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그와 나의 새로운 만남 (1)
아스테인이 다시 죽음의 길을 향해 걸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어가서 말려야 하지 않을까?
“그래요. 그 마음이 변치 않았으면 좋겠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성녀님만 믿고 돌아가겠습니다.”
“네, 다음에 만나는 날은 내 장례식에서겠군요.”
잊고 있었다. 진짜 성녀는 자신의 마지막 날이 다가온 것을 예견할 수 있었다.
내게는 고모뻘인 성녀는 후작가에 그 사실을 전했고, 그래서 이 시기의 아버지는 대단히 예민한 상태였다.
성녀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내가 신성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었으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더 버텨주셔야 합니다.”
성녀님이 떠나는 날은 원래 신전만이 알아야 했다. 후작가에서도 알면 안 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성녀님은 아스테인에게도 말하고 있었다.
“살고 죽는 것은 신의 뜻에 맡겨야겠죠. 신께서는 아마 저를 이 세상에 더 머무르게 할 생각이 없으실 겁니다. 워낙에 여러모로 모자란 성녀니까요.”
성녀님의 목소리에 조금 힘이 없었다. 사실 다른 성녀님들보다 수명이 짧긴 했다.
그것을 그분은 자신이 부덕한 탓이라고 말하곤 하셨다.
“성녀님…….”
“이만 돌아가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네, 아무래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정리해야 할 일들이 제법 됩니다.”
“그래요. 건투를 빌어요.”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나처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하고 일정한 소리였다. 그것이 내 뒤를 따를 때면 늘 든든했다.
긴장과 불안으로 가슴속이 가득 찼던 그 시절 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주던 것인데…….
놓칠 수 없었다. 그대로 그의 발걸음을 쫓고 싶었다. 성기사가 되지 말라는 소리도 해야 했다.
최소한 그의 가문이라도 알아내야 다음 대책을 세울 수 있으니…….
“서, 성녀님!”
“프레이아. 기별도 없이 신전에는 무슨 일이죠?”
내 앞을 막아선 성녀님의 모습에 나는 자동으로 고개가 내려갔다.
본능적인 공포였다. 아버지만큼이나 날 많이 혼낸 분을 만났기에 드는 주눅이었다.
물론 성녀님의 훈계는 아버지의 것과는 달랐다. 늘 엄한 말 속에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그게, 기도를 드리러…….”
“프레이아, 성녀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죠?”
“……당당하고 품위 있으며 분명하게 의사를 전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시선은요?”
나는 말하는 대신 성녀님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으로 답을 드렸다.
그러자 그분은 나를 온화한 눈으로 지그시 바라봐주셨다. 따스하고도 상냥하게.
“신전에 온다는 것을 후작님께는 말씀드렸나요?”
“아니요. 새벽에 꾼 꿈에 마음이 불안하여 급하게 나왔습니다.”
“무슨 꿈이었나요?”
나는 그 말에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가짜 성녀인 것이 밝혀져서 죽는 꿈을 꿨다고 어찌 말할까?
“제 미래에 관한 꿈이었어요. 제 위치가 너무 불안했던 탓 같아요.”
“그렇군요.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신께 답은 얻었나요?”
성녀님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었다. 인자하고 따스한 눈은 내게 진심을 담고 있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럼 프레이아, 나와 차 한잔할까요?”
* * *
응접실에서 나는 의미 없는 대화를 하며 차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계속 한 사람만 떠올라 초조해졌다.
“저기, 성녀님. 조금 전에 만나시던 분은 누구신가요?”
아버지의 통제하에 살아야 했던 나는 사교계 모임이라는 것을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고위 귀족 가문의 사람일지도 모르는 아스테인에 관해 아는 것이 많이 없었다.
“프레이아, 성기사와 성녀는 가장 가깝지만, 거리를 두어야 하는 관계인 것은 알고 있죠?”
성녀님은 조금 단호하게 말했다.
그 말의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평생 여신 데아만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모시며 살아야 하는 존재가 성녀였다.
그 대가로 받은 신성력으로 사람들에게 기적을 내려야 하는 존재이기도 했고.
“그러니 그에게 관심을 두지 마세요. 후작님께서 아시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지 않나요?”
내가 우연히 모르는 남자와 대화라도 하면 며칠씩 다락방에 갇히고는 했다. 욕도 먹고.
“알고 있어요. 그저 어느 분이 가문의 반대에도 성기사가 되려 하는지 깊은 성심에 감동하여 여쭙고 싶었어요.”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신을 향한 찬양과 신앙심에 관한 이야기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성녀가 되고 싶었던 그때와 달리 이상하게 집중이 되질 않았다.
“내가 떠나는 날이 언제인지 전해 들었죠?”
하지만 지금의 이야기에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비극이 시작되는 날이니까.
“네…….”
“신성력에는 변화가 있나요?”
