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지켜야 하는 사람
그때의 끔찍했던 순간들은 내 몸 가득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셀레미온의 죽음, 신전에서 날 수발들던 아기 사제님들이 탄 마차가 구르는 사고, 내가 살았던 고아원에 났던 화재까지.
회귀 전의 나는 무력하게 모든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아무것도 지켜주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버티고 또 버텼었다.
“사제들과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신성력을 쓸 일이 없었는걸요.”
내 말대꾸에 바로 아버지의 손이 올라갔다.
평소 같으면 그것이 올라가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을 것이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눈을 똑바로 뜨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예비 성녀가 계속 숨어 지내는 것이 더 의심 사기 쉬운 일 아닌가요? 기도를 매일 드리고 성녀님 곁을 지키는 것이 예비 성녀가 할 일이에요.”
내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예전의 나로 살 수 없었다.
겁은 났다. 다시 얻은 기회, 그것을 내가 제대로 지킬 수 있을지 걱정도 됐다.
하지만 피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다. 지난 삶에서 너무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배웠다.
“그러다가 네게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들키면?”
내가 가짜라는 것은 나에게도 약점이지만 아버지에게도 치명적인 급소였다. 그러니 내가 눈치를 보고 살 필요는 없었다.
“성녀님께서 제게 조금씩 신성력을 넘겨주신다고 했어요. 차라리 그렇게 받은 신성력으로 작은 기적이라도 만들고 다녀야 사람들이 절 진짜라고 믿죠.”
의견이 없던 사람이 의견을 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지도 몰랐다.
하지만 엘라네르를 찾을 때까지는 아버지를 속여야 했다. 말 잘 듣는 딸이라고, 진짜 성녀가 될 준비가 된 자라고 믿도록.
“흠, 일리는 있구나.”
다행히도 그는 순순히 넘어와 줬다. 덕분에 나는 이제 매일 아스테인을 만날 기회까지 얻었다.
“좋다. 그건 허락하마. 제발 기도를 해서 신성력을 다시 얻어 자유롭게 쓰도록 해. 그게 네가 살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그건 불가능한 미래였다.
죽음 직전에 찾아온 신성력. 어쩌면 그것마저 내 것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내 것은 아주 미약했으니.
“알겠어요. 노력할게요.”
최대한 성실한 딸의 모습을 연기하며 그에게 답했다.
아버지는 뭔가 바뀐 내 태도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너, 도대체 아까 그자와는 어떤 사이인 거지?”
“아까 그분이 말씀하셨던 그대로예요. 성녀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마차가 바위를 피하려다 진창에 빠져서 곤란해하던 절 도와주신 거예요.”
“그자와는 얽히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아버지의 미간이 좁아졌다. 세로로 나란히 잡힌 주름에는 아스테인을 향한 경멸과 무시가 섞여 있는 듯했다.
“누구길래요?”
“단델리온 대공. 폐하의 이복동생이지.”
아버지의 말에 나는 오래전, 흐릿한 기억 하나를 끄집어 올렸다.
황제의 여러 이복동생 중 하나가 영지와 작위를 황제에게 헌납하고 사라졌다.
혹자는 그가 황제의 미움을 받아 쫓겨났다고 했고, 어떤 이는 황제의 손에 이미 암살당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사라진 대공이 아스테인인 걸까?
“폐하께서 가장 미워하는 동생이다. 그 어미가 폐하의 모후를 암살하고 황후가 됐다고 생각했거든. 백작의 사생아가 선황의 씨를 훔쳐 황후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서 희대의 악녀라고 불렸지. 그런 여자의 아들과 어울려서 성녀 이미지에 흠을 내지 말아라.”
그가 오늘 성녀님과 나누었던 대화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아스테인이 안타까워졌다.
지금의 황제는 1년 반 정도 뒤에 지병으로 급사할 예정이었다. 자식도 없이. 그리고 이어졌던 형제들의 황위 쟁탈전.
황위 계승권을 버리기에 아스테인은 아까운 인재였다.
“왜 대답이 없지?”
“알겠어요…….”
“네가 나쁜 소문에라도 연루되면 카렌시아의 명성에 금이 가니 조심해. 황후 폐하께 폐를 끼치면 용서치 않을 거다.”
내가 가짜 성녀가 돼야 했던 이유 중 하나를 언급하는 아버지를 조금 원망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조금 아팠다. 친딸이 아니라는 이유로 버리는 사냥개가 되어야 했다는 사실이.
쫙, 내 뺨에서 마찰음이 울리자 그 사실이 더 와닿았다.
“어딜 감히 노려보는 거지? 네가 겁을 상실했나 본데, 잊지 말아라. 네 위치와 처지가 무엇인지.”
해결책을 찾느라 밤새 잠을 자지 못할 만큼.
* * *
어두운 다락방, 오늘도 그곳에 홀로 갇혔다. 나는 아직도 뜨거운 뺨을 차가운 손으로 식히고 있었다.
