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첫 번째 기적
하늘에서 잿빛 눈송이가 하나둘씩 내려앉았다.
내가 순수한 아이였다면 강아지처럼 눈송이를 보며 행복하게 뛰어놀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눈송이에 번져가는 붉은 핏빛을 보며 절규했다.
“안 돼! 아스테인!”
감히 가짜 성녀가 마음을 품었던 성기사. 그리고 그런 가짜 성녀를 한결같이 지켜온 나만을 위한 기사.
아스테인의 복부에 화살이 연달아 박혔다.
그런데도 그는 내 앞에서 비켜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쓰러지지도 않았다.
아스테인은 화살을 뽑아낸 뒤 묵묵히, 그리고 꿋꿋이 나를 쫓는 가문의 기사와 신전의 성기사들과 맞서 싸웠다.
여전히 나를 위해서.
“신을 기만하고 성녀를 사칭한 죄인이다! 비켜서라, 아스테인!”
“내게는 이분만이 진짜 성녀시다!”
나를 끝까지 믿어주는 아스테인의 말에 죄의식을 느꼈다.
나는 가짜가 맞는데…….
가문에서 권력과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내세운 대역. 이젠 가문에서조차 버림받은 사기꾼이 되었다.
심지어 진짜 성녀마저 나타났다. 입막음을 위해 가문의 기사들은 성기사들 속에 섞여 있었다. 모두가 나를 죽이려고 했다.
그런 나 때문에 내가 연모했던 이가 보장되어 있던 탄탄한 미래마저 던져버렸다.
“아스테인, 지금이라도 투항해. 모두가 마녀에게 속은 것이잖나. 용서받을 수 있어!”
“헛소리하지 마라! 누가 마녀라는 거야?”
아스테인은 다시 커다란 검으로 내게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내가 그에게 사심을 담아 선물했던 검이었다. 어떤 마음으로 선물했는지도 모른 채 그는 그걸 들고 계속해서 나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무모한 싸움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입술을 물어뜯던 나는 겨우 결심을 굳혔다. 그 즉시 내 의지를 아스테인에게 작게 전했다.
“그렇게 해요. 나만 죽으면 모든 게 잘될 거예요.”
살아남아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짝사랑하던 사람만이라도 구하고 싶었다.
나 하나만 죽으면 당신이라도 살아남을 것이다.
“안 됩니다. 프레이아 님은 고귀한 분이란 말입니다.”
가족에게도 듣지 못한 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왜, 당신은…….
점점 아스테인의 움직임은 둔해져 갔다. 우리는 눈 내리는 계곡의 절벽 끝으로 몰려만 갔고 상대의 수는 늘어만 갔다.
나는 절벽 뒤를 돌아봤다. 아찔한 높이의 계곡. 하지만 아스테인을 구하기엔 충분해 보였다.
하얀 눈송이 위로 번지는 피의 양이 늘어만 갔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호호호. 아쉽네. 좀 더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타락시켜야 했는데.”
“프레이아 님?”
“이자는 성심이 깊어서 타락시킬 맛이 더 났는데, 마지막까지 넘어오진 않아서 아쉬웠어. 내가 죽은 후 열심히 기도시키고 고행시키면 원래의 충직한 성기사로 돌아올 거야.”
내 목소리에 넋이 나간 듯 날 돌아보는 아스테인에게 요염하게 웃어주었다.
손을 뻗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바로 뒤쪽의 계곡으로 뛰어내렸다.
진작 이랬어야 했다.
가문의 사람들이 진짜 성녀를 찾고 입적 절차를 마쳤다고 했을 때, 그때 그들의 요구를 따랐어야 했다.
“안녕, 사랑했어요, 아스테인.”
그때 내 위로 아스테인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가 뻗은 팔은 금세 나를 붙들었다. 커다란 손은 내 머리를 감싸 그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나를 놓지 않겠다는 듯, 꽉 끌어안았다.
먼저 뛰어내린 것은 나였지만 바닥에 먼저 닿은 것은 아스테인이었다.
죽으려던 것은 나인데 죽어버린 것은 그였다.
“으으으…….”
그의 품에서 기절했던 나는 밤이 되어서야 정신을 되찾았다. 어딘가가 부러졌는지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하지만 마음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안 돼!”
내게 신성력이 있었다면, 내가 진짜 성녀였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텐데……. 모든 것은 내 탓이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저기, 저기에 마녀가 있다!”
“이번에는 놓쳐서는 안 된다!”
슬퍼할 시간은 없었다. 내 시체를 확인하러 온 성기사들은 다시 검을 뽑아 들었다.
나는 그걸 보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래, 죽여! 얼른 죽이라고!”
그의 곁으로 갈 수 있게.
성기사들의 검이 내 복부를 찔렀다. 내 등을 그었다. 이미 골절로 만신창이가 된 몸에 화끈한 열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았다. 방심하지 말고 끝까지 공격해!”
