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태명은 ‘안녕’이었다. 재하의 ‘하’와 이경의 ‘이’를 합쳐 ‘하이’라고 지었는데, 이왕이면 한국말이 좋지 않겠냐는 이경의 뜻을 따라 ‘안녕’으로 결정했다.
“안녕아, 아빠 말 알아들었지?”
이경의 발아래에 앉은 재하가 불룩하게 부른 이경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파에 앉아 재하를 내려다보는 이경의 얼굴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안녕이가 딸인 걸 안 순간부터 재하는 조기 교육에 들어갔다.
안녕이를 비혼주의자로 키우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는 아빠였다. 세상 남자들 절반은 모자란 놈이고, 나머지 절반은 개 같은 놈이니 안녕이를 절대 결혼시킬 수 없다는 게 재하의 주장이었다.
“결혼은 하면 안 돼. 하는 거 아니야.”
단호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말하는 재하를 보며 이경은 생각했다. 서재하는 모자란 놈일까, 개 같은 놈일까. 지금 저 모습은 모자란 놈에 가까워 보인다.
“안녕아, 아빠 같은 남자랑은 해도 돼.”
이경이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이경에게 재하는 완벽에 가까운 남편이었다. 이런 남자라면 안녕이를 걱정하지 않고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경이도 결혼을 한다면 꼭 재하 같은 남자와 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이경의 말에 재하의 입가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하지만 이내 비장한 얼굴로 안녕이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아빠 같은 남자도 안 돼.”
“왜요? 안녕이 아빠가 얼마나 좋은 남편인데.”
이경은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난 모자란 놈이고, 개 같은 놈이야. 너 안 만났으면 평생 개 같은 모자란 놈이었을 걸? 네가 사람 만들어 놓은 거지.”
자기 객관화는 정말 끝내주는 남자다. 할아버님을 닮았나. 이경은 재하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가 아빠 사람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안녕아, 혼자 살아. 아빠가 줄 수 있는 건 다 줄 테니까.”
재하가 이경의 배에 입을 맞추었다. 이경은 배에 입을 맞추는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든든한 남편, 든든한 아빠. 서재하와 결혼하길 정말 잘했다고 이경은 생각했다.
“배고파요.”
“팥죽 먹을까?”
배고프다는 이경의 말에 재하가 눈을 반짝였다. 이경이 좋아하는 요리를 배우겠다고 주방에서 설친 지 어언 1년, 재하는 제법 훌륭한 요리사로 성장했다.
오전에 재하가 만들어 놓은 팥죽은 맛이 좋았다. 입맛 까다로운 명섭도 칭찬을 할 정도로.
“네.”
몸이 무거워진 이경을 재하가 얼른 부축해 1층으로 내려갔다. 이경을 다이닝 룸 식탁에 앉혀놓고 재하가 따뜻한 팥죽을 가지고 왔다.
“먹여 줄까?”
“됐습니다.”
숟가락을 들며 이경이 작게 웃었다. 재하는 항상 귀찮을 정도로 무언가를 해 주고 싶어 했다. 그런 모습에서 이경은 언제나 그의 사랑을 느꼈다. 재하의 마음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아, 하경이 다음 주에 들어온대요.”
팥죽을 먹으며 이경이 입을 열었다.
“처제 들어온대?”
이경의 말에 재하가 반색했다. 이경이 하경을 많이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였다. 안녕이만 아니었으면 진작 이경을 데리고 영국에 다녀왔을 터였다.
“8월까지는 있을 모양이에요.”
“잘 됐다. 잘하면 안녕이 태어나는 거 보고 가겠네.”
“꼭 보고 갈 거라고 안녕이한테 빨리 나오라고 전해 주래요.”
하경의 말을 떠올리며 이경이 쿡 웃었다.
“첫 조카라 처제도 많이 좋아할 텐데.”
가족 모두에게 안녕이는 처음이었다. 첫 아이, 첫 조카, 첫 증손자. 서로의 피가 이어진 첫 존재. 아이는 가족을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 주리라.
“옷이랑 장난감 잔뜩 사놨대요.”
“나랑 똑같네.”
재하는 이경의 말에 웃었다. 아이가 빨리 보고 싶었다.
***
“그게 다 뭐야?”
퇴근해서 돌아와 보니 이경이 침대 위에 아기 용품들을 한가득 늘어놓고 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제 와요?”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재하의 모습에 이경의 눈이 반달로 휘어졌다.
“다녀왔어.”
재하가 이경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눈으로 쓱 침대 위의 물건들을 훑어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못 보던 물건들이었다.
“주환 씨가 보내줬어요. 아기 잘 낳으라고.”
이경이 들고 있는 카드를 재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서주환이?”
재하가 이경이 준 카드를 읽어 보았다. 축하한다는 말과 건강하게 아이 잘 낳으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조카가 보고 싶다는 말도.
“주환 씨, 안녕이 보고 싶은가 봐요.”
이경이 재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재하는 한참 동안 주환이 보낸 카드를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안녕이 백일 때 부르든지.”
