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가짜 기적
아스테인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의 눈에 의구심이 가득했다.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날 노릴 이유가 전혀…….”
“황제요.”
아스테인은 날 다시 지그시 쳐다봤다. 신의 이름을 팔았는데도 역시 믿기 힘든 일이겠지?
차라리 푸토르 후작의 이야기를 꺼내는 편이 나을까?
“알겠습니다.”
나는 너무나도 쉽게 나온 아스테인의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내 말을 또 있는 그대로 믿어주었다.
“일단 제 호위를 강화하겠습니다만, 폐하는 제가 성기사가 된다고 하면 절 경계하지 않으실 테니 염려 놓으십시오.”
왜 이렇게 여유로운 걸까? 황제가 당신이 죽길 바란다는데.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제대로 경각심을 주려면 사실대로 말해야 했다.
“사실은 제 아버지도 대공님을 노려요.”
두 눈 질끈 감고 내뱉었다.
거짓말로 그의 행동을 이끄는 것은 진짜 성녀를 찾는 일만으로 끝내자.
아스테인은 지금껏 늘 날 믿어주었잖아.
“설마 어제의 일 때문입니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진 대답은 죄책감에 기어들어 갔다.
“죄송해요. 괜히 저 같은 것과 엮여서…….”
“황제파라 제게 반감이 원래 많았었지요. 그래서 여기까지 와버렸고……. 절대 프레이아 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네?”
무슨 의미지? 아니 그보다 내 말을 이번에도 믿어주는 거야? 단 하나의 의심도 없이?
“아무튼, 걱정 내려놓으십시오. 블루 로즈는 절 해치지 않습니다.”
못 한다가 아니라 않는다라고? 그 의미를 깨닫기도 전, 나는 아스테인의 행동에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그는 주변을 살피더니 고개를 숙이고 내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예비 성녀님의 기사가 되기 위해서라도 저는 죽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제와는 다른 그의 다정함에 이번에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무뚝뚝하고 제 일만 하던 성실한 기사가 오늘은 자상한 신사가 되어 있었다. 내가 좋아하던 회귀 전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앞으로는 이곳 말고, 제가 예비 성녀님의 기도실로 숨어들겠습니다. 아무래도 절 죽이려고 한다면 이렇게 공개적인 곳에서 예비 성녀님과 만나는 것은 좋지 않겠군요. 그럼 이만.”
아스테인은 내게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고는 떠나버렸다.
내게 달콤한 라일락 향기만 남기고.
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느라 넋을 잃어버렸다. 그러다 뒤늦게 그가 내 어깨에 걸쳐준 로브가 그대로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입었던 로브가 그의 향기와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 * *
일단은 기도실로 돌아왔다. 아스테인의 로브는 곱게 접어 한쪽 구석에 두었다.
아슬아슬하게 그때 솔라르 경이 돌아왔다. 한창 성녀님이 바쁠 때 보낸 탓에 시간이 걸린 모양이었다.
“성녀님께서 지금 오면 차를 마실 짬이 난다고 하십니다.”
다행히도 그는 내가 밖에 나갔다 온 것을 모르는 듯했다.
“알겠어요.”
그의 눈에 띄지 않게 로브를 더 밀어 숨긴 뒤, 나는 성녀님과 차를 마시러 갔다.
성녀님께 한참이나 가르침을 받고 나자 점심때가 훌쩍 지났다. 성녀님은 즐거워 보이셨지만, 나는 살짝 지쳤다.
얼른 침대에 누워 쉬고 싶을 만큼.
“집으로 돌아가요.”
“예, 아가씨.”
마차에 앉은 나는 편하게 기대앉았다. 어쩐지 계속 아스테인의 라일락 향이 주변에 맴도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날 위해 애써준 덕택에 엘라네르를 찾는 일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젠 그 아이를 찾으면 어떻게 설득할지를 고민할 차례였다. 엘라네르도 자신과 제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를 원망한다면 일이 쉬워질 텐데…….
고민이 깊어질 때, 갑자기 마차가 멈춰서더니 마부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해야지! 이게 누구 마차인 줄 알고!”
“알기에 왔습니다! 예비 성녀님 아닙니까? 제발, 제발 우리 딸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무슨 소리지? 나를 찾는 것 같은데?
순간, 나가도 될까 망설여졌다. 후작이 말했던 의미를 깨달았다. 내가 밖으로 돌아다니면 안 되는 이유가 이거였다.
성녀에게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
그들과 접촉하다 내가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져서는 안 됐다.
“괴질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어요. 우리 딸만이 아니라 빈민가의 아이들이 전부요!”
뭐지? 왜 아이들이 죽어간다는 거야?
도저히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빈민가 출신이었다. 빈민가를 떠돌다 아버지가 후원하는 고아원에서 겨우 목숨을 구한 아이.
빈민가에 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게는 고향 같은 곳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마차 문을 박차고 나갔다. 여차하면 성녀님을 부르면 될 것이다.
