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성녀는 진짜가 되기로 했다-3화 (3/101)

3화. 그와 나의 새로운 만남 (2)

아스테인은 날 가볍게 끌어당겼다.

너무도 쉽게 말에 오른 나는 아스테인의 앞자리를 차지했다.

“고, 고마워요.”

처음으로 말을 타보는 거라 잔뜩 긴장됐다. 높은 시야도 무섭고 다리 밑에 있는 생명체가 꿈틀대는 느낌도 생소했다.

특히 말이 숨 쉬는 것과 심장이 뛰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순간 괜한 짓을 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말의 갈기나 제 팔을 잡고 편하게 앉아 계시면 됩니다.”

내가 말의 것을 느낀다면 내 등 뒤의 이 남자도 내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낄 거 아냐.

설마 이렇게 두근대는 날 보고 경박하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긴장하셨습니다.”

“말은 처음 타 봤거든요.”

“배려하지 못했군요. 죄송합니다.”

그냥 긴장한 탓이라고만 생각해주면 다행이었다. 고맙게도 그는 내 몸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말의 갈기를 잡으면 말이 아파할 것 같고, 그의 팔은 도저히 잡을 용기가 없고.

결국 말의 안장 앞부분을 꽉 잡았다.

“출발하겠습니다.”

아스테인에게 빈민가로 가자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많이 긴장했다.

안장을 잡은 손에 힘을 주자 그의 발이 말을 톡톡 자극해주었다. 그러자 말이 서서히 앞으로 갔다. 그 움직임에 내 몸은 더 굳어버렸다.

“그렇게 긴장하시면 힘이 들 겁니다.”

“네? 네……. 하지만 떨어질 것 같아서…….”

역시 무리였나? 욕망 때문에 말에 탔지만 나와 아스테인은 전혀 닿지도 않고 여전히 멀기만 했다.

“제게 기대시면 편합니다.”

아스테인의 말에 갑자기 심장이 더 쿵쾅댔다.

“제 가슴에 기대십시오. 그렇게 긴장하고 있다가는 내일 근육통으로 고생할 겁니다.”

하지만 나는 기댈 수가 없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혹시라도 이상한 추문이 돌까 봐 무서웠다. 평생을 그러면 안 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탓에 사람들의 시선이 무섭기만 했다.

“하아…….”

그때 귀에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내가 답답한 모양이었다.

대신 말의 속도가 빨라졌다. 그리고 대로를 벗어났다.

“어디로 가는 거죠?”

아스테인을 믿었기에 그가 나쁜 마음을 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가 이런 갑작스러운 행동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내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말을 몰았다.

잠시 후, 말을 세운 곳은 숲이었다.

그를 닮은 라일락 향이 가득한 연보랏빛 숲.

“여기는…….”

“사실 아까 신전에서도 계신 걸 봤습니다.”

“…….”

“그때부터 느낀 건데, 계속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 걱정됐습니다.”

그 말에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그는 회귀 전에도 언제나 세심하게 내 상태를 살펴줬다.

아버지가 다녀가는 날이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내게 따뜻하고 달달한 밀크티를 가져다주었다. 조금만 늘어져 보이면 늘 꽃을 보자며 산책을 권하고는 했다.

단 한 번도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지금처럼 내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며 기다려줬다.

“감사해요.”

말에서 잠시 내려 한참을 눈을 감고 라일락 향에 취해 있었다. 달콤하면서도 끝에서 나를 상큼하게 훑고 지나가는 향이 좋았다.

잠시 무거웠던 마음을 내려놓게 할 만큼.

어쩌면 낯익은 순간이었다. 기억 속 깊은 곳에서 나를 따스하게 감싸주던, 그런 포근한 느낌. 그게 가슴속에 몽글몽글 피어올라 내게 작은 용기를 주었다.

“이만 돌아가도 될 것 같아요.”

“정말이십니까?”

“네, 생각이 완벽하게 정리됐어요.”

운신이 좁은 내가 움직이는 것보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조심스레 눈을 휘어주자 그도 향긋하게 웃어줬다.

“다행입니다.”

다시 말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내 자세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변했다.

아스테인에게 살짝 기대앉을 만큼.

문득 지난 삶에서도 지금의 삶에서도, 내가 가장 의지하는 사람은 단 한 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등을 단단히 받치고 있는 아스테인, 단 하나.

그래서 생각한 일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저기, 아스테인 님?”

어차피 내가 무언가를 부탁할 수 있는 사람도 아스테인밖에 없었지만.

“무슨 일입니까? 말씀하십시오.”

“부탁이 있어요. 사람을 찾아 줄 수 있나요?”

“누굴 말입니까?”

“……푸토르 후작님의 사생아요.”

내 말에 아스테인이 잠시 침묵했다. 황당할 것이다. 오늘 처음 만난 여자가, 그것도 예비 성녀라는 사람이 제 아버지의 뒤를 캐어달라 했으니.