오늘 허락받지 않고 밖으로 나간 죗값이었다. 빛조차 들어오지 않게 모든 문을 닫고, 등불까지 모조리 꺼버렸다.
암흑 속에 버려진 느낌. 웅크리고 있으려니 회귀 전에 다쳤던 곳들이 조금씩 욱신댔다. 실제의 고통처럼 온몸을 찔러대며 괴롭혔다.
“싫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가상의 고통마저 희미해져 갈 때 즈음, 약한 빛이 다락방으로 새어 들어왔다.
“아가씨!”
셀레미온은 어둠을 뚫고 내 곁으로 왔다. 그 아이는 내 곁에 달그락 소리를 내며 무엇인가를 내려놓았다.
“여기 빵이랑 수프예요. 토미 아저씨가 그러는데 신전에서도 드신 것이 없다면서요. 온종일 굶으시면 어째요. 이거라도 드시고 기도하세요.”
셀레미온의 걱정이 내게 닿자 속이 울렁였다. 내게는 지켜야 하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었다.
아스테인도, 나만 따르는 이 작은 소녀도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이었다.
셀레미온이 건넨 딱딱한 빵과 식은 수프를 천천히 꼭꼭 씹어가며 삼켰다.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다시 찾아온 셀레미온은 환하게 웃으면서 다락방의 문을 열어줬다.
“아가씨 이제 나와도 된대요.”
어느새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대부분 잠이 들었는지 저택은 조용한 침묵만 흘렀다.
“방으로 가실래요?”
“아니, 갑갑해서 조금 산책이라도 할게.”
“후작님께서 아가씨가 돌아다니는 거 보면 뭐라 할지도 몰라요.”
셀레미온이 조금 불안한 듯 나를 돌아봤다.
“괜찮아. 잘 피해 다닐 거야. 그리고 운동도 좀 해보려고.”
“운동이요?”
엘라네르를 찾아 성녀로 내세운 뒤, 후작가의 죄를 밝힐 생각이었다. 그 뒤에는 어디로든 도망가 혼자 살아갈 생각이었다.
지금처럼 허약해 빠진 몸으로는 도망치는 것조차 무리였다.
성녀로만 키워져서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고작 회귀 전에 혼자 공부한 약초학이 전부이니,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 계획을 세울 시간도 필요했다.
“응.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것 같아서.”
셀레미온은 이런 나를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혼자 갈 테니까 너는 먼저 가서 자렴.”
“네. 밤에는 아직 차니까 너무 오래 밖에 계시진 마세요.”
셀레미온을 따돌린 나는 후원으로 갔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에 힘을 줘봤다. 하지만 역시나 신성력은 내 차지가 아니었다.
“그럼 그렇지.”
아무런 힘도 없는 가짜. 나는 여전히 신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깊은 한숨이 밀려 나왔다. 어쩌면 이번 생에서는 내가 진짜 성녀이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아스테인과 함께 신전에서 지낼 수 있었을 테니.
상념에 빠져 걷다 보니 후원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그곳의 가제보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이 밝혀져 있었다.
“누구지?”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의아함을 느낀 나는 가제보 근처의 장미 넝쿨 뒤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단델리온 그자가 성기사가 되려고 한답니다.”
“그래? 폐하께서 한시름 놓으시겠군.”
“만약 성기사가 되지 않는다면 조용히 암살하라 하셨습니다.”
심장이 쿵쾅댔다.
황제가 아스테인을 미워한다더니 암살까지 계획하고 있는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흠, 그전에 그냥 죽여버리면 안 되나? 오늘 내게 모욕을 줘서 말이야.”
“그것도 폐하께서는 좋아하시겠군요.”
“좋아. 그럼 내가 살수를 고용하지.”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주 유쾌하게 울렸다.
도대체 나는 방금 뭘 들은 걸까? 내 심장 소리가 어찌나 큰지 내 존재를 들킬까 걱정될 정도였다.
“보통의 살수로는 안 됩니다. 괜히 실패했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폐하만 곤란해집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모르나? 돈만 주면 뭐든 한다는 블루 로즈 말일세.”
“암흑 길드요? 그렇군요. 그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군요.”
암흑 길드 블루 로즈, 나도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비록 가짜지만 성녀로 살던 나와는 대척점에 존재하는 이들.
의뢰받은 일에 실패하는 법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살인을 즐긴다는 소문도 있었고, 돈을 많이 줄수록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들을 어찌 만납니까? 의뢰하기조차 어렵다 들었습니다.”
“후후, 내게 다 방법이 있지.”
“그렇게나 대공이 싫으십니까?”
“감히 성녀의 오라버니이자 예비 성녀의 아비를 모욕한 자다. 심지어 내가 황후 폐하의 아버지인 것을! 나를 무시함은 황제 폐하를 무시한 것이지! 그런 건방진 놈은 미리 싹을 잘라야 해.”
아스테인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정보를 캐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더는 쓸 만한 정보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 떨리는 심장을 조심히 부여잡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어쩌지?”
걱정과 동시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모두 내 탓이었다.
