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딴 계약-83화 (완결) (83/83)

외전 10화

“왜 혼자 가?”

문을 열고 들어온 재하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말하며 이경에게 다가왔다.

재하의 등장에 베이비시터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주었다. 베이비시터가 방을 나가고 재하가 이경의 옆에 앉았다.

“그냥 자죠. 왜 왔어요?”

은은한 조명 아래에 드러난 재하의 얼굴이 피곤해 보여 걱정이 되었다.

“너 혼자 이러고 있는데 잠을 자면 그게 사람 새…… 사람이야?”

거친 언어를 구사하려던 재하는 이경의 품에 있는 안녕이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아빠가 되었으니 바른 말 고운 말만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잠이 덜 깨 욕을 할 뻔했다.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

“나 회사에서 일 안 하고 그냥 잠만 자.”

재하의 말에 이경이 푸스스 웃었다. 매일 잠만 자는 것 치고는 전자 쪽 사업 이익이 눈에 띄게 늘었던데.

안녕이가 모유를 먹다 말고 이경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안녕이의 행동에 이경은 뭉클해져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웃네.”

재하가 안녕이의 작은 손을 만지며 아기와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안녕이 아빠 말이 맞아요. 우리 안녕이 결혼시키지 말아요.”

“평생 우리가 끼고 살자.”

재하가 이경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모유 수유가 끝난 뒤, 재하는 아이를 안고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토닥였다. 제법 능숙하게 트림을 시키는 재하를 보며 이경이 빙그레 웃었다.

한때는 저 남자를 또라이에 양아치라고 생각했었다. 그때는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웃으실까?”

잠이 든 안녕이를 아기 침대에 눕혀 놓고 재하가 이경에게 다가와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옛날 생각이요. 우리 결혼하기 전에.”

“옛날 생각?”

재하가 이경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고 아이 방에서 나왔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베이비 시터에게 눈인사를 하고 두 사람은 침실로 돌아갔다.

침대에 눕자 재하가 이경을 바로 품으로 끌어당겼다. 머리를 사락사락 만져 주며 재하가 입을 열었다.

“서재하 개자식 시절이랑 빌빌거리던 시절 중에 어떤 거?”

“개자식 시절이요.”

이경이 재하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재하의 손길이면 금방 나른해진다. 이경이 재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 시절은 왜 떠올려. 그 시절에 차이경은 서재하라면 치 떨었을 거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돈 받고 하는 일이라.”

잠에 빠져들기 직전인 이경이 웅얼거렸다.

재하는 이경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당장 입에 넣고 물고 빨고 하고 싶지만 꾹 참았다. 빨리 시간이 지나 이경을 한입에 잡아먹고 싶다.

“참아야지. 네가 날 참아 준 시간만큼 참아야지.”

재하는 이경을 품에 더 꽉 안으며 중얼거렸다.

이경은 잠이 들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코끝에 스치는 이경의 향기를 자장가 삼아 재하도 눈을 감았다.

***

퇴근하고 돌아오는 재하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가 쌓여 있었다. 요즘은 일이 많아 연일 야근이었다.

재하는 요 며칠 매일 새벽에 들어왔다. 이러다 이경의 얼굴을 까먹을까 싶어 오늘은 무리해서 일을 일찍 끝내고 퇴근했다.

현관에서 실내 슬리퍼로 갈아신고 긴 복도를 걸었다. 저만치 작고 귀여운 생명체가 나타났다. 심장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존재였다.

“다윤아!”

서툰 걸음걸이로 뒤뚱뒤뚱 걸어오는 아기를 향해 재하가 무릎을 굽히고 팔을 벌렸다.

“꺄아하.”

다윤은 재하와 많이 닮은 얼굴로 웃으며 아빠에게 걸어갔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제대로 걸어온 다윤은 그대로 재하의 품에 안겼다.

“내 새끼.”

재하는 다윤을 품에 꽉 안고 몸을 일으켰다. 이경과 재하를 절반씩 닮은 아기는 유난히 잘 웃었다. 웃을 때면 세상이 환해져 재하는 다윤을 ‘우리 집 햇살’이라고 불렀다.

재하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다윤을 안고 뺨 여기저기에 뽀뽀를 해 주었다. 높이 들어 올려 배에 ‘부부부’ 바람을 넣어 주자 다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다윤이 웃다가 숨넘어가겠다.”

그때, 명섭이 흐뭇한 얼굴로 나타났다.

“다녀왔습니다, 할아버지.”

재하가 다윤을 안고 명섭에게 다가갔다. 피로가 가득했던 얼굴에는 어느새 생기가 흘렀다. 다윤의 웃음소리면 쌓인 피로도 순식간에 녹아 버렸다.

“오늘은 일찍 들어온다.”

“할아버지 얼굴 까먹을까 봐…… 요.”

재하가 재빨리 말끝에 “요”를 붙였다. 다윤이가 태어나고부터 재하는 명섭에게 공손하게 말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아빠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최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했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다윤아, 네 아빠 너랑 네 엄마 덕에 사람 돼서 이 왕할아버지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명섭이 다윤을 어르며 말했다.

“죽긴 뭘 죽어! 다윤이 시집가는 건 봐야지.”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명섭의 말에 버릇처럼 사람 덜 된 서재하가 튀어나왔다.

명섭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쯧쯧 혀를 찼다.

“너 다윤이 시집 안 보낸다며?”