“저와 신전의 미래를 위해서입니다.”

가문의 반대에도 성기사가 되려 할 만큼 성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신전을 핑계 대면 되지 않을까?

“그녀가 꼭 필요해요. 제가 믿고 부탁할 만한 분이 아스테인 님뿐이라…….”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였다. 바보같이.

“오늘 신전에서 성녀님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어요. 곧 성기사가 되신다면서요. 그러면 저와 같이 일을 하실 분이니까…….”

부끄러운 마음에 주절주절 말을 이어갔다. 한참이나 대답이 없던 그는 뜸을 들이다 겨우 대답을 해줬다.

“네, 알겠습니다. 특징이나 단서가 있습니까?”

“이름은 엘라네르, 빈민가에 살고 있어요. 붉은 머리에 황금색 눈을 하고 있고 저랑 나이가 같아요.”

내가 기억하는 정보들을 하나하나 다 이야기했다. 이 정도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절대 흔한 외모가 아니었으니.

“최대한 빨리 찾아주셔야 합니다. 찾은 후에는 신전도, 아버지도 알 수 없는 곳에서 보호해 주셔야 해요.”

미래를 바꾸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쉬운 길은 아스테인이 성기사가 되지 않게 말리는 것이었다. 그를 봤을 때만 해도 그렇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그의 곁에 있으니, 도저히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가 성기사가 되는 것을 포기한다면, 그와 나의 연결고리는 사라질 것이다.

욕심인 것은 알지만, 아직은 그의 곁에 며칠이라도 머물고 싶었다. 예비 성녀와 성기사라는 이름을 붙잡아서라도.

그래서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가 원하는 길을 걷게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아스테인의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했다.

그러니 엘라네르가 성녀 검증에 나서면 된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먼저 가짜 성녀가 되더라도 내가 엘라네르를 찾아 내세우고 죄를 빌 생각이었다. 후작이 그때의 비극을 되살리기 전에.

“가능할까요?”

“제 휘하의 녀석들이라면 충분히 빨리 찾아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보호로군요. 무작정 제 수하들을 믿고 따를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일단 신성력을 가진 엘라네르가 얌전히 아스테인의 곁에 머물려고 할까?

보호를 위해서라고 해도, 믿지 않고 도망치거나 숨어버리면 곤란했다.

“죄송해요, 부탁을 바꿀게요. 은밀하게 그녀의 위치를 파악한 뒤에는 일단 무조건 절 만나게 해주세요.”

비록 그때는 나와 원수지간이었지만, 본질은 선함의 상징인 성녀였다. 절대 내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자리를 처음부터 돌려주고 후작가의 죄를 묻겠다는 것이니.

“그러면 제가 그녀를 설득할게요.”

“알겠습니다.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아직 성녀의 신분도 아닌데 부탁드려서요.”

“아닙니다. 얼마든지 시키십시오. 그런데 중간보고는 어찌해야 할까요? 프레이아 님과는 개인적인 만남이 쉽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푸토르 후작의 일이니 들켜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것이 심장을 다시 콩닥콩닥 튀어 오르게 했다. 볼도 뜨겁게 만들었고.

“네, 비밀은 꼭 유지해주셔야 해요. 그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돼요.”

내가 이런 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아버지는 경을 칠 것이다.

게다가 나는 아스테인을 마음껏 만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매일 아침 신전으로 가서 기도를 드릴 예정이에요. 정원에 있는 라일락 나무 아래에서 기다릴게요. 오늘 성녀님과 아스테인 님이 뵙던 시간에요.”

“괜찮은 생각이군요.”

그렇게나 가기 싫었던 신전으로 갈 이유가 생겼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참아야 했다.

덕분에 너무 먼 미래를 꿈꿨다.

성기사는 언제든 신전을 떠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성녀의 운명에서 벗어나기만 한다면, 아스테인과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매일 오전, 라일락 나무 아래에서 프레이아 님이 오시길 기다리겠습니다.”

귓가에서 울린 아스테인의 달콤한 목소리에 심장이 터질 뻔했다.

후작가의 정문이 보여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나는 그대로 아스테인에게 도망치게 해달라고 부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가는 그가 후작가와 신전 모두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인데도.

“여기서 내릴게요.”

정문에서 살짝 먼 곳에서 아스테인에게 말했다.

아버지나 사용인들의 눈에 띄는 건 좋지 않았다. 내가 혼나는 것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분이라면 분명 아스테인을 괴롭힐 것이었다. 특히 아스테인이 힘없는 가문 출신이라면.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아스테인은 말에서 내려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다 조심스레 내 손을 겹쳤다.

그러자 그가 힘을 주어 나를 잡아당겼다.

떨어지는 느낌, 이건 좋지 않았다. 절벽에서의 느낌과 같아서.

하필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 소리를 내며 살짝 앞발을 들었다. 공포심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 몸을 제어하지 못한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구를 위기에 처했다.

“프레이아 님!”