나를 바래다주려고 왔다가 아버지와 문제가 생긴 거니까. 지워진 과거 속에는 없었던 일에 크게 당황했다.
* * *
새카만 어둠으로 물들었던 밤하늘에 붉은 여명이 번져나갔다. 나는 해가 완전히 뜨기 전 신전으로 갈 준비를 끝마쳤다.
“프레이아, 벌써 신전에 가는 것이냐?”
아버지는 나를 배웅하겠다며 나왔다. 한 번도 하지 않던 그의 배웅에 눈동자가 흔들릴 뻔했다.
“네, 다녀올게요.”
“제발 푸토르의 자녀답게 성녀로서의 위엄을 되찾았으면 좋겠구나. 반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알고 있겠지?”
반년, 이것은 내가 도망칠 준비를 할 시간이기도 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놨지만, 네가 힘을 되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노력할게요.”
나는 어제보다 상태가 아주 조금 나아진 마차에 올라탔다. 겉모습만 어제보다 나아진 것이지 덜컹거림이 줄어들진 않았다.
흔들리는 마차만큼이나 불길하게 떨리는 마음을 안고 신전으로 향했다. 신전에 도착한 뒤, 성녀님께는 인사만 드렸다.
아버지에게 약속한 것처럼 기도하는 척해야 했으니.
나만의 기도실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맞잡았다. 자세를 잡은 나는 고개를 들어 천장의 장식을 바라보았다.
내 머리 색과 닮은 물빛 날개. 나는 그것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제발 소중한 이를 또 먼저 잃게 하지 말아주세요.”
몇 번이고 데아 님께 기도했다. 나는 데려가도 좋으니 아스테인만은 살려달라고.
끝없는 기도가 끝나갈 무렵, 천장에서부터 햇빛이 스며들었다.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빛이 났다.
그중 푸른 날개가 가장 환하게 빛이 날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라르 경, 성녀님께 오전 기도 시간이 끝나면 차를 함께 마실 수 있는지 여쭤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어제 급하게 왔을 때와는 달리 아버지가 감시 겸 호위를 붙였다. 아버지의 끄나풀을 따돌린 뒤, 나는 조용히 기도실을 빠져나갔다.
라일락 나무 아래로 걸어가는 동안 내 심장은 다시 두근두근 커다란 소리를 냈다. 어젯밤부터 뛰던 소리와는 결이 달랐다.
이 소리의 의미를 알았다.
설렘과 기대. 아스테인을 또 만날 수 있다.
“왜 늦지……?”
하지만 그는 내게 기다림을 안겨줬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설마 벌써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나는 머리를 힘껏 휘저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나무 아래 기대어 서서 눈을 감았다.
어제 낮에만 해도 따뜻했던 봄바람이 조금은 서늘하게 느껴졌다. 봄은 아직 덜 온 걸까?
그때 따사로운 봄 햇살이 내 귓가에 닿았다.
“아직은 춥습니다. 너무 얇게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더 따뜻한 아스테인의 마음이 내 어깨에 닿았다. 그는 입고 왔던 로브를 내 어깨 위에 걸쳐줬다.
그의 보라색 눈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와는 달리 너무나 따스한 눈으로.
“저만 추운 게 아니잖아요. 아스테인 경, 아니 단델리온 대공님도 추우시겠어요.”
“저는 달려오느라 전혀 춥지 않습니다.”
얼굴을 붉히면 아스테인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숙여버렸다. 그를 쳐다보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막지 못할까 봐.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빠르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신 분과 비슷한 여인을 세 명 찾았습니다.”
다행히도 아스테인은 나의 이상한 상태를 모르고 평소처럼 이야기했다.
“그러나 알려 준 정보와 하나씩 다른 부분이 있어서 먼저 확인하셔야 합니다.”
“제가 신전 외에는 돌아다니기가 힘들어요.”
내 말에 아스테인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미안했다. 그를 번거롭게 만드는 것 같아서.
“그럼 제가 한 명씩 데리고 이렇게 찾아오겠습니다. 그러면 프레이아 님도 편하시겠지요.”
“네, 감사해요.”
“그럼 전 이만…….”
아스테인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됐다. 나는 손을 뻗었다가 차마 그의 몸에 대지 못하고 내렸다.
“저기, 잠시만요.”
대신 다급하게 그를 붙들었다.
내 부름에 그의 걸음이 멈췄다.
그런데 다급했던 입과 달리 아직 생각은 정리하지 못했다. 뭐라고 경고해야 할까?
내가 아무리 예비 성녀라 한들 내 말을 무조건 믿어줄 수 있을까? 회귀 전의 그는 날 다 믿어줬지만…….
“무슨 일이십니까?”
“그게…….”
잠시 숨을 골랐다. 그때 내 눈에 곳곳에 장식된 푸른 날개가 보였다. 그걸 보자 내 입에서 자연스레 거짓말이 흘러나왔다.
“신께서 지난밤에 꿈을 통해 제게 말을 전해주셨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블루 로즈를 조심하셔야 해요. 당신을 죽이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