재하가 무심한 투로 말하고는 주환이 보낸 옷을 집어 들었다. 잘 어울리겠네, 한마디를 하고는 재하가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이경은 웃는 얼굴로 욕실에 들어가는 재하의 뒷모습을 보았다. 형이 오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좋아할 주환의 얼굴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를 들으며 주환이 보내 온 선물을 정리하려는데, 갑자기 배가 아팠다.
“아.”
배를 감싸 안은 이경이 신음했다. 진통이 시작된 모양이다.
느껴지는 고통에 이경이 침대에 웅크리고 누웠다. 고통이 잦아들 때쯤, 샤워를 마친 재하가 허리에 수건 하나를 두르고 나왔다.
“왜 그래? 아파?”
침대에 누워 있는 이경의 모습에 놀란 재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제 좀 괜찮아요. 진통인가 봐요.”
“아직 한 달이나 남았잖아.”
예정일까지는 한 달이나 남아 재하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성격이 급한 건지.
“병원 가야 할 것 같아요.”
진통이 좀 덜할 때 어서 병원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 알았어. 옷만 입고.”
재하가 빠르게 드레스 룸으로 걸어갔다. 금방 옷을 갈아입고 나온 재하는 이경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가며 운전기사에게 차 대기시키라는 전화를 걸었다.
“왜 그래요? 진통이에요?”
부산스러운 소동에 방에서 뛰쳐나온 하경이 이경을 부축한 재하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어, 지금 병원 가려고.”
“어떡해. 언니 괜찮아?”
조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하경은 파리한 이경의 얼굴에 울먹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얼굴이라 이경이 하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경아, 언니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나도 병원 갈래. 형부, 저도 갈래요.”
하경이 이경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알았어. 따라 나와.”
재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경을 데리고 현관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한 이경은 반복되는 진통에 힘들어했다. 이경이 아파할 때마다 하경은 훌쩍거려 재하는 이경과 하경을 동시에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경은 진통을 시작한 지 8시간 만에 아이를 낳았다. 분만실에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경은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안녕아, 엄마야.”
엄마가 된 이경이 작은 아기에게 인사를 건넸다. 작고 빨갛고 쭈글쭈글한 아기였지만 이경은 단번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아가야.”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이경의 얼굴에는 환희에 찬 미소가 걸렸다.
눈을 뜬 이경이 전화 통화를 하는 재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쁜 일인지 전화로 무언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새삼 그 모습이 멋있어 보여 이경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경의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재하가 몸을 돌렸다.
“다시 전화할게.”
재하가 황급히 전화를 끊고는 이경에게 다가왔다.
“괜찮아?”
피곤한지 충혈된 눈으로 재하가 물었다. 날이 바짝 서 있는 얼굴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예민해 보였다.
“네.”
“이경아, 미안해. 고맙고.”
재하가 이경의 머리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이경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우리 안녕이 봤어요?”
뺨을 쓰다듬는 재하의 손을 잡으며 이경이 물었다.
“봤어. 눈부시게 예뻐. 엄마 닮았나 봐.”
재하의 말에 이경이 작게 웃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예뻐 봤자 얼마나 예쁘겠냐마는 이경은 재하의 말에 동의했다. 분만실에서 안아 본 안녕이는 정말 눈부시게 예뻤다.
“아빠도 닮았어요.”
“응. ……고생했어. 정말 고생 많았어.”
이경이 진통을 겪는 동안 재하도 옆에서 같이 파리해져 갔다. 하경이 울지 않았더라면 재하가 울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경이는요?”
“저기 소파에서 자. 방금 잠들었어.”
재하가 병실 응접실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안녕이 아빠도 좀 자요. 못 잤잖아요.”
“안 피곤해. 좀 더 자.”
“안아 줘요.”
이경이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재하가 웃으며 이경을 품에 안아 주었다. 이경을 품에 안고 재하는 연신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경을 품에 안은 재하는 뭉클함에 눈가가 붉어졌다.
늘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아내. 그 감정이 더욱 커져 재하는 무서울 정도였다. 재하는 이경을 품에 안고 사랑하는 아내가 평생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이경이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왔다. 안녕이에게 밤 수유를 할 시간이었다. 밤에 수유를 할 때마다 재하는 일어나 항상 옆에 있어 주었다.
그게 참 고맙긴 했지만 피곤해하는 재하를 볼 때면 안쓰러웠다. 입주 베이비시터가 2명이나 있어 이경은 수유 시간이 아니면 마음껏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재하는 출근을 해야 했기에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푹 잘 수 있도록 몰래 침실을 빠져나와 바로 옆에 있는 안녕이 방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베이비시터가 잠에서 깬 안녕이를 안아서 달래고 있었다.
“저 주세요.”
“네, 사모님.”
베이비시터가 안녕이를 이경에게 넘겨 주었다. 이경은 소파에 앉아 안녕이에게 젖을 물렸다. 젖을 물자마자 안녕이는 울음을 멈추었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행복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고 재하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