“아이고 성녀님, 도와주세요. 우리 아이들 좀 살려주세요.”
“아가씨, 후작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마부와 나를 호위하는 가문의 기사는 이 상황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나는 예비 성녀임에도 후작가에서 철저히 무시당하는 처지였으니.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나요?”
조금은 단호한 내 태도에 두 사람의 불만은 표면적으로 가라앉았다.
그걸 보고 여자에게 몸을 돌렸다.
“상황 설명을 해 봐요.”
낡은 옷을 입은 여자는 내게 눈물 섞인 하소연을 했다.
아이들이 오전에 갑자기 거품을 입에서 뿜으며 쓰러졌다는 사실을. 의사를 불러도 빈민가에는 와주지 않아 급히 신전으로 오다가 푸토르 가의 문양을 봤단다. 그리고 마차의 창으로 비치는 내 푸른 머리카락도.
“제발 살려주세요. 부탁할 곳이 없어요.”
여인에게 증상을 몇 가지 더 물은 나는 작게 확신했다.
신성력이 없어도 나는 아이들을 구할 수 있다.
“당장 빈민가로 가요.”
* * *
빈민가, 그곳은 여전히 어두침침한 불행의 그늘이 감돌고 있었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그래도 아이들은 희망찬 웃음소리를 내곤 했는데. 오늘은 아픔을 이기지 못하는 아이들의 곡소리만이 이어졌다.
“으아아앙, 엄마아!”
“괜찮아! 성녀님을 모셔왔어.”
솔직히 긴장됐다. 내가 잘못짚은 것이면 어쩌나 싶었다. 그러면 반드시 신성력이 필요한데.
그래도 내게는 신성력 대신 회귀라는, 신이 유일하게 준 선물이 있었다.
나는 회귀 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러니 할 수 있을 거야.
“오늘 아침에 아이들이 산에 다녀오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집에서는 아직 먹은 것이 없나요?”
“네, 배가 고프지 않다며 뛰어놀더니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고 토하면서 쓰러졌어요.”
그때와 같다. 이건 괴질이 아니었다.
나는 빈민가 근처의 텃밭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다행히도 그것들이 많이 자라 있었다.
“봄이라 다들 예상 못 했겠지만, 독버섯에 중독된 거예요. 일단 아이들을 바른 자세로 앉혀서 속에 든 걸 게워 낼 수 있게 도와요. 토사물이 숨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게 하고요.”
빠르게 설명을 끝낸 나는 바로 텃밭으로 달려가 보라색 꽃망울이 맺힌 식물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맨손으로 흙을 파면서 사람들에게 외쳤다.
“벨라돈나 풀의 잎과 뿌리가 필요하니 최대한 많이 캐야 해요.”
내 외침에 빈민가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나는 내 곁에 멀뚱히 선 호위에게 명령을 내렸다.
“불을 피워요. 달여야 하니까! 빨리요.”
얼떨결에 그는 빈민가 사람들이 준비해주는 냄비 아래에 장작을 놓고 불을 피웠다. 냄비가 달궈지자 사람들이 벨라돈나의 잎과 뿌리를 쏟아부었다.
나는 그것을 열심히 으깨며 달였다.
“깨끗한 물이 필요해요.”
“마을 외곽에 우물이 있긴 한데……. 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차를 타고 빨리 물을 떠 와요. 만약 물이 없으면 이웃 마을이라도 다녀오고!”
어느 정도 즙이 나온 뒤 내 손수건으로 건더기를 걸러냈다. 빈민가 사람들의 옷은 더러우니까.
때마침 마부와 마을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구해왔다.
거기에 나는 벨라돈나 즙을 10분의 1 정도 넣어 희석했다.
“아이들의 입에 조금씩 흘려보내요. 단, 한 컵 분량을 내일 아침까지 나누어 먹여야 해요. 한 번에 먹이면 벨라돈나의 독에 중독되어 착란을 일으켜서 위험해요.”
회귀 전, 신성력을 쓸 수 없었던 나는 혹시라도 다급할 때 도움이 될까 하여 약초학 공부를 했었다. 그 자료들은 훗날 마녀의 증거로 사용됐지만.
그래서 이렇게 나선 것에 두려움은 있었다.
아이들에게 약을 먹이는 것을 보는 동안 초조한 마음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효과가 없지는 않을지, 사람들이 이번에도 이상한 오해를 하진 않을지.
“경련이 줄고 있어요!”
“어, 엄마, 목말라.”
다행히 대부분 느리지만 조금씩 반응이 왔다.
그걸 보고 깊은 한숨을 내보냈다. 다행이야, 정말로.
하지만 역시나 좋지 않은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신성력으로 치료하면 더 빨리 낫지 않아?”
회귀 전과 같았다. 저런 의심이 쌓이고 쌓여 내가 마녀로 몰렸으니까.