“괜히 저 사악한 마녀 때문에 죄 없는 아스테인만 죽었잖아!”
동료를 빼앗아간 나를 원망하는 이들의 검은 매서웠다. 하지만 그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랑받지 못해 비뚤어진 마녀니까. 사랑하는 사람까지 죽음으로 내몬 저주받은 가짜 성녀니까.
신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제발, 아……스테……인의 곁으로…….”
그때 눈앞에 밝고 푸른 빛이 번져나갔다. 그러자 고된 지난 삶의 모습이 하나둘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여신 데아의 곁으로 가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다는 현상이었다.
그 기억의 끝에 번져오는 따스한 기운.
왜 뒤늦게 나타난 걸까? 모든 것을 잃고 나서 이제야.
“뭐야? 신성력?”
“속지 마! 마녀의 환영이다.”
이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데, 이제 사랑하는 이는 구하지도 못하는데.
내 몸은 이제 버티고 서 있을 수 없었다.
쓰러지는 순간, 나는 가장 소중한 이의 몸을 덮었다. 그의 차가운 품에서 뒤늦게 찾아온 신성력을 모두 끌어모아 봤다.
그리고 신성력에 내 명을 전했다.
“아스테인을 살려줘, 그리고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줘.”
어려운 소원이었을까? 내 몸에 있던 모든 신성력이 흩어졌다.
내 힘이 부족한 탓인지 아스테인의 몸에 온기도 돌아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스테인의 얼굴을 담은 뒤, 나도 차갑게 식어갔다.
* * *
“프레이아 님, 얼른 일어나세요. 이러다 후작님께 또 혼나겠어요.”
익숙한 냄새와 목소리.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왜, 내가 여기에 누워 있지?
“얼른요. 또 혼나고 싶으신 건 아니죠? 그러다 또 다락방에서 온종일 기도해야 할지도 몰라요.”
“셀레미온? 네가 왜……?”
내가 신전에 가기 전까지 내 수발을 들던 하녀였다. 그 아이가 왜 여기 있지?
“어머니 장례식은 잘 끝났어요. 아가씨가 더 쉬라고 배려해주셨지만, 일해야죠. 먹여 살릴 동생들이 많은걸요?”
눈을 접어 웃는 셀레미온을 조금 넋 놓고 바라봤다. 후작가에서 유일하게 내 편을 들어준 아이.
그 아이의 엄마가 죽은 건……. 내가 성녀가 되어 신전으로 들어가기 6개월 전인 스물두 살, 봄이었다.
“뭐 해요? 얼른 준비하셔야죠.”
그리고 성녀의 대관식 전은 내가 가장 많이 학대를 받던 시기고.
“꿈을…… 꾼 거야……?”
그건 너무 생생한 꿈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잊고 있던 나의 과거. 꿈에서는 그것조차 내게 모두 알려줬다.
후작가로 오게 된 과정도, 후작가에서 받은 차별과 고통도.
부들부들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라고 하셨어요?”
“…….”
“일단 시간이 없으니까 옷부터 갈아입어요.”
셀레미온은 나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내 얼굴을 씻기고 잠옷을 벗겼다.
그때 왼쪽 손목에 감겨 있는 것이 보였다.
새하얗게 빛나는 은실로 엮은 실 팔찌. 아스테인이 내게 직접 만들었다며 준 것이었다.
우리가 죽기 직전, 내 생일에.
“아가씨? 이게 뭐예요? 뭐야, 더러운 데다가 피까지 묻었잖아요. 버리게 이리 주세요.”
“손대지 마!”
나는 손목을 감싸 쥐고 날카롭게 외쳤다. 한 번도 소리라고는 지르지 않았던 내 모습에 셀레미온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성녀는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온화하고 기품 있어야 한다. 그 말을 귀에 박히도록 들어왔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람?
나는 진짜 성녀가 아닌데.
셀레미온은 바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함부로 손대서.”
“아니야, 내가 과민 반응했어. 이거 소원 팔찌라서…….”
“아하, 그랬구나. 피가 묻었는데 씻어드릴게요.”
내 다급한 핑계에도 셀레미온은 이해하고 넘어가 줬다. 나는 죄책감을 숨기고 그녀에게 부탁했다.
“나중에 내가 씻을게. 그리고 나, 바로 외출할 거야. 준비해줘.”
“네? 후작님과의 아침은…….”
“지난밤 신의 부름을 받아서 신전으로 간다고 해줘.”
멋대로 신전에 갔다고 경을 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아스테인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내 꿈속에서만 존재하던 사람인지, 그 모든 것이 꿈인지, 그가 살아 있는지, 꼭 알고 싶었다.
준비된 마차에 오른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봄이네.”
