니에 담은 뒤 서재로 갔다. 밤을 새워가며 뒤졌으나 아쉽게도 이것의 정체가 나온 책은 찾을 수 없었다.

* * *

다음 날, 해가 뜬 뒤에 방으로 돌아갔다.

“아가씨! 어머, 눈 밑이 퀭한 것 봐. 아니, 그것보다 목을 어째요? 멍이…….”

세숫물을 가지고 날 찾아온 셀레미온은 물을 떨어트릴 뻔했다.

“목 위까지 올라오는 넥 케이프가 있을까? 아니면 스카프라도 가져와.”

셀레미온은 애써 차분하게 드레스 룸으로 갔다. 다시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하늘하늘한 쉬폰 레이스로 된 스카프가 있었다.

씻고 외출복을 입자, 셀레미온이 스카프로 내 목을 감쌌다. 스카프의 끝은 작고 앙증맞은 진주가 달린 핀으로 고정했다.

“에잉, 낡아서 고정이 잘 안되네요.”

내게는 변변찮은 장신구가 없었기에 이거라도 찾아온 것이 용한 일이었다. 셀레미온은 몇 번을 더 시도해 겨우 핀을 끼워 넣었다.

“잘못하면 빠질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괜찮아. 스카프만 풀리지 않으면 돼. 얌전히 움직이면 별 탈이 없을 거야.”

셀레미온은 조금 안쓰러운 눈으로 날 봤다. 내가 후작가에서 받는 대우를 아는 아이는 이를 슬쩍 물었다.

그 마음만으로도 정말 고마웠다.

그래서 그 아이를 위로해주기 위해 웃어줬다.

“아프지 않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맨날 괜찮은 척하셔. 그런데 얼굴은 어째요?”

“많이 심각해?”

셀레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동안 제대로 자질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셀레미온이 정성을 다해서 치장했지만 퀭한 기운은 쉽게 감춰지지 않았다. 예비 성녀라는 신분 때문에 짙은 화장은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아가씨는 원래도 가녀리고 연약해서 지켜주고 싶게 생겼는데……. 이러면 더 아파 보이잖아요.”

“마차에서 한숨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하지만 마차에서도 쉽게 잠들지는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덜컹대는 마차에서 잠이 든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신전의 기도실에 도착한 나는 바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늘부터 아스테인이 기도실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그러니 그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를 기다린다는 것이 참으로 낯설었다.

“늘 돌아보면 있었는데…….”

기다림은 계속 이어졌고 지친 나는 잠시 기도실의 벽에 기대앉았다. 그러자 졸음이 밀려왔다. 언제 그가 올지 모르기에 버티려고 했지만 잘 되질 않았다.

결국, 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어 버렸다.

잠결이었을까? 바닥에 작은 것이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스르륵 스카프가 흘러내린 느낌도 났다.

“으드득.”

바로 앞에서 누군가의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아스테인이 온 것일까?

그럼 안 되는데, 내 꼴을 보면 걱정할 거야.

하지만 이틀 동안 고생한 내 눈꺼풀은 뜨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가까운 곳의 온기를 찾아 파고들었다.

꿈결이지만 너무 편하고 따스했다.

그렇게 한참을 잠에 취한 나는 뺨에 무엇인가가 간질간질 닿고 나서야 번쩍 눈을 떴다.

“죄, 죄송해요.”

다홍색에 가까운 붉은 머리에 노란 눈을 가진 내 또래의 여자가 내 앞에 있었다.

“누구죠?”

“빈민가에서 왔어요. 어제 일로 성녀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꽃을 꺾어 왔답니다.”

내심 아스테인이 왔길 기대한 것일까? 아니어서 실망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솔라르 경이 옆에서 곤란한 얼굴로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성녀님께서 피곤하셔서 잠시 쉰다고 안 된다는데도 들여보내 달라고 떼를 써서요.”

내 뺨을 간질인 것은 여인의 손에 들린 푸른 빛을 내는 들꽃이었다. 나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 솔라르 경에게 말했다.

“잠시 이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네, 알겠습니다.”

여전히 곤란해 보이는 솔라르 경이 확실하게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문이 잘 닫혔는지부터 확인한 뒤,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델리온 대공이 보냈나요?”

내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네, 예비 성녀님이 찾는 사람이 제가 맞는지 확인하라 하셨어요.”

순수하고 맑은 눈동자와 밝은 미소는 낯이 익었다. 우리는 회귀 전에 만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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