그때의 아픔으로 잠시 숨이 막혔다. 하지만 나는 곧 손에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신성력을 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안쓰러운 이들을 늘 곁에서 도와주고 싶지만,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반년 뒤 성녀님께 신성력을 조금 얻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신전의 사람들과 아버지는 내가 빈민들을 위해 신성력을 쓰는 것에 늘 반대해 왔으니. 그들에게 신성력을 써야 하는 대상은 빈민이 아닌 귀족과 황족이었다.
“내가 매번 빈민가로 와서 사람들을 구할 수도 없지 않나요?”
조금은 냉정하게 말했다.
모두의 관심밖에 사는 이들에게 자립할 방법을 알려주려면 그래야 했다.
“그래, 성녀님이 한가하신 것도 아니고 우리 애들은 우리가 지켜야지.”
다행히 사람들에게 내 뜻이 전해졌다.
“그러니 차라리 유용한 약을 다양하게 알려주도록 하죠. 내가 늘 당신들을 구해 줄 수 없으니.”
마녀로 몰렸던 약초 사용법을 이들에게 알려줬다. 독초로 알려진 약초들을 약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사람들의 상식에 반하는 일이었다.
“다들 기억할 수 있나요?”
“네! 노력하겠습니다!”
“좋아요. 여름 전에 또 올 테니까 잘 기억해줘요.”
“감사합니다. 성녀님!”
아이들의 부모가 내 손을 덥석 잡고 고개를 숙였다.
“성녀님, 아이들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얼떨떨했다. 분명 이들에게 도움이 된 일은 맞았으나, 진짜 성녀가 하는 행보와는 전혀 달랐으니.
“빈민들을 위해 이렇게 애써주시는 성녀님은 성녀님이 처음입니다.”
성녀라는 소리가 듣기 거북했다.
지금은 성녀라고 하지만 나중에는 다들 가짜라서 그랬다며 입방아에 올릴 것이다.
“이만 가볼 테니 내 경고를 잘 기억하길 바라요.”
그런데 날 보는 호위 기사와 마부의 시선이 바뀌었다.
그게 조금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돌렸다.
“잠깐, 저건……!”
붉은 머리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엘라네르, 진짜 성녀.
그녀가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
쫓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으로 엘라네르의 흔적을 뒤좇으려는데 방해꾼이 있었다.
“아가씨, 이젠 진짜 너무 늦었습니다. 벌써 해가 넘어가려는군요, 후작님께서 걱정하시겠습니다.”
솔라르 경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사이 엘라네르의 흔적이 사라져버렸다.
날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진짜 신성력을 지닌 성녀라는 것을 안다면,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오해를 할지도 몰랐다.
얼른 엘라네르를 만나서 혹시라도 있을 오해를 풀어야 해.
“비켜요, 아직 할 일이 끝나지 않았어요.”
솔라르 경을 밀어내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다급히 빈민가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지만 엘라네르는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 빈민가는 그만 돌아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내 의도를 잘못 이해한 솔라르 경의 청에 겨우 발길을 돌렸다.
어차피 엘라네르를 찾아내더라도 솔라르 경 앞에서는 자유롭게 대화하긴 힘들었다.
아스테인도 찾고 있으니까, 참자.
“출발하세요.”
억지로 마차에 오르고 나자 뒤늦게 후환이 두려워졌다. 아마 아버지는 내가 멋대로 빈민가로 찾아간 일을 질책할 것이다.
겉으로는 고아원을 만들고 그들을 후원하는 자애로운 귀족이었다. 또 성녀의 오라버니이자 예비 성녀의 아버지로 존경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빈민가 사람들을 지독히도 무시하고 경멸했다.
나를 협박할 때 고아원의 아이들을 인질로 삼은 것도 애초에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은 탓이었다.
“후우.”
집에 도착한 뒤, 조금은 각오를 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어쩐 일인지 아버지는 내가 돌아오고도 한참이나 나타나질 않았다.
불길한 예감을 숨기고 목욕부터 했다.
“아가씨, 식사 준비 끝냈어요.”
곧 셀레미온은 내가 야위어 간다면서 잔뜩 음식을 준비해줬다. 하지만 그것들이 잘 넘어가진 않았다.
겨우 수프와 빵을 조금만 입에 넣고는 셀레미온을 불렀다.
“아버지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외출하셨다는데 언제 오실지 모르겠네요.”
무엇 때문에 나갔는지는 알 것 같았다.
블루 로즈에게 의뢰하기 위해서겠지.
“집사님은 아시지 않을까요?”
별로 묻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최측근은 집안에 민폐를 끼치는 날 벌레 보듯 경멸하는 자였다.
특히 내가 가짜 성녀가 되기로 하고 신전으로 가기 직전, 그는 다른 사용인들과는 달리 내게 인사를 하러 오지도 않았다.
“집사는 어디 있어?”
하지만 불편하다는 이유로 매번 피할 수는 없었다.
마음을 굳히고 집사를 찾아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언제나처럼 호칭도 붙이지 않는 딱딱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예전처럼 냉랭한 눈빛도 함께.
하지만 그것에 주눅 들어 무시 받던 여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어딜 가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