혹독했던 겨울의 흔적은 사라지고 연둣빛 새싹들로 거리는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내게만 유달리 혹독했던 시간은 이미 눈 녹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봄이라도 전해주려는 듯이…….
새하얀 대리석으로 장식된 신전, 그것은 내게 점점 다가왔다. 신전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두근두근 요동쳤다.
“아스테인. 살아 있다고 해줘요. 제발요.”
한참을 달린 마차가 신전 앞에 섰다.
심호흡하고 한 걸음씩 내려갔다. 다리가 조금 후들거린 것도 같았다.
신전의 정문을 지키는 성기사들을 보자 더 그랬다. 숨을 쉬기 힘들었다. 특히나 가까이 있는 자는 내 등을 검으로 베었던 자였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건 내가 곧 가짜 성녀가 될 것이라는 양심의 가책이 부채질한 탓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마부의 물음 때문에 기사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푸토르 아가씨,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나를 돌아보는 기사의 인사에 나는 몸이 굳었다. 나만 그 꿈을 꾼 것일까?
다행히 기사의 기억에 가짜 성녀는 없어 보였다.
“기도하러 왔어요. 꿈에서 신의 부름을 받았거든요.”
“그렇습니까? 들어가십시오. 성녀님께도 알릴까요?”
“아니요. 오늘은 혼자 기도를 하다 산책을 하고 갈게요.”
친절하게 내게 굽신대는 모습에 토할 것 같았다. 저 상냥함은 내 정체가 드러나는 대로 사라질 거니까.
성기사들의 안내를 거부하고 혼자 기도실을 찾아갔다.
가는 동안 주변을 열심히 살폈다.
신전 내부에는 많은 기사가 돌아다녔지만 아스테인은 보이질 않았다.
하긴, 나는 그가 언제부터 성기사가 됐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는걸. 나를 맡기 전, 그는 다른 신전에 있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꿈속에서만 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어.”
날 위한 기도실에서 혼잣말을 하며 아스테인이 만들어 준 팔찌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머릿결을 닮은 은실은 핏자국이 묻었는데도 반짝였다.
만든 이를 닮아 아름답게도.
이걸 보면 분명 그는 존재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꿈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신전으로 와야만 했다. 가짜 성녀가 되어.
“그건 싫은데.”
또 그런 비극이 반복되게 둘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짜 성녀가 되지 않거나, 아스테인이 성기사가 되지 않으면 된다.
“어떻게 하면 될까?”
일단 가장 쉬운 방법은 내가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진짜 성녀를 데려오는 것.
후자가 조금은 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한참을 고민하며 기도하는 척 기도실에 머물다가 신전 안에 있는 정원으로 나갔다.
혹시나 그가 있지는 않을까 계속 걷고 또 걸었다.
그래도 보이질 않았다.
“보고 싶어…….”
그가 좋아하던 곳이 어디였을까? 머릿속을 정리하자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였다.
아스테인이 늘 올려다보던 나무, 정원의 중앙에 있는 라일락 나무.
나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제발, 그가 있기를.
“아스테인.”
정말로 그곳에 그가 있었다.
뒷짐을 지고는 고개를 슬쩍 꺾어 보라색으로 가득 찬 나무를 올려다보는 은빛 머리의 성기사가.
덜컥 겁이 났다. 혹시나 아스테인에게도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다면 어쩌지? 날 믿어주었던 것과 다른 진실에 그가 날 경멸하면 어떡하지?
도저히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용기가 사라졌으니까.
그때 은빛 머리카락이 조심스레 흔들렸다. 서서히 돌아가는 그의 시선. 나를 발견한 아스테인의 신비한 보라색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
“성녀님, 오셨습니까?”
그의 말에 심장이 두근두근 존재를 알렸다. 나를 기억하는 것일까?
늘 다정하게 날 불러주던 그때의 그가 떠올랐다.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그를 지켜보며 어떻게 할지 눈동자를 굴리며 방황했다.
“어머, 벌써 신전으로 왔나요?”
그때 뒤쪽에서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망스럽게도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 시선은 날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와 성녀님이 날 발견하기 전에 몸을 돌려 그 자리를 슬쩍 벗어났다.
정원을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 속에 섞여 들어간 탓일까? 다행히도 두 사람은 날 발견하지 못했다. 다른 나무 쪽에 붙어 선 나는 도둑처럼 심장을 졸이며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네, 성녀님.”
“모든 정리는 끝났나요? 다른 분들의 반대는요?”
“아직은 아닙니다. 하지만 형님이야 제가 사라지면 더 좋을 테니 곧 동의할 겁니다.”
“힘든 결정일 텐데요.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성녀님의 말씀에 아스테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가끔 들을 때마다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는 바람에 얼굴을 숨겨야 했던 봄바람 같은 웃음소리였다.
“후회할 거라면 성기사가 되게 해달라 성녀님께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