이번에도 아스테인은 그날처럼 나를 무사히 받아내 주었다. 심지어 이번에도 그가 먼저 바닥에 닿아버렸다.

나쁜 기억이 다시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피투성이였던 그와 그 안에서 보호받아 팔과 다리만 조금 부러졌던 나.

운명에서 벗어날 테니 괜찮다며 다짐하고 다짐하려 하는데도 몸이 살짝 떨렸다.

“괜찮으십니까?”

놀랍게도 아스테인의 목소리가 나를 진정시켰다.

떨렸던 심장이 차분하게 다시 뛰었다.

눈을 뜨고 보니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거리.

당황한 나는 얼른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네, 괜찮아요. 감사…….”

“프레이아! 이게 무슨 짓이냐?”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께 들켰다.

“성녀가 될 아이가 대낮에 근본도 모르는 남자와 이 무슨 해괴망측하게!”

아버지의 불호령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아스테인은 그런 날 감싸며 부축해줬다. 오늘 처음 나와 인사를 나누었을 때보다 더 사무적으로 굳은 얼굴로.

그는 날 일으켜 세운 뒤 아버지를 향해 돌아섰다.

“푸토르 후작, 오랜만이오.”

나는 그의 말투에 깜짝 놀랐다. 놀란 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두 눈을 크게 뜨고 파르르 떠는 모습은 내가 살면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더러 근본도 모르는 남자라 했던가? 그건 내 어머니의 출신을 비하하는 말 맞나?”

도대체 아스테인이 누구길래 날던 새도 신의 축복을 받아 어깨 위로 내려 앉힌다는 푸토르 후작을 쩔쩔매게 하는 걸까?

“죄, 죄송합니다. 각하.”

각하? 나는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대화에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나보다 더 당황한 얼굴의 아버지를 마주해야 했다. 아스테인을 보는 그분의 눈이 불쾌함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애써 분한 감정을 숨기는 듯했다.

“사과했으니 나도 못 들은 것으로 하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예비 성녀님은 신전에서 오시는 길에 마차가 진창에 빠져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을 내가 발견하고 모셔온 것이다. 불필요한 오해는 하지 않도록.”

“네, 각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를 살짝 물며 대답하는 아버지는 자존심이 상해 보였다. 푸토르 후작가의 자긍심 같은 것은 버린 듯이 얼굴에 있어야 할 평온은 깨져 있었다.

“예비 성녀님께서 타시는 마차가 그렇게 부실해서야……. 청렴한 후작가에서 새 마차를 마련할 돈이 없다면 대공성에서 보내겠네.”

“……아닙니다. 오늘 급히 나가느라 프레이아가 정비가 덜 끝난 마차를 탔나 봅니다. 전용 마차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용 마차 따위는 없었다. 오늘 고장 난 그 마차가 주로 내가 타던 마차였다.

“그래, 성녀님만큼이나 맑고 깨끗하다는 푸토르 후작의 말이니 믿어도 되겠지. 나는 이만 폐하의 부름에 응해야 해서 가보겠네.”

아스테인은 말을 끝내고 내게 몸을 돌렸다.

아버지께 보였던 서늘한 기운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무심하고 무뚝뚝한 얼굴. 그와 나 사이에는 다시 기나긴 거리가 생겨버렸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말에 올라타 떠나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대로의 끝에서 말을 돌리는 동안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게 조금은 아쉽고 서운하기도 했다.

그래도 매일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괜찮아.

“너! 도대체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닌 것이냐?”

감상은 길어지지 않았다. 내 귓가에 쏟아지는 노호에 살짝 몸을 떨어야 했으니까.

“신전에 다녀왔어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아버지께 대답했다.

어제까지의 나는 언제나 시선을 피하거나 대답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심지어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다.

“건방진 것! 어디서 감히 네가!”

내게 화를 내려던 아버지는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보이자 목소리를 낮췄다.

“따라 들어오거라.”

어떤 일이 기다릴지 알고 있기에 따라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지금의 내게는 아직 도망갈 곳이 없으니까.

“무슨 일로 허락도 없이 신전에 간 거지? 그러다가 신성력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른 신관들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어쩌려는 것이냐?”

별채에 있는 다락방.

여기는 내게 끔찍한 기억만 가득한 징벌방이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이곳에 들어온 아버지는 날 몰아붙이고 윽박질렀다.

그 모습 속에서 지난 삶 내게 극약을 내밀던 아버지의 손을 떠올렸다.

[신께서 불렀음을 천명하고 다음 대의 성녀를 뽑는다고 선언해라.]

[저더러 죽으라는 소리인가요?]

[내 따님이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네가 진짜 성녀인 척하고 살아 있으면 되겠느냐?]

[절 버리시는 건가요? 제가 그 뜻을 따를 거라 믿으시나요?]

[싫으냐? 곱게 죽지 않겠다면 네가 소중히 여기던 것을 하나하나 다 찢어 없애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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