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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계약-81화 (81/83)

외전 8화

“조심, 조심.”

뒷좌석 문을 여는 재하의 행동이 부산스러웠다.

병원에서 이경의 임신을 확인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임신 테스트기로 아이의 존재를 확인했을 때보다 감동이 더 크게 다가왔다.

감동이 큰 만큼 걱정스러움도 커졌다. 재하는 이경이 다칠까 봐 뒷좌석에 앉는 그 사소한 행동에도 안절부절못했다.

이경이 그런 재하의 모습에 웃으며 뒷좌석에 앉았다. 이경의 옆자리에 탄 재하가 이경에게 얼른 안전벨트를 채워 주었다.

“속은 괜찮아?”

“네.”

재하의 물음에 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먹고 싶은 건?”

“없어요.”

이경이 고개를 저으며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오전 반차를 내고 병원에 온 탓에 할 일이 태산이었다.

“안 돼. 일하지 마. 안정 취해야 돼.”

재하가 이경이 쥐고 있는 서류를 순식간에 빼앗아 갔다.

“주십시오. 급한 건입니다.”

“차에서 이런 거 보면 속 울렁거려. 안 돼.”

“알았어요. 좀 참을게요.”

걱정이 가득한 재하의 얼굴에 이경이 한발 물러섰다.

“댁으로 모실까요?”

“집.”

운전기사의 물음에 재하가 대답했다.

“아니요. 로펌으로 가 주세요.”

서류 보는 건 재하에게 양보했지만 출근은 양보 못 했다. 이경에게는 일도 소중했다.

“로펌을 가겠다고? 이 몸을 하고?”

재하가 얼굴을 찌푸렸다.

“제 몸이 어때서요?”

누가 보면 죽을병이라도 걸린 줄 알겠네. 이경은 피식 웃으며 진정하라는 듯 재하의 손을 잡았다.

“초기에는 조심해야지.”

“무리 안 합니다.”

“퍽 하면 야근이잖아. 주말에도 일하고. 집에 일 가져올 때도 많고.”

“이제 안 그럴게요.”

투덜거리는 재하를 이경이 달랬다.

어차피 임신한 거 알려지면 사건 배당도 많이 받지 못해 일이 확 줄어들 것이다. 지금 맡은 케이스에서 배제당할 수도 있고. 그 생각을 하자 이경은 조금 우울해졌다.

“그만둘래?”

“…….”

그만두라는 재하의 말에 이경이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가뜩이나 우울한데 재하가 그런 말을 하니 이경은 좀 서운했다. 그만두라는 말을 어쩜 이렇게 쉽게 하는지.

이경이 말이 없자 재하가 잘못을 깨닫고 이경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알았어. 취소. 못 들은 걸로 해.”

“일은 계속하고 싶어요.”

재하의 품에 안겨 이경은 제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서재하의 아내인 것도 좋고, 엄마가 된 것도 좋지만 일은 놓고 싶지 않았다.

“해.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뒷바라지 제대로 할게.”

재하가 이경의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손길에 이경은 안정감을 느꼈다. 로펌을 그만두라는 것도 다 생각해서 한 말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경의 서운함은 금방 풀렸다.

어느새 자동차가 로펌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는 이경을 따라 재하가 내렸다.

“들어가요. 저녁에 봐요.”

이경이 재하에게 인사를 했지만 금방 손이 잡혔다. 재하는 이경의 허리에 손을 감고 로펌으로 향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이경이 재하를 올려다보았다.

“사무실까지 데려다줄게.”

“그러실 필요 없는데요?”

“그럴 필요가 왜 없어?”

로펌 건물 안으로 들어온 재하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유난 떠는 것 같아서 싫습니다. 창피해요.”

이경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창피해?”

“유난 떨 때는 가끔 창피해요.”

이경은 솔직하게 말했다.

가끔 재하는 너무 과할 때가 있다. 재하의 유난이 익숙한 가족들도 가끔 기겁할 정도로.

“그럴 리가 없는데.”