“그러니까 영생하라고. 다윤이 시집가기 전에는 절대 못 죽어, 할아버지.”

“에라이, 이놈아. 아, ……주환이 왔다.”

명섭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고는 재하에게 슬쩍 주환이 왔다는 것을 알렸다.

“서주환이? 왜 왔대?”

다윤이 백일 때 밥 먹으러 오라고 주환을 초대했었다. 그때 주환은 다윤을 참 예뻐했었다. 그날 이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옷이며 장난감이며 보내왔다. 월급 받은 거 다윤이 물건 사는 데 다 쓰는 거 아니냐고 이경이 걱정할 정도였다.

“조카 보고 싶어서 왔지 왜 와?”

“우리 다윤이가 한 번 보면 헤어나올 수 없지.”

은근히 딸 자랑을 하며 재하가 명섭과 함께 가족실로 향했다. 가족실에는 이경과 주환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찍 왔네요.”

이경이 눈웃음을 지으며 재하를 반겼다.

재하는 슬쩍 윙크를 해 주고 주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주환은 긴장한 얼굴로 재하를 보았다.

“형 요즘 계속 늦는다고 그래서 형 없을 때 다윤이 얼굴만 살짝 보고 가려고 그랬는데…….”

“나 없을 때 와서 우리 다윤이 훔쳐 가려고?”

주환의 말에 재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훔쳐 갈 수는 없지. 다윤이 너무 예뻐서 자꾸 보고 싶어.”

주환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윤을 안은 재하가 주환에게 다가가자 다윤이 삼촌에게 가겠다고 끙끙거렸다. 재하는 슬쩍 주환에게 다윤을 넘겨주며 말했다.

“몰래 오지 말고 당당하게 와. 뭔 삼촌이 도둑고양이 마냥.”

“형.”

재하의 말에 주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다윤이 밥 먹이고 가.”

“응.”

주환은 그게 밥 먹고 가라는 뜻임을 알았다. 재하의 화법이라면 누구보다도 익숙했다.

웃는 주환의 모습을 힐끔 보고 재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침실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재하를 따라온 이경이 가만히 손을 잡아 주었다.

“잘했어요.”

“이따 밤에 상 줘. 다윤이 재워 놓고.”

재하가 이경의 귀에 속삭였다.

“네.”

이경이 재하의 뺨에 입을 맞춰 주며 대답했다.

등 뒤에서 까르르 웃는 다윤의 웃음소리와 주환의 웃음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재하의 입가도 기분 좋게 올라갔다.

***

재하의 자전거가 느린 속도로 공원을 달렸다. 재하의 자전거와 연결된 트레일러에 앉아 있는 다윤은 신이 나는지 “꺄아아” 소리를 냈다.

아기가 걸음마를 떼자 재하는 자전거를 선물이랍시고 사 왔다. 다윤이 그 자전거를 타려면 앞으로 5년은 더 있어야 해 굉장히 쓸데없는 선물이었다.

덕분에 재하는 오랜만에 명섭에게 모자란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재하는 마냥 좋은지 실실거렸다.

다윤이가 2살이 되자 재하는 트레일러를 사 왔다. 자전거에 익숙해지기 위한 조기 교육이라며 다윤이를 트레일러에 태우고 집 안을 돌아다녔다.

그 덕인지 3살이 된 다윤이는 자전거에 연결한 트레일러를 전혀 겁내지 않았다. 지금도 몸을 들썩이며 굉장히 즐거워했다.

“다윤이 신나나 봐요.”

옆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이경이 재하를 보며 말했다.

“벤치에 좀 앉을까?”

재하가 웃으며 저만치 벤치를 가리켰다.

재하와 이경이 벤치 옆에 자전거를 세웠다. 재하가 트레일러에서 다윤을 쏙 빼냈다.

“아빠, 멈쳐떠?”

“조금만 쉬고 또 타자.”

재하가 다윤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벤치에 앉았다.

“또, 또.”

다윤은 아쉬움이 남았는지 세워 놓은 자전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윤이 물 마시고 또 타자.”

이경이 다윤에게 물병을 쥐여 주었다. 다윤은 얌전히 물병을 받아 물을 마셨다.

“우리 다윤이 언제 커서 자전거 타지?”

물을 마시는 다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재하가 말했다.

“타려면 아직 멀었죠.”

“빨리 컸으면 좋겠다.”

재하는 다윤에게 자전거 타는 방법을 가르쳐 줄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네가 절대 다치지 않도록 아빠가 든든히 버티고 있다는 것도 알려 주고, 설사 넘어져 다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이다.

“으응, 안 커.”

그때 다윤이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고 대답한 거야?”

재하와 이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타.”

다윤은 재하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자전거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자전거를 더 타고 싶은 모양이었다.

“알았어. 자전거 타자. 아빠랑 자전거 타자.”

재하가 행복한 얼굴로 다윤을 안고 일어났다.

재하가 이경의 뺨에 입을 맞추고 다윤을 트레일러에 태웠다. 재하와 이경은 각자의 자전거에 탔다.

“가자, 이경아.”

자전거에 탄 재하가 이경에게 말했다.

이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금방 재하가 따라잡았다.

주말 오후,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어 갔다. 아름다운 색이 번지는 세상 속으로 재하와 이경이 아이와 함께 달려갔다.

“꺄아아아.”

신이 난 다윤의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아이의 웃음소리에 재하와 이경도 소리 내 웃었다.

세상은 금방 행복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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