대답할 수가 없었다. 회귀 직전, 찾아왔던 신성력은 나에게 기적을 안겨주고 흩어졌다.
그 힘이 내게 아직 남아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답을 하지 않자 성녀님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릴 땐 분명 신성력을 타고났었는데……. 그것 때문에 가문의 일원이 되었는데 어쩌다가 이리되었을까요?”
죽음 직전에 되살아났던 지난 삶의 기억이 다시금 머릿속을 채웠다.
나는 빈민가의 길거리를 헤매다 이상한 힘 때문에 오해를 받고 쫓겨났다. 굶어 죽어가던 것을 누군가가 후작의 고아원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사용한 신성력 때문에 후작의 양녀가 되었다.
그 이후, 성녀가 되기 위해 혹독한 수련을 받으며 길러졌다.
지금까지는 푸토르 후작가에서 성녀가 될 아이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나는 예외였다. 그래서 더 미움받았고, 더 학대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떠나는 날, 내 신성력을 모두 물려주겠어요. 그거면 차기 성녀라는 신분도 증명되고, 오랜 시간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성녀님을 꽤 존경하고 좋아했다. 하지만 그녀도 결국 성녀가 아닌 뼛속까지 푸토르 후작가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때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
성녀님은 내가 답을 하지 않자 내 손을 잡았다. 정확히는 은실 팔찌를 차고 있던 왼쪽 손목을.
움찔했다가는 소맷자락 밑의 팔찌를 들킬 것 같아 얌전히 기다렸다.
“그러니 진짜 성녀가 되세요. 가짜가 아닌 진짜 성녀.”
성녀님의 목소리에 맞춰 심장이 아려왔다.
“그것이 그대가 듣지 못한 신의 답이니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될 수 없는 일을 말하는 성녀님의 말씀은 지난 과거에 받은 내 상처를 찔렀다.
그때도 성녀님께 신성력을 빌려왔지만 못했던 일이다. 회귀했다고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성녀님, 2년만 더 버티실 수 없나요?”
그래서 부탁드려봤다.
2년만 버티면 푸토르 후작의 사생아, 진짜 성녀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내가 가짜 성녀가 될 일이 없었다.
“내 죽음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요?”
알고 있던 사실이었는데도 직접 듣자 절망이 밀려왔다. 미래를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성녀님, 혹시 제가 신성력을 제대로 갖춘, 그러니까 진짜 성녀님을 찾아오면 저는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냥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내게 다시 주어진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니까.
성녀님은 조금 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프레이아, 진짜 성녀라뇨? 당신이 진짜 성녀가 되어야 한다는 내 말을 벌써 잊었나요?”
“하지만 제가 신성력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분명 진짜 데아 님의 대리자가 될 분이 있다는 소리 아닐까요?”
“나의 후계자가 따로 있었다면 벌써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지 않았겠어요?”
단호하게 아니라는 듯한 말투에 조금 실망스러웠다.
미래를 겪고 온 내가 확신하는데, 어째서 신성력을 지니고 신의 말씀을 듣는 성녀님께서 아니라고만 할까.
하긴, 그때도 전혀 모르셨지만.
“프레이아, 나는 너를 진짜 조카로 생각하고 있단다. 집안을 위해서도, 널 위해서도 신성력을 빨리 찾는 게 급선무야.”
친근한 말투의 성녀님은 내 손을 토닥여 주었다. 하지만 그녀가 위로를 건넬수록 가슴은 무거워져만 갔다.
마차로 돌아온 나는 차분하게 미래의 일을 떠올렸다. 나와 아스테인이 죽은 이유,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가짜 성녀가 되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엘라네르…….”
진짜 성녀, 그 사람부터 찾아야 했다.
진짜 성녀가 나타난다고 해서 쉽게 나를 놓아줄 후작은 아니었다. 가짜인 나를 성녀로 세우려던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그와 가문의 고귀한 이름을 지키기 위해 진짜 성녀를 찾아내면 날 죽이려 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먼저 그녀를 손에 넣은 뒤, 성녀 대관식 때 진짜 성녀를 모두의 앞에 내세우고 도망친다면…….
최소한 아스테인만큼은 같은 미래를 반복하지 않게 만들 것이다.
생각에 잠긴 사이 마차는 후작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마부석으로 난 창문을 두드려 내 의사를 전했다.
“빈민가에 먼저 들르겠다.”
빈민가에 있을 엘라네르를 찾는 게 미래를 바꾸는 실마리였다. 지금의 내가 미래를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고.
밖으로 나온 지금이 그녀의 흔적을 찾아볼 기회였다.
“후작님이 혼내실지도 모릅니다.”
“신의 말씀이 있으셨다. 아버지께서도 이해하실 거야.”
“알겠습니다.”
마부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자리에 앉은 나는 이제 아스테인이 성기사가 되지 못하게 막을 방법을 생각했다.