재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이경의 이마에 도둑 키스를 했다.

이경은 놀라 주변을 살폈다. 저만치 안면이 있는 로펌 직원이 머쓱한 얼굴로 이경에게 묵례를 했다. 이경은 더 머쓱한 얼굴로 눈인사를 보냈다.

“바로 이럴 때 많이 창피합니다.”

이경이 허리에 감긴 재하의 손을 떼어 내고 열린 엘리베이터 문으로 들어갔다. 재하가 이경이 좋아하는 웃음을 지으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이제 가세요.”

이경이 열림 버튼을 누르며 재하에게 눈치를 주었다. 진짜 로펌 안까지 쫓아올 작정인가.

“안전하게 사무실 들어가는 거 보고.”

재하가 열림 버튼에서 이경의 손가락을 떼어 내 그대로 손을 꽉 잡았다. 애교를 부리듯 웃는 재하 때문에 이경은 결국은 포기하고 웃고 말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안지혜 변호사와 마주쳤다. 이경은 웃는 얼굴로 지혜를 보았다.

“지금 와? 같이 오셨네요?”

지혜가 이경에게 인사를 하고는 옆에 있는 재하를 보았다.

“안 변호사님, 여전히 멋지시네.”

“제가 좀 멋지죠.”

재하의 인사에 지혜가 생긋 웃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 이후로 지혜에게 재하는 서전또에서 정상인으로 격상이 되었다.

“우리 이경이 잘 부탁합니다.”

갑자기 재하가 깍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굉장히 새삼스러운데요?”

갑자기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들은 지혜가 의아한 눈으로 이경을 힐끔 보았다. 무슨 말이냐고 묻는 눈빛이라 이경이 입을 열었다.

“저 임신했어요, 안 변호사님.”

“임신? 자기, 축하해.”

지혜는 환하게 웃으며 이경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내 일처럼 기뻐해 주는 지혜의 모습에 이경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너무 잘 됐다. 얼마나 예쁠까.”

지혜는 몇 분 동안 이경과 재하를 축하해 주고는 재판에 늦었다며 부랴부랴 떠났다.

지혜가 떠난 것처럼 재하도 떠나 줬으면 좋겠지만 기어이 재하는 이경의 방까지 쫓아왔다. 얼마 전 시니어 변호사가 되어 이경은 방을 따로 배정받았다.

방이 생긴 날 재하는 축하한다며 로펌으로 커다란 화환과 떡을 보내 이경을 좀 창피하게 만들었다.

“이제 진짜 가십시오.”

이경이 문손잡이를 잡으며 재하에게 말했다.

“자리에 앉는 거 보고.”

“됐…….”

“부사장님.”

재하를 돌려보내려는데 성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단정한 모습의 성현이 서 있었다.

“윤 변, 지난번에는 잘 들어갔어?”

성현을 본 재하가 입가를 올리며 물었다.

후계가 정해지고 성현은 권명섭 회장의 사람이자 서재하의 사람이 되어갔다. 이경을 놓고 날을 세우던 때는 전생처럼 아득했다.

“덕분에 잘 들어갔습니다.”

“예준이는 이제 물에 잘 떠?”

“네. 이젠 물도 무서워하지 않고 수영하는 날만 기다립니다.”

성현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예준의 엄마 유설이 미국으로 가면서 예준은 성현에게 맡겨졌다.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간 예준을 맡아 키우느라 성현은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빠 선배로서 앞으로 잘 부탁해. 나도 곧 아빠 될 거거든.”

재하가 자랑하듯 입을 열었다.

“아, 그럼 차 변호사.”

성현이 이경을 보았다.

“네.”

이경이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해. 진심으로.”

성현은 미소와 함께 이경에게 축하를 건넸다. 그의 얼굴에 약간의 씁쓸함이 고였다가 금방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이경은 성현의 축하에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예준이 데리고 또 놀러 와. 그때 롭이랑 잘 놀았잖아.”

“예준이 데리고 한번 가겠습니다. 차 변호사, 업무 조절해 줄게.”

재하의 말에 대답하고 성현이 이경에게 말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무리할 필요는 없고.”

“정말 괜찮습니다.”

이경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성현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부사장님.”

“응.”

재하는 행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경을 보았다. 아내를 바라보는 눈에서는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차이경이 내 아내라니. 새삼스럽게 재하는 자신의 삶이 굉장하게 느껴졌다.

이 기쁨을 느끼게 해 준 이경에게 빨리 뽀뽀나 해 줘야겠다.

“잘 가, 윤 변.”

재하는 성현에게 재빨리 인사를 하고는 이경의 방문을 열어 그녀를 그곳으로 살짝 밀어 넣었다. 방문을 쾅 닫고, 깊은 입맞춤을 퍼부었다.

거부하던 이경이 이내 재하에게 매달렸다. 정말 멋진 날이었다.

***

“아기?”

권명섭 회장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이경과 재하를 번갈아 보았다. 오늘따라 아욱국 맛이 깊더니 이런 좋은 소식을 들으려고 아욱국이 맛있었나 보다.

“어, 맞아. 우리 영감님 증손 봐.”

재하가 씩 웃으며 명섭을 보았다.

“이게 뭔 경사라니. 이경아, 고맙다. 고마워.”

명섭이 재하 못지않게 감격한 얼굴로 이경을 보았다.

이경은 명섭의 표정에 수줍게 웃었다.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큰 효도를 한 것 같아 이경은 기분이 좋았다.

“얼마 전에 커다란 황금색 잉어가 집안에서 헤엄치는 꿈을 꿨는데 그게 태몽이었나 보다.”

명섭이 무릎을 치며 좋아했다.

“잉어 꿈꿨어?”

“어찌나 크고 빛이 나는지 금덩이가 헤엄치는 줄 알았지 뭐냐.”

명섭은 신이 난 얼굴로 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경과 재하는 밥을 먹으며 명섭의 태몽 이야기를 즐거운 얼굴로 들었다.

어느새 식사가 끝나고 세 사람은 가족실로 자리를 옮겼다. 명섭은 이경에게 덕담을 몇 마디 건네고는 성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경에게 주식과 건물을 양도하겠다는 뜻을 밝힌 명섭의 얼굴이 환했다.

“할아버지, 이경이한테 선물 큰 거 주네?”

전화를 끊은 명섭을 보며 재하가 기분 좋은 얼굴로 웃었다.

“암, 줘야지. 당연히 줘야지.”

“할아버님, 괜찮습니다. 너무 과분해요.”

이경이 난감한 얼굴로 거절했다.

“영감님이 줄 때 그냥 받아.”

“재하 이놈, 애 아버지 될 놈이 말버릇이 그게 뭐야?”

명섭이 근엄한 얼굴로 재하에게 말했다.

“그치, 우리 아기가 버릇없는 거 배우면 안 되지.”

웬일로 재하는 명섭의 말을 빠르게 수긍했다.

“할아버님, 고마워.”

“에라이, 이놈아.”

재하의 말에 명섭은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섭이 방으로 돌아가고 재하가 이경의 옆에 앉아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우리 태명 지어야지.”

“뭐가 좋을까요?”

이경이 배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태몽이 잉어니까 잉어빵?”

“싫습니다.”

재하의 작명 솜씨에 크게 실망하며 이경이 거절했다.

“금덩이.”

“싫어요.”

“복덩이.”

“싫어요.”

“뭐라고 지어야 우리 아내님 마음에 드실까.”

이경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재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의미 있는 태명이 좋아요. 귀엽고, 부르기 쉬운 걸로요.”

“까다로워서 마음에 들어.”

배에 얹은 이경의 손을 쓰다듬으며 재하가 웃었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머리를 맞대고 두 사람에게 찾아온 아기의 태명을 지었다.

함께 아이의 태명을 짓는 건 경험해 본 적 없는 유형의 행복이었다. 새로운 행복은 오래도록 두 사람을 같은 얼굴로 웃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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