일단은 무조건 그의 신분부터 알아내야 했다.
내일 신전으로 가서 성기사들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꺄악!”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갑자기 마차가 섰다. 심지어 마차가 기울어지기까지 했다.
“아가씨, 어쩌지요? 진창에 바퀴가 빠졌습니다. 마차를 빼낼 때까지 잠시 나오셔야겠습니다.”
밖으로 나와서 본 마차의 꼴은 처참했다. 진창에 빠진 정도가 아니라 바퀴가 뒤틀렸다.
커다란 바위가 막고 있던 것을 피하려 억지로 방향을 틀다가 빠진 모양이었다.
“방향을 바꾸라 하셔서 급히 몰다 이리됐습니다.”
마부는 날 책망하고 싶은지 미간을 잔뜩 좁혔다. 불손한 태도인데도 나는 화를 내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다른 마차와 행인들의 길도 막아버려서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들린 탓에.
정확히는 날 비난하는 소리였다.
“푸토르 가의 예비 성녀님 아닌가요?”
“맞네. 그럼 신성력으로 기적을 일으켜 바위를 치우면 되는 것을, 무슨 민폐래.”
날 향한 곱지 않은 시선들에 얼굴이 붉어지려 했다.
사람들에게 신성력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만능으로 여겨졌다. 이런 일을 하라고 주어진 힘이 아닌데도.
“신성력은 이런 하찮은 일에 쓰는 것이 아니다. 바위는 내가 치우도록 하지.”
위엄을 갖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내가 그리워하는 이의 것이었다.
아스테인 경!
먼저 나갔던 이가 커다란 말을 타고 내 앞에 나타났다.
동화 속의 왕자님처럼.
“잠시 기다리십시오.”
아스테인은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바위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지켜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성실하기만 했다.
그는 말에 매어두었던 커다란 검을 들고 바위 앞에 섰다. 그리고 정확하고 빠른 손길로 바위를 조금씩 조각냈다.
신전에서 아스테인은 최고의 실력자로 통했다. 아마 대륙 안에서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을 거라고. 그래서 늘 안심하고 그에게 내 호위를 맡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떨어져 나간 조각을 직접 들어서 옮겼다. 잔뜩 근육이 오른 뒷모습을 지켜보자니, 심장이 콩콩콩 존재를 알려왔다.
여전히 그는 믿음직하구나.
바위 조각을 치우는 것을 끝내고 다른 마차들의 통행이 자유로워졌음을 확인하고서야 그는 내 앞으로 왔다.
“감사해요.”
“푸토르 후작가의 아가씨 맞으시죠?”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예전의 따스함은 없었다.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눈빛.
그때와는 다른 그와의 첫 만남이 설레면서도 한쪽 끝은 계속 아려왔다. 지난밤 꿈같았던 시간의 죄책감이 계속 나를 짓눌렀다.
마음에 품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이 더 나를 꼬집었다.
“아스테인이라고 합니다.”
굳이 성을 밝히지 않았다. 그때처럼 내게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으려 했다.
“프레이아 푸토르예요.”
“잘 알고 있습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세상 사람들을 모르는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날 알아봤다.
새장 속에 갇혀 지낸 탓일까? 언제나 나는 구경거리였는데 나는 사람도, 세상도 모르는 바보였다.
그래서 내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빠졌고,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히 목이 메지는 않았다.
“마차가 당장 이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듯한데 어쩔 생각입니까?”
“수리가 끝나길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빈민가에 가긴 틀린 것 같았다. 몰래 나온 김에 들르려고 한 것인데.
후작가에서 보낸 마차는 절대 날 다른 곳에 보내 주지 않을 것이다.
“아가씨, 죄송합니다만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겁니다.”
마부의 소리에 아스테인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내게 조심스레 권했다.
“그렇다면 제 말을 타고 후작가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스테인이 나를 돌아보며 말을 꺼냈다. 그는 여전히 눈썹을 모은 채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성녀님이 되실 분이라 부담스러운 것은 압니다만, 마냥 기다리게 되실 듯해서요. 마침 후작가 근처에 볼일도 있어서 갈 예정입니다.”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낯선 남자와 함께 말을 탄 것을 보게 된다면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할지 뻔히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게 커다랗고 단단한 손까지 내밀고 있는 아스테인을 보자 내 속에 숨어 있던 욕망이 꿈틀댔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그의 곁에 붙어 있고 싶다.
“부탁드릴게요.”
계속 사무적이었던 아스테인의 얼굴에 잠시 빛이 돌았다고 느낀 것은 내 착각일까?
아스테인은 먼저 말에 올랐다. 그리고 내게 굳은살이 새겨진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잡으십시오.”
그의 손을 잡자 나는 그의 곁으로 날아오를 수 있었다.
가장 그리워하던 이의 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